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201화 (201/1,277)

##  201화

“온다고 하죠?”

“예. 그렇네요.”

사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고 있다. 그에 비해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는 조금 미묘한 표정이었다.

리처드는 대놓고 인상을 쓰고 있었다.

교내에서 그렇게나 높은 인기를 구가하는 에르네스트는 막상 친구들 사이에선 그리 인기가 많지 못했다. 슬프네요, 에르네스트.

잠시 기다리자 에르네스트가 스터디룸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섰다.

그러고는 앉아 있는 면면들을 살폈다. 에르네스트의 표정 역시 좋지만은 않았다.

그가 물었다.

“타티아나. 무슨 이야기인데?”

“아, 그게 말이죠……. 일단 앉으시겠어요? 에르네스트. 마실 것이라도 드릴게요.”

“어? 응…….”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분위기가 이럴 이유는 없었다.

일단 앉으라고 권하고 음료수를 컵에 따라 주자 에르네스트가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고마워.”

에르네스트는 작게 중얼거리며 감사를 표하더니 건네 준 음료수를 원샷하고는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내게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급하기도 하셔라.

난 차분히 다음 달경 열릴 자선 연주회와 그 무대에 오를 찬조 연주자를 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에르네스트 역시 난데없는 자선 연주회라는 것엔 조금 의아한 듯했지만, 거기에 별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아나스타샤에게 툭 물었다.

“아나스타샤, 너도 나갈 거야?”

“그러려고.”

“그런 거라면 나도 나가야지.”

아나스타샤도 1초도 고민하지 않고 대답하더니, 에르네스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주저 않고 바로 참가 의사를 밝혔다.

“고마워요, 에르네스트. 큰 힘이…….”

“듀엣하자.”

“예?”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에르네스트가 말했다. 강렬한 눈빛이 날 직시했다.

“안 그래도 어제 그 이야기하려고 했어. 잘됐네.”

어제라면 연습실에서 쇼팽 연습곡 25-6로 대결했을 때 일이었다.

난 에르네스트에게 피아노 듀엣 무대를 가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고, 에르네스트는 그것을 진지하게 고민해 본 모양이었다.

솔직히 말해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다.

난 그간 에르네스트와 같이 여러 번 피아노로 합을 맞춰 보면서 우리가 듀엣을 해도 꽤 잘 어울릴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프로그램에 피아노 듀엣을 추가하는 건 괜찮게 느껴졌다.

그런데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잠깐만.”

아나스타샤가 다리를 꼬고 앉아 이쪽을 향해 말했다. 목소리는 시큰둥하지만 눈은 어느 때보다 매서웠다.

“타티아나는 이미 바이올린과 첼로도 구했어. 연주회에 올라서 타티아나는 트리오를 못해도 두 곡은 하게 될 거야. 거기에다가 듀엣까지? 대체 타티아나에게 몇 곡이나 시키려는 거야?”

“그 트리오를 내가 하면 되겠네.”

“뭐?”

“내가 맡을게.”

내가 소화해야 할 곡의 개수가 부담스러워질 것이란 지적을 에르네스트가 간단히 일축했다.

그 마음은 고마웠다. 하지만 막심 선배와 니콜라이 선배와의 트리오는 내가 해야 했다.

무엇보다 이 연주회를 내가 주도적으로 추진하려는 이유는 협연 경험을 쌓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조심스레 말했다.

“저기, 에르네스트. 미안하지만 트리오는 제가 하려고 해요.”

“아직 정한 건 아니잖아?”

“그렇다면 양보해 주실 수 없나요?”

“……하고 싶나 보네.”

적당히 설명했는데도 에르네스트는 들어주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내가 선배들과 협연을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이해해 준 듯했다.

그는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윽고 내게 말했다.

“네가 하고 싶다는데 내가 막을 순 없겠지. 그렇게 해. 그런데 내 제안도 들어줬으면 좋겠어. 난 우리 피아노과가 듀엣도 해야 한다고 생각해.”

“듀엣…….”

“그래. 너도 어제 그랬잖아. 우린 무대에서 듀엣을 할 수도 있다고.”

에르네스트가 다시 날 설득했다.

“나랑 하자. 재미있을 거야.”

“…….”

피아노 듀엣, 그냥 같이 해 보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든다.

선배들과의 트리오 두 곡에 에르네스트와의 듀엣까지 세 곡.

그것도 혼자 연습해서 될 곡들도 아니고 같이 모여서 한 달 만에 무대에 올릴만한 완성도를 갖추려면 난 정말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아나스타샤의 말처럼 그건 작은 부담은 아니었다.

