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화
프란츠 리스트.
1811년 태생으로, 열한 살에 체르니로부터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는 극찬을 받고, 열두 살부터 전 유럽을 돌며 피아노 연주회를 열어 엄청난 인기를 얻은 피아노의 황제.
피아니스트가 얼마나 위대해질 수 있는지 보여 준 리스트의 위업은 가히 전설적이다.
연주회가 열렸다 하면 수많은 사람들은 그가 태우다 던진 담배꽁초 하나라도 얻기 위해 쟁탈전을 펼쳤고, 연주회를 마치고 떠날 땐 여섯 마리의 백마가 이끄는 마차를 탔다. 그리고 수십 대나 되는 마차의 호위행렬이 잇따르곤 했다.
이 정도로 전설적인 인기는 리스트의 연주곡들이 보이는 초인적인 기교와 퍼포먼스에서 비롯되었다.
“리스트 스페셜…….”
에르네스트의 말은 얼핏 우습게 들렸지만, 내가 연주한 곡과 겨루기 위해 꺼내 들 곡이라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정말 날 잡기 위한 특별한 기술처럼 들린다.
아마 그의 수준 높은 기교를 드러낼 수 있는 곡이 나올 것이다. 메피스토 왈츠, 헝가리 광시곡, 디아벨리 변주곡 등 몇 가지 곡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중 무엇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잠시 후, 피아노가 있는 방에 들어갔는지 에르네스트가 날 불렀다.
- 음, 듣고 있어? 타티아나.
“예.”
작게 대답하자 그는 가타부타 설명 없이 곧장 말했다.
- 시작할게.
귓가에서 잠시 스마트폰을 떼고 통화 녹음 버튼을 눌렀다. 동의 없이 이렇게 녹음을 하는 것은 매너에 어긋나는 행동이겠지만, 한순간이라도 그의 대답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내 의지였다.
다시 귓가에 전화를 붙이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전화 너머에서 소리가 날아들어 날 후려치길 기다렸다.
그때.
감미로운 아르페지오 선율이 내 뺨을 쓰다듬었다.
뺨을 때릴 것이라 생각했던 소리는 더없이 부드럽게 귀를 스치고 목께를 맴돈다. 예상치 못한 선곡에 잔뜩 긴장해 있던 어깨가 바르르 떨린다.
리스트의 연주회용 연습곡 3곡 중 3번째 곡, 탄식Un sospiro.
경쟁자를 압도하고 전의를 상실하도록 강요하는 난폭한 음색은 전혀 없다. 그저 아름답게, 넘실거리는 물결처럼 오르내리는 아르페지오가 끝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따뜻하고 안락하게 느껴지는 주 선율.
프란츠 리스트는 유럽 전역을 휩쓴 대표적인 기교파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지만, 50대가 되어선 종교에 귀의해 수도사의 길을 걸었던 것처럼, 이렇게 아름다운 선율을 가진 곡들도 많이 작곡했다.
그 음악성을 증명하는 한 곡이 전화 너머로 들려온다.
“…….”
듣자마자 알았다.
전화 통화로 전해지는 조악한 음질로는 그리 대단한 것을 전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었지만, 이 정도면 음질은 충분했다.
혹시나, 하고 생각했다.
밝은 모습을 보이는 에르네스트가 내 연주에서 아무것도 읽어 내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하고.
하지만 절대 그럴 리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르네스트는 모두 알았다. 내가 악마적 암시라는 강렬한 곡으로 그를 다시 한 번 무시하고 내쳤다는 것까지 이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으면서 모른 척해 준 것이다.
“읏…….”
눈앞이 흐려지고, 코가 시큰해졌다. 난 눈가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지만 닦지도 못하고 귓가에 들리는 음악에만 집중했다.
차라리 화를 내 주었다면 당연한 내 책임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곡은, 너무나 따뜻하다. 에르네스트는 화가 나긴커녕 모두 이해한다는 듯한 음악을 선보였다.
정원을 거니는 듯한 선율과 아르페지오는 다시 한 번 우아하게 변화하고는, 조성을 바꿔 조금 더 열정적으로 귀에 파고들어 전신을 노곤하게 만들었다.
본래 고절한 실력을 가지고 있던 에르네스트였지만, 그 음색에 있어서 훨씬 더 점잖음이 가미된 것이 느껴진다. 전화 음질 정도로도 확연하게 전해질 정도로 에르네스트의 연주는 일련의 품격을 갖추고 있었다.
