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화
사샤는 물 한 컵만 가져다 달라는 형의 부탁에 따라 부엌으로 나왔다. 평소 같았으면 형이 가져다 먹으라고 반항했겠지만, 오늘따라 사샤는 형의 부탁이 들어주고 싶었다.
사샤는 몇 분 전을 떠올렸다.
처음 에르네스트가 전화기를 들었을 때만 하더라도 조금 못미더웠다.
사샤가 느끼기에 타티아나는 본래 음악을 제외한 모든 부분에서 강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최근엔 강한 척조차 못할 정도로 불안하고 위태로운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옆에서 지켜봤을 에르네스트는 그걸 잘 알고 있을 텐데도 꿋꿋하게 음악으로만 타티아나를 상대하려 했다.
한참이나 어린 사샤가 보기에도 그건 어이가 없었다.
타티아나가 약한 부분을 보이는 부분은 일상적인 부분들뿐이었다. 그녀는 음악에까지 약함이 전염되려 하자 더더욱 경계 태세를 공고히 하고 있는 상태였다. 연습실에 다른 사람을 전혀 들이지 않을 정도로.
그 정도의 방비를 음악으로 정면 돌파 하려는 것은 바보 같은 짓으로 보였다. 사샤가 본능적으로 느끼기에 타티아나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음악이 아니었다. 때문에 사샤는 에르네스트가 타티아나와 잡담이라도 나누고, 운이 좋다면 같이 저녁 식사라도 하길 바랐다.
하지만 이 피아노밖에 모르는 형이 꺼내 든 카드는 통화 너머로 연주를 주고받는 것이었다.
타티아나는 잘 걸렸다는 듯 받아들였고,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로 차갑게 거부하는 음악을 쏟아내었다.
사샤는 두려움을 느꼈다.
음악 자체의 강렬함에, 그리고 혹시 도울 수 있겠느냐고 말한 에르네스트에게 이런 음악으로 거부를 표한 타티아나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을지에.
늘 성실하고 착하게만 보이던 타티아나는 섬뜩할 정도의 냉정함 또한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사샤가 아는 자존심 강한 에르네스트는 분명 화를 냈어야 했다. 그의 형은 음악가로서 무시당하는 것을 죽는 것보다 싫어했고,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몇 번이고 싸우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잔인한 거절 의사에 정면으로 얻어맞고도 에르네스트는 눈썹을 조금 찡그렸을 뿐이었다.
그리고 얼어붙어 있는 사샤를 내려다보고는, 입가에 손가락을 대며 쉿 하고 소리를 냈다.
타티아나의 연주에서 무엇을 느꼈든 아무 말도 말란 뜻이었다.
에르네스트는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전화를 들고는 명랑하게 타티아나와 대화했다. 마치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바보처럼 그렇게 떠들썩하게 이야기하다가, 사샤를 바꿔 주기도 했다.
사샤는 그의 형이 하는 연극에 장단을 맞춰 줘야 했다. 모든 것은 서로의 표정이 보이지 않은 덕분이었다.
보이진 않지만 분위기가 밝게 이어지자 타티아나는 당혹스러워하는 것 같았고, 에르네스트는 자연스럽게 대결이라는 말을 꺼내며 자신의 차례를 가져왔다.
사샤는 그 능숙함에 조금 놀랐다. 하지만 저렇게 마음의 문을 단단하게 걸어 잠근 타티아나에게 음악으로 접근하는 것은 힘드리라 생각했다. 특히 프란츠 리스트의 기교적인 음악으로는 그 겉면을 두드리는 데에 그치고 말 것이다.
어린 사샤의 음악적 깊이는 거기까지였다.
프란츠 리스트는 기교파 작곡가고, 음악성으로는 다른 작곡가에 비해 뒤떨어진다. 그것이 사샤가 활자로 배운 리스트였다. 아직 사샤는 그렇게밖에 리스트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사샤는 그의 형이 정말 리스트의 음악으로 마음을 휘어잡아 버리는 것을 보며 숨을 멎는 듯한 놀라움을 느꼈다.
강철 같은 비르투오시티로 꿰뚫는 것이 아닌, 부드러운 바람처럼 스미는 음악이었다.
연주가 끝나자 입을 뗀 타티아나는 엉망으로 목소리를 떨고 있었다.
일부러 감동을 거부하는 듯 쌀쌀맞은 어투를 하려 하지만, 연기자가 아닌 이상에야 쉽게 컨트롤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그대로 타티아나는 대결에서도 졌다고 인정했다.
그리고 뒤이어 흘러나온 타티아나의 연주평. 사샤는 그것을 듣자마자 말을 버벅대던 형을 떠올리며 웃음 지었다.
“형. 여기.”
“어……. 고마워.”
