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91화 (191/1,277)

##  191화

운전석에 앉은 빅토르가 유쾌하게 말했다.

“세 분 모두 오늘은 류비그에서 즐거운 시간 되셨으면 좋겠군요.”

“고마워요, 빅토르.”

류비그는 신아르바트 거리에 막 개장한 대형 멀티센터의 이름이었다.

나와 아나스타샤, 발렌티나 세 사람은 차를 타고 그곳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옆을 보니 때마침 아나스타샤도 내 쪽을 보고 있다. 내가 눈을 깜빡이자 그녀도 깜빡였다. 우리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웃었다.

작게 웃던 아나스타샤가 스마트폰으로 무언가 확인하고는 말했다.

“어디 보자 예약은……. 시간은 딱 맞겠다.”

“예약도 해야 하나요?”

“아, 이야기 안 했던가? 벌써 예약이 많이도 밀려 있대. 소문 많이 났나 봐. 특히 헤어숍은 길게는 몇 주일까지 걸린다던데.”

몇 주일……?

류비그는 대형 쇼핑몰은 물론이고 각종 놀이시설과 카페, 레스토랑, 피트니스 클럽, 스파 등등 온갖 것들이 갖춰져 있었다.

게다가 헤어숍과 네일숍까지, 그야말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관리받을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이 모두 모여 있어서 편리할 뿐이지 굳이 류비그 안의 한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서 몇 주간 기다려야 하는 예약을 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해가 갈 듯 말 듯 한 기분으로 생각하다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발렌티나.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예약을 잡았죠?”

“아하하, 타티아나. 내가 누구겠어?”

발렌티나요…….

바보 같은 대답밖에 안 떠오른다.

발렌티나는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며 으스댔다.

“내 인덕으로 최대한 빨리 구했지. 방법은 많단다.”

“대단하네요, 발렌티나.”

“뭐가? 너도 이름만 대면 명단 가장 위로 올려 주려고 하는 곳 많을 건데.”

“……그런가요.”

가끔 발렌티나가 깔끔하게 현실적인 이야기를 할 때면 난 할 말이 없어지곤 했다.

그녀의 말이 옳다. 난 종종 특별대우를 받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대우는 여전히 부담스럽다. 난 돈을 그리 많이 쓰지 않기 때문이다.

한도가 얼마인지 알 수 없는 카드를 한 장 받아서 자율적으로 쓰고 있긴 하지만, 늘 같이 어울리는 아나스타샤나 발렌티나는 용돈을 받으므로 매달 쓸 수 있는 돈이 정해져 있다.

그리고 난 딱히 그녀들의 한도보다 더 쓸 일이 없었다.

가끔은 내가 내주려고 해도 이 둘은 무조건적으로 거절했다.

돈이 없어 동네 공원에서 미끄럼틀을 타고 노는 한이 있어도 그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녀들의 그런 태도는 조금 감동적이었다. 덕분에 나도 그녀들의 지갑 사정을 헤아리면서 나름대로의 금전 감각을 익힐 수 있었다.

문득 우리가 가는 류비그를 다시 떠올렸다. 헤어숍은 시작에 불과할 것이다.

열다섯 살짜리들 세 명이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아나스타샤에게 물었다.

“그 외에도 예약한 곳이 많나요?”

“응? 어. 이것저것. 아, 맞아. 특별히 널 위해 예약한 곳도 있어.”

발렌티나가 그렇게 말했다. 날 위해서?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난 즐기는 것이 별로 없다.

“절 위해서요? 어디인데요?”

마치 이렇게 물어보길 기다렸다는 듯, 발렌티나가 귀엽게 웃으며 손가락을 입에 댔다.

“비밀이야.”

내 궁금함은 도착할 때까지의 즐거움으로 하자는 것 같다.

***

류비그에 도착한 나는 약간 위압감마저 느꼈다.

땅도 사람들도 건물도 큰 러시아는 정말 모든 것이 컸다.

나는 굼 백화점이나 갤러리아 백화점도 가 봤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거대한 에르미타주 박물관과 많은 궁전들도 봤다.

요즈음은 아파트로 70층씩 짓는 시대다.

내 생일에 가 봤던 페더레이션 타워도 100층에 달하는 고층건물이었고, 이제 어지간한 건물은 봐도 그리 놀라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는데,

“……굉장하네요.”

이건 다른 의미로 굉장했다.

높이가 높은 것이 아니라 그 너비가 엄청나게 넓었다. 이렇게 넓은 건물이 도심 한복판에 있을 수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컸다.

건물 내부로 들어가니 최신식 건축물이라는 말답게 한 눈에 봐도 현대적인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넓고, 화사하다. 예술적 감성을 중요시하는지 철근이나 플라스틱으로 된 부분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대부분이 대리석과 유리였다.