마지막 변주로는 양손 아르페지오가 이어진다. 양손이 동시에 오르내리는 와중에도 정확하게 주 선율을 강조하며 아름답게 만들어 나간다.
한 번에 3개의 독립적인 성부를 다루는 일은 피아니스트에게 있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테크닉이었지만 그 수준에도 차이가 있는 법. 에르네스트의 연주는 마치 손이 세 개, 혹은 그 이상 달린 사람의 것처럼 들렸다. 그의 실력은 갈수록 원숙해지고 있었다.
작년보다 족히 몇 계단은 더 성장한 듯하다.
5분 남짓한 연주가 끝나고.
“…….”
난 그제야 손을 들어 조용히 눈가를 닦아 냈다.
스마트폰을 내리고 녹음을 중지시켰다. 이 녹음 파일은 어쩐지 자주 듣게 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잠시 후, 미묘한 기척이 느껴졌다. 전화 너머의 에르네스트가 다시 듣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난 일부러 조금 표독스럽게 말했다.
“뭔가요, 에르네스트.”
- 응? 뭐가.
“리스트 스페셜이라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 스페셜이지. 넌 이 곡이 쉬워 보여?
그의 말이 맞았다. 리스트의 연주회용 연습곡 3번 탄식은 나지막하고 우아해서 다른 곡들에 비해 듣기에 강렬함이 부족할 뿐이지, 연주 난이도는 굉장히 높았다. 이렇게 여유롭게 갑자기 꺼내서 연주할 수 있는 곡이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
탄식처럼 말랑말랑한 곡이 아니라 조금 더 악마적이고 강렬한 곡으로 날 때릴 수도 있지 않았느냐고 물어야 했는데, 난 그렇게 하지 못했다.
탄식은 그 어떤 기교적인 곡들보다 효과적으로 날 무장해제시켰다.
내겐 이미 에르네스트의 배려를 다시 한 번 걷어 찰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못됐어요, 정말.”
- 와, 나 너한테 그런 말 들어 보는 건 처음인 것 같은데.
에르네스트는 킬킬거렸다. 기분이 이상하다.
한참을 웃던 에르네스트는 숨을 고르더니 말했다.
- 어쨌든, 못됐다고 생각한다면 부담 없이 더 할 수 있겠군.
“예……?”
- 스페셜이라고 했잖아? 설마 한 곡으로 끝나리라 생각한 거야?
무슨 소리인가요?
멍하니 듣는 사이 에르네스트는 제멋대로 말하고 있었다.
- 네 차례는 다 끝나고 다음에 줄게. 그러니까 지금은 그냥 들어.
“자, 잠깐만요!”
그를 급히 불렀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이미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다시 연주를 시작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난 늦기 전에 녹음 버튼을 눌렀고, 누르자마자 바로 연주가 시작됐다.
리스트의 위안consolation 6개의 곡 중 3번째 곡.
이번에도 에르네스트는 부드럽게 곡을 연다.
얼핏 베토벤과 같은 고전의 화성이 느껴지는, 단조로울 수도 있는 곡조이지만 에르네스트는 근사하게 그것을 펼쳐 냈다.
실력도 인격도 의젓해진 그의 피아노 소리가 감미롭게 울렸다. 코앞에서 듣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조금 불만이지만, 장점도 있었다.
만약 그의 앞이었다면 난 지금처럼 편안하게 이 음악에 턱까지 몸을 담그고 있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화로 듣는 연주는 미묘했다. 결코 음질이 좋다고 할 순 없었고 전해져 오는 감정은 많이 퇴색되어 있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의 옆에서 들었다면 난 결코 경계를 늦추지 않았을 테고, 무표정을 연기하느라 정신없었을 게 분명하다는 거다. 그렇게 경계하는 마음은 귀에도 분명한 영향을 준다.
지금처럼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장점은 마음을 조금 더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
한결 풀어진 마음으로, 양손으로 스마트폰을 귀에 붙인 채 눈을 감고 감상에 임했다.
표제 그대로 해석해도 상관없을 정도로 밝은 영적 위안을 느낀다. 무엇에 대한 위안인지는 모르겠지만, 마법과도 같은 이 피아노 소리는 마음 속 깊은 곳까지 들어와 어두운 사념을 조금 걷어내 주었다.