사샤가 물컵을 가지고 방에 다시 들어가자 팔을 늘어뜨리고 멍하니 스마트폰을 내려다보고 있던 에르네스트가 고맙다고 말하며 컵을 받았다. 그러고는 그대로 원샷했다. 풀려 있던 눈가에 빛이 돌아왔다.
“형은 진짜 대단하네.”
“뭐? 뭘.”
“결국 끝까지 음악으로 타티아나 누나의 마음을 얻은 거잖아.”
“뭐, 뭐라고?”
에르네스트는 들고 있던 물컵을 떨어뜨렸다. 원샷으로 잔을 비웠기에 망정이지 방바닥이 젖을 뻔했다. 사샤는 의아해했다.
고개를 기울이며 에르네스트에게 물었다.
“왜 그래?”
“어린 게 못 하는 말이 없어. 혼날래?”
“형이야말로 나이도 많으면서 왜 그래?”
“아니, 이게 진짜…….”
주변 친구들 중에는 대여섯 살만 되어도 커서 결혼하자고 약속을 나누는 아이들도 있다. 열다섯 살이면 대체 뭐가 안 된다는 건지 사샤는 이해가 안 갔다.
그리고 상황 파악을 잘못한 것 같진 않다. 타티아나가 남긴 연주평은 그저 그런 삭막한 평이 아니었다. 리스트에 대해 잘 모르는 사샤가 듣기에도 상당히 의미심장했다.
“공주라도 반하겠다잖아? 그게 그 말 아니야?”
“아니라니까. 그냥 일화야 일화. 비약하지 마.”
“비약이 뭐야?”
“그건……. 아니 어쨌든, 오늘 일은 전화를 통한 조금 특이한 대결이었을 뿐이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런가……?”
사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르네스트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만……. 그럼 왜 그렇게 당황해서 물까지 떠 달라고 했어?
사샤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런데 사실 생각해 보면 타티아나 누나는 공주라 해도 괜찮을 것 같고. 아빠도 전에 그런 말을 했…….”
“사샤. 다시 한 번 말할게.”
별것 아닌 일로 대충 치우려던 에르네스트가 별안간 사샤의 말을 끊었다.
“네가 뭘 듣고, 그 애를 어떻게 보는진 모르겠는데.”
사샤가 조용히 듣는 사이 에르네스트가 단호하게 말했다.
“타티아나는 공주 같은 게 아냐.”
“그럼 뭔데?”
“음악가.”
설마 했던 대답이다. 사샤는 조금 어이없었다.
“재미없어. 형 이런 사람이었어?”
“이런 사람이 뭔데?”
사샤는 태연하게 말하는 에르네스트를 보며 싸늘한 공포를 느낀다.
그의 형이 학교에서 얼마나 인기가 많고 따르는 여학생들이 많은지에 대해선 몇 년 전부터도 알고 있었다. 그사이 한 명도 사귀지 않은 건 조금 이상했지만, 설마하니 형이…….
그 시선에서 설명해달라는 무언의 압박을 느꼈는지 에르네스트가 대답했다.
“나도 처음엔 그 애에 대해 너처럼 생각하기도 했어. 아버지가 그리 생각했듯, 나도 비슷했으니까.”
그의 아버지 스테판 니콜라예비치는 그야말로 타티아나를 공주처럼 생각한다. 대재벌 베르체노프의 하나뿐인 영애. 게다가 혈통마저 소련 이전 러시아 제국의 귀족 혈통이다. 소련 시절 거의 모든 귀족들이 숙청당하고 사라진 것을 생각한다면 베르체노프의 존재는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젓는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어. 그건 너무 아까운 일이지.”
“아깝다고?”
“네가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어.”
“이해시켜 줘.”
“됐어. 어차피 아버지도 이해 못 하는 거야. 이해시킬 생각도 없고. 어쨌든 난 아버지가 뭐라 한들 내 마음대로 할 거야. 그러니 넌 아버지에게 들은 말에 신경 쓸 필요 없어. 나한테 뭐라고 할 필요도 없고.”
“전화는 내가 시켜서 했잖아.”
“그야……. 내 맘이지. 뭐. 어쩔래.”
에르네스트는 더듬거리다가 툭 내뱉었다.
사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예 마음이 없는 것 같진 않다. 마음이 없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형은 그것을 직시하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동료 음악가로서 그리고 친구로서 타티아나를 대하고 싶어 하는 듯하다.
이해가 안 간다. 사귀면 어떻단 말인가? 연인과는 음악적 교류를 못 하란 법도 없고.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
“형 진짜 이상해.”
“네가 그 애에 대해 잘 몰라서 그래.”
“형은 잘 알아?”
“나도 잘 모르지만.”
에르네스트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인상을 썼다. 하지만 곧 말했다.
“너나 아버지처럼 쉽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건 알아.”
“쉽게?”
“애초에 그 애는 그리 호락호락하지도 않고.”
“세상에 타티아나 누나만큼 호락호락한 사람도 없을 것 같은데.”
