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80화 (180/1,277)

##  180화

교복을 벗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나는 식당으로 나왔다.

“…….”

슬쩍 보니 아무도 없다. 주방에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보통은 우리 집의 셰프이자 내 요리 선생님인 드미트리가 늘 주방을 지키고 있었지만 잠깐 어디 간 모양이다.

드미트리가 없다면 사실상 주방의 넘버 투는 바로 나였다. 드미트리는 혼자서 이 저택의 모든 식사를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용인이 적은 것도 아니고, 항상 30명 가까운 수를 유지하고 있는 우리 저택에서 요리사를 1명 더 뽑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드미트리는 혼자서 힘들 텐데도 주방의 인원을 더 뽑을 필요는 없다며 강력하게 주장했고, 아버지는 그 바람을 들어주셨다.

그래서 드미트리는 아직도 혼자서 주방을 책임진다. 고마운 사람이다. 내가 요리를 배우고 싶다고 했을 때, 드미트리가 굉장히 기뻐했던 것이 떠올라서 문득 웃음이 나왔다.

“후후후.”

난 살금살금 주방을 거닐었다. 드미트리가 없는 사이 무언가 몰래 찾아 먹으려는 건 아니었다.

그저 따뜻한 차가 마시고 싶었을 뿐이다.

나제즈다에게 부탁해도 되겠지만 바쁜 그녀를 일부러 부르고 싶진 않다. 나 혼자서 못 할 것도 없다.

주전자는 금방 찾아냈고, 찻잎도 늘 있는 곳에 있었다. 러시아식 잼인 바례니에도 찾아냈다.

러시안 티는 전통적으로 설탕이나 잼을 차와 함께 마신다. 처음엔 이 조합이 정말 익숙하지 않았지만 이젠 찾아 먹을 정도가 되었다.

“흐흥.”

난 주전자에 물을 올리고, 그사이 바례니에가 들어 있는 유리병을 보며 도전의 시간이 다시 찾아왔음을 느꼈다.

손가락을 쭉 펴고, 손목을 흔들며 스트레칭을 하고, 어깨도 한 번 돌린다.

그리고 난 맨손으로 유리병과 뚜껑을 쥐었다. 열려라 참깨. 주문까지 외우며 손에 힘을 주었다.

“으윽.”

꼼짝도 하지 않는다. 손이 밀리면서 아파 온다. 난 본능적으로 손을 떼어 놓았다.

“…….”

갑자기 화가 난다.

분명 저번에 먹었을 때, 뚜껑에 끈적끈적한 바례니에가 남아 있지 않도록 충분히 씻어서 깨끗하게 했었고, 닫을 때도 살짝 약하게 닫아 놓았다.

그런데 대체 누가 다시 닫아 놓은 건지, 끔찍하게도 세게 닫아 놓았다. 한숨이 나온다.

약한 인대와 악력은 피아노 연주자로서 애로사항이라 할 수 있는 일이지만, 피아노는 힘만으로 다루는 악기가 아니고, 불리함은 테크닉으로 커버할 수 있다. 덕분에 연주를 할 땐 그리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병뚜껑을 따는 것처럼 힘만 필요한 일엔 여실히 드러난다. 힘도 힘인 데다가, 피부가 약해서 그런지 아파서 못 하겠다.

“…….”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난 싱크대에서 상아색 고무장갑을 찾아냈다. 고무장갑을 끼고, 다시 병을 잡고 돌린다. 뻑뻑한 유리병은 그래도 저항한다.

다음 단계로, 따뜻한 물을 받아서 병뚜껑을 담갔다. 잠시 시간을 두고, 다시 힘을 주자 뚜껑이 뻥 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까불지 말란 말이지. 의기양양하게 숟가락으로 딸기 바례니에를 접시에 덜어냈다. 그때였다.

“타티아나. 뭐 해?”

옆을 보니 루슬란 오빠가 뒷목에 손을 올린 채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대답했다.

“차를 끓이고 있어요. 오빠도 한 잔 드시겠어요?”

“응? 그래. 그것 좋지.”

루슬란 오빠가 히죽 웃었다. 슬리퍼를 질질 끌고 오는 폼이 영락없는 백수였지만, 난 오빠가 요 며칠간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대학교 수업과 아버지에게 받는 후계자 수업까지 받느라 바쁘게 살다가 오늘에서야 집에서 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눈가에 피로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가끔 이런 티타임도 좋은 휴식이 될 것이다. 난 루슬란 오빠를 위한 찻잔을 하나 더 준비했다.

선반에 있던 쿠키도 꺼내려는데, 오빠가 중얼거렸다.

“고무장갑……?”

“아.”

식탁 위에 고무장갑 한 켤레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치워 놓는다는 것을 깜빡했다.

루슬란 오빠는 그것을 유심히 보더니 의심스럽다는 듯 내 쪽을 바라보았다.