그간 드리워져 있던 우울한 음영이나 허망함 등이 옅어져 간다.
무의미하게 강렬하고 기교적인 클라이맥스 없이, 그저 유려하고 아름답게 음악은 마무리되었다.
“…….”
에르네스트의 리스트 스페셜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막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에르네스트는 다음 곡을 시작했다.
불공평하다. 난 한 곡만 연주했을 뿐인데 에르네스트는 연달아 세 곡째 연주를 시작하고 있다. 대결이라기엔 너무 불공평했다.
하지만 난 그런 그를 막지 않았다. 막지 못했다.
세 곡이 아니라 열 곡을 연주한다 하더라도 아무 말도 못 할 것이다.
에르네스트의 세 번째 곡은 리스트의 녹턴 3곡 중 3번째 곡이다.
흔히 알려져 있는 이름은 사랑의 꿈liebestraume.
“…….”
돌체 칸탄도dolce cantando. 달콤하게 노래하는 명료한 선율이 귓가를 간질인다. 노래하듯 연주하는 것은 모든 연주자들의 꿈이지만, 에르네스트는 그 어디에 이런 서정성을 지니고 있었을까 궁금해질 정도로, 감춰 두고 있던 부드러움을 아낌없이 드러내었다.
전화의 음질 때문에 그 전부를 느낄 순 없었지만, 사랑의 노래는 일부분이라도 분명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
보통 자주 연주되는 이 3번째 곡을 사랑의 꿈이라고만 부르지만 사실 그건 리스트의 녹턴 세 곡 모두를 일컫는 제목일 뿐이다. 각 곡엔 이름이 따로 붙어 있었다.
엄밀히 말해 사랑의 꿈 3번째 곡. 이 곡의 제목은 사랑하라, 사랑할 수 있는 한O lieb, so lang du lieben kannst 이었다.
유럽 전역에 광풍을 불러일으킨 인기만큼 애인도 많았던 리스트가 정의하는 사랑이 무엇인진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음악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
본래 리스트가 가곡으로 작곡했었기 때문일까. 주 선율은 사람의 목소리를 닮아 있었다. 그 목소리를 분명하게 끌어내면서 동시에 복잡한 다성부 연주를 해내야 했다.
피아노의 기린아 에르네스트가 보여 주는 기예는 여기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자칫하면 잘 알아들을 수 없게 뭉쳐서 느끼하고 질척거리게 될 수도 있는 곡이지만, 에르네스트는 절제된 페달링과 터치로 깔끔하게 곡을 연주해 나갔다.
난 나도 모르게 음악에 취해서 마음이 호소하는 대로 노래를 할 뻔했다가, 가까스로 입을 다물었다. 지금 이 모든 것은 녹음되고 있었다. 준비되지도 않은 내 노래를 붙일 정도로 자신이 있진 않다. 난 마음속으로만 노래했다.
반복되는 주 선율은 변주를 거쳐서 심화되었다. 분명히 같은 템포이지만, 심장은 더욱 빠르고 거칠게 뛴다.
강하게 치솟는 옥타브와 화음도, 에르네스트는 거칠지 않고 선명하게 연주했다. 피아노 소리는 한순간 맞물리다가 다시 풀어지며 차분하게 내려앉는다.
마지막으로 새소리처럼 지저귀던 곡은 상냥하게 끝을 맺었다.
“…….”
난 마지막까지 여운을 느끼다가 녹음 버튼을 눌러 녹음을 끝냈다.
잠시 후, 에르네스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 자, 리스트 스페셜은 여기까지야.
치사했다.
에르네스트는 리스트의 연주회용 연습곡 3번, 위안 3번, 사랑의 꿈 3번 이 세 가지 곡을 연달아 연주함으로서 정말 쉴 틈도 안 주고 날 몰아붙였다. 정말 치사해도 너무 치사한…….
“…….”
- 타티아나?
그가 다시 날 부른다. 난 뭐라 말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내가 에르네스트를 치사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연달아 세 곡이나 연주해서인지, 아니면 날 따뜻하게 위로하는 듯한 음악들을 선보여서인지 잘 모르겠다. 어느 쪽을 따지고 들어야 할지 정리가 안 된다.
결국 아무것도 못 따졌다.
에르네스트가 말했다. 약간 곤란해하는 어조다.
