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화
연주회의 테마와 인선, 프로그램 등에 대해 즉석 회의가 이어졌다.
관계자인 세 명과 그 외 세 명으로, 총 여섯 명의 입에서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쏟아졌고, 타티아나는 그 모든 것들을 공책에 차분히 기록했다.
머리가 복잡하기 짝이 없을 터인데도, 한 점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연주회를 어떻게 구성할지에 대해서 집중했다.
“…….”
아나스타샤는 듀엣 곡을 신청해 달라는 타티아나의 말에 약간 화가 날 뻔했다.
아무리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로 했어도 불쑥 튀어나오는 것들은 상당히 복잡하고 억누르기 힘들었다.
아나스타샤는 간신히 감정을 추스르며 몇 가지 곡들을 불러 주었다.
그리고 타티아나는 에르네스트에게도 똑같은 것을 물어보았다.
에르네스트는 아나스타샤와 똑같은 표정으로 몇 가지 곡을 불러 주고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전사해버린 병사처럼 고개를 숙였다. 죽은 것 같다.
아나스타샤는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을 느꼈지만 스스로의 저열함을 자각하고는 다시 암담해졌다. 우리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에르네스트.
회의는 길지 않았다. 애초에 하루 만에 모두 다 결정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리처드가 가장 먼저 자리를 떴고, 이어 에르네스트가 선생님의 연락을 받고 일어났다. 에르네스트를 따라 사샤도 나갔다.
그리고 타티아나도 미하일 선생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연주회 일정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 있다는 것 같다.
남은 사람들을 돌아보며 아나스타샤는 말했다.
“여기까지 할까.”
“그렇게 하도록 해요. 모두들 좋은 의견들 감사해요. 훌륭한 연주회가 되도록 해 볼게요.”
“응.”
“아, 테이블을 정리해야…….”
“괜찮아, 우리가 할게. 빨리 가. 선생님이 부르신다며.”
“미안해요, 아나스타샤. 부탁드릴게요.”
“그래.”
타티아나가 가방을 들고 일어섰고, 아나스타샤는 손을 흔들었다.
“…….”
타티아나가 스터디룸에서 나가고, 남은 두 명은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발렌티나가 빨대로 주스를 빠는 소리만이 들렸다.
아나스타샤는 젤리를 우물거리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살다 살다 에르네스트와 듀엣 무대를 가지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나스타샤는 어이가 없어서 실실 웃었다.
그 모습을 보았는지 발렌티나가 약간 볼멘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아나스타샤. 너 이래서 되니?”
“뭘.”
“타티아나 말야.”
발렌티나는 공공연하게 타티아나와의 관계를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두 사람은 친구였고 여자였지만, 발렌티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나스타샤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해 시비를 걸고 놀리는 것을 삶의 보람으로 삼는 발렌티나도 진지해야 할 부분에 있어선 굉장히 진지하고 현실적이었다.
발렌티나가 말했다.
“타티아나 있잖아, 사실 네가 듀엣하자고 했으면 했을 거야. 근데 네가 딱 막아버렸잖아. 트리오 외에 너무 많은 곡들을 준비시키면 부담이라고.”
“그랬지.”
“네가 자초한 거야 이건.”
“알아.”
“알긴 뭘 알아?”
발렌티나가 불쑥 역정을 냈다. 그녀는 아나스타샤가 이렇게 미적거리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답답해. 너 내가 이렇게 밀어 주려고 하는데도…….”
“발렌티나.”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틀며 발렌티나를 바라보았다.
늘 있는 장난과 놀림 없이, 한없이 깊게 내려앉은 눈이 진심을 담았다.
“그만했으면 좋겠어.”
“……왜?”
차마 더 역정을 내지 못하고 발렌티나가 작게 물었다.
짜증을 내거나 비아냥거리지 않고, 아나스타샤는 담담히 말했다.
“난 이미 여러 번 타티아나에게 물어봤어. 나도 그 애가 헷갈렸으니까. 결국엔 아무나 골라잡으면 되지 않느냐고까지 했지.”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를 집에 데리고 왔던 날을 떠올렸다.
단지 집을 소개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었는데, 타티아나는 그날 처음 본 일리야와 잘도 어울렸고, 아나스타샤는 그에 대한 벌이라는 핑계로 타티아나를 날이 밝을 때까지 멋대로 끌어안았다.
비겁한 방법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외로웠고, 타티아나는 그중에서도 상당히 심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나스타샤는 그렇게 했다.
그러고는 일어난 타티아나를 말로 흔들기까지 했다.
하지만 타티아나의 흔들어 넘어뜨리진 못했다.
아나스타샤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땐 미처 몰랐지만 그 비겁한 말에도 타티아나는 진지하게 응해 줬어.”
“…….”
“무시하고 싶지 않아.”
처음엔 타티아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본의 아니게 몇 번이고 곤란하게 만들었지만, 이젠 생각을 조금 정리한 뒤였다.
