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화
피아노에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낮은 음은 라 음으로, 88개의 건반 중 가장 왼쪽에 위치해 있다.
그만큼 멀리 있고 어지간해선 손 댈 일이 드문 건반을 향해, 허리와 어깨를 틀며 손을 뻗는다. 그대로 왼손으로 빠르게, 지옥 밑바닥에서 음들을 건져 올리듯 긁으며, 끌어당긴다.
우르릉 소리와 함께 피아노가 불길하게 운다. 내 부름에 무언가가 응답한다.
“…….”
키득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잇고는, 불쑥 튀어나온다.
깜짝 놀라도록 양손으로 피아노를 때렸다. 물론 이 정도는 장난이다.
소리는 곧 숨어 버린다. 하지만 잔향이 남아 흔들거린다. 다시 왼손으로, 이번엔 조금 얕게 할퀴었다.
조금 더 높게 대답과, 놀래는 과정이 이어지고,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망치로 사용한다.
피아노는 근본적으로 타악기라고 했던 프로코피에프는 그 지론에 충실하도록 곡들을 썼다. 그리고 악마적 암시는 같은 소품으로 묶인 회상, 활기, 절망이라는 제목들의 곡들 중에서도 가장 적나라하게 피아노를 타악기로 학대했다.
양손이 끊임없이 역할을 주고받으며 쉴 새 없이 화음을 연타한다.
언제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불협화음과 반음계가 불안감을 조성했다. 깊고 음산하게 울리는 화성으로 실체를 만들고 숨통을 틀어막고 목을 졸라 답답하게 만든다.
그러한 소리의 크기를 점차 키워 나가면서 불안감의 눈덩이를 굴려가다가, 오른손으로는 반음계적 3도 화성의 연타로 최고조로 끌어올리고, 왼손은 크게 들어 건반을 내리찍는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연달아 건반을, 피아노를 꿰뚫는다.
피아노에서 터져 나온 소리가 연습실 전체를 쩡 하고 울렸다.
병뚜껑도 맨손으론 따기 힘들어 할 만큼 힘이 없는 손이다.
하지만 건반과 피아노를 이해하고 오로지 그것을 다루는 데에 필요한 모든 기술을 집약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훈련을 거듭한 손은, 힘이 아닌 기술로 건반을 지배하는 데에 익숙했다.
몇 개나 되는 테크닉의 벽을 넘어서고, 인간이 쓰고, 연주하는 곡이라면 어지간해선 전부 연주할 수 있도록 모든 잠재력을 끌어올렸다.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손은 건반을 망치로도 만들었다.
다시 왼손이 건반을 내린다. 건반이 최대로 내려가고, 그 밑의 바닥과 그보다 더 깊은 부분을 감지한다. 손끝으로 그 모든 것을 느끼면서 더더욱 심원하고 파괴적인 소리를 이끌어냈다. 모조리 부숴 버릴 것같이 정신없고 빠르게 음악이 이어졌다.
- …….
당장 도울 일이 없냐고 묻는 에르네스트에겐 크나큰 애정과 감사를 느낀다. 그의 진심 어린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난 구원받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분명하게 다시 전한다. 난 캔을 따진 못하지만 피아노를 다룰 순 있다. 피아노로 무언가를 부숴 버릴 수 있다. 이 순간 난 철저하게 피아노를 제어하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이런 내 피아노 소리가 무겁다고 평했다.
무겁다 함은 불필요한 요소가 많다는 말이고 대행자로서의 연주자의 본분에 하자가 있다는 말이다.
다시 건반을 내려친다. 아직 정리하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다. 약동하는 마음과 삿된 감정, 사명감, 미련, 강박, 의무감, 나약함,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들…… 이 모든 게 얽혀 무거움의 요소가 되었으니, 이것을 무엇이라 말할 것인가.
상관없다. 상관없어야 했다.
당장 주어진 것들로 답을 찾아야 한다면 그 무거움을 이용할 뿐이다. 내게 주어진 도구는 피아노뿐이고 난 도구를 적절히 사용할 줄 알아야 했다.
다시 망치를 들었다. 거친 연타로 모든 것들을 두드리고 저며서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 악마의 이름이 붙은 짧은 곡에서 모든 것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짓뭉개져 갔다.
“…….”
무거운 피아노는 더더욱 묵직한 소리를 냈다. 그건 셈여림이 매우 여리게 바뀌었음에도 변하지 않았다. 소리의 크기가 일순 줄어들었지만 묵직한 질량감은 그대로 이어졌다. 낮게 울부짖으며 손짓하는 듯한 소리로 위협하고, 압도한다.
