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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77화 (177/1,277)

##  177화

집으로 돌아가면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가진 도구가 망치뿐일 땐 모든 문제가 못으로 보인다.

내가 쥔 망치란 피아노뿐이었다. 다른 모든 문제를 돌이켜보았을 때, 내가 그것들을 모두 피아노로 해결하려 했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이 짧은 문장은 상당히 잔인하게 날 묘사하고 있었다.

“……망치라니.”

살짝 기분이 상한다.

비유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무작정 반론을 하고 싶다.

일단 피아노는 망치처럼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모든 문제들을 망치마냥 때려서 해결할 수 있다면 좀 편하겠는가? 하지만 적어도 피아노는…….

그렇게 혼자 반론을 떠올리다가, 사실 큰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경쟁 상대를 쳐서 때려눕히고, 협연자를 찍어 누르고, 내 감정을 두들겨 펴고.

참 다양하게도 사용해왔다. 그건 망치의 사용법과 비슷했다.

“…….”

그간 피아노를 다룸에 있어 꽤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해 왔다.

지난 1년 동안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고, 지금도 기술적, 육체적인 부분에선 주어진 한계 이상의 성장세를 보인다고 판단하고 있다.

음악가로선 갈 길이 멀지만, 연주자로선 상당한 궤도에 올랐다고 여길 만한 것이다.

연주자로서 피아노 건반을 다룸에 있어 자유로워진다면 정말 표현할 수 있는 길이 많아진다.

도구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어야 비로소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있으니.

하지만 결국 내가 피아노를 다루는 방식은, 망치였다.

구세프 선생님의 말씀이 새삼 떠오른다.

선생님은 작년부터 꾸준히 음악을 도구로 사용하면 안 된다고 가르치셨다. 호통을 치고, 역정을 내고, 비난도 서슴지 않았다.

수없이 야단을 맞으면서도 난 거기에 맞서 내가 쓸 수 있는 도구라곤 이 음악밖에 없는데 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모르겠다고 대들기도 했었다.

후회와 창피함, 혼란스러움과 억울함이 섞여 머리가 어지러웠다.

“난 뭘 하고 있는 걸까.”

여태껏 피아노밖에 모르고 살아왔다.

내 마음 속 저울 위에 그 무엇을 올려놓더라도 피아노의 무게보단 못할 것이라 여기고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저울 눈금이 움직였다.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었고, 깨달은 순간 갈구하게 되었다.

그 욕구를 난 피아노로 찍어 눌렀다. 또다시 망치를 집어든 것이다.

“…….”

이러면 안 되는 거였을까.

어쩌면 막심 선배들에게 보였던 것이야말로 망치가 아닌 피아노였을지도 모른다.

내 의지로 피아노를 컨트롤하지 못한 것은 처음이라 당혹스럽고 불안해져서, 그런 건 절대 내 피아노가 아니라고 치부했다.

그리고 혹여나 친구들 앞에서 보일까 봐 홀로 연습실에서 다시금 망치를 두들겼지만, 그건 바보짓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프게 웃던 아나스타샤와 유난히 유치하게 굴던 에르네스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애들은 내가 어떤 연주를 하건 긍정해 줄 것 같다.

“……아니야.”

“아가씨?”

옆자리에 앉아 있던 빅토르가 내 목소리에 반응했다. 그의 눈동자엔 심란함이 가득했다.

줄곧 고민에 빠져 있는 내게 어떻게 말을 붙여야 하는지 고민하는 표정이다.

본의 아니게 걱정시켰나 보다. 난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늦게까지 힘들죠, 빅토르.”

“아뇨? 무슨 말씀을.”

“소로킨도, 자하르도. 고생이 많아요.”

“아닙니다.”

운전대를 잡은 소로킨과 조수석에 탄 자하르가 답했다.

난 그들 모두에게 말했다.

“저 음반 작업은 아마 여름방학 전에 끝날 것 같아요. 그렇게 되고 나면 이렇게 늦게까지 밖에 있진 않겠죠.”

“음, 상관없습니다만.”

“여름방학엔 모두 휴가라도 다녀오실 수 있도록 꼼짝 않고 집에 있을게요.”

“……예?”

앞에 있는 두 사람이 되물으며 내 쪽을 돌아보았다. 심지어 운전대를 잡고 있는 소로킨까지. 신호등에 걸려 차가 멈춰 있는 상태라 다행이다.

옆을 보니 빅토르는 한 손으로 얼굴을 덮고 탄식하고 있다.

“제가 저택 밖으로 나오지 않고 집에 있으면 소로킨도, 자하르도. 그리고 빅토르도 쉴 시간이 생기지 않겠어요? 물론 다른 업무가 주어질 수도 있겠지만, 제가 강력하게 건의해서 보장해 드릴게요.”

“아니……. 저희 휴가를 아가씨께서 신경 쓰실 필요는…….”

“제가 신경 쓰지 않으면 누가 신경 쓰나요?”

“…….”

소로킨이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이전에 빅토르와 농담 삼아 주고받았던 이야기였지만 난 확실하게 못 박았다.