감탄하면서 곳곳을 구경하던 우리가 자연스럽게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백화점이었다.

류비그 내의 백화점은 총 4층이었는데, 그 모두가 여성복 브랜드였다.

그 외에도 구두, 가방, 모자, 쥬얼리, 화장품 등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상품을 판매하고 있었다.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는 물 만난 고기처럼 돌아다녔다.

무언가 많이 사거나 하진 않았지만 그녀들은 쇼핑몰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했다.

물론 류비그에는 다른 즐길 거리도 많았다.

우리는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어있는 휴게실에서 사진도 찍고, 스마트폰 관련 액세서리를 파는 곳에선 스마트폰 케이스를 하나씩 샀다.

VR체험관에서 처음으로 VR을 경험해 보기도 했다.

그리고 통로를 감싸는 거대한 아쿠아리움도 감상했다.

아쿠아리움에 가 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바닥을 제외한, 눈이 닿는 모든 곳을 아쿠아리움으로 만들어 놓은 곳은 처음이었다.

이름 모를 물고기들이 많이 보인다. 떼 지어 다니는 것이 너무 예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자연의 아름다움만을 옮겨다 놓은 듯한 인공적인 시설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어쩌면 사람이 할 수 있는 예술이란 다 이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느릿하게 지나가던 바다거북이 이쪽을 바라본다. 발렌티나는 눈이 마주쳤다며 좋아라했다. 난 그런 그녀가 귀여워서 웃었다.

다음으로 우리가 도착한 곳은 예약해 두었던 헤어숍이었다. 마음에 드는 숍을 찾아 모스크바 전역을 헤매고 다니던 내 친구들은 눈을 반짝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일반 헤어숍하고는 규모 자체가 달랐다.

놓여 있는 거울과 의자만 스무 개가 넘는 것 같고 앞치마를 찬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발렌티나가 카운터에 가서 예약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렸다.

“이쪽으로 오시죠.”

직원이 안내해 주는 대로 따라가서 우리 세 명은 나란히 앉았다. 잠시 기다리니 내 뒤로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이 거울에 보였다.

웨이브진 검은 머리가 스타일리시하게 보이는 남자가 내 등 뒤에 섰다.

헤어스타일리스트인 것 같다. 거울을 통해 나와 눈이 마주친 그가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처음 오시는 아가씨들, 반갑습니다. 발렌티나 페트로브나는 이전에 오셨죠?”

“예. 맞아요.”

“친구분들도 모두 귀여우시네요. 맡겨 주셔서 고마워요.”

헤어스타일리스트는 내 머리를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그러면 어디 보자……. 아나스타샤 세르게예브나는 조금 기다려 주시면 다른 선생님이 오실 거예요. 잠시 기다려 주시고. 전 타티아나 유리예브나에게 물어볼까요?”

예약을 할 때 우리 이름도 같이 올렸는지 이미 이름도 다 알고 있었다.

그가 허리를 숙이며 나와 머리 높이를 거의 가까이 했다.

“어떤 스타일을 원하세요?”

그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처럼 들렸다.

난 늘 긴 머리를 고수하고 있었고, 연주회 등으로 조금 헤어스타일을 손봐야 할 때는 땋아 올리거나 약하게 웨이브 펌을 하곤 했다.

헤어스타일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고, 무턱대고 손을 대기가 약간은 무섭기까지 했다.

항상 같이 가는 아나스타샤도 자기는 이랬다가 저랬다가 헤어스타일을 많이 바꾸는 편이었지만, 그걸 내게 제안하진 않았다.

그가 손을 뻗어 내 어깨 아래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만졌다.

“결도 좋고 관리는 잘하신 것 같네요. 길이도 잘 기르셨고. 뭘 해도 되겠는데요? 흠…….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혹시 이 머리색은 천연인가요?”

“예. 염색은 안 했어요.”

“플래티넘 블론드라……. 예쁜 색이네요.”

종종 그런 말을 듣기도 했지만, 예쁘다고 칭찬받고 마냥 기뻐하기도 어려웠다.

이전의 내 머리색은 훨씬 밝아서 지금 아나스타샤와 비슷할 정도로 반짝거리는 금발이었다.

지금은 혼수상태로 병상에 누워 있었던 여파로 빛이 바래 버린 색이었다. 1년이나 지났지만 이 머리색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밝게 염색을 하자니 그것도 우스운 일이라 내버려 두고 있었다.

내버려 둔 머리카락을 보며 그가 기운차게 말했다.

“의욕이 생기네요.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뭘 하고 싶으세요? 전 개인적으로 길게 레이어드 컷을 해서 약간의 펌을 섞는 걸 추천드리고 싶은데. 보다 사랑스러움이 살아날 거예요.”

