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86화 (186/1,277)

##  186화

오늘은 레슨이 있는 날이다.

난 늘 미하일 선생님과의 레슨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일주일에 두어 번 정도밖에 오지 않는 아주 중요한 시간이고, 연습실에서 몇 시간이고 틀어박혀 홀로 피아노와 씨름하고 있던 곡도 레슨을 받으면 단 5분 사이에 나아지기도 한다.

물론 일주일 내내 빠짐없이 레슨을 받는다고 빠르게 실력이 향상되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테크닉적인 문제나 해석에 관한 자잘한 문제들, 흔히 학생들 사이에 말하는 속어로 ‘더러운 빨래’는 집에서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여긴 세계 최고의 음악학교지 동네 피아노학원이 아니었다. 지도 선생님에게 들고 가서 레슨을 받을 만한 문제들은 혼자 미리 추려 내고 정리해야 했다. 그 후에 선생님의 도움을 받는 것은 일주일에 두 번이면 꽤 합리적인 횟수였다.

그래도 난 레슨을 더 많이 받고 싶었다. 미하일 선생님에게 레슨을 받을 때만큼 마음이 편한 시간도 드물었기 때문이다.

미하일 선생님은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 어디든 간에 거의 무조건적으로 지지해 주신다. 고속도로든 비탈진 산길이든 상관하지 않으신다. 다만,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발치에 놓인 돌이나 장애물을 일러 주시는 스타일이었다.

요 며칠간 내가 헤매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도, 미하일 선생님은 피아니스트로서의 의견과 선생님으로서의 의견을 따로 제시해서 내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해 주셨다.

그것이 내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

협연에 있어서 난 어떤 연주자가 될 수 있을까.

피아노를 완벽하게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또 믿어 왔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것 또한 알았다. 끔찍하게 우울해져서 혼자 있어 보기도 했다. 여전히 내 도구는 피아노뿐이라는 것을 다시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이젠 마음이 조금 편하다.

내가 피아노를 하는 한 세상에 홀로 동떨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학교에 와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세계 최고 수준의 음악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을 수 있는 것도, 어려서부터 세계에 통용되는 실력을 가진 아이들과 대결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리라.

난 조금 더 걸음을 빨리했다. 레슨 또한 내게 허락된 소중한 시간 중 하나였다.

미하일 선생님에게 내 피아노를 들려 드리고 싶다. 저번엔 내 피아노가 부드러워졌다고 하셨지만, 이번엔 어떻게 말씀해 주실지 궁금했다.

“선생님, 타티아나입니다.”

그렇게 기분 좋게 노크를 하고,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문손잡이를 잡고 멈칫했다. 예상하지 않았던 인물과 눈이 마주쳐 하마터면 소리를 낼 뻔했다.

난 침착하게 반걸음 물러서서 문패를 다시 확인하고, 미하일 선생님의 레슨실이 맞다는 것을 확인했다.

다시 안을 들여다보니 책상에 앉아 있던 덩치 큰 남자가 내 이름을 불렀다.

“타티아나.”

“안녕하세요, 구세프 선생님.”

“그래, 안녕하냐.”

“예…….”

구세프 선생님은 책상에 앉아 노트북으로 업무를 보고 계셨다.

학교 선생님들은 각각 독립적인 레슨실과 교수방법을 존중받고 있었고, 이렇게 다른 선생님의 레슨실에 드나들어 책상에 앉거나 하는 일은 사실 해선 안 되는 일에 가까웠다. 하지만 두 분은 워낙에 절친한 사이라 이런 일은 자주 있었다.

오늘도 무슨 일로 미하일 선생님이 잠시 자리를 비웠겠거니 싶어서 벽 쪽에 있는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구세프 선생님은 나와 인사를 나누고는 다시 무언가 하시느라 별달리 말씀을 않으셨고, 나 역시 바쁜 선생님에게 먼저 말을 걸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고. 오도카니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데, 이 침묵을 견디지 못한 건 내 쪽이 아니라 구세프 선생님 쪽이었다.

“타티아나.”

“예? 선생님.”

“뭐 하나?”

“……미하일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어요.”

“아무것도 못 들었나?”

내 대답에 구세프 선생님은 노트북에서 눈을 떼더니 날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레슨 없다.”

“예!?”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가.

깜짝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뜨자 구세프 선생님이 쯧쯧 하며 혀를 찼다.

“미하일 녀석은 모스크바 음대에 가 있다. 급한 호출이 있어서 말이지.”

“아…….”

“그래도 그렇지 애제자에게 연락도 않다니. 정신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원…….”

레슨 시간이 바뀌는 일은 가끔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미하일 선생님은 내게 연락을 해서 미리 알려 주시곤 했다. 오늘은 아무 연락도 못 해 주실 정도로 바쁘고 급한 일이 있으신 모양이다.

구세프 선생님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하긴, 놓고 간 노트북에서 데이터를 찾아 메일로 보내 달라 하는 것만 봐도 제정신은 아니지.”

“…….”