아나스타샤는 헛웃음을 흘렸다. 언제부터 이렇게까지 바보가 되어버린 걸까.
처음엔 피해 다녔다. 그냥 질이 안 좋은 건 상관없었지만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베르체노프의 권력을 등에 업고 행패를 부리고 다니는 것이라면 얽히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깜짝 놀랄 정도로 예쁜 얼굴이 아깝다고 생각했지만 그뿐이었다.
하지만 연습실로 아나스타샤를 끌고 간 타티아나는 그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고 스스로의 강함을 증명했고, 그 때부터 아나스타샤와 타티아나는 친구가 되었다.
그 후로 아나스타샤가 친구에게 빠져드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처음엔 보살펴 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타티아나는 병이 있는지 허약했으며 일상생활에 있어선 정말 피아노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냥 내버려 두면 아무나 따라가 버릴 것같이 위태로워 보였다.
같은 여자로서 또한 친구로서 타티아나를 케어해 주어야겠단 생각을 한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타티아나 역시 아나스타샤를 필요로 했고, 아나스타샤는 거기에서 기쁨을 느꼈다.
자신을 의존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반드시 귀찮으리라 생각했었는데, 막상 그렇지가 않았다.
물론 그런 생활은 잠시였다. 타티아나가 아나스타샤에게만 의존하는 일은 없었다.
상식이 조금 부족할지언정 결국 바보가 아닌 타티아나는 금방 여러 가지를 배웠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받았다.
그것을 보며 아나스타샤는 뿌듯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약간의 독점욕을 느꼈다.
그 검고 축축한 감정은 생전 처음 느끼는 것이면서도, 스멀거리며 아나스타샤의 말과 행동을 잠식해 나갔다.
자기도 잘 모를 감정, 좋아함인지 집착인지 독점욕인지 아니면 그 모두인지.
아나스타샤는 여자애에게 이런 감정을 느껴도 되는 것인지 혼란스러워하면서 타티아나와 관계가 깨어지지 않도록 균형을 유지해 나갔다.
다행히 타티아나는 참을성이 많았고, 아나스타샤가 이해해 줄 때까지 기다려 줄 줄 알았다.
그리고 결국,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를 조금이나마 이해했다. 이제는 이 연약하지만, 나약하지 않은 친구에게 경의를 느낀다.
아나스타샤는 음료수를 홀짝이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난 그 애와 친구로서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누릴 수 있지만, 그 이상은 남자인 에르네스트에게 주어져 있을지도 몰라. 내가 해 줄 수 없는 것들을 에르네스트는 해 줄 수도 있겠지.”
“그건…… 모르잖아.”
“그 말 그대로. 모르지. 나도 모르고, 그 애도 모르고. 아무도 몰라.”
발렌티나는 아나스타샤가 대놓고 이런 말을 하는 것에 섬뜩함마저 느꼈지만, 자포자기로 이런 말을 하는 것으로 들리진 않았다. 말 그대로 모르겠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발렌티나 역시 옆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면서 느낀 것이 있었다.
본인들은 모르는 모양인데, 옆에서 보면 너무나 잘 보인다. 발
렌티나가 두 팔 걷고 도와주면 정말 승산이 충분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그치만 내가 보기에 타티아나는 너한테…….”
아나스타샤가 단호히 말을 자른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어. 하지만 타티아나는 나한테 그랬지. 누구와도 사귈 수 있지만 누구와도 사귀면 안 된다고.”
타티아나는 정말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그렇게 말했다.
정확히는 아무나 골라잡을 수 없다고 했고 아나스타샤는 그 말을 바로 이해하진 못했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정말 진지한 본심의 토로였다.
“그게 그 애가 지키고 있는 선이야. 자기도 모르기 때문에.”
조용히 듣던 발렌티나가 물었다.
“그 선을 지켜 주겠다는 거야?”
아나스타샤는 삐뚜름하게 발렌티나를 바라보다가 툭 중얼거렸다.
“솔직히 난 너랑 이런 이야기 하기 싫어.”
“……뭐?”
“넌 의도가 불순하잖아.”
발렌티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불순하다고 하면 불순하다고 할 수 있는 의도였다. 발렌티나도 그런 자각 정도는 있었다.
발렌티나는 아나스타샤가 마음의 문제 때문에 굉장히 괴로워한다는 것을 눈치챘고, 때문에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렇게 잘되면 타티아나에게 티 나게 관심을 보이는 에르네스트도 단념하게 될 것 같다는 계산이 없다고 할 순 없었다.
“그, 그래서 내가 뭐 잘못했어?”
아나스타샤는 딱히 더 비난하는 기색이 아니었지만 발렌티나는 항변했다.
“그 애가 에르네스트를 좋아하는 기색을 보인다면 깔끔하게 포기했을 거야. 축복까지 해 주진 못했을지라도 인정은 했겠지.”
