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화
피아노 두 대가 있는 듀엣 연습실. 에르네스트는 책상에 턱을 괴고 스마트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장 최근 온 메시지는 아나스타샤의 것이었다. 기왕에 할 것이라면 제대로, 당장 연습부터 하자는 내용이었다.
아나스타샤는 묘하게 의욕이 있어 보인다. 에르네스트는 황당했다. 뭐가 이렇게 신이 난 거지, 이 녀석?
에르네스트는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아나스타샤와 친구로 만나게 된 지 8년이나 되었지만 그간 한 번도 피아노 듀엣이란 걸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어렸을 때도 에르네스트는 피아노로 누군가에게 지기 싫어했고, 아나스타샤는 자유분방한 스타일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피아노로 듀엣을 연습했던 날, 일곱 살의 에르네스트는 똑같이 일곱 살의 아나스타샤에게 자신에게 맞추라고 말했고 아나스타샤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제멋대로 피아노를 쳤다.
아직 어린 나이라서 음악에 대한 공통된 배움이나 목적성 없이 이루어진 듀엣은 당연히 엉망이었고 그 후엔 자존심 싸움이 이어졌다.
당시 에르네스트는 아나스타샤를 조금 우습게 생각했다.
어린 아나스타샤는 요정 같다는 칭찬을 하루에도 열 번씩 들을 정도로 귀여웠고, 그건 에르네스트가 보기에도 그랬다.
때문인지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장난을 치고 괴롭히고 싶기도 했다.
가장 큰 실수는 일곱 살의 아나스타샤가 에르네스트보다 주먹이 세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는 점이었다.
그날 에르네스트는 코피를 흘리면서 다시는 아나스타샤를 무시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 후로도 두 사람은 친하게 지냈지만 듀엣을 하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8년 만에 이렇게 아나스타샤와 듀엣을 할 일이 찾아왔다.
딱히 기분이 나쁘거나 하진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에르네스트가 꽤 좋아하는 친구 중 하나였고, 무대에서 같이 듀엣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가 아니라 타티아나였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분명 그렇게 될 것 같은 흐름이었는데, 어쩐지 정신을 차려 보니 아나스타샤와 하게 되어버렸다.
일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하.”
한숨을 쉬며 에르네스트는 스마트폰을 덮었다.
잘못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타티아나가 약한 모습을 보이며 의지해 올 때, 그는 충분히 고민한 후 연주자로서 타티아나를 도왔다.
에르네스트의 조력에 힘입어 타티아나는 기운을 차리고 일어섰다.
그 후로는 타티아나가 다른 이들과 어울려도 에르네스트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의 라이벌이 되어 줄 수 있는 이는 제가 아니라면 다른 누구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오만한 생각이었지만, 현실이기도 했다. 타티아나는 유독 에르네스트의 피아노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때문에 대여섯 명씩 모이는 스터디룸에서 무언가 공통분모를 찾아 나갈 필요도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연습실에서 단둘이 있는 시간이 훨씬 더 값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타티아나는 남녀가 단둘이 연습실에서 연습을 해도 오로지 피아노에만 맹목적인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피아노 앞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두 사람은 그저 연주자일 뿐 다른 그 무엇도 아니었다.
“…….”
잘 알면서도, 막상 다시 확인당하고 나니 당황스럽다.
타티아나가 보이는 연주자로서의 태도를 충분히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피아노라는 연결 고리만 있다면 얼마든지 더욱 친밀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뒤로 밀어 놓았다고 생각한 것들이 자꾸만 꿈틀거렸다.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 들끓으며 비웃어 댔다.
어쩐지 화가 나서 이번엔 부르는 대로 달려가서 무조건 무대에 올라가 듀엣을 하자고 노골적으로 어필했음에도 불구하고, 타티아나는 그것을 단지 연주자 두 명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으로만 인식하는 듯했다.
여태 연습실에서 단둘이 그렇게 연습했는데 이제 와서 무슨 호들갑이냐고 묻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올바른 태도이긴 하다. 연주회 무대 구성을 궁리하면서 사심을 끼워 넣는 건 정말 프로답지 못한 행동이니까.
