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화
전화로 연주를 주고받으면서 우리는 조금 더 가까워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전화상이라서 가능했던 것이었다. 이렇게 한 공간에서 피아노를 앞에 두고 있자니, 난 약한 패닉마저 느꼈다. 머리가 뜨겁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심지어 구세프 선생님이 주문한 것은 협연이었다.
나는 또다시 독자적인 통제력을 잃고 협연자에게 휩쓸려버릴 것이다.
친구이자 동료이자 라이벌인 에르네스트와 지금 협연을 하는 것은, 내 나약한 부분을 모조리 보이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으…….”
생각만 해도 무섭다. 난 친구들 앞에서 언제까지고 강한 연주자로 있고 싶었다. 그간 얼마나 약한 모습을 많이 보였는지 잘 알지만, 적어도 피아노 앞에 앉아선 강하고 싶었다.
“…….”
하지만 더는 안 될 것 같다.
에르네스트를 돌아보았다. 그는 묵묵히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도 전화로 세 곡이나 연달아 연주하면서 날 위해 줬고, 심지어 난 그걸 녹음하기까지 했다.
마지막으로 세워 보려던 자존심과 가치관은 이미 무게를 잃고 둥둥 떠다녔다.
때마침 도망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연습할 곡은…… 차이코프스키 트리오예요. 악보는 거기에 있어요.”
“어? 음. 이게 네가 했었던 곡이야?”
“예. 시간을 드릴까요.”
“아니, 됐어.”
역시나 에르네스트는 악보를 보자마자 초견으로 바로 연주하려 했다.
난 어깨를 폈다. 자조하고 체념하지만, 이젠 아무래도 좋다. 연주를 해야 했다.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한 난 어떤 형태로든 간에 연주자여야 했다.
“시작할게요.”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트리오 2악장이 시작되었다. 목가적인 하나의 주 선율을 홀로 연주한다.
첫 테마가 흘러가고, 변주가 시작되자 에르네스트가 개입했다.
구세프 선생님이 했던 것과 같은 현악기 파트 연주였다. 초견으로 순식간에 연주해 내는 실력은 열다섯 살이 지닌 노련함이라 보기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대단했다.
난 새삼 감탄하며 그와 발을 맞추어 나갔다. 처음 맞춰 본 것이지만 어색한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잠시 후, 변주가 바뀌면서 피아노에게 조명이 집중되는 구간이 돌아왔고, 난 약간 어깨를 긴장시켰다.
어떻게 해야 할지 여전히 갈피가 안 잡혔다. 내 옆에서 발맞춰 연주되는 에르네스트의 피아노 소리가 이미 이 음악의 근간을 정해 놓았다. 거기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모르겠다.
에르네스트는 약간 이상함을 느꼈음이 분명했다. 소리가 보다 커졌다. 악보의 셈여림 지시에 따른 소리였지만 거기에서 분명한 메시지를 읽어냈다. 일단 따라오라는 것 같다. 난 거기에 의지해 음악을 더듬어 나갔다.
명백하게 기대고 있다.
난 눈을 감았다. 보다 선명하게 피아노 소리가 어떻게 얽히고 있는지 그려진다. 섬세하게 설계된 이 구조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난 그대로 연주를 이어 나갔다.
어떨 땐 힘겹게 발을 맞추어 나가다가, 앞서 나가기라도 하면 돌아봐 달라는 듯 부르기도 하고, 가끔은 이 음악을 듣는 청중을 제쳐 놓고 바로 옆의 협연자의 귓가에 속삭이기도 한다.
목적이 이상해져 버린 연주다. 안다. 하지만 이미 자제할 수가 없다.
입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 낼 것 같은 목소리가 손을 타고 피아노로는 나왔다. 그러다 보면 서로의 소리가 더욱 가까워진다는 것이 느껴진다. 기다란 뱀처럼 스륵거리며 다가가 뒤엉키기도 한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협연자가 날 내버려 두지 못하도록, 매혹하고 교태를 부린다. 교활하기 짝이 없는 연주다. 이런 소리를 내가 내고 있다는 사실이 악몽 같다.
