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화
“에르네스트입니다.”
“들어와라.”
구세프는 막 레슨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에르네스트를 보지 않고 타티아나를 살폈다.
타티아나는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다. 악담을 하고 고함을 질러도 꼼짝 않고 차분한 모습을 잘 지키는 평소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좌불안석으로 들썩거리는 모습이 당장 도망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구세프는 타티아나가 이렇게 당황해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아 조금 놀라웠다.
레슨실에 들어선 에르네스트는 구세프와 타티아나를 발견하더니 인사부터 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오냐.”
“타티아나, 넌 레슨? 미하일 선생님은?”
“……미하일 선생님은 없어요.”
“어디 가셨나 보네.”
“선생님…….”
타티아나는 이 자리에 없는 미하일을 찾는 듯 웅얼거렸다. 그 애처로운 목소리엔 원망과 도움을 바라는 기도가 공존하고 있었다. 구세프는 순간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제 선생을 찾고 싶을 정도로 끔찍한 상황이란 건가?
에르네스트가 태연하게 대하는 걸로 봐선 둘이 싸우거나 하진 않은 것 같은데. 타티아나만이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다. 묘한 상황이다.
보기 드물게 떠는 타티아나를 보니 마음이 약해지긴 했지만, 직접 안배해 놓은 상황이다. 선생 노릇을 제대로 하기 위해선 이렇게 악역을 자처할 때도 필요하다는 것을 구세프는 잘 알았다.
“잘 왔다, 에르네스트.”
“예, 선생님. 무슨 일이신지?”
“별건 아니고. 여기 타티아나와 같이 연습을 해 봐라.”
“연습이요?”
“그래. 저 애의 반주를 해 주면 된다.”
아니나 다를까, 타티아나는 핏기가 달아난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했다.
구세프는 갈등하는 타티아나를 보며 어떤 심정일지 유추했다. 지금 친구인 에르네스트와 함께 연습을 하긴 싫다. 하지만 지금 누구에게 화를 내거나 도망치는 건 부당하다.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우물쭈물하는 모습이다.
이런 상황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타티아나.”
“……예.”
“선생인 나와 달리, 네 친구에겐 지금 협연할 때의 피아노 소리를 들려주기 싫은 게냐?”
“…….”
타티아나는 고개를 들어 구세프를 바라보았다. 혼란과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로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거린다. 그리고 이 와중에도 자신의 태도가 에르네스트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지 살피고 있다. 정말이지…….
구세프는 한숨을 내쉬었다.
본래 타티아나는 독불장군처럼 세상 모두를 경쟁자로 여기며 독주자로 평생을 살아갈 것처럼 연주하던 타입이었다. 구세프는 그것이 앞으로 타티아나가 연주자로 살아가는 데에 있어 상당한 마이너스라 생각했고, 때문에 조금이라도 고쳐 주길 바랐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자신감을 잃어버리길 바라진 않았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타티아나는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조심스러워졌고, 발을 맞추는가 싶다가 기대어 오기까지 했다.
그 모두가 스스로의 통제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상관없었다. 그건 구세프로서도 바라는 일이다. 하지만 그녀 스스로 원해서 나오는 태도가 아니라는 것쯤은 잠깐 합을 맞춰 보는 것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타티아나는 지금 자신의 연주를 매우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스스로 납득도 못 하고, 용서도 안 된다는 듯 분에 차 있다.
선생인 구세프에게 보이는 것은 감당할 수 있는 듯했다. 사제관계라는 위치가 어떤 연주든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확신을 주기 때문인 것 같았다.
하지만 동등한 친구에게 보이는 것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크흠.”
구세프는 에르네스트를 돌아봤다. 에르네스트는 그리 충격인 것 같진 않았다. 구세프는 속으로 혀를 찼다. 또래 여자애가 이렇게까지 싫어하면 충격받는 척이라도 좀 해 봐라, 에르네스트.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어떠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듯 표정 하나 안 변하고 타티아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구세프가 다시 입을 열었다.
“타티아나. 네가 지금 왜 누군가와 협연하길 꺼리는지 안다.”
“…….”
“넌 자세만 보더라도 상당히 감정을 절제하려고 하는 연주자지. 이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했던 인터뷰에서도 그랬듯이.”
타티아나는 곡에 몰입하면서도 과한 몸짓을 보이거나 퍼포먼스 등을 드러내며 심취하지 않고, 담백하고 깔끔하게 자신의 연주만을 해 나가는 연주 스타일을 지니고 있었다.
열다섯의 나이로 그 정도의 실력을 지녔다면 어떤 면에서든 취할 만도 한데, 타티아나는 결코 그러는 법이 없었다.
