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화
니콜라이 선배를 보내고, 에르네스트와 약속했던 대결을 하기 위해 연습실로 향했다.
하지만 비장의 곡을 보여 주겠다고 했던 에르네스트는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는지 다음에 보여 주겠다고 했다.
난 에르네스트가 준비한 곡이 듣고 싶었지만, 딱히 보채진 않았다.
때문에 오늘 대결은 쇼팽의 연습곡 25-6으로 치렀다. 역시 속주 대결이다.
대결 방법은 단순했다. 스마트폰으로 스톱워치를 실행시키고, 연주를 한다.
마지막 음을 치는 것과 동시에 스마트폰을 터치해서 스톱워치를 정지시킨다. 가장 빠른 사람이 승자가 된다.
간단명료한 규칙이지만 음악이 음악으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망가져 버리도록 템포를 올리면 당연히 패배다.
감당해 낼 수 있는 최고 속도의 템포를 찾아내서 지치거나 걸려 넘어지지 않고 안정적으로 이어 나갈 필요가 있었다.
막 연주를 마친 에르네스트가 재빠르게 스마트폰을 누르고 집어 들었다.
“1분 34초 72. 역시 어렵네.”
“굉장하네요.”
“뭉개진 거 없었지? 내가 듣기엔 없었는데.”
“예. 제가 듣기에도 없었어요.”
쇼팽의 연습곡 25-6은 3도 트릴 연습곡이다.
완벽한 손가락 독립 연습을 위해 존재하는 곡이면서, 쇼팽의 연습곡들 중 최고 난이도의 곡이기도 하다.
에르네스트의 실력은 역시 흠잡을 곳 없었다.
정박에 맞춰 인템포로 연주하면 2분 정도 걸리는 곡이다.
거기에서 마지막 느린 렌토 부분을 제하고 앞부분만 연주하면 1분 45초 정도. 이것을 에르네스트는 정확하게 연주하면서도 11초나 앞당겼다.
말이 11초지 2분도 안 되는 곡에서 11초를 당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네 차례야.”
“…….”
에르네스트는 결과가 마음에 드는지 씩 웃으며 날 바라봤다. 어디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것 같다.
난 피아노 앞에 앉아 스톱워치를 준비시켰다. 그리고 왼손으로 스톱워치를 가동시킴과 동시에 연주를 시작했다.
오른팔을 편하게 늘어뜨린 채로, 손가락만을 움직여 반음계적 트릴을 연주했다.
하늘거리며 공중을 떠다니다가 그대로 날아올라 어디론가 빠져나가버리는 것 같은 소리가 울린다.
오른손은 가볍게 트릴하면서 왼손으로 주 멜로디를 그렸다. 박자에 조금 신경을 썼다.
“…….”
별관의 연습실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든다.
평소 연습실에 틀어박혀서 하농 연습곡과 바흐의 평균율 등으로 손을 풀고 나면 다른 연습곡들을 연주하곤 하는데, 이 쇼팽의 연습곡 25-6은 그중에서도 빠지지 않는 곡이었다.
다른 고난도 연습곡인 10-1이나 10-8등도 많이 연습하긴 했지만, 이 곡은 하루에 100번이고 연습해도 부족함이 느껴질 정도라 늘 빼놓지 않았다.
에르네스트에겐 조금 미안하다. 그는 내 주력 연습곡 중 하나가 이 곡인지 모르고 제안했을 테니까.
곡을 마치고 스마트폰을 터치했다.
1분 32초 55.
“너 사람 맞아……?”
에르네스트는 실례스럽게도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때로 사람 같지 않다는 말이 연주자들 사이에선 최고의 찬사가 되기도 한다. 난 그런 말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사람이잖아요?”
“손에 모터 같은 거 달아 놓은 거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어휘를 조금 고르는 게 어때요 에르네스트?
난 황당하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팔을 내밀었다.
“만져 보시겠어요?”