미하일 선생님도 없는데 구세프 선생님이 레슨실에 와서 노트북을 하고 계신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제정신이 아니라니? 구세프 선생님은 정말 다 좋은데 말씀이 심해서 점수를 다 깎아 드시는 때가 있다.

물론 학생이 매기는 점수 따위 신경조차 쓰지 않으실 강철 같은 분이시지만…… 가끔은 조금 야속하다. 굳이 담당 학생인 내 앞에서 이러셔야 할까?

조금 불퉁하게 보고 있는데, 구세프 선생님이 말했다.

“타티아나, 그거 아나?”

“어떤 것 말씀이시죠?”

“넌 상당히 재미있는 학생이란 걸.”

“……?”

난 세상에 나만큼 재미없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구세프 선생님이 보기엔 그렇지 않나 보다.

대체 무슨 재미를 말씀하시는 건지 의아해하고 있는데, 구세프 선생님은 노트북을 탁 덮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 큰 몸집이 일어서니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다.

난 잠깐 들었던 불손한 생각을 얼른 지워버렸다. 설마 표정에서 드러난 건 아니겠지?

구세프 선생님은 씩 웃으며 손짓했다.

“어쨌든, 좋다. 미하일이 말한 건 다 끝났고……. 이렇게 된 참에 네 레슨이나 봐주도록 하지. 간만에 잘되었군.”

구세프 선생님은 내 지도 선생님이 아니었지만, 비공식적으로 내 두 번째 선생님이었다. 어떤 면에선 미하일 선생님보다도 보다 깊게, 나와 약속으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지만……. 그건 지금 중요하지 않고.

“그…… 잘 부탁드립니다.”

“뭐냐? 그 태도는. 싫은 게냐?”

“아뇨, 아니에요.”

“잔말 말고 앉아라.”

오늘은 미하일 선생님에게 레슨을 받고 싶었는데 조금 아쉽다. 하지만 내가 할 일이 달라지진 않는다.

나도 선생님도 각각 피아노 앞에 앉았다. 능숙하게 자리를 잡고, 레슨을 받을 준비가 되자 구세프 선생님이 물었다.

“최근엔 뭘 하나?”

“아……. 차이코프스키의 트리오를 했었어요.”

“차이코프스키? 아주 어려운 것만 골라 하는군, 정말.”

구세프 선생님은 작게 투덜거리시더니,

“해 봐라. 2악장만.”

짧게 지시하셨다.

난 곧바로 연주를 시작했다.

처음부터 함께 해 주시는 일은 없었고, 난 홀로 피아노 파트만을 기억에 의존해서 연주했다. 이미 암보한 지 오래였고 합주 경험도 있기 때문에 그리 어렵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혼자 하려니 음악 같지가 않고 밋밋한 감이 없지 않다.

홀로 연습할 때처럼 노래라도 하면서 하면 나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구세프 선생님이 보는 앞에서 내 개인적인 연습 방법을 보이는 것은 조금 창피했다.

난 입을 다물고 조용히 머릿속의 바이올린과 첼로 소리에 따라 피아노에만 집중했다.

2악장은 11개의 변주와 피날레로 이루어져 있다. 총 연주 시간은 약 20분 남짓. 본래 독주곡이라면 얼마든지 상관없었지만, 실내악을 혼자 연주하는 것은 내 생각보다 시간이 길게 느껴지기도 했다.

연주를 마치고, 손을 내리자 구세프 선생님이 턱을 괴고 날 바라봤다.

“타티아나…….”

혹시라도 불호령이 떨어질까 살짝 긴장하고 있는데, 구세프 선생님의 목소리는 그리 매섭지 않았다.

되레 조금 상냥하기까지 했다.

“상당히 연구를 많이 한 것 같구나. 어떻게 해야 좋은 협연자가 될지.”

“……예.”

막심 선배는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지만, 선생님의 의견은 조금 달랐다. 애초에 구세프 선생님은 늘 독주자처럼 연주하는 내게 협연자로서의 자세를 굉장히 강조하시곤 했다.

물론 그렇다고 짚고 넘어 갈 부분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트리오는 조금 더 존재감을 키울 필요가 있지. 다시 해 봐라. 특히 2악장의 스케르초풍의 변주.”

“역시…… 그런가요?”

“역시라니? 아무튼 다시 해 봐라. 음, 내가 반주를 해 주지.”

구세프 선생님은 악보가 쌓여 있는 곳으로 가시더니 잠시 뒤적여 차이코프스키의 트리오 악보를 찾아내셨다.

그리고 선생님은 나와 듀엣을 시작했다.

연주는 별문제 없이 이어지는 것 같았다. 난 주 선율을 연주했고, 바이올린과 첼로 소리 대신 구세프 선생님의 피아노가 따른다.

그렇게 연주하던 도중, 구세프 선생님이 소리를 쳤다.

“더 크게!”

옆에서 피아노 소리가 반주로 들리니 더더욱 내 통제력이 말을 듣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홀로 연습할 땐 원하는 대로 나던 소리가,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

난 어깨에 힘을 주었다. 당연히 피아노를 통제한다는 복잡한 행위가 단순히 힘을 더 주는 것으로 해결될 리 만무했고, 소리가 깨어졌다.

