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화
“리타르단도가 너무 느끼하다. 에르네스트, 조금 더 얌전히 잦아드는 듯한 소리를 내라.”
“페달을 조금 아낄까요. 이건 어떻습니까?”
“너 왜 이러냐? 옆에 보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집중이 안 되나? 한 명의 청중도 감당이 안 되나?”
“아뇨? 완전 집중하고 있는데요.”
“그럼 다시 해 봐라.”
에르네스트는 구세프 선생님에게 레슨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곡은 요하네스 브람스의 헨델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
그가 어려워하는 곡은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구세프 선생님은 에르네스트를 호되게 혼내며 지도했다.
러시아 공로 예술가 훈장을 받은 그도 지도 선생님 앞에선 그저 학생인 것이다.
신선하게 지켜보고 있는데 에르네스트가 곤혹스럽다는 듯 이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에르네스트!”
“윽.”
천둥처럼 떨어지는 호통에 에르네스트가 움찔했다. 그러고는 다시 피아노에 집중했다.
난 빨대를 입에 물고 처음 보는 그의 레슨을 흥미진진하게 견학했다.
이 레슨실은 미하일 선생님의 장소이긴 하지만 지금은 잠깐 구세프 선생님과 에르네스트에게 빌려주고 있는 상태였다.
오늘 있어야 할 내 레슨은 나중에 미하일 선생님이 보충해 주실 것이다.
그래서 자리를 비켜 주고 견학을 하겠다고 말했더니, 에르네스트는 낭패감이 서린 이상한 표정을 했지만 구세프 선생님은 옳다구나 곧바로 에르네스트에게 레슨을 시작했다.
그의 레슨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난 희미하게 미소를 띠었다.
편하게 앉아서 에르네스트가 애를 먹는 것을 구경하고 웃고 있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그는 알고 있을까? 시시각각 그의 소리가 점점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천재는 과연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는 듯 에르네스트는 성장하고 있었다.
바로 지금도.
“…….”
빨대를 빨아들였다. 시원한 청량감이 입안을 적셨다.
어제 에르네스트는 캔 뚜껑을 딸 수 있냐며 평소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던 것을 묻더니, 오늘은 내가 레슨실의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세 개 빼서 돌리자 냉큼 내 것까지 가져가고는 뚜껑을 따더니, 어디선가 가져온 빨대까지 꽂아서 돌려주었다.
난 어안이 벙벙했지만 감사히 받았다. 이런 도움은 언제라도 주겠다더니 빈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난 가만히 캔을 내려다보았다. 오늘 받은 건 이뿐만이 아니었다.
함께 차이코프스키의 트리오를 연주한 뒤, 난 그가 리스트 스페셜과 비슷한 또 다른 스페셜을 들려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는 딱 한 번 연주를 맞춰 본 뒤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 간파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따뜻한 우유와 클래식. 에르네스트는 그것을 내게 내줄 것처럼 말했다.
난 양팔을 늘어뜨리고 멍하니 기다렸다. 하지만 바로 다음 에르네스트가 한 것은 날 대결의 링으로 끌어올린 것이었다.
약간 방심하고 있던 난 얼떨떨해 하면서도 그를 믿고 링에 올랐다가, 난데없는 일격에 거의 기절할 뻔했다.
“천천히. 감미롭게. 마치 하프처럼 말이다.”
“이렇게 다성화음을 내는 하프가 어디 있어요, 세상에.”
“세상엔 없어도 지금 이 레슨실엔 있어야 해.”
“제가 무슨 피아노의 신이에요?”
구세프 선생님의 주문에 건방지게 투덜거리는 에르네스트를 보며 나는 미소를 머금었다.
나는 안다. 에르네스트가 왜 왈츠나 로망스를 제쳐 놓고 타란텔라를 선택했는지. 왜 나를 거의 죽일 듯이 격렬하게 몰아세웠는지.
그런 선택을 한 에르네스트의 마음도 헤아렸다. 사실 그의 본심은 그렇게 하고 싶어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무엇을 우선시해야 할지 굉장히 갈등했을지도 모른다. 난 주제넘게, 파렴치하게 그런 생각을 한다.