난 사랑스러움이라는 단어와 상당히 거리가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는데……. 잘 모르겠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아나스타샤 쪽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그녀가 피식 웃는다. 난 조금 부끄러워졌다. 항상 이렇게 의존하면 안 되는데.

“조금 생각해 볼게요.”

“아, 모쪼록. 여기 잡지도 있으니 보시면서 생각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자리에 앉아서 시간을 달라는 건 실례일지도 모르겠는데, 날 담당한 남자는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비켜 주었다.

난 그가 넘겨준 잡지를 받아들고 몇 장 넘겨 보았다. 헤어숍답게 헤어스타일에 관한 전문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잡지였다.

평범한 웨이브펌에서 목이 부러지진 않을까 걱정이 들 정도로 휘황찬란한 머리까지, 정말 다양했다.

신선한 기분으로 잡지를 보고 있는데, 옆자리에 있던 발렌티나가 문득 파격안을 내놓았다.

“아니면 나처럼 단발로 해 볼래? 타티아나.”

“단발로요?”

“응. 편하기도 하고. 네가 해도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발렌티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단발을 하고 있었다.

난 늘 그런 발렌티나가 귀엽고 활발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실제 성격이 그렇기도 했고.

다시 거울을 본다. 솔직히 말해 지금 이 긴 머리는 감고 말리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고역이다. 난 하루에 30분씩 머리에 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냥 손톱을 짧게 자르는 것과는 상대도 안 될 정도로 잘 생각해야 할 문제였다. 한 번 자르면 몇 년을 길러야 할지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금 꺼려진다. 나한테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애초에 어울린다는 게 뭔지 잘 모르겠지만.

약간 고민을 하는데 아나스타샤가 대뜸 말했다.

“난 반대야.”

“뭐? 왜?”

“반대에 왜가 어디 있어. 그냥 반대지.”

약간 황당하긴 하지만, 난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이쪽을 보는 아나스타샤가 고마웠다.

마음을 정하고 말했다.

“그냥 길게 둘게요.”

“그래? 짧게 해 보는 것도 좋은 기분 전환이 될 건데.”

“괜찮아요. 기분 전환을 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응?”

머리를 자르는 것으로 기분 전환을 꾀한다면 마치 이전까지가 잘못되었다는 것 같잖아?

난 그 무엇도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

하지만 발렌티나는 약간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기분 전환이 필요 없어?”

“아.”

듣기에 따라 약간 차갑게 비꼬는 것처럼 뉘앙스가 달라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어떻게 설명할까 하다가 그냥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전 발렌티나, 아나스타샤와 함께 있는 지금 기분이 소중하고 행복하니까요. 굳이 바꿀 필요는 없잖아요?”

“그런…… 말을 지금 여기서 하면…… 어떻게 해……!”

발렌티나가 황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작은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나도 입 밖으로 말을 내고 나서야 창피함을 느꼈다.

하지만 마음에도 없는 말은 아니었다.

나와 그녀는 늘 가깝게 지내고 있지만, 여러 이유로 아직도 조금 복잡한 관계이다.

난 에르네스트와 함께 있을 때의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면 말문이 막히곤 한다.

이렇게나 귀엽고, 친구도 많고, 피아니스트로서도 유망한 그녀가 막연한 박탈감 같은 것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실질적으로 그녀에게서 무언가 빼앗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면 난 정말 마음이 심란하다.

그래도 이 두 사람이 내게 있어 정말 소중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발렌티나는 후,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더니 폭신한 의자에 깊게 파고들었다.

“듣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야…….”

“하지만 진심이에요.”

“듣는 사람이 없어도 그만해!”

마지막으로 왁 하고 비명을 지른 그녀는 의자에 더더욱 깊게 파고들며 침묵했다. 난 발렌티나가 진정할때까지 가만히 바라보았다.

곧 그녀의 고개가 내 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왜 애들이 널 좋아할 수밖에 없는지 알 것 같네.”

“……예?”

“아무것도 아니야. 타티아나, 그거 알아?”

발렌티나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나도 사실 너 되게 좋아한다는 거.”

“……?”

발렌티나에게서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난 놀라워하며 아나스타샤 쪽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약간 미간을 굳히고 기분 모를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난 그제야 바보같이 대답했다.

“갑자기요?”

“뭐가 갑자기야? 어라……. 오해는 하지 마? 난 모든 종류의 사랑을 존중하지만 널 그런 의미로 좋아한다는 건 아니니까.”

“아, 물론이죠. 친구…… 친구니까요.”

“그래, 그래.”

발렌티나가 활기차게 말했다. 친구로서 발렌티나가 날 좋아해 준다면 나 역시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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