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89화 (189/1,277)

##  189화

에르네스트는 바로 옆자리의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타티아나는 살짝 찌푸린 눈으로 악보와 연주에 집중하고 있었다.

음악가에게 있어 악보란 음악의 언어로 적혀진 설명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거대한 건물의 청사진이기도 하고, 예술품의 상세한 밑그림이기도 했다.

타티아나는 그것을 모든 방면으로 읽어낼 줄 알았다.

타티아나가 한 걸음 다가오면 에르네스트가 한 걸음 물러나고, 얽혀 들었다가 곧 스쳐 지나간다. 두 사람은 몇 년간 합을 맞춰 온 사람들처럼 검무를 추었다.

이 모든 건 라흐마니노프가 안배한 절묘한 균형 위에 올라가 있었다.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닌 클래식의 정수와 그것을 이해하는 연주자의 강점은 이렇게 발현된다.

서로 합을 맞출 수 있다는 확신하에, 타티아나와 에르네스트는 더더욱 격렬하게 희고 검은 칼날을 쏟아냈다.

발을 구르며 살짝 멀어지나 싶더니, 곧 찔러 들어온다.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가 연주하는 날카로운 음색에 헛웃음을 토해 냈다. 맞받아치지 않으면 더더욱 깊숙이 들어와 꿰뚫어버릴 버릴 기세다.

에르네스트는 손목을 쓰면서 한층 더 화려하게 변화를 주었다. 타티아나의 소리를 흐트러뜨리고 파고든다. 타티아나는 공격이 막혔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더 이상 공세를 펼치지 않고 잔잔히 사그라든다.

하지만 이전처럼 자신 없이 주춤거리는 태세는 아니었다.

타티아나는 희열에 찬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시 자신감을 되찾은 눈빛이 찬란한 열정을 머금었다.

에르네스트는 이렇게 타티아나에게 다시 조금 무리를 시키는 것이 옳은 방법이었다는 것을 느꼈다.

“…….”

차이코프스키의 트리오를 함께 연주하면서, 에르네스트는 충격 아닌 충격을 받았다. 연주 자체는 흠 잡을 곳 없다고 할 만했지만, 타티아나의 본래 연주 스타일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꼿꼿했던 태도는 온데간데없고, 옆에 있는 협연자에게 달라붙어 속삭이는 연주가, 기겁할 정도로 명료하게 들렸다. 심지어 이쪽으로 기대며 응석을 부려 온다.

타티아나가 스스로를 홀로 연습실에 가두고 싶어 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녀는 음악에 있어선 늘 진지했고 무엇보다 중요시했다. 이런 모습을 다른 누군가에게 보이긴 싫을 것이다.

며칠 전, 현악기과의 선배 두 명과 트리오를 마치고 나온 타티아나를 보았던 것을 떠올렸다. 그 선배들 앞에서도 이런 연주를 했었다면, 그 자존심과 긍지에 얼마나 큰 상처를 입었을지 안 봐도 뻔했다.

에르네스트는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 고민했다.

이번에도 얼마든지 그녀를 위로하고 따스하게 보듬는 곡들을 꺼낼 수 있었다. 그건 정말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쩌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일지도 모른다. 에르네스트는 바보가 아니었다. 타티아나가 정신적으로 이렇게까지 무방비한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이 순간을 기회로만 여긴다면, 타티아나를 영영 잃고 말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들었다.

에르네스트는 그 직감을 무시하지 않았다. 타티아나는 언뜻 자포자기한 것처럼 보이지만 스스로에게 있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격하다. 그녀가 무엇을 할지 에르네스트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때문에 위로는 이쯤하기로 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이젠 친구로서 의무를 다할 차례였다.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가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대결이라는 형식을 제시하고, 일부러 말로 도발하고, 타란텔라를 선곡하고, 일절 봐주지 않고 타티아나를 맹습했다.

그녀는 잠시 어리둥절해하더니, 곧 본색을 드러내며 사납게 맞받아쳤다.

“……큭.”

타티아나와 트리오를 맞춰 봤을 그 선배들도 아마 이런 타티아나를 원했을 것이다. 강인하고 자존심 세면서, 정면으로 맞붙어보고 싶은 기분이 들게 하는 강한 연주자. 그 선배들이 타티아나를 꾀어낸 것도 십분 이해는 간다.

하지만 그네들이 뭘 알겠어?

대체 뭘 아냔 말이지.

선배건 뭐건 상관없었다. 그들에겐 자격이 없다.

에르네스트는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본색을 드러낼 마음이 없는 그녀를 흔들려면 오케스트라라도 준비했었어야지.

현악기 두 대로 트리오를 하는 것 정도로는 타티아나에게 그 어떤 위협도 가할 수 없다. 그녀를 몰아세우려 했겠지만, 연주자로서 잡아먹히기 싫다면 피아노로 저항해야 한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하기엔 한참이나 부족했다.

에르네스트는 가능했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두 선배 모두 상당한 수준의 연주자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타티아나에 대해 잘 모른다.

