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79화 (179/1,277)

##  179화

사샤는 다시 한 번 졸랐다.

“방해하지 않을게요.”

“사샤가 방해가 된다는 뜻이 아니랍니다.”

한 번 마음을 정한 타티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 죽고 못 살 것까지 굴던 모습이 거짓말같이 느껴질 정도로, 타티아나는 단호했다.

에르네스트는 자신과 아나스타샤가 거절당한 것처럼 사샤도 거절당한 것에 조금 저열한 기분을 느끼기도 하고, 스스로의 유치함에 절망적인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복잡한 기분이다.

사샤는 물끄러미 타티아나를 올려다봤다. 거절당했다는 것은 알지만 딱히 상처받은 듯한 기색은 없었다.

사샤가 물었다.

“그럼 왜요? 누나.”

마땅히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는 투도 아니고, 실망감이라곤 찾아 볼 수도 없이 맑은 목소리다. 사샤는 딱히 참을성이 없는 아이는 아니었지만 궁금한 것을 물어보는 것에 있어선 거침이 없다.

“…….”

타티아나는 잠자코 침묵했다. 곤란해한다.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대충 얼버무릴 것이라 생각했다.

개인 연습에 그 누구도 들이고 싶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사샤에게 쉽게 설명하긴 어려울 것이다. 어린 사샤는 아무렇게나 말해도 잘 믿어 주니 대충 변명을 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진지하게 사샤를 바라보았다. 에르네스트는 직감했다. 타티아나는 본심을 드러낼 생각이었다.

“사샤. 사샤는 화나는 일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나요?”

“누나 화났어요?”

“아뇨. 그냥 답해 주시면 되어요.”

타티아나의 질문에 사샤는 조금 눈치를 보는 듯했지만, 자신이 졸라서 그녀가 화가 난 것 같진 않다는 것을 느끼곤 조심스레 답했다.

“화를 내죠.”

“그렇겠죠?”

타티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하지만 전 피아노 앞에 앉아요.”

“피아노요?”

“예. 그리고 늦게까지 피아노를 치죠.”

“마구 화내시면서요?”

“아니에요. 그런 조잡한 감정이 피아노 소리에 섞여 나오지 않도록 잘 갈무리해야죠. 건반을 눌러서 해머가 현을 때릴 때마다, 막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른 화난 감정을 때려서 납작하게 눌러 편다고 생각해 보세요.”

타티아나는 굉장히 직접적인 비유를 들었다. 그녀의 말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지만 약간 무섭게 들렸다.

타티아나가 옅게 웃었다.

“그러다 보면, 희미해져요.”

사샤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풀려요?”

“풀리더라고요. 대체로.”

진지한 타티아나에겐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에르네스트는 조금 웃을 뻔했다. 화가 나면 피아노 앞에 앉는다니, 정말이지 타티아나다웠다.

하지만 그는 이어지는 타티아나의 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샤, 기쁜 일이 있을 땐 어떻게 하세요?”

“웃죠.”

“예. 그리고 예상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전 그때도 피아노 앞에 앉아요.”

화나는 일이 있을 땐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피아노 앞에 앉는다.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기쁜 일이 있을 때도 굳이 피아노 앞에 앉는다는 건, 조금 이상했다. 타티아나는 기쁨 또한 피아노로 눌러 펴야 한다는 듯 말하고 있었다.

이번엔 이상함을 느꼈는지, 사샤가 말했다.

“누나도 웃을 줄 알잖아요? 지금도요.”

“맞아요. 지금도.”

옅게 웃으며 타티아나는 목을 돌려 옆에 있는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를 한 번씩 바라보았다.

“전 여러분과 있는 게 너무 기쁘고 과, 아니,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약간 심상찮은 단어가 나오려다가 말고, 타티아나의 목울대 안으로 사라졌다.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본래 말하려던 것이 뭔지 묻고 싶었지만, 미처 묻기도 전에 타티아나가 이어 말했다.

“하지만 사샤. 아시다시피 즐거운 순간만을 계속해서 누릴 순 없어요.”

“왜요?”

“밤에는 각자 집에 돌아가야 하잖아요? 그렇죠?”

“자고 가도 되잖아요?”

“매일같이요?”

“엄마가 허락해 주시면요.”