하지만 막연히 짜증이 난다.
“걔는 대체……. 내가 싫은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가 입을 다물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절대 아닐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이따금 타티아나는 정말 따뜻한 시선으로 에르네스트를 보곤 한다. 싫어하는 사람에게 그런 눈을 할 리가 없었다.
“후…….”
조금 불안하다.
정처 없는 손끝으로 스마트폰 화면을 휙휙 넘기던 에르네스트는 괜히 평소 보지도 않던 뉴스기사 등을 찾아보다가 아예 책상에 엎드려버렸다. 정말로 머리가 아팠다.
그리고 머리가 책상에 닿자마자 타이밍 좋게 연습실 문이 열렸다.
“자냐?”
에르네스트가 고개를 드니 아나스타샤가 가방을 들쳐 메고 삐딱하게 서 있었다.
황금빛 머리카락이 자체적으로 빛을 내는 것만 같다.
똑같은 교복을 입고 있는데도 멋스러운 캐쥬얼 정장을 차려입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성격만 평범했다면 인기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쉬운 성격이 아니었다.
상대가 누구든 늘 냉기를 날리는 고자세인 데다가 교칙 위반으로 정학까지 당하니, 그 이후로는 그야말로 모두가 조심스러워하는 1순위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엄격한 중앙음악학교에서 아나스타샤의 행보는 파격 그 자체였다.
에르네스트는 그것이 긴 슬럼프에 지친 아나스타샤가 참다못해 저지른 짓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웃기면서도 슬프기도 했다.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아나스타샤가 옆자리에 앉았다.
“더 자든가. 자장가라도 불러 줘?”
“됐어.”
에르네스트는 퉁명스레 대꾸했다.
목을 잡고 조금 스트레칭을 하자니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에르네스트.”
“뭐.”
“너 진짜 하기 싫어 보인다?”
“뭘?”
“나랑 듀엣.”
노골적인 물음에 말문이 다 막힌다. 에르네스트는 힐난하는 눈초리로 아나스타샤를 노려보았지만 그녀는 뭐 어쩔 테냐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에르네스트는 맥이 탁 풀려서 중얼거렸다.
“딱히…….”
“그럼 좋아?”
“좋지도 않고. 그냥 그래.”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런 넌 어떤데?”
“나도 그냥 그래.”
“똑같네 뭐.”
사실을 말하자면 그냥 그렇진 않았다.
지금 이 시간에도 타티아나는 현악기 연주자들과 연습에 몰두할 것이라 생각하니 조금 언짢았다.
해선 안 될 생각이었다. 피아노 연주자는 누구라도 현악기 연주자들과도 친해야 했고, 자주 협연을 해야만 했다.
그건 타티아나도 예외가 아니다. 그녀가 피아노 연주자로 나아가기 위해선 필수적인 일이었다.
에르네스트는 프로답게 처신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근질거리는 마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
아나스타샤는 무표정한 얼굴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오늘 회의에서 아나스타샤가 주장한 말들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지만, 어쩌면 일부러 방해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나스타샤는 평소 타티아나를 굉장히 과보호하는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타티아나의 가장 친한 친구인 아나스타샤를 지지자로 끌어들인다면 엄청난 우군이 되겠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요원한 일이었다.
에르네스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아나스타샤의 심기를 거스르지나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연습……해야지. 하기로 했으니까.”
“의욕 없어 보이는데.”
아나스타샤는 끝까지 그런 말을 했다. 일단 연주회에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을 정한 에르네스트는 짐짓 인상을 쓰며 말했다.
“네가 아니라 리처드 자식이랑 하게 되더라도 최선을 다할 테니까 걱정 마.”
“그래? 에르네스트 넌 그런 부분에선 자존심이 참 세지.”
“자존심 문제야 그게? 아니라고 보는데.”
“어쨌든 말야.”
아나스타샤는 웃었다.