하지만 못 할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에르네스트 역시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승낙 쪽으로 생각이 기우려는 찰나, 아나스타샤만이 날 걱정하며 반대해 주었다.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 짜 봐야 알겠지만 난 프로그램에 듀엣을 넣는 건 여전히 반대야. 타티아나에게 갈 부담도 부담이고, 구성도 안 어울려.”

“뭐가 안 어울리는데?”

“팸플릿을 만든다고 생각해 봐. 자선 연주회라는 이름이 붙겠지만 메인이 뭐가 될지 제목은 나와야 한다고. 그리고 그 주인공은 피아노와 바이올린, 첼로의 트리오가 되겠지. 나머지는 찬조 연주자로 물러나 주는 게 맞아. 그런데 듀엣? 헷갈리잖아?”

막 반박하려던 에르네스트가 입을 다물었다. 이 부분은 아나스타샤의 말도 옳았기 때문이다.

연주회를 열게 되면 어떠한 테마를 가지고 여는지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우리가 할 자선 연주회의 테마는 당연히 피아노 트리오다.

그 테마를 살려야 한다는 아나스타샤의 의견은 지극히 상식적이었다.

나 역시 현실적인 고민을 하고 있는데, 에르네스트가 낮게 중얼거렸다.

“아니, 그래서 어쩌자고…….”

“그냥 너랑 내가 이번엔 같이 물러나 주면 될 일이라고.”

“싫은데? 넌 그러고 싶어?”

“…….”

에르네스트는 약간 고집을 부렸다. 난 아나스타샤가 그런 그를 비웃으리라 생각했는데,

“어쩔 수 없잖아. 이미 트리오가 메인인걸.”

생각 외로 아나스타샤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에르네스트는 더더욱 거세게 몰아붙였다.

“뭐가 어쩔 수 없다는 건지 난 이해 못 하겠어. 앞서 트리오를 하고 그대로 피아노를 한 대 더 이동시켜서 듀엣으로 이어 가는 건 하나도 안 이상해. 충분히 할 수 있는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해서 다 해야 하는 건 아니거든?”

“넌 그냥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에르네스트, 네가 뭘 알아?”

아나스타샤가 신경질적으로 답했고,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에르네스트가 비웃었다.

“하나는 알겠다. 네가 재미없어졌다는 건.”

“……뭐?”

짜증이 서린 눈으로 에르네스트를 보고 있던 그녀가 서늘하게 되물었다. 옆에 있는 내가 다 무서워질 정도였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우습지도 않다는 듯 계속해서 말했다.

“이전 같았으면 듀엣 정도가 아니라 피아노 세 대를 놓고 모차르트 협주곡 7번이나 바흐의 피아노 협주곡을 하자고 했겠지. 아니야?”

“피아노 세 대를 어떻게 무대에 올려.”

“못 할 것도 없지. 어떤 홀을 빌릴진 모르겠지만 스타인웨이, 뵈젠도르퍼, 야마하 세 대를 다 갖추고 있는 홀은 꽤 많아. 아예 내가 알아 봐?”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7번은 피아노 3대를 필요로 하는 협주곡이었다. 그리고 바흐는 피아노를 4대까지 필요로 하는 곡을 쓰기도 했다.

피아노를 2대 이상 필요로 하는 곡들은 정말 드물었지만,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피아노과의 세 명이서 무대에 함께 오르자면 그런 선택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고, 아나스타샤 역시 잘 안다.

하지만 그녀는 인상을 썼다.

“정말 말은 쉽게 하는데 너 말야…….”

“난 말만 쉽게 한 적이 없어.”

에르네스트가 칼같이 대답했다. 그에겐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다. 그런 에르네스트를 보며 아나스타샤는 더더욱 거슬린다는 듯 말했다.

“자신 넘쳐서 좋겠다, 에르네스트.”

냉랭한 말투가 쏘아져 나간다.

“조금 짜증나네.”

“나도 답답하네. 네가 왜 이러는지도 모르겠고.”

에르네스트가 투덜거렸다.

난 두 사람을 보면서 언제쯤 중재할까 고민했다.

연주회 프로그램에 대해 상의하면서 이러저런 이야기가 오가는 건 이해하겠지만, 분위기가 더 험악해져서 좋을 건 없어 보였다.

발렌티나 역시 이 날 선 분위기에 쉽게 끼어들지 못하고 두리번거리더니, 마침내 빈틈을 찾아내어 입을 열었다.

“있잖아, 얘들아. 그러지 말고, 아직 아무것도 정해진 건 없으니 상의를 해 보는 게 어때? 어차피 에르네스트도 같이할 거라면 선택지가 넓어지면 넓어지지 좁아지진 않았을 거잖아?”

“난 듀엣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난 반대야. 다시 말하지만 타티아나는 트리오를 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으로 충분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두 의견이 엇갈린다. 그리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으르렁거린다.