그리고 다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칼끝을 내민 그의 용기와 순수함에 감탄했다. 모르지 않는다. 그건 용기였다.
용기 있는 그를 존중하기 위해 맞장구를 치긴 했지만, 난 바보가 아니다.
“알아요, 에르네스트.”
작은 소곤거림은 피아노 소리에 파묻혀서 들리지 않았다.
에르네스트는 내 라이벌이자 동료 음악가이자 친구로서 내 신뢰를 받고 있지만, 지금 내가 느끼는 신뢰는 단지 그 정도가 아니었다.
그렇게 이름을 지어야만 안도할 수 있는 관계를 초월한, 에르네스트라는 사람 자체를 향하는 신뢰.
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러한 뭉클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난 아직 다른 누군가에게 내보일 진심도, 또 그에 대한 자격과 근거도, 여유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느낀다. 두려워해야 하기 때문에 두려워했던 것처럼, 믿어야 하기 때문에 믿어야 할 때도 있다는 것을.
약간 들뜨는 기분을 가라앉히고, 난 레슨에 몰두하는 에르네스트와 구세프 선생님을 얌전히 지켜보며 기다렸다.
시간을 기다린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잠시 후 정해진 레슨 시간이 끝났고, 에르네스트는 신음성을 흘리며 팔을 풀었다.
상당히 고된 레슨이었나 보다. 약간 안쓰럽게 바라보니 에르네스트가 내 쪽을 보고는 눈을 흘긴다. 뭐야?
어쨌건, 빚이 많은 내 쪽에서 할 말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난 웃으며 그를 칭찬했다.
“정말 빠르게 좋아지고 있어요. 에르네스트.”
“뭐라고?”
“며칠만 더 연습하신다면 얼마나 완성시킬 수 있으실지 기대되네요. 그땐 제게도 들려주셨으면 좋겠어요.”
“어? 응……. 그래.”
에르네스트가 머쓱한지 뒷목을 문지르며 답했다. 그는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지만 괜한 소리는 아니었다.
난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볼 때마다 놀라운 그의 성장 속도를 본다면 며칠이 아니라 당장 내일이라도 깜짝 놀랄 연주를 보여 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구세프 선생님이 내게 물었다.
“타티아나. 네가 보기엔 며칠이면 될 것 같으냐?”
“아, 죄송해요. 선생님. 제가 주제 넘는 소리를 했어요.”
“아니다. 상관없다. 그냥 말해 봐라.”
지도 선생님이 옆에 계신데 학생에 불과한 내가 하기엔 너무 건방진 말이었다.
하지만 구세프 선생님은 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난 조심스레 답했다.
“……에르네스트는 이해력도 좋고 곡을 익히는 속도도 빠르니까요. 제가 듣기에…… 테크닉적인 부분은 큰 문제가 들리지 않으니 표현에 집중하면 다음 주 레슨엔 정말 많이 좋아지지 않을까요.”
“음, 그러냐.”
“예. 대단해요. 에르네스트는.”
구세프 선생님은 약간 미묘한 표정이다. 내가 무언가 대답을 잘못했나?
그리고 에르네스트는 약간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대단하긴 뭐가. 그런 넌?”
“저요?”
“그래. 반복이 아니라 그저 한 곡을 죽 쳐 내는 와중에도 발전해 나가는 게 너잖아, 타티아나. 지금 누가 누굴 대단하다고 하는 건지 원…….”
난 아직도 이런 괴리감과 마주하면 할 말이 궁색해진다.
“전…… 그저 연습량으로 메우고 있을 뿐이에요.”
“와, 장난해?”
에르네스트는 황당하다는 듯 양팔을 펴 보였지만, 답답한 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모르겠지만, 그의 시간과 나의 시간은 공평하지 않다.
잘 알면서도 나는 그 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연습도 꾸준히 하면서 이 천재들과 언젠가 벌어질 시간을 늦추고, 늦추는 중이었다.
여기까지 받아들이는 데에 수많은 타협이 있었다.
