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화
버스를 타고 1시간, 정류장에서 내려 잘 정돈된 공원을 따라 걸었다.
「추워라.」
3월의 날씨는 아직 추웠다. 임세연은 어깨를 옹송그리며 양손을 패딩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봄이 시작된다는 입춘이 온 지 벌써 한 달이 넘었는데 동장군은 여전히 기승이었다.
세연은 추운 겨울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걸으면서 폰을 만지기도 힘들고, 예쁜 공원은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처음 이 길을 오가게 되었던 작년 10월을 떠올렸다.
혼자서도 갈 수 있다고 기세 좋게 출발한 건 좋은데 길을 헤맸다.
엄마가 무조건 가지고 가라며 들려 준 음료수 상자를 들고 걷다가 결국 지쳐서 공원에 잠시 앉아 쉬었다.
하필이면 유리병에 든 음료들이라 오래 들고 있자니 팔이 빠질 것 같았다.
그렇게 공원에 앉아 팔을 주무르던 세연은 시간에 맞춰 마중을 나온 초로의 교수를 마주했다.
공원의 쓸쓸한 나무를 닮은 교수와 세연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연은 그때까지도 유명 음대의 교수, 그것도 교수로 수십 년을 계시다가 명예 교수로 추대되신 분이 공짜로 레슨을 해 주시겠다는 말을 반신반의했지만, 공원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면서 점점 믿음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교수는 정말로 세연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세연의 피아노를.
「교수님은 계시겠지?」
세연은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벌써 5개월째 이어지고 있는 관계였고, 한 번도 교수님이 레슨을 약속한 시간에 집을 비운 적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세연은 불현듯 불안해졌다.
교수는 종종 어린 세연이 이해하기엔 어려운 감정을 얼굴에 보이곤 했다.
세연은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 이해하진 못했지만, 교수가 갑자기 그만두자고 하거나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조금 더 빨리 공원을 지나쳐 교수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 다다른 세연은 익숙하게 한 아파트를 찾아갔다.
출입구의 비밀번호는 이미 알고 있다. 비밀번호를 넣어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내리면 바로 오른쪽 집. 문을 두드렸다.
「박성재 교수님, 저예요. 세연이.」
잠시 기다리자 인기척이 들리고,
「일찍 왔구나.」
초로의 교수가 현관문을 열어 주었다. 젊었을 땐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연주회를 열고 공부를 했다던 교수는 언제 봐도 세련되고 깔끔한 용모를 하고 있었다.
세연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그래. 어서 들어오너라.」
교수가 언제나처럼 인자하게 웃으며 세연을 인도했다. 집 안으로 들어가니 부엌에 있던 한 여성이 고개를 내밀며 반겼다.
「세연아, 왔니.」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곱게 나이가 드셨다는 말이 딱 어울리도록 우아한 기품이 넘친다. 하지만 그만한 대접을 받는 것은 이상하게 싫어하는 분이라는 걸 안다.
세연은 교수님의 부인 되시는 분을 처음 마주쳤을 때 사모님이라고 불렀다가 서운하다며 얼마나 곤혹을 치렀는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밖에 엄청 춥지? 아줌마가 유자차 타 줄게.」
「고맙습니다.」
「오늘도 레슨 열심히 받으렴.」
웃음과 응원을 받으며 세연은 교수와 방 안으로 들어갔다.
교수의 방은 연구실이자 레슨실이었다.
두꺼운 책들과 음반 등이 정리되어 있는 책장과 선반,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 책상. 그리고 정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그랜드 피아노까지.
조금 작지만, 모든 것이 다 갖춰진 완벽한 레슨실이다.
세연은 패딩을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그리고 바로 가방에서 악보부터 꺼내는 세연을 보며 교수가 작게 웃었다.
「세연아, 차부터 한 잔씩 마시고 하자꾸나. 그사이 따뜻한 물로 손이라도 조금 녹이고.」
「어……. 예. 갔다 올게요.」
늘 세연이 먼저 말하기 전에 교수는 앞서 배려를 해 줬다. 허락을 받고 세연은 화장실로 향했다.
