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85화 (185/1,277)

##  185화

에르네스트와의 전화를 끊고, 한동안 머리를 감싸 쥐고 있던 나는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아.”

적절하지 못한 평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당황할 게 아니라 더더욱 모른 척 시치미를 떼고 뻔뻔하게 나갔어야 했다.

에르네스트가 리스트의 생애에 대해 모를 리도 없고, 내가 별다른 해석의 여지를 주지 않고 아무 생각 없다는 듯 당당하게 설명했다면 아무 문제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말실수를 깨닫자마자 바보같이 멈춰버렸고, 더듬거리다가 전화를 끊어버렸다.

아무리 그의 연주가 감동적이었다고 해도, 이건 정말 나답지 않은 일이었다.

“…….”

난 피아노라는 망치만을 도구로 들고 세상 모든 문제를 못으로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인정했고, 받아들였다. 그래서 친구들와의 일도 망치로 해결하려 들었다.

그런데 세상에 망치를 든 사람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에르네스트 역시 그런 사람 중 하나인 것이다.

그는 말로 무언가 의사전달을 하는 대신 피아노 곡을 세 곡이나 연달아 연주함으로써 날 위로했다.

선곡도, 연주도, 서로 얼굴이 보이지 않는 전화상이라는 상황도. 그 모든 것은 날 아무것도 못 하도록 만들었고.

“하…….”

난 대체 뭘 하고 싶은 걸까.

아나스타샤와 이야기를 하면서 다시 한 번, 그 후에도 몇 번이고 난 마음을 다잡았다. 최악의 일이 되지 않도록, 신중히 모두를 대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의 연주를 듣곤 이 모양이다.

정말이지 난 스스로를 믿을 수가 없다. 이전에도 믿지 않았고 항상 의심하고 경계했지만, 최근 들어선 더더욱 어렵다.

“…….”

피아노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손을 들어 건반을 꾹 눌렀다. 음이 퍼져나간다. 이 소리에 나는 너무 약하다.

오늘 일도 느닷없는 기습에 놀랐을 뿐이다. 아나스타샤의 집에서 갑자기 안겼을 때처럼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이 당했을 뿐이다. 에르네스트의 음악은 아나스타샤의 품만큼이나 따뜻하고 포근해서, 저항할 수 없었을 뿐이다.

조금 나쁘게 말하자면 이건 비겁한 기습이었다. 연주자끼리의 대결에 기습 같은 게 어디 있냐는 것이 내 평소 지론이긴 했지만, 아무튼 비겁했다. 치사했다. 반칙이었다.

모든 건 불가항력이었고 지금부터라도 내가 제대로 하면 될 일이다.

“흥…….”

코웃음을 치며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뭘 연주해야 할지 모르겠다. 리스트 스페셜? 좋다. 내가 하면 더 잘…….

나도 모르게 사랑의 꿈을 연주하려다가 손을 멈췄다. 정말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결국 난 한 곡도 연주하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 있다가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서야 연습실에서 나왔다.

함께 식사를 하던 아버지는 날 보며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느냐며 이상한 말씀을 하셨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다. 지금 내 앞에 쌓여 있는 골칫덩이들 때문에 미칠 지경인데, 아버지가 보기엔 내가 즐거워하는 것처럼 보인단 말인가?

그렇다고 해서 딸 된 도리로 아버지에게 좋은 일은커녕 우울하다고 할 수도 없었기에, 난 웃으면서 그냥 오늘따라 컨디션이 좋다고만 대충 얼버무렸다. 아버지는 그 또한 좋은 일이라고 기뻐해 주셨지만 난 속이 쓰렸다.

연습실로 돌아온 나는 복잡한 머릿속에서 바흐를 찾아냈다. 표제도 주제도 순수한 바흐의 음악이 필요했다. 난 손에 새겨져 있는 그대로 바흐의 평균율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완벽하게 똑같이 균등한 2개의 성부. 총 4개의 성부를 연주해 나간다. 음악이 왜 수학인지, 사람은 왜 정돈된 수로부터 아름다움을 느끼는지 그에 대한 이러저런 이론들이 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아름다운 수학적 원리에 기초를 둔 이 음계의 조화는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준다.

그렇게 무념무상으로 몇 시간이나 연습한 후에 나는 방으로 돌아갔다.

밤에도 할 것은 많았다. 음악사 숙제는 끝내 놓았지만 과학 숙제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러시아 문학사 예습도 조금 해 둬야 한다.