그리고 에르네스트는 몇 번이고 내 소리를 앞으로 밀어 올리려 했다. 막심 선배가 그랬듯, 구세프 선생님이 그랬듯.
철저하게 반주자로 역할하면서 손색없이 멋진 솜씨로 날 일으켜 세운다. 연이어 부추긴다. 마치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프로코피에프의 악마적 암시에서 들려주었던 그 소리를 다시 한 번 드러내 보라는 것 같다.
하지만 난 에르네스트와 싸울 생각이 없었다.
“…….”
기나긴 연주가 끝나고, 난 손을 내렸다. 피로하다.
피아노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난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가만히 목을 기울여 옆 자리의 에르네스트를 본다. 그의 표정엔 별다른 변화가 없다. 조금 밉다. 하지만 싸늘하게 한 마디 해 보려 한들, 지금 내가 어떤 바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에르네스트도, 구세프 선생님도 말이 없다. 침묵이 슬슬 무서워지기 시작할 무렵, 에르네스트가 불쑥 물었다.
“타티아나, 요즘도 잘 못 자?”
“……예?”
뜬금없는 소리였지만 정확했다.
난 바보같이 되물었지만 에르네스트는 이미 대답을 들은 듯 말을 이었다.
“그런 것 같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음반 들으면서 자 본 적 있어?”
“……!”
그야말로 기겁했다. 찔리는 것이 적잖았기 때문이다.
심장이 드세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귓가가 뜨겁다. 에르네스트가 어디까지 안 거지?
이미 그와 짧게나마 피아노를 섞으면서 드러날 건 다 드러났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파고들면 난처하다.
난 일단 잡아뗐다.
“어, 없어요.”
“없어?”
“예. 어떤 클래식을 듣든 무의식중에 분석하는지라 머리가 복잡해져서…….”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당장 어제 에르네스트의 연주 녹음을 들으며 잠들었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난 입을 꾹 다물었다.
에르네스트는 다시 권했다.
“그래도 해 봐. 사실 그것만큼 좋은 것도 드물거든.”
“좋은 것이라면…….”
“따뜻한 우유를 마시고 녹턴 같은 걸 틀어 놓고 자면 좋아. 사실 네 말처럼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음악을 그저 테라피의 하나로 즐기긴 어렵기도 하지만……. 일단 자장가처럼 심신을 편안하게 해 주긴 하니까.”
더더욱 찔린다.
난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어, 어떻게 열다섯…… 살이나 되어서 자장가 같은 것에 기댈 수 있나요? 전 어린아이가 아니에요.”
“뭐 어때? 자장가랑 나이랑 무슨 상관이야? 우리 할머니는 예순 살인데도 우유랑 음악이 없으면 잠을 못 주무시는데.”
“하, 할머니요?”
에르네스트는 피식 웃더니 설명했다.
“할머니는 원래 이탈리아 분이신데 외로움을 많이 타시거든. 한참을 술과 수면제 같은 것에도 의지하셨는데, 언제부터인가 이래선 안 되겠나 싶으셨는지 클래식을 찾으시더라고.”
에르네스트의 할머니가 이탈리아 분이라는 건 처음 알았다. 조금 신선하게 느껴져서 바라보고 있자니 그가 말했다.
“내가 이상한 예시를 들었나. 기분 나빴다면 미안.”
“아뇨……. 이상하지 않아요. 할머님이 효과를 보셨단 예시가 왜 이상한가요?”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고.”
난 고개를 저었다. 에르네스트의 말은 내 가슴 속 깊은 곳까지 들어와 기존에 내가 지키고 있던 것들을 모조리 뒤집어버리는 듯했다.
정리도 안 되고 복잡한 생각들 사이를 비집고 나가는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데, 에르네스트가 말했다.
“어쨌든…… 타티아나.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지.”
“중요하지 않다고요?”
여태껏 걱정 가득한 투로 이야기하던 그가 이렇게 말할 줄은 몰라 깜짝 놀랐다.