제대로 맞붙는다면 어떻게 봐도 승산이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타티아나가 아예 남자에게 관심이 없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그런데 그게 아니잖아. 대결이라는 것도 늘 에르네스트가 제안하고 있고……. 현실적으로 내 말이 틀리니? 그에 비해 넌 훨씬 더 유리한 위치에…….”
“바보네, 발렌티나. 그게 일방적으로만 보여?”
“뭐?”
“유리한 위치? 정말 아무것도 모르네.”
발렌티나는 가끔 타티아나가 아나스타샤에게 향하는 시선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저었다.
“타티아나는 정말이지 최선을 다해서 선을 지키고 서 있어. 오늘도 그렇지. 그 태연한 표정을 보면 무의식중에 한 것이겠지만……. 그 애는 적어도 나와 에르네스트를 동등한 친구로 여기려고 기를 쓰고 있다고.”
타티아나는 홀로 연습을 하며 정리할 것이 있다고 했을 때도 동등하게 에르네스트도 아나스타샤도 연습실에 들이지 않았다.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라 생각한 자신마저 거절해버리는 모습에 적잖이 상처받긴 했지만, 그것이 존중의 의미였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게 안 보이니?”
“…….”
“아무튼 더 억지로 무언가 하려 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해.”
마지막으로 아나스타샤는 못 박았다.
아나스타샤는 발렌티나가 짠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타티아나와 마음 편히 친구로서 노는 것이 아닌, 그저 그녀를 흔들기 위한 일들이 된다는 것을 느꼈고, 때문에 심한 죄책감을 느꼈다.
그건 친구로서의 지위를 악용하는 것에 가까웠다.
발렌티나는 아나스타샤가 이렇게까지 진심을 보이니 더 이상 무어라 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친구는 닮는다더니. 근래 묘하게 성실하게 연습에도 임하는 것 같고 타티아나에게 정말 많이 옮은 것 같다.
종국에 발렌티나는 퉁명스럽게 타티아나를 탓했다.
“대체 왜 그런데 걔는? 진짜 이상한 애야……. 그냥 좋으면 좋다 말을 하면 되잖아. 그게 헷갈릴 일이야?”
“헷갈릴 수도 있지. 나도 헷갈리는걸.”
아나스타샤는 담담히 말했다.
누구를 좋아하는지 사춘기가 지나고 나서도 잘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아나스타샤 역시 평생을 자신은 남자를 좋아하는데 멀쩡한 사내놈이 없을 뿐이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타티아나를 만나고, 생각이 많이 바뀐 참이었다.
아직도 잘 모른다. 불현듯 찾아온 갈증을 무어라 설명해야 하는지. 아나스타샤는 단정 지을 수 없었다.
하지만 뭐가 어쨌든 이상할 건 없을 것 같단 막연한 생각을 했다.
망연한 표정을 하고 있는 친구를 보며 아나스타샤는 짓궂게 웃었다.
“그리고 좋으면 좋다 말을 못 하는 건 너도 똑같잖아? 발렌티나.”
“뭐…….”
부럽네, 에르네스트. 아나스타샤는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그 외모도, 피아노 실력도, 저도 모르게 사람을 끌어들이는 스타성도. 물론 성격이 조금 재수 없긴 하지만 세상에 흠 하나 없는 사람이 있을 순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사실 에르네스트를 상당히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그런 초인과 경쟁하려고 생각하니 까마득하다. 심지어 에르네스트는 남자이기까지 하다.
타티아나가 동등하게 선을 긋고 있지 않다면 게임이 성립조차 되지 않았을 것이다.
“…….”
피아노도 공부도 외모 관리도 더 잘할 수 있다.
아나스타샤는 근래 아침 연습도 빼놓지 않고 하고 있었고, 시험기간에만 벼락치기를 하지 않고 공부도 꾸준히 했다.
아나스타샤는 그렇게 해도 타티아나가 하는 노력을 못 따라간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더더욱 노력할 생각이었다.
아나스타샤는 당장 타티아나로부터 맡겨진 일도 제대로 할 생각이었다. 믿고 맡겨 줬다면 실망시켜선 안 된다.
에르네스트와의 듀엣?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선생님을 만나러 간 에르네스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어차피 해야 할 듀엣 연습이라면 당장 하자는 메시지였다.
잠시 후 연습실로 오라는 답장이 왔다.
아나스타샤는 씩 웃으며 가방을 들었다.
“아무튼 난 에르네스트 만나러 갈게. 연습만 할 거니까 걱정하진 말고.”
“무, 무슨 걱정?!”
“아하하하하.”
발렌티나가 펄쩍 뛰었지만 아나스타샤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닫힌 스터디룸에 홀로 남은 발렌티나는 빨대를 물고 다리를 흔들거렸다.
아나스타샤는 쾌활하게 웃으면서 나갔지만 그녀가 대체 어떤 기분일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발렌티나는 답답한 마음을 안고 테이블 위를 내려다보다가, 이마를 찡그렸다. 과자 봉지와 음료수 캔 등이 보였다.
“우리가 하겠다고 했으면서…….”
발렌티나는 한숨 쉬며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