에르네스트 역시 타티아나는 영원한 미스테리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적어도 같은 피아노 연주자로서 타과 학생들보다는 타티아나를 잘 안다.

그리고 지금, 에르네스트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분명히 깨달았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것처럼 스스럼없이 기대어 오는 그녀는, 밀치거나 어깨를 붙잡아 흔드는 것 정도로는 떨쳐낼 수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새파란 예기가 흐르는 날붙이를 타티아나의 턱밑에 들이밀었다. 도발하고 부추기는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직접적인 실전 감각을 강제로 되살려야 했다.

외로움에 사무쳐 몸을 떠는 친구에겐 지나친 일이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독하게 밀어붙였고 타티아나는 칼끝을 느끼며 스스로의 위치와 본질을 깨달았다.

그대로 배신감을 느끼며 울며 무너져 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그렇게 약하지 않았다. 에르네스트는 그것을 믿었다.

에르네스트가 아닌 그 누구도 이렇게 단순하고 강력한 방법을 떠올리지도, 시도하지도, 성공하지도 못 했을 것이다.

심지어 에르네스트도 자신이 여자에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 줄 상상도 못 했다.

“……!”

연타로 이어지는 타란텔라 특유의 멜로디가 흘러가고, 타티아나는 더더욱 기세를 올렸다. 저 작은 몸으로 도대체 무슨 마법을 부리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광대한 소리가 레슨실 전체를 뒤흔들었다.

소리는 공기를 타고 전달되는 물리적인 현상인데, 에르네스트는 귀가 아닌 온몸으로 그 소리를 느꼈다.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다.

그는 쾌활하게 웃으며 전력으로 타건했다.

마지막으로 주고받는 검무가 이어지고, 두 사람은 양손 가득 피아노를 집어삼키려는 듯 웅장한 화음의 피날레로 끝을 맺었다.

“…….”

연주를 마무리하고 건반에서 손을 뗀 타티아나와 에르네스트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교차하는 눈빛엔 신뢰와 열망이 어른거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구세프가 팔짱을 끼며 흡족하게 웃으며 말했다.

“에르네스트를 부르길 잘했군.”

구세프가 어디까지 바라보고 자신을 불렀는진 모르겠지만, 에르네스트는 그 말에 동의했다. 이런 역할은 동급생이자 비슷한 실력을 지닌 자신에게 맡기는 것이 적절했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 자신의 무릎을 내려다보던 타티아나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에르네스트…….”

“응.”

“제가 잘했나요?”

“그래.”

순수하기 짝이 없는 물음. 타티아나가 어디에서 불안을 느끼고 두려워하는지 에르네스트는 다시금 느꼈고, 때문에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느끼기에 이번 대결은 무승부로 해야 할 것 같아. 네 생각은 어때? 타티아나.”

“…….”

타티아나는 잠시 말이 없다가, 고개를 주억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직까지 우린…… 라이벌일 수 있겠어요.”

사실 이제 와서 공신력 없는 상대 전적 같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에르네스트는 그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이 될 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다. 에르네스트에게 대답하는 타티아나의 표정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별생각 없이, 그저 장난처럼 타티아나를 도발해서 연습실로 끌고나오기 위해 꺼낸 말이 이렇게까지 그녀를 옭아 맬 수 있었을 줄은 미처 몰랐다.

그녀는 한숨을 폭 내쉬더니 목을 세우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숨이나 쉴 수 있을까 싶은 기다란 목이 파르르 떨리다가, 곧 안정되었다.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제가 두려워하던 것들은…… 이렇게나 무의미했군요.”

타티아나는 머리를 기울이며 에르네스트를 바라보며 힘없이 웃었다.

“알고 있었을 텐데.”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에르네스트는 정확하게 알지는 못한다.

다만 그녀가 자신감을 되찾았음을 어렴풋이 느낀다.

타티아나는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생긋 웃었다.

“에르네스트.”

그녀가 이렇게 무방비하게 웃는 얼굴을 보일 때면, 가끔 에르네스트는 가슴이 철렁하는 것을 느낀다.

타티아나는 애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도 오늘도 제게 도움이 되어 주시네요.”

“그랬어?”

“예.”

리스트의 위로의 세 곡, 그리고 라흐마니노프의 전투적인 듀엣곡. 이 모두를 타티아나는 도움이라 말했다.

타티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에르네스트를 믿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믿었기에 받아 준 것이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두 번이나 협연을 할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타티아나는 연주자로서 에르네스트를 굉장히 신뢰하고 있었다.

“……응.”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가 보내는 신뢰를 느끼면서 작게 대답했다.

부끄럽거나 자신에게 그런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이렇게까지 믿어 주는 것에 대해 약간의 책임감마저 느꼈다.

하지만 조금, 마뜩잖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 뒷골에서 근질거린다.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구세프는 그런 둘을 지켜보며 그 틈에 끼어들어도 되는지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다 이윽고 말을 꺼냈다.

“타티아나.”

“예, 선생님.”