에르네스트는 이어 말했다.
“그래. 지금은 한낮이잖아. 학교고. 레슨실이고.”
“…….”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런 게 아니라고 생각해.”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다. 난 조용히 물었다.
“그럼……. 뭘 할 수 있는데요.”
“연주자가 둘에 피아노가 둘이야. 뭘 해야겠어?”
협연이겠지. 에르네스트는 한 번으론 모자란 듯했다.
하지만 난 이번엔 정말 도망치고 싶었다.
아직 에르네스트는 날 친구로 여기고 있는 것 같지만. 지금 저 눈빛이 바뀌기라도 한다면, 참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건 피하고 싶다.
“전 그만하고 싶어요. 부탁이에요, 에르네스트.”
“아니, 알아. 연습하자는 게 아니야.”
작은 목소리로 거부하자 에르네스트는 오해 말라는 듯 말했다. 무슨 소린가 싶어 고개를 드니, 그가 킥 웃었다.
“일전에 우리 전적은 동등해졌지?”
“……?”
“오늘 마무리를 지어 보자.”
갑자기 열불이 난다.
사람 속도 모르고 지금 피아노로 대결을 하자는 거야?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 피아노로 내 불안정한 속마음을 드러낸 것 같아 죽고 싶은 심정인데, 다 듣고도 속 편하게 이게 무슨 소리인가? 멍청이인 거야, 정말?
그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받아 주었을 것 같다. 하지만 대결하잔 소리엔 화가 났다.
“제가 먼저 해도 되나요?”
난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 머릿속에 악마적 암시는 상대도 안 될 정도로 폭력적인 독주곡들이 수곡이나 떠오른다. 좋다. 이번에야말로 엉망진창으로 짓눌러버릴…….
“아니? 무슨 소리야 같이 해야지.”
“예?”
“듀엣곡을 고를 거야.”
“……!?”
에르네스트가 정말 날 죽일 심산인가 보다.
독주곡이면 모를까, 지금 난 누군가와 함께 할 때 제 실력을 내지 못한다. 그도 분명 그걸 안다. 그야말로 엉망 그 자체인데 대체 무슨 대결을 하잔 말인지 모르겠다.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노려보자 그가 피식 웃었다.
“넌 라흐마니노프를 좋아했었지?”
“…….”
에르네스트는 그렇게 말하고는, 일어나서 악보 더미로 가서 뒤적이기 시작했다. 할 말이 없다. 그는 정말로 할 생각이었다.
마지막으로 구세프 선생님을 돌아보았지만 선생님은 지금 상황을 온전히 에르네스트에게 맡길 생각인 모양이다. 말없이 지켜보고 계실 뿐이었다.
싫다고 말할까.
지금 내가 신경질을 부린다면 에르네스트도 날 강제하진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를 믿고 싶기도 했다.
편안했던 연주와 그 후에 해주었던 말들이 떠오른다. 그는 나름대로 날 위해 노력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그가 그저 날 희롱하고 괴롭히기 위해 저렇게 악보를 찾고 있다고는 생각하기 싫었다.
조용히 기다리자 에르네스트는 악보를 하나 가지고 왔다.
“라흐마니노프가 작곡한 조곡이나 소품에서 고르자면…… 오늘은 이게 좋을 것 같은데. 어때?”
라흐마니노프.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조곡 2번, op.17.
조곡이란 몇 개의 무곡을 악장으로 엮은 형식을 뜻한다. 모음곡이라고도 한다.
몇 번이고 들어서 잘 아는 곡이다. 하지만 연주를 해 본 적은 없다.
좋은 핑계가 생겼다 싶어서 처음이라 어쩔 수 없다고, 연습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거부하려다가, 에르네스트의 강렬한 눈빛에 붙잡혔다.
“나도 아까 차이코프스키의 트리오를 초견으로 연주했잖아.”
“…….”
“타티아나 너 정도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첫 주자는 내가 할게.”