“네가 잘 몰라서 그래.”
두 번째다. 사샤는 조금 기분 나쁘다는 듯 눈을 흘겼다. 타티아나가 캔 뚜껑을 따는 데에 힘겨워할 정도로 힘이 없다는 것도 몰랐으면서 이제 와서 무슨 잘난 척을 해도 설득력이 있을 리가 없다.
사샤가 보기에 타티아나는 세상에서 가장 호락호락한 사람 중 하나였다. 큰 소리 내는 일도 한 번 없었고 언제나 상냥했다.
타티아나가 자신에겐 조금 더 특별히 자상하다는 것을 느끼곤 했지만, 다른 사람이라고 해서 딱히 그 태도가 바뀌는 일은 없었다. 늘 친절한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옆에 항상 붙어 다니는 아나스타샤와 비교하면 그 차이는 더더욱 두드러졌다.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가 대책 없이 무방비한 태도로 다닐 때마다 굉장히 깐깐하게 관리하려 했다. 어린 사샤의 눈에도 그게 보였다.
사샤가 아무리 생각해도 타티아나만큼 착한 사람은 드물 것 같았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짓궂게 말했다.
“아까 들었잖아?”
“…….”
사샤가 입을 합 다물었다.
평소 보이던 모습처럼 타티아나가 다정한 사람이라면 손을 내민 에르네스트에게 그렇게 폭력적인 음악을 선사하진 않았을 것이다. 말로 거절하거나 적당한 음악을 연주하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결코 봐주지 않고 가열히 에르네스트를 공격했다.
무자비하고 사납기 그지없었다.
사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함께 연습실에 있었을 때도 나긋나긋한 음악만을 하며 부드럽게 웃어 주었던 타티아나가, 그런 어둡고 공포스러운 면모를 지니고 있을 줄은 미처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에르네스트의 말대로 사샤는 타티아나에 대해 반만 알고 있다.
타티아나가 마냥 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음악가인 그녀의 본모습을 못 본 사람뿐이다.
다시금 그 연주를 떠올렸는지 질린 듯한 표정을 하는 사샤를 보며 에르네스트가 피식 웃었다. 그는 타티아나의 그런 모습에 대해 알고도 그리 충격적으로 느끼진 않는 것 같았다.
“뭐, 그렇다고 무서워할 필요는 없어. 근본적으로 타티아나는 착한 애니까.”
“무섭진 않아.”
사샤가 작게 말했다.
타티아나의 악마적 암시는 분명 공포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그 이면을 살짝 들춰 보면 그녀가 얼마나 외로워해야 했는지 느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사샤는 친구에게 그런 음악을 연주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할 순 없지만, 피부로나마 받아들이는 바가 없지 않았다.
사샤는 문득 에르네스트를 바라봤다.
형도 느꼈겠지? 자신도 느낀 것을 훨씬 더 성숙한 에르네스트가 느끼지 못했을 리 없다.
“형도 무서워할 필요는 없어.”
“뭐? 내가? 뭘?”
“그냥.”
“이상한 소릴 하네.”
에르네스트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투덜거렸다. 사샤는 생긋 웃으며 이어 말했다.
“어쨌든 형. 브람스는 안 돼.”
“뭐가?”
“아빠가 기절할 거야.”
“브람스가 무슨 말인데? 아니, 사샤 너 정말 타티아나한테 뭐 옮았어? 아까부터 왜 자꾸 못 알아들을 소릴 해?”
에르네스트는 곧바로 떠올리지 못하는 모양이지만 사샤는 학교에서 배웠던 브람스에 대한 것을 떠올렸다. 브람스는 정신적 지주였던 슈만과 그의 아내를 평생 동경하며 홀로 살아간 음악가였다.
그건 절대 안 된다. 사샤는 굳게 주먹을 쥐었다.
사샤는 타티아나도 무척이나 좋아했다. 정말 가족이 되어 준다면 좋겠단 생각도 했다. 이 바보 같은 형을 도와 줄 필요를 느낀다.
한참이나 어린 동생의 깜찍한 생각은 꿈에도 모르고 에르네스트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목을 이리저리 풀며 일어났다.
“아, 배고프네. 배고프지, 사샤.”
“응.”
“어머니는 늦을 것 같고……. 요리나 해 볼까.”
“어? 형이?”
“해 보지 뭐.”
에르네스트는 어머니가 시키면 주방에 나가 감자를 깎곤 했지만 실제 요리에 나서는 일은 절대 없었다. 사샤는 그런 형이 갑자기 요리를 하겠다고 하자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건지 궁금해졌다.
동시에 약간 기대되기도 했다. 사샤는 어머니의 요리를 좋아했지만 가끔은 형이 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그 기대는 30분 후 모든 것이 귀찮아진 에르네스트가 다 때려치우고 감자나 쪄 먹자고 하자 커다란 실망으로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