어리기에 할 수 있는 대담하고도 순진한 사샤의 말에 타티아나는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곧 소리 내어 웃었다. 처음으로, 기분 좋은 목소리가 높게 울린다.

“아하하하하. 사샤. 사샤……. 정말, 마음은 기쁘지만 그러진 마세요. 부모님이 슬퍼하실 거예요.”

“슬퍼해요? 왜요?”

“그야 하루 이틀이라면 상관없겠지만, 사샤가 저희 집에 계속 함께 있는다면 부모님들께서도 사샤를 보고 싶어 하시지 않으시겠어요?”

“그런가요.”

사샤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에르네스트를 보았다. 그 눈빛은 분명했다. 부모님들도 좋아하실 것 같은데.

“그런데 아빠는 자꾸 형한테…….”

“사샤.”

무언가 폭탄 발언이 나오기 직전, 에르네스트가 급하게 사샤의 말을 틀어막았다.

타티아나와 관련해 아버지가 한 말들이 이 자리에서 튀어나왔다간 정말 수습하기 힘들 것이다.

에르네스트는 집에 가면 다시 사샤를 입막음하고, 아버지에게도 애가 들으니까 제발 쓸데없는 소리 그만 좀 하시라고 한마디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짐짓 인상을 썼다.

“아버지가 한 말은 네가 들을 필요 없는 말이야.”

“왜? 형은 되는데 난 안 돼?”

“그야 넌 아직 어리니까. 이 꼬맹아.”

“에르네스트.”

타티아나가 낮게 에르네스트를 불렀다. 에르네스트는 점심을 먹기 전 사샤의 전화를 받던 그의 태도를 놓고 타티아나가 책망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사과하라는 것도.

거의 반사적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음, 미안. 사샤.”

“혀, 형이 사과를 했어!?”

“…….”

자존심 강한 형의 생전 처음 보는 모습에 사샤가 기겁했다. 에르네스트는 속이 쓰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조금 짜증이 난다. 에르네스트는 팔짱을 끼고 말했다.

“아, 됐어. 아무튼 타티아나. 그래서 결론이 뭐야, 결론이. 속 시원하게 이야기를 해 봐.”

“시원하게요……?”

타티아나는 세상에 그런 단어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안 사람마냥 바보처럼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보며 에르네스트는 머리가 다 아팠다. 도대체 이 애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또래임에도 불구하고 연주자로서의 태도 하나만큼은 정말 존경스러울 정도이지만, 조금 심하지 않은가?

타티아나는 다시금 쐐기를 박듯 말했다.

“전 뭘 하든, 뭘 느끼든 피아노 소리에 영향이 안 가게끔 혼자서 정리해야 해요. 전 그 시간이 필요해요.”

꼿꼿하게 앉아서 말하는 타티아나를 보며, 에르네스트는 그녀의 양 어깨를 붙잡고 싶었다. 바로 두어 걸음 앞에 있는 타티아나는 금방이라도 어디론가 가 버릴 것처럼만 보였다.

팔짱을 끼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간다. 풀어 버린다면 손을 뻗고야 말 것 같다. 간신히 참아낸다.

“영향이 가는 게 당연하다니까?”

“전 안 당연해요.”

도무지 모르겠다. 세상 부족할 것 없이 살 수 있으면서 대체 무엇을 바라는 것인가. 또 바라지 않는 것인가. 알 수가 없었다.

에르네스트의 복잡한 머릿속에서 수많은 단어들이 조합되었다가 분해되길 반복했다.

아무 말도 못하고 내려다보고 있자, 타티아나가 힘없이 웃더니 약간 달래는 투로 입을 열었다.

“에르네스트.”

그녀의 말엔 묘한 울림이 있다. 그 울림으로 이름을 부르면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에르네스트를 잠시 바라보던 타티아나의 눈이 길게 휘어진다.

“저한테 이기고 싶으시죠.”

“너 사람을 뭘로 보…….”

“아닌가요?”

“…….”

그때 있었던 비공식전에 대해 사실 타티아나는 언급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진 않는 것 같았지만, 필요가 있다면 얼마든지 꺼내 들기도 했다.

에르네스트는 입을 다물었다.

이기고 싶다.

참 단순하지만, 그건 에르네스트에게 있어 정말 강력하게 작용하는 동기였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에르네스트가 자존심이 세거나 승부욕이 유난히 높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타티아나처럼 강한 연주자를 본다면, 그 누구라도 느낄 수밖에 없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 머뭇거리는 사이, 타티아나가 말했다.