내 러시아어 실력은 굉장히 나아져서 이젠 그리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였지만, 아직도 교과서 같은 것을 읽다 보면 모르는 단어가 종종 있었다. 한번 슥 읽고 단어를 찾아 두는 건 필수적으로 해야 할 예습이었다.

그러다 보면 2시간 정도는 금방 지나갔다.

“…….”

자야 할 시간이다.

난 침대를 바라보며 긴장을 느꼈다. 근래 나를 괴롭히던 추위에 벌써 목뒤가 서늘하다.

하지만 내가 무엇을 느끼든 상관없이 어떻게든 자야 했다. 난 옷을 벗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뜬눈으로 멍하니 있다 보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쓸데없는 생각, 불안한 생각.

그중에서도 가장 날 괴롭히는 건 내일 학교에 갈 생각이었다. 정확하게는 에르네스트가 문제다. 어떻게 보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오늘 왜 전화를 그렇게 끊어 버린 거지. 내 스스로가 원망스럽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학교를 정말 빠져버리는 것은 더더욱 바보 같은 짓이었다.

“하…….”

담백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제 와서 늦었을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선택의 여지가 없다. 에르네스트는 끝까지 대결 전적 운운하면서 날 라이벌로 여겨 주고 있었으니 나 역시 그에 부응하면 될 일이다.

그냥 전화상으로 대결을 했고, 졌을 뿐.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게 되새겼다.

“…….”

잠이 안 온다.

이대로 몇 시간이고 있다간 내일 컨디션에 지장이 생길 텐데, 걱정이다. 이게 다 에르네스트 때문이다.

그대로 얼마간 있다가 머리맡에 둔 스마트폰을 들었다. 화면을 켜고 잠금을 해제한다. 그리고 녹음 파일을 재생할 수 있는 앱을 실행했다.

두 개의 파일이 보인다. 제목도 딱히 없이 날짜와 시간만이 기록되어 있는 통화 녹음 파일이었다.

난 그중 하나를 실행시켰다.

리스트의 위안 3번이 스마트폰에서 흘러나왔다. 앱에서 보이는 연주자는 Unknown artist라고 표시되어 있다.

“잘하네…….”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섬세하고, 아름답다. 확실히 잘 연주한다. 스마트폰으로도 이 정도면 실황으로 들으면 얼마나 대단할지 기대되기까지 한다.

이 연주자는 정말 대단한 연주자다.

대단해.

위안이 지나가고 곧바로 사랑의 꿈 3번이 재생된다.

그리 좋지 못한 음질과 스마트폰의 작은 스피커로 재생되는 음악은 귀로 듣기에 그리 훌륭하다고 할 순 없었지만 마음으로 듣기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우아하게 밤하늘에 깔리는 듯한 쇼팽의 녹턴과 달리 리스트의 녹턴, 사랑의 꿈은 자장가처럼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준다.

난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게, 그렇게 잠에 들었다.

***

8학년 피아노과의 문을 열기 직전 다시 생각했다. 평상심. 평상심이다. 언제나처럼 평범하게 대하면 괜찮을 것이다.

난 문을 열고 들어섰다. 피아노과 8학년은 13명이었는데, 오늘은 내가 조금 늦게 왔기 때문인지 10명 가까이 와 있었다.

그중에서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 발렌티나. 이렇게 평소 뭉치는 아이들이 창가 쪽에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 쪽을 돌아봤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안녕. 타티아나.”

“좋은 아침.”

내가 인사하자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가 받아 주었다. 그리고 에르네스트가 피식 웃었다.

“왔어?”

“에르네스트.”

어제 말실수 이후 계속 의식했던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정도로 에르네스트는 아무렇지도 않게 한 손을 들어 보이며 인사해 왔다. 평소처럼 자신감 넘치고 밝은 모습이다.

“얼굴이 좋아 보이네. 잘 잤어?”

“덕분이에요.”

“덕분?”

“…….”

나 왜 이러지 정말.

대답하지 않고 난 가방에서 챙겨 온 책을 꺼내 에르네스트에게 내밀었다.

“에르네스트. 자, 여기요. 말씀하셨던 책.”

“책……?”

“음악사 숙제하실 때 쓰겠다고 하셨잖아요?”

“아, 아. 그래. 응. 고마워.”

에르네스트는 자기가 빌려 달라고 전화까지 했으면서 까맣게 까먹고 있던 사람처럼 더듬거리며 책을 받았다. 뭔가 묘한 표정이다.