방학이 되면 몇 주건 내 경호원들에게 휴가를 줄 것이다.

어차피 난 2년간은 콩쿠르 등에 나갈 생각도 없었고, 이번 방학에 무언가 할 일이 생길 것 같지도 않다.

그러면 집에 틀어박혀 피아노에 집중할 시간이 더 늘어날 것이다.

망치라고?

좋은 문장이었다. 내가 정말 바보 머저리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자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고. 굉장히 자존심 상하지만, 좋다. 인정한다. 여전히 난 바보였다.

이 순간에도 나는 피아노를 더 잘 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다.

건반을 하나 빼고도 연주할 수 있듯, 내게서 무언가 빠져도 나는 연주자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

“형. 꼭이야.”

“나도 몰라.”

“모르는 거 없어. 꼭이야. 알았지?”

에르네스트는 어린 동생 사샤의 강요를 이기지 못했다. 결국 고개를 끄덕이자 사샤는 만족하고 1학년 반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에르네스트는 발걸음을 돌려 계단을 올라갔다.

걸음은 조금씩 빨라졌다. 에르네스트는 미처 한 층을 다 오르기도 전에 두 칸씩 계단을 뛰어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빨라졌던 걸음은 교실이 가까워지자 점점 느려졌다. 서서히 잦아들며, 평범하게 걷는 걸음으로 바뀌었다.

에르네스트는 아무렇지도 않게 옷매무새를 다시 고치고, 고개를 좌우로 까딱였다. 나쁘지 않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8학년 피아노과 반엔 일찍 온 몇 명이 보였다. 에르네스트는 그들에겐 관심이 별로 없었다.

그의 눈이 자동적으로 향한 곳은, 창가 쪽 자리였다.

빛바랜 금발이 햇빛에 반짝인다.

“타티아나, 좋은 아침.”

“에르네스트.”

창밖을 보고 있던 타티아나가 고개를 돌렸다. 새하얀 얼굴에 웃음기가 서린다.

“좋은 아침이에요.”

학교에 오면 매일같이 보는 친구이긴 하지만, 그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에르네스트는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

어제 했던 실수에 대해선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미소를 마주하며, 그는 여유 있게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아나스타샤는? 아직인가?”

“조금 늦는 것 같아요.”

“아침 연습?”

“아침 연습 때문에 지각이라도 하신다면 본말전도가 되겠는걸요. 후후.”

타티아나는 생각만 해도 즐거운지 입을 가린 채 낮게 웃었다.

에르네스트는 천하의 그 아나스타샤가 근래 들어 친구를 따라 아침잠을 포기하면서 아침 연습을 시작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에르네스트는 새삼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얼굴 생김 자체는 인상이 또렷하지만, 희게 바란 머리칼과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인해 약간 유약해 보이는 모습이다.

어떻게 봐도 강제로 아나스타샤를 따라오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연습광에 가까운 타티아나를 따라 아나스타샤가 연습량을 늘리게 된 것은 전적으로 그녀 스스로가 타티아나를 따라 하길 원했기 때문이리라.

자기도 모르게, 에르네스트가 말했다.

“정말 보면 볼수록 희한한 조합이란 말야.”

“응? 무슨 말인가요?”

“너랑 아나스타샤.”

타티아나는 희미하게 웃는다. 무슨 소린지 아는 듯하다.

에르네스트는 언제나처럼 창가에 앉으며 말했다.

“난 걔랑 어려서부터 알기 때문에 대충 성격을 알거든. 솔직히 어떻게 너랑 친해진 건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가.”

“아나스타샤도 알고 보면 정말 순수한 사람이에요.”

“알고 보면이 아니라, 대놓고 자유인인걸, 뭐.”

어려서부터 아나스타샤는 외모도 성격도 상당히 특출 난 데가 있었다.

그 성격을 가지고 클래식에도 재능을 가졌다는 것이 특이하긴 하지만, 클래식이라고 꼭 딱딱한 것만은 아니니까.

인상파 작곡가들을 보면 아나스타샤처럼 자유로운 성격일수록 더 유리한 면도 있었다.

그에 비해 타티아나는 누가 보더라도 엄격하고 우아한, 보통 사람들이 클래식 연주자를 떠올릴 때 느낄 수 있는 표본 그 자체였다.

에르네스트는 두 사람이 어울려 다니는 것을 보면서 묘한 느낌을 받았다.

타티아나가 이끌고 다니는가 싶었는데, 밖으로 나가 놀 땐 거의 모든 것을 아나스타샤가 리드한다.

그래서 주도권이 아나스타샤에게 있는가 하면 또 그렇지도 않았다.

타티아나가 연습에 몰두하는 것을 아나스타샤는 결코 방해하지 못했고, 따라가기까지 했다.

친구끼리 좋은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겠지만, 어쩐지 에르네스트가 느끼는 기분은 조금 달랐다. 에르네스트가 말했다.

“어쨌든, 콩쿠르에까지 따라가고 집에도 가고 말이지. 일리야 형도 만나고……. 일리야 형 아직도 머리 검은색에 문신하고 있어?”

“예. 그런데요?”