“받아들일게요.”

“뭐?”

“대신, 시기에 조건이 있어요.”

타티아나가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적어도 여름방학이 지나고 다음 학기. 그때 다시 해 보도록 해요. 에르네스트가 원하는 대로.”

“다음 학기?”

지금은 8학년 2학기가 막 시작한 3월이다. 다음 학기인 9학년 1학기는 9월에 시작된다. 시간으로 치자면 반년이다.

짧다면 짧다. 하지만 매일같이 얼굴을 보는 친구로서 반년은 너무 길다.

“이제 학기 초인데 무슨 소리야?”

“약속드릴게요. 그땐 아무 소리 않겠다고.”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단아한, 그러면서도 엄격한 타티아나의 얼굴을 보며 아나스타샤의 말이 떠올랐다. 쟤 오래 갈 것 같은데. 그녀의 말이 맞았다. 정말 오래 갈 모양이다.

지금부터 반년? 대체 뭘 준비하는 거야?

“잠깐…….”

순간, 소름끼치는 생각이 들어서 에르네스트는 아나스타샤를 보았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별달리 이상한 것을 느끼지 못한 표정이다.

아무것도 못 느낀 거야?

실력의 준비라면 상관없었다. 에르네스트가 느끼기엔 전혀 손색이 없지만, 실력을 더 키워서 확실히 대결에 임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기다려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마음의 준비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홀로 생각이 많은 타티아나가 반년이나 되는 시간 동안 어떠한 마음의 준비를 할지, 에르네스트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무턱대고 내버려 두면 안 될 것 같단 직감이 들었다.

그때, 가만 보고 있던 사샤가 타티아나를 불렀다.

“타티아나 누나.”

타티아나는 에르네스트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사샤를 돌아보았다. 사샤가 말했다.

“누나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진 잘 모르겠지만, 선생님들도 비슷한 말을 했어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피아노와 함께하라고.”

종종 그렇게 가르치는 선생이 있긴 했다. 에르네스트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사샤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저도 그렇게 하면 누나처럼 될 수 있을까요?”

친형인 에르네스트도 유망한 연주자로 정평이 나 있었지만, 사샤는 연주자로서 닮고 싶은 쪽은 타티아나 쪽이라는 듯 말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자조하며 고개를 저었다.

“절대 그러지 마세요. 사샤.”

“왜요?”

“제가 틀렸으니까요.”

“……예?”

방금 전까지 말한 모든 것들을 틀렸다고 말한다. 누가 들어도 타티아나의 말은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 진심을 느끼며, 에르네스트는 조용히 침묵했다.

***

베샤스트니흐가의 거실. 에르네스트는 쇼파에 앉아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그 옆엔 사샤가 앉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중이었다.

얌전히 앉아 있던 사샤가 불쑥 말했다.

“형.”

“어.”

“저거 재미있어?”

텔레비전에선 최소한의 장비만을 가지고 시베리아에서 살아남는 서바이벌 다큐멘터리가 나오고 있었다. 재미있어할 사람은 재미있어하겠지만, 에르네스트는 관심이 없었다.

저런 짓을 왜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이 앞선다.

“아니.”

“그럼 왜 봐?”

“볼 게 없어.”

“그럼 안 보면 되잖아.”

“안 봐도 할 게 없어.”

연습을 할 기분도 들지 않아서 멍하니 있던 에르네스트는 문득 지금도 타티아나는 피아노 앞에 있을 것 같단 생각을 했다. 분명 그럴 것이다.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을 그녀를 떠올리다가,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휘저어 생각을 떨쳐 냈다. 일단 내일도 학교에서 볼 얼굴이다. 내일 보면 되겠지.

대신 에르네스트는 사샤에게 말했다.

“왜. 뭐 보고 싶은 거라도 있어?”

“으응. 아니.”

사샤는 텔레비전에 흥미가 있진 않다는 듯 스마트폰만을 보고 있더니, 갑자기 말했다.

“형. 타티아나 누나한테 전화해 봐.”

“뭐?”

에르네스트는 거의 목이 부러질 정도의 속도로 옆을 돌아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크게 되물었다.

사샤는 아랑곳하지 않고 스마트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어이가 없어 동생에게 물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왜 말이 안 돼? 누나 형 친구 아니야?”