- 음, 내가 너무 막무가내였나?
“…….”
- 좋아. 공정하게 그럼 이제 네가 두 곡을 연주할 차례…….
“아뇨.”
그럴 필요는 없었다.
“제가 졌어요.”
난 담백하게 말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부터 내가 극도의 기교를 필요로 하는 곡들을 열 곡, 아니 백 곡을 연주한다 한들 에르네스트를 이겼다고 생각하긴 어려울 것이다. 이미 난 완벽하게 졌다.
“그런 대결이었죠?”
- 그렇긴 한데…….
조금 마뜩잖아하는 목소리. 그는 이대로 대결을 마무리 짓기 섭섭한 모양이다. 내가 두 곡 더 연주하고 깔끔하게 정리할 수도 있었지만, 이쯤에서 깨끗하게 항복하는 것 또한 예의였다.
“오해하진 말아요. 내기거리로 걸린 것이 없어서 순순히 시인한 건 아니니깐요.”
- 알아. 네가 그럴 사람이 아니란 것쯤은.
에르네스트는 짧게 웃더니 말했다.
- 내기거리는 다음에 이야기하도록 하자.
“다음요?”
- 그래 다음. 뭘 그렇게 이상하다는 듯 말해? 우린 아직 아무것도 결정 나지 않았어.
의아해하는 내 물음에 그가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 상대 전적이 일대일이라면 일단 한 번은 더 해야 할 것 아냐?
“음…….”
에르네스트는 나와의 전적을 차곡차곡 쌓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 말도 맞네요.”
- 그렇지? 뺄 생각 하지 마.
“하……. 아하하. 집요하세요, 정말.”
에르네스트는 끝까지 날 연주자 라이벌로 여겨 주고 있었다.
그와 대결했던 것이 두 번. 앞으로 한 번 더 한다면 세 번으로 끝날 것 같진 않다. 다섯 번, 일곱 번, 아홉 번. 몇 번을 해도 난 그와 대결에 임해야 할 것 같다는 직감을 느꼈다.
물론 그것도 에르네스트가 날 경쟁상대로 인식해 주고, 받아 주어야 가능해지는 일이다. 내가 그와 피아노로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으로 뒤쳐진다면 전적이라는 것이 무의미해질 테니까.
난 그의 라이벌로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미래의 일이야 어쨌든 당장 지금은, 꽤 즐거운 기분이다.
- 어쨌든…….
에르네스트가 피식 웃었다.
- 이렇게 전화상으로 잘 될지 몰랐는데, 잘 된 것 같네. 신기하게.
“예상보다 음질이 듣기에 괜찮았어요.”
- 그래? 다행이네.
“예. 에르네스트가 연주한 리스트의 곡들…….”
난 그 곡들을 떠올리고, 200년 전 피아노 한 대로 유럽 전역에 폭풍을 몰고 온 천재 음악가를 떠올린다.
“세 곡 모두 리스트가 바이마르에서 카롤리네 공주와 동거할 때 작곡된 곡이죠. 카롤리네 공주가 리스트에게 왜 빠졌는지 알 것 같네요.”
- 뭐, 뭐……. 뭐?
“왜 그러시나요? 모두 아는 사실이지 않…….”
새삼스럽게 왜 놀라나 하던 나는,
“아…….”
내가 무슨 소리를 한 건지 뒤늦게 깨달았다.
“……잠시만요.”
- …….
“저기…… 그냥 못 들은 것으로 해 주세요. 제가 잘못 말했어요.”
- 그, 그래?
“그래요.”
에르네스트는 정말 당황해하고 있다. 난 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연주에 대한 평을 하는 건 좋다. 하지만 하필이면 이런 식으로 평을 해야 했을까. 나도 모르게 나온 말실수이긴 하지만, 말실수를 해도 이건 정말 심각한 실수였다.
난 더듬거리다가 결국 말했다.
“그, 끊을게요.”
- 타티아나!
도저히 전화를 못 들고 있겠어서 내려놓으려는데 다급하게 에르네스트가 날 불렀다.
- 내일 학교에서 봐.
“…….”
- 음악사 숙제할 책 꼭 빌려줘야 해. 알겠지?
무슨 일이 있어도 무조건 직접 와서 달라는 목소리다. 난 나지막이 대답했다.
“알았어요.”
전화를 끊고,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학교 가기 싫은 기분이 드는 것은 처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