하지만 받아들였다고 해서, 내가 잘난 척을 하고 있을 수는 없잖은가?
약간 불만에 찬 에르네스트를 보며 난 쓴웃음을 지었다. 더 이상 해 줄 수 있는 설명이 없을 때, 난 그저 웃을 수밖에 없다.
“…….”
내 친구들은 이미 날 상당히 깊게 파악하고 있다. 에르네스트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
레슨실에서 다시 반으로 향하면서 나와 에르네스트는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사샤는 정말 놀러 갈 생각인가 보던데.”
“그런가요? 언제라도 환영이에요. 에르네스트는요?”
“나? 난 왜?”
사샤가 온다면 당연히 에르네스트도 함께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에르네스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뭐……. 이젠 둘이 번호도 아는 사이니까. 알아서 시간 맞춰 봐.”
“말도 안 돼요, 에르네스트. 어린 동생 홀로 모르는 집에 보내실 건가요?”
“모르긴 왜 몰라?”
“몇 번이고 방문해서 익숙해졌다면 또 모르겠지만…….”
“여덟 살이면 혼자 놀러가는 것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는 나이야.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네. 난 그 나이에 펜션을 빌려서 친구들이랑 바비큐 파티도 했어.”
“예? 정말요?”
“당연히 농담이지…….”
에르네스트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말했다.
“사샤도 혼자 가는 걸 바랄걸?”
“뭐라고 해도 좋아요. 에르네스트도 오세요.”
“아니…….”
내 쪽에서 권유하지 않으면 그가 끝까지 사양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서 조금 더 강하게 말했더니 가만 날 내려다보던 에르네스트가 이윽고 중얼거렸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에르네스트의 항복 선언을 받으면서 난 베샤스트니흐 형제가 집에 오는 광경을 떠올렸다.
문제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남자애들과 집에서 뭘 하고 놀아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점이었다.
남자애들이 집에 온 건 처음이 아니었고 작년에 리처드와 한승우가 온 적이 있긴 했지만, 그땐 함께 놀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식사를 하자마자 그 둘은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난 기억을 되짚었다. 아나스타샤나 발렌티나가 왔을 땐 뭘 하고 놀았지? 연습실에서 피아노를 치다가 차도 마시고 대화를 나누다가……. 그랬다간 남자애들은 지루해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뭘 하면 좋을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포기했다.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피아노 외엔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
모르겠다고 웃어넘길 일이 아닌 것 같다.
난 아나스타샤와 놀 때도 내 쪽에서 주도할 때면 뭘 해야 할지 몰라 연습실에나 가자고 할 때가 대부분이었다.
사실 이전까진 누군가와 놀 궁리 할 시간에 피아노를 한 번 더 치는 것을 삶의 목표이자 기쁨으로 알고 살았다.
여전히 똑같긴 하지만……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은 자성의 기분이 든다. 친구들과 있으려면 이대로는 안 될지도 모른다.
약간 공허해져서 멍하니 걷다 보니 곧 교실에 다다랐다.
난 버릇처럼 교실 안을 둘러보았다. 그 어디에도 화려한 금발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탐스러운 갈색 웨이브 단발이 보인다.
발렌티나는 스마트폰으로 무언가 메시지를 쓰다가 우리 쪽을 돌아봤다.
그리고 일순간, 차가움을 느꼈다. 섬찟한 기분에 다시 발렌티나를 보았을 때, 그녀는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착각인 모양이다.
“에르네스트, 타티아나.”
나와 에르네스트는 발렌티나가 앉아 있는 쪽으로 향했다.
에르네스트가 말했다.
“발렌티나, 연습 일찍 마쳤나 보네.”
“응? 그냥. 그냥 그래. 에르네스트는? 뭐 했어?”
“레슨.”
“레슨? 연습이 아니라?”
“어. 오늘 레슨날인데.”
레슨 스케줄은 항상 변동하곤 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발렌티나는 에르네스트가 연습을 했으리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고개를 귀엽게 갸우뚱하던 발렌티나가 내게 물었다.