옆에 있던 아나스타샤가 지켜보더니 불쑥 물었다.

“뭐야? 책?”

“예. 에르네스트가 음악사 숙제에 참고하도록 빌려 달라고 하셔서요.”

“언제?”

어제 저녁에 전화로 그랬다고 대답하려는데, 에르네스트가 내 대답을 낚아챘다.

“내가 어제 전화해서 빌려 달라고 했는데?”

“전화로?”

“어.”

“책만?”

“다른 용건이 있어?”

에르네스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책을 흔들거렸다. 그러면서 눈길이 내 쪽에 와 닿는다. 에르네스트는 어제 있었던 나와의 연주 대결을 다른 아이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듯했다. 거기엔 나도 동의했으므로 나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걸 가만히 보던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돌려 내 쪽을 힐긋 바라봤다. 예리한 통찰력이 번뜩인다.

아나스타샤가 다시 에르네스트에게 물었다.

“어제 타티아나가 나랑 통화하고 바로 다음에 전화했었나 보네?”

“뭐?”

“아니, 타티아나랑 잠깐 통화한 다음에 까먹은 게 있어서 다시 전화해 봤는데 통화 중이라는 신호만 오더라고.”

에르네스트의 전화는 아나스타샤의 전화가 끊어지자마자 왔다. 그리고 에르네스트와 통화를 하는 사이 아나스타샤는 내게 한 번 더 전화를 걸었던 모양이다.

에르네스트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래. 시간이 겹쳤나 보지.”

“그런데 책 빌려 달란 이야기를 20분도 넘게 했어?”

“……어?”

여유로운 태도로 대답하던 에르네스트의 얼굴이 딱 굳었다.

아나스타샤가 마치 형사처럼 삐딱하게 고개를 비틀며 말했다.

“내가 두어 번 걸어 봤거든.”

“…….”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아나스타샤는 한쪽으로 꼬고 앉아 있던 다리를 반대로 꼬더니 히죽 웃으며 말했다.

“아니, 뭐 상관은 없어. 그냥 몇 번 걸어봤는데 통화 중이어서. 나중에 말해도 되겠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별것 아닌 일이니까. 나중에 타티아나 너랑 신아르바트 쪽 멀티센터 가서 뭘 할지에 대한 거였거든. 가서 정해도 상관없고……. 그냥 정할 것도 없고 사실. 하루 종일 돌면서 다 돌아보면 되잖아?”

뭔가 두서없이 길어지는 듯하지만 어쨌건 어제 전화상으로 나누었던 멀티센터에 놀러 가기로 한 이야기의 연장인 것 같았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스타샤가 데리고 가겠다면 어디라도 상관없었다.

아나스타샤는 그 정도로 이야기를 정리하려는 듯했다.

하지만 발렌티나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난 궁금한데. 무슨 이야기 했어?”

난 발렌티나가 에르네스트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때문에 여러모로 발렌티나에게 할 말이 많았지만, 동시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우리는 여전히 어려운 관계였다.

에르네스트는 내 쪽을 보더니 허락을 구한다. 말해도 되겠냔 뜻이었다. 어차피 이제 와서 이 눈치 빠른 애들을 속여 넘길 수도 없었다. 난 마음대로 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어제 전화상으로 대결을 했어.”

“대결? 말싸움을 했다고?”

“아니. 피아노로.”

“아, 피아노 대결? 그걸 전화로 했다고?”

“어.”

“들리긴 해?”

발렌티나는 전화상으로 피아노 대결을 했다는 말이 조금 어이없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나 역시 막상 해 보기 전엔 그렇게 생각했으니 이해가 간다.

아나스타샤는 다른 의미로 어이없다는 듯 내게 물었다.

“타티아나. 당분간 피아노 연습 혼자 하겠다고 했잖아?”

“…….”

무슨 말을 해도 변명이 될 것 같아서 말을 고르고 있는데, 에르네스트가 대신 대답했다.

“대결이 연습이야? 실전이지.”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인데. 연습이 싫다면 실전을 하자 이거지.”

“그래서 싫어하는 애한테 대결을 하자고 했다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에르네스트에게 향했다. 아나스타샤는 명백히 오해하고 있었다. 에르네스트가 날 억지로 대결에 임하게 만들었다고.

이러한 오해에서 벗어나는 일은 간단했다. 그저 내게 물어보면 된다. 싫어했냐고.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내게 싫어했어? 라고 묻는 대신 혼자 뒤집어썼다.