세면대에 따뜻한 온수를 받아서 손을 넣자 사르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세연은 그대로 손가락 사이사이를 움직이며 스트레칭했다.
긴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금방 손을 녹인 세연은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
책상에 앉아 있던 교수는 액자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세연은 그간 이 방에 들락날락하면서도 액자는 본 적이 없었다.
「교수님?」
「…….」
교수는 말이 없다. 세연은 피아노 의자에 앉아 교수가 자신을 알아차리길 기다리며 교수를 지켜보았다.
그리움과 회한이 가득한 눈빛이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지게 만든다.
세연은 교수가 알게 모르게 과거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어렴풋하게 알았다. 늘 점잖고 자상하시지만, 그 이면엔 화를 내지 않는 것이 아니라 화를 내지 못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똬리를 틀고 눌러앉아 있었다.
세연은 가끔 교수가 무서웠다.
잠시 기다리자 교수가 고개를 들었다.
「아, 미안하구나.」
「아녜요.」
세연은 괜찮다고 이야기하다가, 문득 자기도 모르게 이어 물었다.
「사진인가 봐요?」
바보나 할 법한 이상한 질문처럼 들렸지만,
「아무것도 아니란다.」
교수는 더더욱 이상한 대답을 하며 액자를 치웠다.
세연은 무언가 이상했지만 더 캐묻는 건 굉장한 실례가 되리라는 것을 직감하고 입을 다물었다.
교수는 아무렇지도 않게 세연에게 이러저런 것들을 물어보았다.
연습에 대한 것, 학교에 대한 것. 그리고 심지어 부모님과 관계에 대한 것까지. 교수가 신경 써 주는 부분은 상당히 폭넓고 깊었다.
아주머니가 타 주신 유자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던 세연은 교수가 그냥 친한 할아버지처럼 너무 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유자차를 다 마시고 교수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분위기가 급변했다.
「이제 레슨을 시작해 보도록 하자, 세연아. 본 교수가 오늘까지 인템포로 연주할 수 있도록 연습해 오라고 했던 곡은 다 준비했겠지?」
「예. 할 수 있어요.」
「해 보자.」
지시에 따라 세연은 차분하게 연주를 시작했다. 교수가 만들어 오라고 했던 곡은 쇼팽의 연습곡 10-7.
세연은 박 교수의 레슨을 원하는 학생이 한국에 얼마나 많은지 잘 알고 있었고, 그 행운이 자신에게 찾아왔다면 결코 낭비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정말 최선을 다해 곡을 연습해 왔다.
교수 역시 레슨엔 열성적이었다.
「손에 익지 않았구나. 절뚝거리고 있어. 늘 손가락을 다음 건반에 준비시키고 있어야 한다.」
「예.」
「다시 해 보자.」
자상했던 교수는 평상시의 모습과 피아노를 가르칠 때의 모습이 굉장히 달랐다. 엄한 목소리에 따라 세연은 피아노에 집중했다.
「왼손에 무게를 더 실어야 한다. 주 리듬은 오른손에 있지 않아.」
교수가 세연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그렇다고 어깨가 기울어지면 안 되지. 왼손에 힘을 주는 것은 손만으로 충분해. 자세를 바로 해야 한다.」
극도로 집중하면서 머리가 하얗게 되는 기분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손은 움직이고 있었다.
세연은 정신을 놓지 않기 위해 기를 쓰고 피아노에 덤벼들었다.
그렇게 몇 번 곡을 되풀이하며 연습하고, 다음에 레슨을 받으러 올 때까지 고쳐야 할 문제점들을 정리해서 악보에 썼다.
교수는 악보에 직접 지시사항을 적어 주기도 했다.