드물게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타티아나가 차분히 대답했다. 구세프가 에둘러 이야기를 시작했다.

“음……. 헛소리를 잠깐 해 볼까. 창세기의 아담은 세상의 동식물들에 이름을 붙였다고 하지. 그 때문인지 이름을 지음으로서 비로소 대상을 규정하고 관계를 확정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사람의 본성에 가깝지.”

“……무슨 말씀이세요?”

“그냥 헛소리라니까. 어쨌든, 궁금하군. 에르네스트와 널 어떤 관계라 이름 지을 수 있을지. 아까 라이벌이라고 했는데, 그게 다냐?”

타티아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하지만 그녀가 믿는 또 한 명의 선생이 하는 질문에 어떻게든 진지하게 답하려는 듯 고민에 잠겼다.

구세프는 탄식을 토해 냈다. 실수했다는 표정이다.

그리고 에르네스트는 구세프가 이렇게 묻고 나서야 지금 자신이 왜 약간 초조함을 느끼는지 자각했다.

그는 약간 불만스럽게 자신의 선생을 올려다보았다. 멋대가리 없이 따져 묻지 말라고 했으면서, 이건 멋이 있습니까?

제자의 시선을 눈치챈 구세프가 이번엔 에르네스트에게 물었다.

“에르네스트 넌?”

“그런 게 뭐 중요합니까? 전 그런 거 신경 쓰지 않습니다.”

마지막까지 폼 잡는 듯한 대답을 하는 에르네스트를 보며 구세프는 두 번째로 이마를 짚었다.

길게 심사숙고하던 타티아나가 입을 떼었다.

“에르네스트는 제 라이벌이자 동료 음악가이며.”

구세프를 향하던 대답은 자연스레 에르네스트에게 다시 향했다. 따뜻한 시선도 함께한다.

“친구이기도 하죠.”

“그러하냐?”

“예. 그래요.”

더 이상 답은 없다. 라이벌, 동료 음악가, 친구. 이것으로 끝이었다. 타티아나는 담백하게 그렇게 관계를 이름 지었다.

에르네스트는 이 모든 것에 아무 문제도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뿐이 아니라 의도하기까지 했다.

필요 이상으로 성가시게 굴지 않았고, 오늘은 왈츠나 로망스 대신 격렬한 타란텔라를 꺼내들었다.

거기에 힘입어 타티아나는 자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열 번을 생각해 보아도 잘한 일이라 생각했다.

“…….”

그런데 왜 열이 받지.

영원히 친구라는 듯 신뢰가 가득한 미소를 보내는 타티아나를 보며 에르네스트는 막연히 기쁘다가도, 자충수를 둔 것 같다는 생각을 느꼈다.

분명 올바른 길인데도 불구하고 길을 잘못 든 것 같다는 기분.

살면서 처음 느껴 보는 복잡한 감정이다. 이 감정이 후회가 아니길 바랄 뿐이다.

에르네스트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름 지어버리라 해도 그렇게까지 딱 자를 건 없잖아……?”

“예?”

“아무것도 아냐.”

에르네스트는 툴툴거리며 말했다. 스스로 결정했던 일인데 이런 기분이 들 줄은 몰랐다. 유치해서 참을 수가 없다.

고개를 돌려 버리자 타티아나는 조금 안절부절못해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에르네스트의 심기가 안 좋아졌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저기, 에르네스트에게 오늘 받은 것만 하더라도…….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뭐? 잘됐다, 타티아나. 이번엔 그럼 로망스를…….”

“에르네스트.”

만면에 화색을 띄며 대답하는 에르네스트를 보며 구세프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어린 제자를 타이르는 듯한 목소리다.

에르네스트는 어려서부터 구세프와 함께였지만 이렇게 대놓고 애 취급당하는 느낌은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구세프는 어린 두 제자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너희는 이제 겨우 열다섯 살이지. 적지는 않지만 결코 많지도 않은 나이야.”

“그렇긴 하죠…….”

“너희는 나이대에 걸맞지 않다고 느껴질 정도의 실력을 지니고 있어서 가끔은 나조차도 정말 어리다는 걸 까먹곤 하다만, 열다섯이라는 숫자를 직접 말해 보니 새삼 실감이 드는구나.”

“……?”

고개를 갸웃거리는 타티아나를 보며 구세프가 말했다.

“너희가 이 학교를 떠날 때가 기대되는군.”

“서, 섭섭한 말씀 마세요, 선생님.”

깜짝 놀라서 손사래를 치는 타티아나를 보며 구세프가 짓궂게 웃었다.

에르네스트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생각했다. 열다섯 살. 적지는 않지만 많지도 않은 나이.

시간은 공평한 듯 보이지만 사실 공평하지 않다. 에르네스트는 그것을 안다.

복잡한 생각에 머리가 어지럽다. 순간 한심하다는 듯한 사샤의 눈초리가 아른거린다.

나도 알아 이 꼬맹아. 에르네스트는 으윽 하는 소리를 내며 짜증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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