그건 기본적으로 감정을 절제하고 갈무리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이었다. 어디서 배워왔는진 몰라도 그건 연주자로서 아주 훌륭한 태도였다.
하지만 구세프는 타티아나의 연주를 되새기며 말을 이었다.
“그건 여태껏 피아노를 배우길 감정을 자제해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는 게다. 그런 깔끔한 연주가 바로 연주자로서의 네 당위성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
“그렇지만 그런 절제와 별개로 너는 일반적인 연주자 이상으로 감정도 풍부하고, 하고자 하는 말도 많은 학생이지. 고집도 세고, 충동적인 면도 많아.”
타티아나는 움찔했다.
타티아나는 그 누구보다 연주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길 바라며 감정을 절제해 순수하게 수준 높은 음악을 추구하지만, 동시에 어떠한 목적과 필요에 따라 음악을 철저히 자신의 도구로 삼으려는 듯한 모습도 보였다.
특히 평생에 걸쳐 얻어야 할 자신의 음악을 미리 알고 있는 사람처럼 조급하게 굴 때면 섬뜩한 분위기를 드러내기도 했다.
안타까운 것은 타티아나가 상당히 명석한 편이었고, 눈치챈 모순을 나 몰라라 하지 못하고 괴로워할 정도로 자존심도 강하다는 점이었다.
구세프는 그런 그녀가 답답하기도 하지만, 정말 안쓰럽기도 했다.
결국 잠시 고민하던 구세프는 타티아나에게 더 강하게 하지 못했다.
“타티아나.”
이름을 부르자 가만히 올려다본다. 구세프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도 늙었군.
“마음의 최전방엔 손끝이 위치하고 있다는 말 아나?”
“예. 알아요.”
“그럼 이번엔 그저 따라 보는 건 어떻냐. 여기 있는 나나 에르네스트나 널 외롭게 두진 않을게다.”
“……예?”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더라도 괜찮단 말이다.”
타티아나는 대놓고 의아해했다.
구세프는 사사로운 것들을 내려놓고 음악을 추구하는 연주자를 매우 높게 평가했고, 타티아나에게도 여태껏 그렇게 가르쳐 왔다.
하지만 지금은 도저히 타티아나에게 왜 감정에 휘둘리냐고 호통을 칠 수 없었다.
타티아나는 지금껏 잘 따라왔다. 그런데 버티고 버티던 자제력이 바닥을 보이고, 이젠 통제도 못하게 손끝에서 새어 나올 정도라면 하지 않느니만 못했다.
자책하면서 무너지게 두느니 조금이나마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그녀가 믿는 선생인 자신이 숨통을 틔어 주는 것이 나았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타티아나, 뭘 그렇게 겁내는 거지?”
“전…… 두려워해야 하니깐요.”
구세프는 그 대답 자체에서 섬뜩함을 느꼈다. 두려워해야 하기 때문에 두려워한다. 마치 당위성의 화신과도 같은 대답이다.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진 모르겠지만, 평범하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구세프는 다시 한 번 말했다.
“에르네스트는 분명 네 도움이 될 수 있을 게다. 지금은 선생인 나보다도 더.”
타티아나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바라본다. 쓸데없이 괴롭힐 거면 그만두라는 것 같다. 하지만 구세프는 진심이었다.
“농담 아니다.”
“…….”
타티아나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구세프가 종종 농담을 하곤 하지만 진지해야 할 땐 한없이 진지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구세프는 침묵하는 타티아나를 유심히 보았다. 그녀는 딱히 에르네스트를 꺼려 하고 있지 않았다.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 눈빛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다른 그 누구에게도 향하는 것이 아니라면, 바로 그녀 자신을 향한 것이리라. 타티아나는 스스로를 두려워하고 경계하고 있었다.
구세프는 옆으로 눈짓했고, 옆에 서 있던 에르네스트가 바통을 받았다.
“타티아나. 저번에도 말했지만 아나스타샤도 2년 가까이 슬럼프였어. 하지만 그렇다고 걔가 연주를 숨기고 혼자 하는 일은 없었지. 그리고 걜 건져 준 게 너라며. 걔가 혼자 그랬다면 아직도 슬럼프였을걸?”
“…….”
“타티아나, 우린 연주가 엉망이라고 해서 헐뜯거나 하는 사이는 아니잖아? 도와줬으면 도와줬지. 안 그래?”
따뜻하게 말하는 에르네스트를 멍하니 보던 타티아나가 일순 표정을 굳히더니 독기가 서린 어투로 답했다.