그 지시들은 대부분 근사하게, 혹은 아름답게 같은 추상적인 말들이라 바로 납득하고 곡에 섞어 내는 건 힘들었지만, 세연은 교수가 가르치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결국 그 모든 추상적인 어휘들이 이해되는 지점이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실제로 요 5개월간 세연은 이전까지 피아노를 배운 5년 어치의 성장보다 훨씬 더 빠르고 크게 성장한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새삼 지금 자신을 가르치는 교수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생각하면서 레슨시간에 집중했다.
그때였다.
「여보……. 잠시만.」
「레슨 중인데.」
「지금 종혁 군이 찾아왔어요. 일단 문을 열어 줬는데…….」
교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옆에 세연이 있다는 것을 의식했는지 그녀에게 말했다.
「세연아. 잠시 쉬었다 하자꾸나.」
「예. 괜찮아요.」
「미안하다.」
그리고 교수는 방 밖으로 나갔다.
세연은 종혁이라는 이름을 듣고는 작년에 만났던 한 대학생을 떠올렸다.
교수와 같이 있던 세연은 처음 보는 대학생이 교수의 제자라는 것을 알고는 살갑게 인사했다.
같은 스승을 두고 있는 제자라면 남남이 아니었다.
하지만 종혁은 한참이나 어린 세연이 인사하는데도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시선을 피했다.
키도 크고 훤칠하게 생겨선 중학생에게 낯을 가리거나 할 만한 사람으론 전혀 보이지 않았는데, 종혁은 마치 죄 지은 사람처럼 세연을 피했다.
그때 이후로 처음이다. 세연은 그래도 나가서 인사를 해야 하는 게 옳은 게 아닌가 고민하고 있는데,
「돌아가게.」
처음 듣는, 차갑기 짝이 없는 교수의 목소리가 세연의 발걸음을 멈추었다.
곧이어 우울한 목소리가 들렸다.
「교수님, 저 같은 놈이 이런 말 할 자격이 없다는 건 잘 압니다.」
그 목소리는 축 늘어져 있었지만 모종의 의무감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1주기이지 않습니까?」
「…….」
「제발 부탁드립니다. 오늘…….」
간절히 비는 목소리에 도대체 무슨 일인가 나가 보고 싶을 지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답은 단호했다.
「못 가네.」
제자가 이렇게나 부탁하는데, 교수는 칼날같이 섬뜩한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
문 건너 듣는 세연도 숨이 막힐 지경인데, 바로 앞에 있을 종혁은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가, 교수의 말에 깨어졌다.
「본, 아니……. 내가, 왜 그 배은망덕한 녀석을 보러 가야 한단 말인가?」
덜덜 떠는 소리가 분노한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세연은 교수가 단순히 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배은망덕한 녀석이 누굴 말하는진 모르겠지만 교수에게 있어선 애증의 대상처럼 느껴진다.
종혁이 다시 용기를 내어 말했다.
「교수님, 제가 그놈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닙니다. 교수님을 위한 일이에요.」
「무슨 소린가?」
「지금 거두신 아이 있지 않습니까? 세연이라고 했던. 그 아이…….」
「입 다물게.」
교수가 싸늘하게 말했다. 문 건너 세연이 있다는 것을 다분히 의식한 말이었다.
잠시 후 교수가 사과했다.
「미안하군.」
「아닙니다…….」
종혁은 말을 삼갔다. 지금 교수에겐 어떤 말이든 쉽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듯하다.
세연은 저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진 모른다.
하지만 그 사이에 모르는 사람이 한 명 끼어 있고, 거기에 자신까지 얽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조금 무서워졌다.
늘 자신이 어떻게 이렇게 대단한 교수님을 사사할 수 있는지 미스터리였다.
하지만 몇 번을 물어봐도 교수는 세연이 피아노에 재능이 있기 때문이라고만 답했다.
믿는다. 하지만 믿기 때문에 더더욱 두려워졌다.