“뭐야 이거? 찻잔에 지문 안 묻히려고?”

“왜 다들 그런 농담들을 하는 거죠?”

범죄 드라마가 유행이기라도 한가? 저번에 일리야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왜 내가 지문에 신경 써야 한다는 거야?

난 손을 들어 바례니에가 담긴 병을 가리켰다.

“바례니에 병을 열 때 썼어요. 너무 세게 잠겨 있어서요.”

“병? 아…….”

루슬란 오빠는 그제야 고무장갑이 식탁 위에 올라가야 할 상황을 이해한 듯했다.

“열려 있길래 아무 생각 없었는데, 네가 열었구나.”

“예.”

“보니까 뚜껑에 잼이 굳었네. 잘 안 열렸을 건데……. 열기 힘들면 이야기를 하지 그랬어. 다른 사람한테. 아니면 나라도.”

그렇게 말하면서 루슬란 오빠는 병뚜껑을 다시 돌려 잠갔다가,

“금방 열어 줄 텐데.”

힘을 주어 쉽게 열었다. 잠글 때도 꽤나 세게 잠갔던 것 같은데, 굉장히 쉽게 연다. 생각보다 힘이 센 걸까.

“매일 집에 계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야 그렇지만. 오늘은 있었잖아.”

“괜찮아요. 혼자 할 수 있어요.”

“그래……?”

난 잔을 따뜻하게 만들고 다시 물을 끓이면서 찻잎을 덜어냈다. 그 사이 루슬란 오빠는 양 팔을 식탁 위에 올린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자꾸 시선이 신경쓰인다. 마치 뭐라도 바라는듯한 눈길이다.

조금 고민하다가, 슬며시 말해보았다.

“루슬란 오빠.”

“응.”

“혼자 할 수 있다고 해놓고 죄송하지만, 여기 선반 위에서 쿠키 상자를 꺼내주시겠어요? 제 키로는 닿질 않네요.”

“오, 그래?”

내 부탁과 동시에 루슬란 오빠는 벌떡 일어나더니 성큼성큼 다가와서 선반 쪽으로 손을 쭉 뻗었다. 선반을 여니 쿠키 상자가 여러 개 있었다. 루슬란 오빠는 손에 닿는대로 상자들을 모두 내렸다.

“자, 타티아나.”

“그거 다 드실건가요?”

“너무 많나?”

“많지요.”

“도로 올려놓지 뭐.”

굳이 두 번 일을 하면서도 루슬란 오빠는 귀찮은 기색 없이 웃었다. 그 얼굴을 마주한 나 역시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쿠키 상자를 꺼내는 일 같은 건 내가 의자를 밟고 올라서서 혼자 할 수도 있었겠지만, 만약 그렇게 했으면 루슬란 오빠가 심심해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티타임은 나중에 온 드미트리까지 함께해 세 명이 되었다. 드미트리는 한사코 사양했지만 내가 무조건 식탁에 앉히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내가 끓여 주는 홍차를 받아 주었다.

요리에 대한 이야기, 학교에 대한 이야기 등등 여러 말과 말이 오갔다. 난 기분 좋게 환담을 즐겼다.

드미트리는 내게 가르쳐 주고 싶은 레시피가 많았고, 아마 그의 레시피를 모두 배우려면 수십 년은 걸릴 것이다. 그리고 뭘 만들든 아마 루슬란 오빠는 맛있게 먹어 주겠지. 그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난 기분이 굉장히 나아졌다.

그렇게 짧은 티타임을 마치고, 별관의 연습실에 들어섰다.

“…….”

비로소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다시금 되새긴다.

불을 켜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액션에 약간 문제가 있었던 건반은 조율사가 와서 고쳐 놓았다. 큰 문제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의자를 바로 하고 허리를 편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그 무엇도 움직이지 않는다. 고요하다. 잠시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천장에서 따뜻한 바람이 쏟아지는 소리와, 내 심장 소리만이 들린다.

에르네스트도 아나스타샤도 나와 함께 연습하자고 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오늘은 사샤도 나와 같이 하길 바랐다. 난 그것도 거절했다. 지금 이 고요함은 내가 바란 고요함이다.

“…….”

후회를 하진 않지만, 사샤에 대해선 약간 미련이 남는다.

영특하고 착한 사샤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많았을 것이다. 선배로서 사샤의 피아노를 보고 약간 도움을 줄 수도 있었고, 어떤 선생님을 선택하면 좋을지 진지하게 상담을 해 줄 수도 있었다.

사샤는 심지어 집에 놀러 와서 며칠이건 자고 가겠단 말까지 해 주었다. 상당히 귀여운 이야기였고 난 진심으로 기뻤다.