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묻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할 수 있다는 투였다. 일종의 도발이면서 동시에 용기를 불어넣어 준다.
난 숨을 멈춘 채 그를 바라본다. 에르네스트는 진지했다. 결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다. 내가 지금 비참한 기분을 느끼고 있으리란 것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다.
그것을 쇄신할 두 번째 기회를 주려는 것이다.
“…….”
믿어 보자.
그라면 믿을 수 있다.
손에 들린 악보를 펼쳤다. 4개의 악장의 모음집이다. 1악장 도입곡, 2악장 왈츠, 3악장 로망스, 4악장 타란텔라.
처음부터 악보를 보려는데, 에르네스트가 말했다.
“처음부터 하지 말고. 타란텔라만 해 보자.”
“4악장만요?”
“그래. 난 너와 왈츠를 추거나 로망스를 노래하고 싶지 않거든.”
“……?”
에르네스트는 정말 딱 부러지게 단호한 태도로 그렇게 말했다.
난 약간 어이가 없어서 그를 바라보았다. 에르네스트가 이 정도까지 담백한 사람이었어? 아니……. 무슨 생각을 하든 좋다. 다 좋은데…… 그걸 나한테 굳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뭐야?
얼이 빠져 있는데 그는 그저 히죽 웃을 뿐이었다.
부아가 치민다. 뭐가 어째? 왈츠나 로망스는 싫어? 그런 주제에 어젠 그렇게나 사랑스럽고 따뜻한 곡을…….
난 격하게 고개를 저어 잡생각들을 날려버리고 바로 악보를 파라락 넘겼다. 4악장을 찾아낸 뒤, 온 신경을 집중해서 악보를 읽어 들였다.
처음 보는 악보이지만 곡은 머릿속에 있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끝까지 읽어 내고 나자, 그간 말없이 지켜보던 구세프 선생님이 다가왔다.
“내가 페이지터너를 해 주마.”
“감사합니다.”
짧게 감사를 표하고, 에르네스트에게 말했다.
“준비되었어요. 시작해요.”
“좋아.”
그가 피아노 앞에 준비되었고, 난 손을 들었다.
다시 생각한다. 이건 단순한 협연 리허설 같은 것이 아닌 피아노 대결이었다. 명백한 실전이다.
지금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있는 내가, 그것도 초견으로 악보를 봐 가면서 에르네스트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진 않지만, 대결이라는 것에 집중을 하니 손아귀에 약간 힘이 돌아온다.
라흐마니노프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조곡 2번 4악장 타란텔라.
악장 지시는 프레스토. 낮고 음산하게 곡을 시작한다. 악마적 암시에서 그러했듯 우중충한 음들을 피아노에서 끌어내어 풀어놓는다.
곧바로 에르네스트가 따라붙어서 화성을 쌓아올리며 음악을 끌어 올린다. 폭풍의 전조와도 같은 음들을 이어붙이면서 나와 에르네스트는 피아노 두 대로 거대한 먹구름을 불러일으킨다.
퍼스트 피아노인 에르네스트의 피아노 소리에 신경이 쏠린다. 대결이라는 것을 떠올리니 불합리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집중해서 세컨드 피아노의 역할에 집중했다.
먹구름처럼, 또는 으르렁거리며 몰려드는 늑대처럼. 최고조로 고조된 음악이 이윽고 폭발했다.
“……!”
마치 거인의 발걸음처럼 거대한 화성이 쾅 하고 울려 옆에 있는 내게 직격했다. 한 번에서 그치지 않는다. 몇 번이고 날 후려갈긴다.
피아노가 망치와도 같다는 것은 그저 은유가 아니었다. 당연하다는 듯 음의 부피를 다룰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해있는 데다가 남자이기까지 한 에르네스트가 진심으로 후려치는 현은, 한계를 초월하는 듯한 음을 내뿜었다.
폭발하듯 쏟아지는 소리가 온몸을 뒤흔들었다. 숨이 안 쉬어질 정도의 음압에 눈앞이 흐릿해졌다. 악보가 잘 안 보인다.