“그래……? 그런가? 타티아나는?”
“저도 레슨이지만 오늘 미하일 선생님이 부재중이셔서 못 받았어요.”
그런데 내 대답을 에르네스트가 정정했다.
“대신 나 오기 전에 구세프 선생님한테 레슨 받았잖아.”
“그렇죠…….”
“그럼 받은 거지 뭐.”
사실 그의 말도 옳았다. 구세프 선생님은 자주 날 봐주시기도 했고. 하지만 그래도 30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받은 것으로는 턱없이 목이 마르다.
발렌티나는 나와 에르네스트를 번갈아 봤다.
“그래서 지금 동시에 레슨 받고 오는 거야?”
“그래. 겸사겸사 같이 듀엣도 하고.”
“듀엣?”
“사실 대결이었지만. 그리고 비겼지. 그렇지 타티아나?”
“예…….”
연주 내용만 보면 비겼다고 해도 무방하지만, 마음의 빚을 본다면 완패다.
물론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발렌티나는 대결 자체를 궁금해했다.
그런데 질문이 약간 묘하다.
“어제 전화로 한 걸론 모자랐나 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데, 에르네스트가 대신 답했다.
“모자랐다면 모자랐지.”
“이번엔 누가 하자고 했어? 타티아나가?”
“아니. 이번에도 내가.”
어제 먼저 전화를 걸고, 대결을 하자고 한 것은 에르네스트. 오늘 함께 차이코프스키 트리오를 협연해 보고는 대결을 하자고 한 것도 에르네스트.
사실 난 그가 이끌어 주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못 할 뻔했다.
“그렇구나…….”
에르네스트의 대답에 발렌티나는 그냥 그렇게 말끝을 흐리며 다시 스마트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은 나와 에르네스트가 뭘 하든 별 흥미 없어 보이기도 했다.
여태 궁금해하던 것 같은 태도가 무색하게 느껴진다. 발렌티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무표정하게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던 발렌티나가 돌연 날 불렀다.
“있잖아, 타티아나.”
“예, 발렌티나.”
“너 아나스타샤랑 같이 가기로 했었지? 신아르바트 쪽에 생긴 거기.”
난 가까스로 아나스타샤의 이름에서 힌트를 얻어 거기가 멀티센터를 뜻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예. 맞아요. 전화로 이야기했었죠. 발렌티나는 가 봤다고 하셨나요?”
“응. 전에 가 봤어. 그런데 너무 커서 하루로는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겠더라고.”
그녀는 배시시 웃더니 내 쪽으로 얼굴을 기울였다. 나보다 약간 작은 키의 발렌티나는 아나스타샤와 다르게 굉장히 귀여운 외모였다.
“언제 갈 거야? 같이 가게.”
“언제가 좋을까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나스타샤와 시간을 맞춰 봐야 할 것 같아요.”
“타티아나 아직도 그런 답답한 소릴 해? 대체 뭘 맞춰? 걔는 맨날 시간 있어.”
“아하하하.”
난 실없이 웃었다. 아나스타샤의 연습량이 근래 많이 늘긴 했지만 여전히 그녀는 노는 것을 좋아하긴 했다. 내가 말한다면 언제든 시간을 낼 것 같았다.
잠자코 듣던 에르네스트가 슬쩍 물어온다.
“뭐야, 어디 놀러 가게?”
“응.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안 돼. 거긴 여자들의 성역이니까.”
“윽. 그래.”
여자들의 성역이란 말에 에르네스트가 화들짝 놀랐다.
난 에르네스트와 저번에 디저트 뷔페에 같이 갔었던 것을 기억했다. 그는 아직도 그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듯했다.
조금 미안해지긴 하지만, 그래도 살짝 놀려 볼까.
“같이 가시지 않으시겠어요? 에르네스트.”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에르네스트는 그야말로 펄쩍 뛰며 기겁했다. 난 소리 내어 웃을 뻔했다.
발렌티나는 별 표정이 없었다. 그녀는 스마트폰으로 누구와 메시지를 주고받는지, 계속해서 화면을 툭툭 두드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