이게 아니라는 건 알겠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

짧은 연주가 다시 끝나고, 구세프 선생님은 곰곰이 무언가 생각하시는 듯하더니 날 보며 말씀하셨다.

“타티아나. 내가 이전에 네게 이야기했던 건 분명 혼자 앞서 나가는 피아니스트는 협연자로서 문제가 있다는 것이긴 했다만…….”

선생님은 드물게 말을 신중히 고르셨다.

“앞서 나가던 속도를 늦추고 협연자 옆에서 나란히 걷는 게 아니라 자꾸 기대는구나.”

“기댄다고요?”

“그래. 마치 의지하려는 것 같이 말이지. 글쎄……. 연주에 자신이 없는가 하면 그건 아닌 것 같고. 주도권을 잡을 생각이 없구나.”

“…….”

“기묘하군. 네가 원래 이런 스타일이 아니었을 텐데.”

이전 미하일 선생님이 했던 평도 비슷했다. 눈치를 보고 두리번거린다고 하셨던가. 그리고 막심 선배도, 니콜라이 선배도 비슷한 말을 했다. 바라는 것이 보인다고 했었지.

내겐 아직도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이제 난 내가 그저 생활 전반에 하자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연주자가 아닌 한 명의 사람일 때, 나는 외로움도 많이 타고 그리 심지가 굳세지도 못하다.

조금 이상한 기분이지만 그걸 정면으로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이전처럼 걷잡을 수 없이 한없이 처지거나 하진 않았다.

그래도 연주자로서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 같아 살짝 우울한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내 표정을 보며 구세프 선생님이 물었다.

“타티아나, 솔직히 말해 봐라. 그간 내가 너무 심했나? 네 선생도 아닌데 주제넘게 귀찮게 했을지도 모르겠군.”

난 기겁해서 대답했다.

“아, 아뇨! 전혀 그렇지 않아요!”

“네 녀석은 선생이 뭐라 하든 내색을 않으니 원…….”

구세프 선생님은 쯧 하고 짧게 혀를 차시더니, 이어 말했다.

“아무튼 많이 변했구나. 그래.”

“…….”

구세프 선생님은 내게 제대로 된 협연자의 태도에 대해 몇 번이고 강조해서 말씀하셨고, 그것 때문에 내가 변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그것 또한 내게 영향을 주긴 했지만…….

그것보다, 원하시는 대로 내가 변했다면 기뻐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

구세프 선생님의 표정은 미묘했다. 기뻐하시긴커녕 조금 착잡해하시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마 내가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겠지.

조심스레 물었다.

“실망하신 건가요?”

“실망? 아니. 그건 아니지.”

구세프 선생님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실망이라는 말을 꺼내는 걸 보니 너 스스로도 요즈음 헷갈리나 본데, 넌 아주 잘 하고 있다, 타티아나.”

“잘 하고 있나요……?”

“갈고 닦기 나름이다, 모든 건.”

“…….”

갈고 닦아야 할 부분이 많단 소리로 들리는데요.

어떻게 해야 하지. 피아노가 기댄다고까지 하는 평이 나왔으니 이대론 안 된다. 무언가 방법을 찾아야 했다.

혼자 그렇게 고민하던 나는 문득 입을 열어 물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선생님.”

“……흠.”

내가 말하고도 놀랐다. 평소 같았으면 난 이렇게 무턱대고 선생님들에게 질문을 하지 않는다. 나 홀로 정리해야 할 문제는 홀로 정리하고, 선생님들이 깔끔하게 답을 내려 줄 수 있는 문제만을 명료하게 묻는 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물어보고 싶었다.

구세프 선생님은 내 눈을 들여다본다. 뭘 보고 계시는지 잘 모르겠지만, 난 선생님이 굉장히 날카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그렇게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긴 시간은 아니었다. 불과 몇 초도 되지 않아 구세프 선생님의 스마트폰이 울렸기 때문이다.

“미안하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사과를 전하고 스마트폰을 확인한 구세프 선생님은 갑자기 미소를 지으셨다.

그리고 화면을 두드려 무언가 메시지를 남기시는 듯하더니, 날 바라보았다.

“타티아나.”

“예.”

“좋은 방법이 있다.”

“정말이신가요?”

이렇게 빨리? 난 반신반의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구세프 선생님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에르네스트 녀석을 불렀다.”

“예!?”

에르네스트를 왜요!?

소스라치게 놀라 묻자 구세프 선생님이 희한하다는 시선으로 쳐다봤다. 난 움찔했다.

내가 에르네스트와 전화상으로 연주를 주고받은 것은 그것이 전화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난 아직 그 애나 내 친구들과 피아노를 바로 옆에 두고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 애들에게 내가 기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하지만 종종 연주자는 자신이 있건 없건 피아노 앞에 내던져지곤 한다.

도망치는 게 낫지 않을까. 별생각을 다 하는 사이, 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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