낮게 깔리며 당장 발목을 잡고, 다리를 타고, 허리를 찍고, 어깨까지 타고 오른다.
공포와 두려움. 점차 기어오르는 검은 그림자는 목을 콱 쥐고, 첨예한 소리의 날붙이를 목덜미에 내리찍고, 내리찍고, 내리찍는다.
내 양손은 한계에 다다른 속도로 번갈아 도약했다. 그 와중에도 오른손은 악보에 써진 그대로 움직여 거의 동시에 들릴 정도로 빠른 꾸밈음을 구겨 넣었다.
한 차례의 스케일과 귓가에 으르렁거리는 소리. 다시 양손이 도약한다.
필사적으로 끌어올린 템포가 극한의 테크닉을 요구하는 구간에 부딪히자 몸이 못 견디는 것이 느껴진다. 이를 악물고 템포를 지켰다.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화려한 아르페지오와 도약, 그리고 글리산도.
손등과 손끝으로 건반을 횡으로 긁었다. 한 번 올라간 오른손은, 다시 중간에서부터 글리산도로 올라가서 최고점의 도 음을 찍는다.
클라이맥스가 끝나고 다시 주제를 한 번 되풀이하고는, 다시 깊은 지하로 모든 음들을 밀어 넣고, 마무리했다.
“……후.”
40분씩 이어지는 곡에서도 모든 건반이 사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 곡은 2분 30초 남짓한 길이임에도 가장 낮은 음에서 가장 높은 음까지 모든 음을 사용한다.
현대의 기준으로 들어도 공포스러운 음악을 100년도 전에 선보였으니, 당시 10대였던 프로코피에프가 클래식 음악계에서 얼마나 파격적인 존재였을지 어렴풋이 예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당시 음악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프로코피에프의 천재적인 작품으로 에르네스트를 끔찍하게 공격했다.
최고의 선곡이었고, 동시에 최악의 선곡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아무것도 못 알아들을 것이다. 난 내가 품고 있는 문제들을 드러내지 않도록 강렬하고 폭력적인 프로코피에프의 음악을 택했고, 심지어 그건 스마트폰을 통해 에르네스트에게 전해진다. 거기에서 깊은 무언가를 읽어내기란 힘들 것이다. 단지 읽을 수 있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피상뿐. 최고의 선곡이다.
그리고 에르네스트의 기분은 최악일 것이다. 그는 바보가 아니다.
작년에도 그는 내가 연주한 프로코피에프의 사르카즘에 짓눌려 패배를 인정한 적 있었다. 그때 역시 난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그를 비웃고, 조롱하고, 경멸하는 의도를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서 정신적으로 그를 압도하고, 졌다고 시인하게 강요했다.
이번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달랐다. 에르네스트는 무고했으나 난 일방적으로 그를 다시 조롱했다.
다신 그렇게 잔인하게 굴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난 피아노로 할 말이 있다면 해 보라고 내민 에르네스트의 손을 망치로 찍어 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에르네스트는 내 곡에 맞서 무언가 답을 내놓기도 싫어졌을 것이다.
“……흑.”
흐느낌이 목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난 화들짝 놀라 어깨를 비틀고, 손을 들어 거칠게 눈가를 비볐다. 거칠었던 연주로 피로해진 손이 파르르 떨렸다. 갑자기 감정이 북받쳐 올라 오열이 나올 것 같다. 스스로 내 목을 졸라 막고 싶어진다.
해야 해서 했다.
하지만 해야 했던 것일까.
나는 왜 친구에게까지 이렇게 모질게 굴어야만 하는 거야.
“…….”
단호하게 거절하고, 마음 편할 수 있으리라 생각진 않았다. 단지 스스로 결정해서 한 일에 대해 후회하지 않으리라 몇 번이고 다짐했고, 결정한 그대로 연주에 임하고 나면 언제나 그랬듯 납득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연주자는 무자비해야 하니까.
지금 내가 홀로 있고 싶어 하는 이유가 바로 무뎌진 피아노를 다시 단단하게 만들고 싶기 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연주 집중이 깨어진 지금, 난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충격을 받고 있었다. 참을 수 없이 가슴이 아프다.
자꾸만 울음이 나오고 만사가 싫어진다. 피아노도 갑자기 무섭게 보인다. 평생에 걸쳐 피아노가 두려워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지금은 건반을 만질 기분도, 엄두도 안 난다. 그저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침대로 가고 싶어졌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지금 나보다 훨씬 더 최악의 기분을 느끼고 있을 에르네스트를 생각하니 그럴 수 없었다. 그가 왜 이렇게 부당한 대우를 받고 모욕을 당해야만 했는지, 최소한 난 그에게 욕이라도 먹어야 했다. 그것이 내 책임이었다.