“에르네스트는 아무것도 몰라요.”
너무한 태도였지만, 구세프는 타티아나가 이렇게 답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사제관계와는 달리 친구 혹은 동료 음악가와의 관계란 나란한 관계여야 했다. 그녀는 친구들을 무척이나 소중하게 여기고 좋아한다. 언제까지고 관계를 이어 가고 싶어 한다.
그렇게 좋아하기 때문에 넋 놓고 기대어 버릴 수 없다. 균형이 깨어지면 친구로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해는 가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칼같이 밀어내는 것도 대단한 정신력이다. 구세프는 작게 혀를 차며 에르네스트를 돌아보았다.
“그래. 난 아무것도 모르지.”
에르네스트는 태연하게 답했다.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반응이었다.
타티아나가 이를 부득 갈더니 일부러 잔인하게 말했다.
“전 그 무엇보다 제 피아노가 중요해요.”
“나도 알아. 도와주겠다고.”
“그에 대한 답은 전화상으로 했을 텐데요.”
“그리고 또 거기에 대한 답도 내가 했을 텐데.”
“…….”
“타티아나, 정말 내가 필요 없어?”
이 작은 다툼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승패가 결정 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타티아나는 에르네스트와 얼굴을 마주하고 지기는 싫다는 듯 자존심을 세우며 예민하게 굴었지만 결국 그를 이기지 못했다.
싸늘하게 굳히고 있던 표정은 길게 가지 못했고, 타티아나는 곧 어깨를 늘어뜨렸다. 전의를 상실한 듯한 얼굴엔 조금 있으면 눈물이라도 맺힐 것 같다.
구세프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대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까지 맥을 못 춘단 말인가?
“그쯤해라, 에르네스트.”
“선생님.”
“멋대가리 없이 굴면 정말 빈축을 살 게다.”
타티아나는 고개를 들었지만 굳이 부정하진 않았다.
구세프가 이어 말했다.
“타티아나. 넌 모스크바 음악원의 아르카디 세르게예비치 교수로부터 입학 제의를 받고도 모스크바 음악원에 가지 않았지.”
“그걸 어떻게 아신 건가요!?”
“널 이 학교에 묶어 놓고 있는 것은 미하일도 나도 아니라 생각한다.”
구세프는 미하일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미하일은 모스크바 음악원의 아르카디 교수에게 타티아나를 보내 달라는 요청을 받고 구세프와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미하일은 선생 된 입장으로서 보다 나은 환경을 위해 타티아나를 모스크바 음악원에 보내는 것이 옳은 것 같다고 말했지만, 구세프는 그래선 안 된다고 그 자리에서 잘라 말했다.
입학 제의를 받은 타티아나가 거부했고, 지도 선생인 미하일에게 아무런 상담조차 없이, 제의를 받은 일이 아예 없는 것처럼 조용히 학교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타티아나는 중앙음악학교에서 나가고 싶지 않아 했다. 그렇다면 그건 존중해야 했다.
그만큼 타티아나는 이 학교에 애착이 있었다. 그 애착은 학교 자체에 대한 애교심은 아닐 것이다. 피아노가 있는 것은 모스크바 음악원 역시 마찬가지니까.
그녀를 붙잡는 것은 사람에 대한 애착일 것이다.
음악가라면 누구라도 상관없다는 듯 굴고 있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
구세프는 비슷한 학생을 한 명 더 안다.
충분한 실력을 가지고, 모스크바 음악원에 조기입학을 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남아 있는 학생. 에르네스트.
이 둘은 상당히 닮아 있었다.
두 제자를 번갈아 보던 구세프는 쓴웃음을 지었다. 때가 온다면 이 애들도 졸업하겠지. 아직 몇 년 남긴 했지만 몇 년 정도는 순식간에 흘러간다.
덜컥 걱정부터 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그때가 기다려지기도 한다. 음악이 있는 한 이 애들은 괜찮을 것이다. 그건 지금 증명할 수도 있다. 구세프는 그렇게 믿었다.
“더 무어라 하기도 조금 그렇군.”
“……?”
“남자 둘이서 여학생 하나를 괴롭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나? 솔직히 말해 지금 상당히 부담스럽군.”
구세프는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미하일을 제정신이 아니라고 했을 때 타티아나가 숨기지 못하고 화를 냈던 것처럼, 아니나 다를까, 이번엔 구세프를 위해 타티아나가 다급하게 변명했다.
“그렇지 않아요, 선생님. 전…….”
“그냥 믿고 해 보겠느냐?”
“…….”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말에도 타티아나는 반사적으로 경계하는 듯한 태도를 하다가, 결국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