틀린 말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타티아나와 전화상으로 이야기를 해 본 것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가 가장 최근이었다. 심지어 그것도 타티아나 측에서 걸어온 것이다.

사샤는 이상하다는 듯 바라봤다. 실제로 만나선 잘만 이야기하면서 전화에 왜 유난이냐는 눈빛이다.

그러더니 다시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화면엔 주소록에 저장된 타티아나의 번호가 띄워져 있었다. 사샤가 말했다.

“이젠 번호도 아니까 내가 해 보려고 했는데……. 난 솔직히 누나가 하는 말을 잘 모르겠어. 그래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그렇게 중얼거리던 사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니까 형이 해 봐.”

“타티아나는 네 전화를 더 좋아할걸.”

에르네스트는 살짝 삐딱하게 말했다. 사샤가 전화라도 건다면 타티아나가 얼마나 좋아해 줄지 안 봐도 뻔했다.

“그럴까?”

사샤는 반신반의하는 투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결국 다시 에르네스트에게 말했다.

“……아니야. 형이 해 봐.”

“갑자기 뭔 전화를 하라는 거야?”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지 모르겠다. 뭐 맡겨 둔 거라도 있나?

사샤는 여전히 화면만을 바라보는 채로,

“음……. 그냥.”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타티아나 누나는 캔 뚜껑도 혼자선 힘들게 따잖아.”

“뭐?”

“지금도 그러고 있지 않을까 싶어서.”

에르네스트는 이런 말을 하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어 말했다.

“사샤. 너도 타티아나한테 옮았냐?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원.”

“아, 형. 그러지 말고.”

캔 뚜껑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용건도 없이 전화를 해서 수다라도 떨라는 것인가? 상대가 타티아나가 아닌 다른 누구라면, 할 수도 있었다. 그 정도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하지만 타티아나에겐 그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스스로도 왜인지 모를 감정에 에르네스트는 조금 갈등하다가, 사샤에게 심술궂게 말했다.

“몰라. 네가 하든가.”

“형.”

“그리고 그 애도 혼자 캔 정도는 쉽게 딸 수 있어. 그냥 네가 따는 걸 보고 싶어서 자꾸 주는 거야.”

캔 뚜껑을 따는 사샤를 타티아나가 얼마나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던지, 그녀는 그냥 사샤가 뚜껑을 따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응? 아닐걸.”

사샤는 형이 뭘 모른다는 듯 대꾸했다.

“그때 보니까 정말 못 따던데?”

타티아나가 마시는 주스 캔은 알루미늄이 아닌 철제라 유난히 단단하긴 했다. 에르네스트도 가끔은 짜증 날 정도로.

하지만 피아노로 그 엄청난 음량을 내는 타티아나가 그렇게 악력이 약할 것 같진 않다.

“그럼 타티아나는 혼자 있을 땐 목말라 죽겠네?”

“그건 아니야. 맨손으로 못 하니까 동전으로 했거든. 엄청 힘들어하긴 했지만.”

“……인간은 도구를 쓰는 생물이지.”

“어, 타티아나 누나도 동전으로 따더니 그 소리 똑같이 했었는데.”

“…….”

동전으로 요령껏 하면 할 수 있긴 하지만 그 정도였나 싶다.

에르네스트는 그 어떤 병이든 퍽퍽 열어젖히는 아나스타샤를 봐 와서 그런지 캔을 못 열어서 동전을 꺼낸다는 건 뭔가 상상이 안 갔다.

사샤가 목격담을 덧붙였다.

“저번엔 플라스틱 병도 못 열었어.”

“…….”

“근데 그건 나도 못 열었어. 진짜 세게 잠겨 있더라고.”

그런 것도 있긴 하지.

에르네스트는 사샤가 왜 자연스럽게 타티아나의 캔을 받아 가서 따 주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도 이런 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정 그렇다면, 자신이 못 해 줄 것도 없었다. 에르네스트라면 사샤가 못 여는 병도 열 수 있었다.

하지만 보통은.

“아나스타샤가 해 주겠지.”

“응?”

“아무것도 아냐. 그보다 사샤. 너 연습하는 거 봐 줄 사람 필요하면 내가 도와줄게. 가자.”

“싫은데…….”

“아니 왜들 그래 진짜!?”

에르네스트는 벌컥 짜증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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