난 덜덜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폰을 잡았다.
두려움에 그만 연결된 전화를 끊어 버리고 말 것 같다. 난 가까스로 참으며 여전히 연결되어 있는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읏.”
혹시라도 우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목을 가다듬고, 다시 눈을 비볐다.
사과를 해야겠지만, 그건 나중에. 지금은 입 끝을 떨지 않도록 노력하며 스마트폰을 귓가에 대었다.
“…….”
아무런 목소리도 없다. 단지 작게, 숨소리만이 들린다. 에르네스트가 듣고 있다.
문득 내가 숨을 몰아쉬는 소리 역시 듣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 조금 거리를 떼어 놓는 사이, 수화기 저편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 멋진데.
“……예?”
에르네스트의 목소리는 분노도, 슬픔도 아닌 유쾌함을 띄고 있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 너 캔 못 딴다는 거 정말 거짓말 아니야? 그런 애가 무슨 피아노를 그렇게 다 때려 부수려고 들어?
“……?”
난 에르네스트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히 내가 무시했다는 것 정도는 알아들었을 텐데.
“어……. 에, 에르네스트?”
- 응?
다시 천진하게 되묻는 그에게 혹시 기분 나쁘지 않았느냐고 물을 정도로 용기 있진 않았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 큭큭……. 아주 보란 듯이 보여 주는구나? 타티아나.
역시 통화 품질이 별로였던 걸까. 그래도 이렇게 유쾌하게 받을 줄은 또 몰랐는데. 난 안도와 짜증을 동시에 느꼈다.
울적하게 스마트폰을 잡고 있는데, 생뚱맞은 소리가 나왔다.
- 어쨌든, 사샤의 감상을 들어 볼까?
“……어, 예? 무, 뭐라고요?”
- 사샤. 자.
사샤? 사샤가 듣고 있었다고?
- 타티아나 누나.
“아……!”
정말 바로 옆에 있었는지 사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모르게 탄식했다.
역시 전화를 통한 연주라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는진 모르겠지만, 사샤가 옆에서 그걸 들었다는 것 자체만으로 난 엄청나게 부끄러워졌다.
곡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내가 그걸 에르네스트에게 과시하고 멸시하듯 보였다는 걸…….
“아니, 그……. 저, 제가…….”
변명하면 안 된다. 사과해도 안 되고. 하지만 그게 아니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말 전화를 끊어버리고 싶은 마음과 이대로 기절하고 싶은 마음이 충돌해서 아무것도 못 하고 손만 벌벌 떨고 있는데, 뜻밖의 말이 나왔다.
- 누나, 정말 멋졌어요. 지금 당장 가서 다시 듣고 싶어요!
- 야, 지금 몇 신 줄 알어?
- 아니, 형.
- 민폐는 나중에 해 나중에. 그리고 타티아나는 혼자 연습해야 한다잖아. 낮에 들었던 거 까먹었어?
- 알아…….
- 이렇게 전화상으로 듣는 걸로 만족해.
- 그치만…….
사샤가 순진무구하게 말했고, 에르네스트가 핀잔을 주듯 말렸다. 두 형제는 티격태격 하더니, 사샤가 뾰로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 난 지금 누나가 보고 싶은 걸.
- 야, 누군 안 그런 줄 알…….
에르네스트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더니, 급히 입을 닫았다.
에르네스트?
난 입을 반쯤 벌리고 굳었고, 에르네스트는 재빨리 수습했다.
- 진짜 음악사 책 빨리 받아서 숙제해야 하는데 말야.
“그, 그건 정말……. 미안해요.”
- 아니, 그건 미안할 게 아니고.
지금 만나서 책을 줄 수도 있지만, 에르네스트가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닌 듯하다.
그가 아무래도 다 상관없다는 듯 크게 말했다.
- 어쨌든, 이번엔 내가 한 곡 들려줄게.
“예? 에르네스트가요?”
- 그래. 네 연주를 듣고 났더니 나도 한 곡 치고 싶어져서 말이야.
계속 뇌리를 잠식하고 있던 두려움이 점차 씻겨 내려간다.
- 들어 줄 거지?
“정말…….”
난 더듬거렸다.
에르네스트가 무언가 답가를 연주해 주리라곤 상상조차 안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난 잔뜩 긴장되어 있던 어깨에서 힘을 풀 수 있었다.
“정말인가요?”
- 뭐가?