“……원 참, 내가 이런 헛소릴 다 하게 되네. 어쨌든 기다려. 마실 거 사 올 테니까.”
에르네스트는 잠시 날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젓고는 투덜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뭘 마시겠냐고 묻진 않았다. 난 탄산이나 카페인이 들어 있지 않은 과일주스라면 뭐라도 상관없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에르네스트가 돌아왔다. 그는 들고 있던 캔을 따선 내 쪽으로 주었다.
이젠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지만 난 꼬박꼬박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에르네스트가 탄산음료를 들이키며 중얼거렸다.
“또 졌네…….”
“에르네스트도 저와 별 차이 안 나잖아요?”
“2초가 별 차이가 아니야? 엄청난 차이라는 걸 알면서 그래?”
피아노 속주는 스포츠 같은 것이 아니었지만 인간의 한계를 겨루는 모든 경쟁에선 2초가 아니라 1초도 안 되는 찰나의 시간도 중요하게 여겨진다.
별 차이가 나진 않지만 어쨌든 내가 이긴 것이다. 덕분에 지금 이렇게 음료수를 얻어 마시고 있고.
하지만 으스댈 일은 아니다.
“그리고 오늘 제가 이겼다 한들, 전적은 여전히 동점이고요.”
에르네스트에게 늘 이기는 건 아니었다.
그는 나보다 손이 훨씬 크고 길었으며, 그 손을 피아노에 맞춰 단련시킨 것이 10년도 넘는다.
그에 비해 난 1년에 불과했다. 테크닉 대결에선 내가 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에게서 자주 이기는 부분은 테크닉적인 부분이 아니라 선곡에서 시작된다.
기억하는 레퍼토리에서 원하는 곡을 정확하게 끌어 올리는 능력을 많이 잃어버렸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회복한 상태였다.
에르네스트가 혀를 찰 정도로 넓은 이 레퍼토리에서 그를 꺾을 곡들을 몇 곡 추려 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나와 에르네스트는 서로 이기고 지는 것을 당연히 여기며 대결에 임했다. 내가 이 시간을 즐거워하듯, 그 역시 그러하리라 믿는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보기 드물게 약간 착잡해 보였다.
“에르네스트? 무슨 일 있으신가요?”
“일? 아니, 없는데.”
“고민이 있으신 것 같아 보이시네요.”
“고민…….”
에르네스트가 중얼거리면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냥,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연습해도……. 결국 우리 피아니스트가 청중들이 지켜보는 무대에 올라가는 건 솔로가 아니면 현악기 주자들과 함께인 게 아닌가 싶어서.”
“……?”
“아니, 그냥 헛소리야. 잊어버려.”
헛소리를 이렇게 정상적으로 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에르네스트의 말은 다른 것을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 난 그것을 정확하게 짚어 낼 순 없었지만, 어렴풋하게 느껴지는 그의 생각을 더듬어 말로 풀어내었다.
“피아노 듀엣이 있잖아요?”
“어……?”
“홀로 무대에 서지 않고, 현악기 없이 하려면 피아노 듀엣을 하면 되겠네요. 그렇지 않나요?”
“응?”
너무 당연한 소리였는데 에르네스트는 생전처음 듣는 말인 양 굴었다.
희한했다. 일전에 나와 라흐마니노프의 조곡을 함께 듀엣으로 연습해 본 적도 있으면서.
난 연주회 경험이 일천했지만 만약 에르네스트와 함께 무대에 올라간다면 문제없이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같이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에르네스트는 묘한 눈초리로 날 바라봤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참는 듯한 모습이다.
“왜 그러시나요?”
“……나중에 이야기할게.”
그는 말을 아꼈다.
***
미하일 선생님과 레슨이 끝나고, 난 상담을 요청했다. 당연히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에 대한 건이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선생님.”
“음.”
미하일 선생님은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하시더니, 내게 말했다.