두 사람은 어려서부터 소꿉친구라 서로를 잘 알았다. 그만큼 스스럼없기도 했다.

때문에 진지한 이야기를 할 때도 서로 말투가 공격적이기도 했다.

그러한 두 사람이 서로를 대하는 태도는 가끔 부럽기도 하지만, 이렇게 주먹만 오가지 않지 말로 치고 박을 땐 정말 살벌하다.

진지하게 음악을 두고 언쟁을 하는 러시아 음악가를 말릴 수 있는 방법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결국 모든 언쟁을 잠재워버릴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 나왔다.

결국 음악가의 망치는 피아노인 것이다.

“야, 아나스타샤. 연습실로 따라 나와.”

“웃겨, 진짜. 그렇게 말하면 내가 겁먹을 줄 알았어?”

“너랑 내가 피아노로 붙어 본 게 가장 최근이 언제지? 한 3년 됐나?”

“몰라. 알 바야?”

“감을 잃었나 본데, 아나스타샤.”

에르네스트가 낮게 쏘아붙였다.

“너 그때도 나한테 졌었어.”

“그게 그렇게 좋았나 봐? 아직도 기억할 정도로?”

“기억 못 하는 네가 문제 아닐까?”

“그럼 그 좋은 기억으로 한 6년 전은 기억해? 그때 그토록 서럽게 울던 게 이제…….”

“야, 잠깐만 내가 졌어. 그만해.”

마치 아나스타샤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윽박지르던 에르네스트가 곧바로 꼬리를 내렸다.

난 황당해서 입을 벌렸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

저도 모르게 패배 선언을 한 에르네스트는 스스로도 너무 흥분했었다는 걸 이제야 자각했는지 나와 리처드, 발렌티나를 돌아보며 헛기침을 했다. 무척이나 창피해하는 것 같다.

“……아니, 참나.”

“뭐?”

아나스타샤는 더 할 말 있냐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고, 에르네스트는 조금 약해진 기세로 말했다.

“말싸움 계속할 거 아니지?”

“싸움이나 된다고 생각해?”

“……그만두자.”

에르네스트가 맥이 빠졌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아나스타샤는 그런 에르네스트의 모습에 더욱 짜증이 난 듯했다.

“뭘 그만둬? 그만두긴.”

“그러면 뭐, 다 같이 진짜 연습실 갈래?”

에르네스트는 벌떡 일어서며 호기롭게 그렇게 말했지만,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 젠장. 잠깐만. 사샤를 뺀 세 명은 다 아나스타샤 편일 것 아니야?”

“형 나에 대해선 안심하는 거야?”

“넌 또 언제 넘어갔냐……?”

사샤가 장난스레 웃었고 에르네스트는 이렇게 형편없는 일이 어딨냐며 투덜거렸다.

물론 모두 농담이다. 여기 모인 사람들이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가 벌이는 대결에 참관인이자 심판으로 참석하게 된다면 연주자가 누구든 오로지 연주만 보고 판단하게 될 것이다.

난 내 친구들이 음악에 대해선 거짓말을 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두 사람의 피아노 대결의 승부를 낸다면, 아마 십중팔구 아나스타샤가 질 것이다.

“…….”

아나스타샤의 실력이 많이 뒤떨어져서가 아니다.

에르네스트가 너무 앞서 나가버리기 때문이었다.

난 두 사람 다 너무나 좋아하고, 앞으로 나보다 훨씬 더 대단한 음악가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지만, 당장 현재만 놓고 본다면 음악성도 테크닉도 에르네스트가 몇 수는 앞선다고 봐야 했다.

어떠한 사심도 없는 담백한 평가다.

슬슬 나서야 될 때라는 것을 느꼈다.

“두 분, 잠시 앉아 주시겠어요?”

“타티아나. 네가 보기엔 누가 이길 것 같…….”

“그런 것 몰라요. 앉아 주세요.”

“…….”

단호하게 잘라 말하자 에르네스트가 입을 다물더니 의자에 앉았다.

아나스타샤도 더 이상 까칠하게 에르네스트를 공격할 생각은 없는지 다리를 꼰 채 삐딱한 시선만을 보일 뿐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난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 옅게 웃으며 상황을 정리했다.

“두 분 말씀은 이해했어요. 에르네스트는 피아노과가 한 명씩 찬조연주자에 그칠 것이 아니라 듀엣으로 연주회에서 어느 정도 비중을 가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고, 아나스타샤는 제가 듀엣까지 맡게 되면 너무 부담이 커질까 우려하시는 것 같네요. 맞나요?”

“……어?”

“그런가?”

무슨 반응들이 이래요?

난 고개를 기울이며 재차 물었다.

“제가 잘못 이해한 건가요?”