“지금 연주하시겠다는 것 말이에요.”
- 그럼 내가 하는 척하고 CD라도 틀어 놓을까 봐?
이게 무슨 소리야…….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농담조로 킥킥거리던 에르네스트가 돌연 진지하게 어투를 바꾼다.
- 타티아나.
“…….예.”
- 난 할 말이 많아.
그의 태도는 약간, 이상했다.
내 연주에선 아무것도 읽어내지 못한 것처럼 박수를 쳐 주고 좋은 연주였다고 했다.
그런데 할 말이 많다고 한다.
그가 이어 말했다.
- 하지만 지금 전화기를 붙잡고 떠들어 봐야 너도 못 알아듣고, 나도 정리가 안 될 뿐이지.
“…….”
- 그래서 곡으로 들려주겠단 거야.
우리는 서로 입을 열어 대화하는 것보다 피아노로 교류하는 것에서 훨씬 더 많은 것을 주고받을 줄 알았다.
약간 주저하는 사이 그가 말했다.
- 음, 아닌가. 같이 연습하면서 의견 주고받고 하는 게 싫다고 그랬었나.
“그게 싫진 않아요! 그게 아니라…….”
자꾸 변명만 하는 것 같다.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질 무렵, 에르네스트가 시원스레 말했다.
- 됐어. 복잡하게 할 것 없어. 그럼 대결로 하지 뭐.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 뭐, 이상해?
전화 너머로 연습한 결과를 들려주고 곡들을 주고받는 것이 싫다면 대결 구도로 가자고 한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 타티아나 넌 반년 후에 하자고 했지만, 이젠 아니지. 이미 네가 한 곡 보여 줬고. 그럼 이제 내 차례인 거지?
“…….”
그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르네스트가 무슨 곡을 꺼내들진 모르겠지만, 그것으로 날 후려치고 찍어 눌러버린다면…….
난 형편없이 져버리겠지.
“좋아요. 에르네스트의 차례예요.”
- 받아 주는 거야?
“에르네스트가 연주를 마칠 때까지……. 절대 전화 끊지 않고 있을게요. 가만히 듣고 있을게요.”
전화상으로 얼마만큼 전해졌는진 모르겠지만, 난 내가 에르네스트에게 한 일에 아직도 상당히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대결을 걸고 싶어졌다면 받아 주는 것 또한 내 책임이다.
에르네스트가 경쾌하게 말했다.
- 그것 좋네.
그는 흠, 소리를 내며 고민했다.
- 어디 보자……. 와, 작년 생각나는걸? 프로코피에프라……. 그때 내가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 쳤다가 너한테 된통 깨졌었지?
“…….”
- 설욕전도 리스트로 해 볼까.
에르네스트는 별것 아니라는 듯, 상당히 가벼운 투로 말하고 있었지만 설욕전이라는 말을 할 정도로 자존심 세고 승부욕 강한 에르네스트에게 있어 별것 아닌 대결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정말로 할 생각이다.
“리스트요.”
- 그래. 타티아나.
전화 너머의 그가 말한다.
- 내가 너에게 프란츠 리스트 스페셜을 보여 줄게.
무슨 기술 이름처럼 들리는 건 착각이겠지.
- …….
피아노가 있는 방으로 가는지 움직이는 소리가 난다. 난 가만히 앉아 침묵을 지켰다.
에르네스트의 프란츠 리스트 스페셜이 뭔지 모르겠지만, 낭만 시대에 대한 레퍼토리가 굉장히 넓은 에르네스트는 리스트의 곡들 역시 상당히 꿰뚫고 있을 것이었고, 그렇다면 나올 수 있는 곡은 굉장히 많았다.
낭만적이고 화려한, 기교파 피아노의 시대를 연 장본인인 프란츠 리스트의 곡들은 하나같이 다 비르투오시티를 드러내기에 부족함이 없는 곡들이었다.
특히나 에르네스트처럼 기교적으로도 굉장히 뛰어난 연주자가 연주한다면 듣는 사람을 하여금 경외감에 빠져들게 한다.
“…….”
무슨 곡을 보여 줄 건가요? 에르네스트.
어떤 곡을 꺼낼진 모르겠지만 제 연주를 짓밟아버리기에 충분한 곡을 들려주겠죠. 이번엔 이미 제 곡을 들었고 방심도 않을 테니.
갑자기 마음이 조금 편해진다.
뼛속부터 승부사로, 검투사로 살아야 하는 연주자에게 필요한 덕목인 승부욕은 내 마음 속에서 찾아 볼 수 없었다.
나는 조용히 연주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