세연은 꼼짝도 않고 뻣뻣하게 서 있었다. 자신의 심장소리와 문 밖의 숨소리마저 모조리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침묵을 지키던 교수가 한층 더 참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종혁 군. 난 피아니스트를 키워 내는 걸 업으로 하고 있지만……. 또한 사람을 키우기도 하네. 그래, 난 사람을 키웠어.」
낮게 뇌까리는 듯하던 목소리가 일순, 고개를 든다.
「그런데 사람이 그래도 되는가?」
「…….」
「난 교육자로서 실패했고, 그…… 막돼먹은 녀석은 사람이 아닐세. 사람이면 그러면 안 돼!」
중얼거리던 목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결국엔 고함으로 변했다. 세연은 움찔하며 눈을 감았다.
교수의 덜덜 떨리는 목소리가 울린다.
「그렇게까지……. 왜…….」
「교수님…….」
「난 그 녀석을 이해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네. 아무리 피아노가 전부였다 해도 그럴 순 없어…….」
종혁은 차마 말을 받지 못하고 침묵했다.
잠시 후, 스스로 지나쳤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교수가 다시 차분하게 하지만 냉엄하게 말했다.
「못 가니까, 이만 돌아가게. 난 자네 이해함세. 나보다 더 힘들겠지. 그러니 자네 탓할 생각은 없어. 그러니까 돌아가게. 내가 제정신일 때.」
「교수님…….」
「마지막으로 말하지. 나가게.」
「…….」
잠시 후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교수가 방으로 돌아왔다.
「…….」
세연은 여전히 서 있는 상태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꽉 쥔 주먹과 경직된 어깨가 바들바들 떨렸다.
그 모습을 본 교수가 다가와선 사과했다.
「놀랐구나. 미안하다, 세연아.」
「……아니에요.」
고개를 젓자 교수는 두 손으로 세연의 어깨를 감싸 진정시켜 주고는 의자에 가서 앉았다.
세연은 교수가 그냥 앉는 것이 아니라, 어쩐지 주저앉는 것 같다고 느꼈다.
종혁에게 고함을 지르던 교수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절망에 지치고, 회한에 젖은 늙은 남자만이 있을 뿐이었다.
「레슨은 여기까지 해야겠구나.」
「오늘…… 혹시 바쁘신 일이 있으셨나요?」
교수가 눈을 들었다. 수심에 찬 눈이 잠깐 사이 굉장히 피로해 보였다.
「아니, 없단다.」
「…….」
아무 일도 없다면 저렇게 제자가 찾아와서 제발 같이 가 달라고 부탁할 이유도 없었다.
오늘 교수는 무언가 빠져선 안 될 중요한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세연은 혹시 자신의 레슨 때문에 방해가 된 것이 아닌가 싶어 안절부절못했다.
교수가 그런 세연에게 말했다.
「겁먹지 말려무나. 괜찮으니까.」
「하지만…… 화나셨잖아요?」
「화?」
교수가 힘없이 씁쓸하게 웃었다.
「어쩔 수 없지 않느냐. 나도 사람인 것을.」
교수가 사람이라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교수는 굳이 그것을 확인해야겠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세연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몰랐다. 하지만 마음이 시키는 대로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너무 화내지 마세요. 제가 있잖아요.」
「……응?」
교수가 놀랐는지 눈을 크게 떴다. 그 모습에 힘을 얻은 세연이 다시 용기를 내어 말했다.
「지금은 열심히 배우고, 커서는 교수님 계신 대학에도 가고, 피아니스트도 될 거에요. 교수님 속상하시지 않게 말 잘 듣고 열심히 할 테니까요…….」
「하…….」
웃음이 막 나오려다가, 삼켜졌다.
아무리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스승에게라지만 이런 부끄러운 말을 하는 데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교수는 세연을 바라보며 따뜻하게 말했다.
「고맙구나. 세연아.」
「교수님께 가르침받는 제자로서 이 정도는 기본이죠.」
약간 기분이 풀린 듯한 교수를 보며 세연이 기운차게 말했다.