“아니, 맞는 것 같아.”

“그렇긴 한데…….”

석연찮은 대답들이지만 두 사람 다 내가 이해한 것이 바르다고 확인해 주었다.

“그렇다면 간단한 해결법이 있지요.”

“응?”

“뭔데.”

영원히 평행선만을 달릴 것 같은 이 언쟁을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해 호기심이 동했는지 두 사람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사실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두 분이 듀엣을 해 주시면 되겠어요.”

“……?”

“그러면 프로그램에 피아노 듀엣도 넣을 수 있고, 전 트리오에 전념할 수 있고 연주회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겠죠. 안 그런가요?”

듀엣까지 내가 하면 좋겠지만, 여의치 않다면 분담을 하면 될 일이다. 다행히 여기엔 믿을 수 있는 피아노 연주자가 두 명이나 있다.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 사이엔 실력 차가 꽤 있긴 하지만 같이 듀엣을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잘 알기 때문에 듀엣을 하면 멋진 무대가 만들어질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는 대뜸 기가 막히다는 듯 손가락질을 했다.

“내가 쟤랑?”

“타티아나, 잠깐만. 나 머리 아파…….”

아나스타샤는 고압적이던 태도를 잃어버리고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스르르 흘러내렸다.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눈빛은 약간의 원망을 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싸우던 둘에게 듀엣을 해 보라는 건 원망을 받아 마땅한 일이기도 했지만, 나라고 아주 눈치가 없어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었다.

내가 원망을 받더라도 차라리 이게 낫겠다 생각한 것이었다.

그리고,

“푸하하하하하!”

난데없이 폭소가 터졌다. 리처드였다.

“그거 묘수네! 좋아! 타티아나 너 천재냐?”

“천재는 아닌데요.”

“오늘까지 아니었다면 지금부턴 천재 해! 내가 인정해 줄게.”

리처드 공인으로 난 천재가 되었다.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의 언쟁을 잘 해결할 좋은 방법이라 생각해 주는 것 같다. 리처드는 열렬히 동의했다.

그런 리처드를 보며 에르네스트가 으르렁거렸다.

“웃기냐?”

“아니, 맞잖아? 타티아나가 낸 해답이. 아니면 네가 꼭 타티아나와 듀엣을 해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어?”

“…….”

에르네스트가 물끄러미 날 바라보았다. 난 그의 시선에서 함께 듀엣 무대에 오르고 싶다는 열망을 느꼈다.

개인적으론 나도 얼마든지 그렇게 하고 싶다. 하지만 이번엔 미안함을 담아 고개를 저었다.

“저도 에르네스트와 하면 좋겠지만요……. 아무래도 이번 연주회는 트리오가 메인이다 보니…….”

“…….”

“다음에 같이 하도록 해요. 저도 에르네스트와 듀엣 무대엔 꼭 서고 싶어요.”

“진짜 무대 생각뿐이구나. 하……. 그래……. 네 말이 맞아. 연주자가 연주회에 참가하기로 했으면 연주회에 집중해야지. 내가 바보지.”

세상을 포기한 듯한 한숨과 함께 에르네스트가 그렇게 말했다.

내가 제안한 듀엣은 생각보다 두 사람에게 훨씬 큰 충격을 준 듯했다. 난 다시 부탁했다.

“아나스타샤, 에르네스트. 두 분에게 듀엣을 맡겨도 될까요? 전 두 분이라면 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

두 사람이 정 못하겠다고 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난 그렇게까지 두 사람의 사이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조금 퉁명스럽고, 막 대하곤 있지만 그래도 함께 지내 온 시간이 있다.

에르네스트가 물었다.

“야, 어떻게 할 거야.”

“……그래, 차라리 이게 낫겠네. 어차피 내가 할 수 있지도 않을 테고 그렇다면 차라리 너랑 하는 게 낫겠어…….”

“무섭게 왜 그래?”

“이제 와서 무섭니?”

중얼거리던 아나스타샤가 싱긋 웃었다. 에르네스트는 처음으로 두려워하는 눈빛을 보였다.

“에르네스트와 듀엣, 할게.”

아나스타샤가 그렇게 하기로 하고, 에르네스트도 동의했다.

이로써 연주회는 한층 더 풍성해졌지만,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발렌티나는 중얼거렸다.

“못 살아, 진짜…….”

“발렌티나?”

“타티아나 너……. 아니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그녀가 처연한 눈을 했다.

그리고 이어 사샤가 날 불렀다.

“타티아나 누나.”

“예, 사샤.”

“대단하세요.”

“……? 고마워요.”

리처드에 이어 사샤까지 날 칭찬했다.

일단 고맙다고 답했지만 다시 돌아오는 건 작은 한숨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