한순간, 정말 한순간이지만 사샤를 껴안고 정말 사샤가 싫다고 질려할 때까지 집에 있어도 좋다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그 정도에서 그쳐야 했다. 사샤에게도 모두에게도 너무 부담되지 않도록, 그리고 사샤를 하나의 타협안으로 생각하는 엄청난 실례를 저지르지 않도록. 그 정도에서 웃으며 거절할 수 있었던 날 칭찬하고 싶다.

“…….”

난 요즈음 괜찮다.

밤에도 그럭저럭 버틸 만하고, 친구들과 지내는 데엔 문제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피아노도 나쁘지 않았다.

피아노 소리를 객관적으로 들어 볼 수 있는 건 스튜디오에서뿐이었고, 괜찮다고 생각했던 연주도 마카로프 프로듀서에게 무겁다는 평을 듣긴 했지만, 적어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피아노에 집중한다면 누구와 합주하더라도 꼴사납게 매달리는 듯한 음색을 내진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도 이렇게만 한다면 난 다시 지금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들을 잊고 피아노에만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피아노는 훨씬, 훨씬 더 강력한 망치가 되어 줄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다시금 내 스스로를 향해 망치를 휘두르려고 팔을 치켜드는 순간,

“……?”

부우웅 하는 진동이 들렸다. 전화가 왔다. 아나스타샤였다.

“아나스타샤.”

- 어, 타티아나. 뭐 해?

“아무것도요.”

- 통화 좀 할까?

“그래요. 무슨 일이신가요?”

- 어? 어…….

아나스타샤는 화들짝 놀라더니 드물게 말을 더듬었다. 전화 너머로도 당혹스러운 기색이 느껴진다.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내가 뭔가 잘못이라도 했나?

보채지 않고 참을성 있게 기다리자 전화 너머로 조심스러운 음색이 들려온다.

- 일이라면……. 타티아나. 혹시 이번에 신아르바트에 생긴 멀티센터 가 본 적 있어?

이번에 생긴 곳을 왜 나한테 묻지?

“혹시 그곳에 제가 아나스타샤와 갔었던 적이 있나요?”

- 아니?

“그럼 없어요.”

- 무슨 대답이야 그게…….

모스크바에 있는 그 어떤 가게든 아나스타샤 없이 나 홀로 가 본 곳은 정말 손에 꼽았다. 오래된 곳이라도 그랬는데, 신아르바트 거리 쪽에 이번에 생긴 곳이라면 어림도 없었다. 아나스타샤 역시 잘 알면서 왜 쓸데없는 걸 묻는지 모르겠다.

아나스타샤는 중얼거리더니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 어쨌든, 거기 헤어숍이 정말 괜찮다고 하더라고. 발렌티나가 가 봤는데 분위기도 좋고……. 일단 오너 디자이너를 프랑스에서 상당히 유명한 헤어디자이너가 맡고 있다든가. 그리고 거기가……. 음.

무언가 두서없이 설명이 길었지만, 결국 아나스타샤가 하고 싶은 말은 하나였다.

- 갈래?

“갈게요.”

- 아하하…….

곧바로 대답하자 마른 웃음이 수화기 너머에서 흘렀다.

그녀가 물었다.

- 혹시 지금 연습실이야?

“예? 어떻게 아셨어요?”

- 연습실에서 전화 받으면 딱 그 느낌이 있어.

기본적으로 방음 처리가 되어 있는 연습실에선 반사가 없으니 사람의 목소리가 다른 방과는 조금 다르게 들린다. 아나스타샤는 내 목소리에서 그것을 읽어낸 것 같다.

그녀가 이어 물었다.

- 혼자고?

“예.”

- 그래…….

난 아나스타샤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느꼈다. 같이 어딜 가든 좋았고, 상관없었지만 유독 피아노를 앞에 두고 함께하는 것에만 거리를 두고 있으니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이겠지. 난 그 모든 것을 그녀에게 설명할 수 없었다.

미안해요, 제게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이윽고 아나스타샤가 짐짓 유쾌하게 말했다.

- 알았어, 타티아나. 내일 학교에서 봐. 알겠지?

“예. 학교에서 뵈어요.”

- 응.

전화를 끊고 나서야, 아나스타샤가 딱히 용건 없이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그녀는 용건 없이 전화를 하는 성격이 아니었고, 전화를 해도 길게 이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연히 지금 이 통화 역시 정확한 용건만을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마지막 전화를 끊으며 남긴 그녀의 어투에서, 난 쓸쓸한 감정을 적나라하게 느꼈다.

난 전화가 끊어진 스마트폰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

생각해 보면, 내가 아나스타샤에게 먼저 전화를 건 적은 정말 손에 꼽는다. 그것도 특별히 용건이 있을 때만.

그것도 아나스타샤가 참아 주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전화를 해 본다면 어떨까?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다시 진동이 왔다.

나는 깜짝 놀라서 스마트폰을 떨어뜨릴 뻔했다가, 간신히 잡았다.

“……?”

이번엔 에르네스트의 이름이 화면에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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