교수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말이다, 너무 열심히 하진 말거라.」
「……예?」
지금까지 그렇게나 열성적으로 지도해 놓고는 이제 와서 엉뚱한 소리였다. 세연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교수가 이어 말했다.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내가 궁극적으로 네게 가르치고 싶은 건 그런 것이구나.」
「잘 모르겠어요, 교수님.」
「그래…….」
이해를 못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설명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세연은 일단 그 말을 머리 한편에 담아 두었다. 언젠가 자신에게 도움이 될 말이라 믿었으므로.
교수는 자세를 조금 바로 하더니 세연에게 말했다.
「그래도 지금은 열심히 하고.」
「열심히 해요? 하지 말아요?」
「적어도 저번 콩쿠르 때 만났던 네 러시아 친구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단다.」
교수가 제시한 기준은 세연에게 정말 가혹하게 느껴졌다.
세연은 생전처음으로 상을 탄 상트페테르부르크 청소년 콩쿠르에서 만났던 러시아 소녀를 떠올렸다.
피아노 치는 인형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예쁜 아이였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난데없이 울음을 터뜨려 세연을 곤란하게 하기도 하고, 조금 심약해 보이긴 했지만 세연을 괴롭혔던 같은 러시아 남자애와 말싸움을 하기도 하고, 종국엔 그야말로 괴물 같은 실력으로 대상과 모든 특별상을 거머쥐었다.
앞으로도 차이가 좁혀지긴커녕 커지기만 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교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세연이 따라잡을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세연은 자신을 4개월 만에 그런 큰 무대에 올려 준 교수를 믿어 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저 코피 터져 가면서 열심히 해야 할걸요?」
「그래, 그러니까 지금은 열심히 해야지.」
「나중엔 열심히 하지 말고요?」
「그건 그때 가서 보자꾸나.」
열심히 하지 말라는 말이 대체 무슨 말인가 했더니, 최소 그런 괴물급의 경지는 되고 나서 떠올리라는 말이었다.
세연은 머리 한편에 밀어 두었던 교수의 말을 더더욱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었다. 지금은 열심히 해야 할 때다.
생각난 김에, 세연은 교수에게 말했다.
「아, 맞아. 교수님. 저 영웅 폴로네이즈 봐 주시면 안 될까요? 타티아나가 했던 것처럼 고쳐 봤는데 아직 잘 모르겠어서요.」
「굳이 그걸 따라 할 필요는 없단다, 세연아.」
「하지만 교수님은 걔가 하는 게 마음에 든다고 하셨잖아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전화로 이야기를 나눌 때도 그랬고, 세연이 한국으로 귀국해서도 교수는 타티아나라는 소녀의 연주를 몇 번이고 돌려가면서 상당히 자주 듣는 듯했다.
앞으로 세연의 경쟁자가 되리라 생각되는 상대를 분석하는 것 치고는 경우가 잦고, 홀로 깊은 고민에 빠지는 듯한 모습을 보일 때가 많았다.
하지만 교수는 세연의 물음엔 그저 타티아나가 리듬을 다루는 방법이 어쩐지 익숙하게 느껴졌을 뿐, 그 외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런 의미가 아니었단다, 세연아. 넌 네 음악에 집중하는 것으로 충분해. 100명의 음악가가 있다면 100개의 음악이 있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잖니.」
「하지만…….」
「하지만이 아니지. 난 임세연의 피아노가 러시아의 신성을 이길 날이 오리라 믿는단다.」
교수님이 러시아의 신성이라고 말할 정도로 뛰어난 경쟁자.
하지만 세연은 기가 죽기보단, 더욱 열의에 불탔다.
「열심히 할게요.」
「그래. 나도 열심히 가르쳐 주마. 레슨…… 조금만 더 하자꾸나.」
「예!」
열정 넘치는 세연을 보며 교수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신경 쓰이는 일도 많고 당장 오늘만 하더라도 심란한 상태겠지만, 교수는 다시 세연의 피아노를 지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