“안 무서워?”

“잘 모르겠어요.”

타티아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에르네스트는 어이가 없었다. 정말 보기와 다르게 당찬 면이 있다.

“너랑 아나스타샤가 왜 죽이 맞는지 알 것 같기도 하고.”

“……?”

“아무것도 아냐.”

에르네스트는 피식 웃었다. 그는 타티아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할 때가 제일 즐거웠다.

가끔은 세상만사 다 아는 듯 이야기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상식 등엔 막상 약한 모습을 보인다.

그 기묘한 갭이 이젠 익숙하지만 에르네스트는 그래도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면 마치 병아리를 보는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바보인 것은 아니었다.

“에르네스트?”

“응.”

“생각해 보면 있잖아요, 콩쿠르에 따라오고 집에 가 부모님을 만나 뵙기도 한 건 에르네스트도 마찬가지이지 않나요?”

“어……?”

에르네스트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여기서 갑자기 이렇게 한 발자국, 훅 디디고 들어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타티아나를 보니 별생각 없어 보인다. 아니, 애초에 그녀는 남녀관계라는 것 자체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일찌감치 타티아나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한 에르네스트는 같은 연주자이자 친구로서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데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끔 이럴 때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말 아무 생각이 없기에 할 수 있는 말인 건가?

에르네스트는 어물거리며 말했다.

“그렇긴 하지?”

타티아나는 대답하지 않고 빙그레 웃었다. 에르네스트는 입을 다물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그녀와 많은 것들을 함께했다.

그러면서 타티아나와 많이 친밀해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외부에서의 압력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특히 그의 아버지는 상당히 직접적으로, 타티아나와의 관계를 잘 맺어 나가길 종용하기도 했다.

이해는 간다. 타티아나는 한 사람으로도 매력적이었지만 그 뒤의 배경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업가의 입장에선 어떻게든 깊은 연을 만들어 놓고 싶을 만했다.

하지만 자존심 강한 에르네스트는 그런 노골적인 압력에 따를 생각이 없었다.

아들이 사업을 물려받지 않고 연주자의 길을 택한 것에 대해 그토록 반대해 왔으면서, 대체 뭘 안다고 이제 와서 잘되었다며 멋대로 말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이렇게 순수하게 자신을 가까이하는 듯한 말을 해 오면,

착각하고 싶어지는 것도 잘못된 것은 아니리라.

“…….”

에르네스트는 거리를 가늠했다.

함께 연습실에 가는 것도 거절당했고, 그다음으로 유치하게 억지를 쓰다시피 한 재대결 역시 거절당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그만큼이나 서로의 소리를 나누었건만,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다.

타티아나의 피아노 소리를 한 번만 들어 본다면 그 본심을 조금이나마 헤아려 보겠다만, 타티아나는 지금 에르네스트에게 그 어떤 피아노도 들려주고 싶지 않은 듯했다.

그러면서도 함께 있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것 같진 않았다.

이야기를 평범하게 나누고, 같이 놀러가서도 싫은 내색은 없다.

심지어 오늘은 가장 친한 친구인 아나스타샤와 동격으로 여기는 듯한 발언까지 하고 있었다.

조금 더 알아보고 싶어졌다.

마침, 사샤에게 부탁받은 좋은 핑곗거리가 있었다.

“타티아나. 너 사샤 기억하지.”

“물론이죠.”

그 이름이 나오자마자 타티아나가 반색했다.

타티아나는 아이들을 상당히 귀여워하는 듯했다. 에르네스트는 사샤를 안고 헤실거리며 풀어진 얼굴을 하고 있던 타티아나를 떠올렸다.

에르네스트는 사샤의 말을 전했다.

“사샤가 그러더라고. 같은 학교인데도 교내에서 널 한 번도 못 본 것 같아서 이상하다고.”

“아…….”

같은 학교이긴 하지만 1학년인 사샤와 8학년인 타티아나는 교실 층수도 다르고 일정도 달랐다.

물론 복도에서라도 한 번쯤 마주칠 만도 하지만, 개학 후 한 달도 안 된 시간이니 그간 못 만난 건 그리 이상하지 않았다.

사샤가 폭발한 것은 에르네스트가 타티아나, 아나스타샤와 디저트 뷔페에 간 사진을 보고 나서였다.

사샤는 자신은 타티아나와 학교에서 한 번 만나지조차 못하고 있는데 형인 에르네스트는 보란 듯이 놀러 다닌다는 것이 불공평하다며 칭얼거렸다.

그게 대체 뭐가 불공평한지 모르겠지만, 에르네스트는 사샤가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을 처음 봤다.

“그래서 말인데, 오늘 점심이라도 같이 할래?”

에르네스트는 말하면서도 거절당할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같이 놀러갔고, 이야기도 나누지만, 점심 식사는 거절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두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타티아나가 그 어느 때보다 밝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이었다.

“그럼요. 좋아요.”

“……음.”

사샤를 앞세우는 것 같아 조금 죄책감이 들었지만, 두 사람 다 좋아한다면 모두 좋은 일 아니겠는가?

에르네스트는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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