“그래, 그랬어.”

“왜?”

“전적을 일대일로 만들어 놔야 했으니까.”

“너 또라이구나?”

“칭찬 고마워.”

“너 진짜…….”

아나스타샤는 비난조로 말하더니 맥이 풀린 듯 중얼거렸다.

여기서 내가 끼어들기도 애매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원했다고 말해도 이상했고, 사실 에르네스트가 싫다고 거부하는 내게 억지를 쓴 것도 맞았으니까. 하지만 확실히 지금은 에르네스트가 고마웠다.

순간, 발렌티나가 엉뚱한 부분에 집중했다.

“에르네스트, 녹음은? 했어? 들어 보고 싶은데.”

“뭐?”

에르네스트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대뜸 말했다.

“내가 미쳤어?”

전 미쳤어요…….

너무 단호하게 말하는 에르네스트를 보며 난 입을 꾹 다물었다. 발렌티나는 포기하지 않고 연이어 물었다. 에르네스트가 대결에 임할 때 연주했던 곡을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지금 들어 보니까 타티아나와 대결해서 이긴 것 같은데. 전화로 했다며? 그럼 통화 녹음으로 녹음할 수 있었을 것 아냐?”

“그걸 왜 녹음해?”

“뭐 어때서? 나라면 녹음했을 텐데. 어쨌든 이긴 거잖아?”

“안 했어.”

에르네스트는 그런 상상도 못할 소리는 하지 말라는 듯 딱 부러지는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

더 이상 물어봐야 소용없겠다고 여겼는지 발렌티나는 음, 하고 침음성을 삼키더니, 또 한 명의 대결 당사자를 찾아냈다.

“타티아나, 그럼 넌?”

“아, 안 했어요.”

난 양심도 없는 애다. 죽고 싶다.

아나스타샤가 팔짱을 끼더니 미련을 버리지 못한 눈빛을 하고 있는 발렌티나를 향해 핀잔을 주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발렌티나.”

“뭔데 또. 불만이야?”

“사전에 서로 녹음하기로 했다면 모를까. 그건 아니지.”

“영문을 모르겠네? 뭐 어때?”

“넌 자기 연주가 동의 없이 그것도 전화처럼 저음질로 어딘가에 저장된다고 하면 좋겠어?”

“음……. 에르네스트의 피아노는 확실히 그렇게 저음질로 녹음하긴 아깝긴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라 신뢰의 문제라고.”

아나스타샤는 내 쪽을 보며 말했다.

“에르네스트는 몰라도 타티아나가 그럴 애는 아니지.”

“…….”

미안해요.

없다고 생각했던 양심이 아무래도 있었나 보다. 정말 분명히 느껴질 정도로 격렬하게 아파 온다.

난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 속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이걸 들켜서 아나스타샤를 실망시킬 바에 차라리 물에 담가 버리는 게 나을 것이다. 어디 접시에 담긴 물 없나. 이 스마트폰을 담그고, 내 코도 박아 버리게.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고 있는데, 에르네스트가 기분 나쁘다는 듯 말했다.

“야, 아나스타샤. 너 말에 가시가 있다? 왜 나는 몰라도야?”

“대결에 미친 너라면 충분히 네가 이긴 연주를 녹음해서 심심할 때마다 틀어 보고 자아도취에 빠져도 안 이상할 것 같은데?”

“내가 변태야? 작작해, 진짜.”

“아니면 스마트폰 보여 줘 볼래? 녹음한 거 있나 없나 보게.”

투닥거리다가 아나스타샤가 당당하게 손을 내밀자, 에르네스트는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투로 쏘아붙였다.

“프라이버시도 모르냐 넌?”

“지금 프라이버시가 문제야?”

“당연히 문제지. 애인 사이에도 안 보여 주는 게 스마트폰인데 무슨 헛소리야?”

“왜 안 보여 줘? 찔리는 게 있으니까 못 보여 주는 거겠지. 찔리는 게 없다면 애인 사이에는 보여 줄 수도 있어야 하는 것 아냐? 남자들은 하여간.”

“맞아. 맞아. 에르네스트. 그건 네가 잘못 생각하는 거야.”

아나스타샤에 이어 발렌티나까지 합세해서 그를 몰아세웠다.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여긴 에르네스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겠냐…….”

그러면서 내 쪽을 본다. 너라면 내가 신성한 피아노 대결 도중 녹음 따윌 하지 않았으리라 믿어 줄 것이라는 눈빛이다.

“…….”

난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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