“바로 진행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단다. 어차피 지금 일정을 잡고 바로 다음 주에 한다거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니.”
협연이란 그냥 지나가다 마주친 연주자와 그 자리에서 세션을 하는 것과 차원이 다른 문제다.
연주회를 하게 된다면 티켓을 팔아야 하고, 돈이 걸려 있다.
난 금전적 문제에서 조금 자유로운 편이지만 오케스트라를 운영하는 측에선 절대 그렇지 않다.
프로그램 하나를 짜는 데에도 음악감독과 몇 번이고 미팅을 해서 상의를 해야 하고, 함께 연습을 하는 것도 결코 쉽지 않다.
빠르게 하려면 얼마든지 빠르게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짧게는 몇 주에서 길게는 년 단위로도 걸릴 수 있다.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연주회에 관련된 문제들을 신경 쓰지 않고자 하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기도 했다.
난 쓸 수 있는 방법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약간의 자존심 문제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연주회가 아니라 연주 그 자체다.
“챔버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한다면 협주곡을 해야 할 텐데……. 네가 지금 할 수 있는 협주곡이 몇 곡이지? 타티아나.”
“세 곡 정도예요.”
“자신 있는 곡은?”
“……한 곡도 없어요.”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1번,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
셋 모두 악보는 거의 다 암보했고, 당장 연주하라 해도 할 수는 있지만, 완성도엔 자신이 없었다.
난 독주곡에 있어서도 여전히 음악적 완성도에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하물며 한참이나 부족한 협주곡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미하일 선생님이 물었다.
“더 작은 실내악을 해도 마찬가지겠지?”
“차이코프스키의 트리오라면 이제 할 수 있지만요.”
“트리오는 너무 작지. 그래도 챔버 오케스트라와의 기회 아니더냐?”
일반적으로 60-100명도 넘게 모여 만들어지는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비해 챔버 오케스트라는 훨씬 작은 규모인 15-30명 정도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도 어지간한 협주곡들은 연주할 수 있는 오케스트라이다.
미하일 선생님은 이러한 오케스트라와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세 명이서 하는 트리오로 쓰는 건 너무 아깝다고 생각하시는 듯했다.
선생님은 생각하시는 바가 많으신지 턱을 슬며 말씀하셨다.
“어디 보자……. 실내악은 너무 작고, 결국 협주곡이란 말이지. 바로크 협주곡은 너무 마이너하고, 낭만 시대로 가면 챔버 오케스트라로는 오케스트라의 규모가 작고. 사실 가장 알맞은 건 고전 협주곡인데……. 모차르트 협주곡은 어떻지? 타티아나.”
“쉬운 협주곡이라면 연습해서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음…….”
모차르트의 협주곡은 연주 난이도가 아주 높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 대답을 듣자마자 미하일 선생님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익혀야 한다면 굳이 그렇게 서두르듯 곡을 만들어서 급하게 할 이유는 없어 보이는구나.”
“그런가요…….”
“좋은 기회야. 좋은 기회지만…….”
망친다면 끔찍해질 것이다.
세상엔 정말 많은 챔버 오케스트라가 있고 그중엔 직장인들이 취미로 하는 곳도 있을 만큼 딱히 권위나 규격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는 달랐다.
역사와 권위를 가지고 있는 명망 높은 오케스트라인 것이다.
미하일 선생님은 고민하고 계셨다.
선생님은 평소 날 상당히 고평가하시지만, 그건 독주자로서의 역량에 한정 짓고 계셨다.
미하일 선생님은 지극히 현실주의자셨다.
선생님은 협연자로서 내가 상당히 약하다는 것을 이해했고, 정확하게 현실에 맞춰서 내게 크게 문제가 생기지 않고 경력을 쌓을 수 있길 바라셨다.
선생님이 조심스럽게 말씀하셨다.