내게 맡겨진 세컨드 피아노가 저음을 강조하는 역할이 아니었다면 난 진즉 연주를 흐트러뜨렸을 것이다. 그만큼이나 충격적인 음색이었다.
에르네스트는 말하고 있었다. 착각하지 말라고. 우린 친구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레슨실이고 대결 중이라고.
우린 우아하고 부드럽게 왈츠나 발라드를 연주할 수도 있었지만 라이벌로서 첨예한 타란텔라로 마주했다.
타란텔라는 에스파냐의 검무였다. 나와 에르네스트는 날카로운 진검을 든 투사가 되어 있었다. 서로 얽혀 검무를 추어야 했다.
난 초점을 잃고 흐릿해진 눈을 찡그렸다. 다시 악보를 본다. 지금 내가 함께하는 협연자는 날 죽일 수도 있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한바탕 에르네스트의 칼춤이 지나가고, 내 차례가 찾아왔다. 이번엔 에르네스트가 악보에 따라 뒤로 반걸음 물러선다.
“…….”
이전 같았으면 난 칼을 제대로 휘두르기보단 에르네스트가 보여 준 것과 똑같이 하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직감했다. 내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에르네스트를 따라할 순 없다는 것을.
눈이 빠르게 악보를 훑는다. 내게 주어진 음표들과 박자를 가늠했다. 그리고 현재 가능한 최고의 음량을 퍼부었다. 망치를, 칼을 휘두른다는 기분으로 건반을 휘둘렀다.
에르네스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음 순서를 받아선 더 크고 화려하게 연주했다. 아르페지오가 잇따랐다. 검광이 번뜩인다.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지만, 동시에 섬뜩한 예기가 내 목에 스치고 지나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난 각오를 했다. 그리고 내 순서가 오자마자 그보다 잘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최선을 다했다.
여태껏 피아노를 하면서 신체적 한계를 느끼긴 했지만 그래도 상당히 극복했다고 생각했다. 몸이 작다면 그만큼 자세를 바로하고 손의 힘이 약하다면 그만큼 한 건반에 힘이 집중되도록 만드는 데에 집중했다. 어지간한 곡들은 소화하지 못하는 일이 드물었다.
하지만 지금, 정말로 한계를 느낀다.
난 이를 악물고 더욱 집중했다. 오로지 세게 힘을 주어 치는 것으론 남자이면서 동시에 어마어마하게 고절한 테크닉을 지니고 있는 에르네스트에게서 더욱 멀어지는 일이다.
음의 크기는 그저 손가락의 무게가 아닌 속도에 따른다. 그간 체화한 모든 테크닉으로 내 손이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다한다. 폭풍처럼 아르페지오가 휘몰아쳤다.
가까스로, 정말 가까스로 에르네스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었다. 한순간이지만 소리를 잡아먹히며 에르네스트가 움찔하고 놀라는 음색이 들렸다.
“…….”
나도 모르게 웃음이 입가에 스민다. 악보를 읽어내어 손에 전달하느라 머리는 복잡하고, 손은 바쁘고 귀는 따갑지만, 그럼에도 나는 깊은 본질에 잠재되어 있는 무언가를 느끼며 즐거워했다. 그간 억눌러 왔던 것들이 깨어나며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나약해진 마음으로 피아노를 다루다간 친구들에게 의존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그건 모두를 최악으로 몰아세우는 일이 되리라 생각했다. 때문에 강해지고자 했다.
하지만 날 나약하게 만들었던 건 아나스타샤의 품도, 에르네스트의 연주도 아니었다. 나 스스로였다.
그것을 마치 꿰뚫어 본 듯, 에르네스트는 단순히 학교 친구나 동료가 아닌 라이벌로서 내게 칼을 내밀었다. 이전까지의 따뜻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난폭함이다.
그리고 난 섬뜩한 섬광을 흩뿌리는 그의 칼을 보자마자 도망은커녕 환희를 느끼며 더욱 세차게 들이받았다.
난 결국 이런 인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