“챔버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하기 전에 실내악 무대 경험이 있으면 좋겠다만…….”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혹여나 내가 상처받지 않을까 주의하시는 듯하지만, 나 역시 현실주의자였다.
난 아직 데뷔 연주회도 열지 않은 학생에 불과했다.
피아니스트로 사는 데에 있어서 데뷔라는 게 가수나 밴드처럼 딱히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처음이었다.
그런 내가 지금 바로 챔버 오케스트라와 함께 협연을 해서 반드시 연주회를 성공시킬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내가 미하일 선생님의 말에 동의를 표하자 선생님이 옅게 웃으며 제안하셨다.
“타티아나. 그렇다면 협연자를 구해서 실내악 연주회를 해 보는 건 어떻겠느냐? 아마 그리 어렵지 않을 텐데.”
“제가 개인적으로 하는 건가요?”
“그래. 소속사 없이 솔로이니 필요하다면 혼자 하면 된단다. 어려울 건 없어. 협연자를 구하고, 홀을 대관하면 그만이다. 내가 도와줄 테니 걱정 말거라. 비용은…… 유리 알렉세예비치와 이야기를 해 봐야겠군.”
실내악 연주회라면 조금 부담이 덜하다.
내가 할 일은 아마 프로그램을 협연자와 정하고 날짜에 맞춰 가서 무대에 서는 것 정도이리라.
난 매니저가 없으니 그 외에도 신경을 써야 할 일이 있긴 하겠지만, 선생님과 아버지가 도와주신다면 분명 별문제 없을 것 같다.
그렇게 연주회를 해야 한다면…….
“…….”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났다.
“미하일 선생님.”
“그래.”
“협연자라면…… 도와줄 사람이 있을 것 같아요. 바이올린과 첼로 한 명씩요.”
“오, 그러하냐?”
“예. 실력도 확실해요.”
내가 생각하는 협연자는 막심 선배와 니콜라이 선배였다. 그 두 선배의 실력은 직접 확인까지 해 봤으니 확실했다.
물론 내가 막심 선배에게 저질러 놓은 잘못이 있으니 같이 무대에 오르잔 이야기를 하기 전에 사과를 해야겠지만, 난 그 외의 다른 대안을 생각하지 못하겠다.
그리고.
“그리고 연주회 형태는 자선 연주회로 하는 게 어떨까요?”
“자선 연주회?”
미하일 선생님이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그것도 나쁜 건 아니고 언제고 하면 좋은 일이긴 하다만……. 왜지?”
“절 도와줄지도 모르는 협연자들이 10학년 선배거든요.”
“선배라고?”
그제야 내가 뭘 하고 싶어 하는지 이해한 선생님이 짧게 웃음을 터뜨리셨다.
“그렇다면 자선 연주회로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구나.”
“예. 학생들이 모여 학교 이름으로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아마 대관도 제가 개인으로 하는 것보단 조금 쉽게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이다마다. 정기적으로 학교에서 무료 연주회를 할 때 대관하는 홀이 많지. 그중 한 곳에 부탁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게다.”
내 개인으로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만, 학교 측에서 하면 훨씬 더 간단할 것이 분명했다.
선배들과 함께 자선 연주회로 무대 경험을 가져 보겠단 발상은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신경 쓸 일도 훨씬 덜할 것 같았고.
난 그렇게 내 편의를 생각해서 말해 본 것인데, 미하일 선생님은 약간 다르게 생각하시는 듯했다.
“기특한 생각을 했구나, 타티아나.”
“선생님이 말씀해 주셨던 것이었어요.”
“그래도 바로 이렇게 네 이름이 아닌 학교 이름으로 연주회를 하고자 마음을 먹기가 쉽지가 않은데 말이다.”
협연 무대에 오르는 경험을 필요로 하는 내가 찾아낸 방법이 학교와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된다면 정말 기쁠 것 같다.
그리고 그렇다면 더더욱, 힘을 내어 최선을 다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