“나도 똑같거든.”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바라보고 있자니, 아나스타샤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난 알아. 네가 지금 날 굉장히 우습게 보고 있다는 걸.”
“무슨 헛소리야 내가 그럴 리가…….”
“피아노로는 상대가 안 될 거라 생각하고 있잖아?”
“…….”
에르네스트는 당혹을 금치 못했다. 아나스타샤가 자기 입으로 저런 말을 하리라곤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당장 피아노 실력으로는 에르네스트가 앞서고 있다는 사실은 객관적으로 보아도 옳았지만, 대놓고 말하기엔 정말 꺼려지는 것이었다.
피아노 실력이 어쨌든 간에 에르네스트는 아나스타샤를 친구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부러 에르네스트는 짜증스레 말했다.
“어이가 없네. 너 그런 말 하려고 지금 만나자 한 거야? 진짜 이 자리에서 다시 승부할래?”
“아니, 난 남자애들이 걸핏하면 승부 운운하는 거 좀 짜증 나거든. 그건 됐고.”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 말은 당장 에르네스트와 맞붙기 싫다는 것같이 들렸다.
하지만 다시 치켜뜬 눈에는 승부욕이 자세를 낮추고는 낮게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이번 듀엣 말야. 난 반드시 성공적으로 해낼 거야. 그러니 다른 것은 생각 말고 나만 봐. 알겠어? 쉽지 않을 테니까.”
“……뭐라는 거야.”
에르네스트는 뜨끔했다. 아나스타샤와 듀엣을 하기로 했음에도 타티아나를 떠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나스타샤는 그런 에르네스트를 꿰뚫어 본 듯 단호히 말했다.
이 연주회에서 두 사람에게 맡겨진 것은 듀엣 연주였고 그 외는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좋아.”
자리에서 일어난 에르네스트가 두 대의 피아노 중 한 대 앞에 앉았다.
그리고 다른 피아노를 가리켰다.
“앉아, 아나스타샤. 상대해 줄게.”
“와, 짜증 나.”
“뭐 어쩌라고 대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와서 앉아.”
약간 가르치려는 듯한 투로 들렸는지 아나스타샤가 대번에 아니꼽다는 듯 눈을 치떴다.
에르네스트는 그건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굴하지 않고 더더욱 강압적으로 말했다.
아나스타샤는 투덜거리면서도 피아노 앞에 앉았다.
“곡은?”
“네가 정해. 아까 대충 나왔잖아.”
“그럴까? 이건 어때?”
아무 생각 없이 에르네스트가 손을 젓자 아나스타샤는 바로 한 곡의 짧은 구간을 연주해 보였다.
“……?”
에르네스트는 저번 타티아나의 콩쿠르를 도와줄 때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아나스타샤가 피아노를 다루던 모습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정도라면 대충 실력이 가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
전혀 아니었다.
몇 달 사이 아나스타샤는 차원이 다른 연주를 보이고 있었다.
“너…….”
“왜?”
“아무것도 아냐.”
충격을 추스르며 에르네스트가 머리를 흔들었다.
슬럼프가 조금 길었을 뿐이지 아나스타샤가 원래 대단한 애였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 타고난 재능에다가, 늘 같이 다니는 타티아나에게서 좋은 영향을 받은 아나스타샤의 연주는 이전과 그 수준을 달리 하고 있었다.
놀라움과 당혹, 그리고 즐거움. 여러 감정이 스쳐지나간 뒤 에르네스트의 얼굴 위에는 오로지 진지함만이 남아있었다. 그가 말했다.
“시작하자.”
에르네스트는 방금 아나스타샤가 짧게 연주한 곡으로부터 모든 것을 이해하고는 곧바로 그것을 맞상대하기 위한 음악을 자아냈다.
아나스타샤 역시 진지하게 표정을 굳히고는 연주에 임했다.
***
미하일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자선 연주회 참가자 구인 게시물을 교내 게시판에 붙였다. 이걸로 정말 공식적인 학교 행사가 된 것이다.
“……음.”
잘 보이도록 똑바로 붙인 게시물을 보았다.
이미 참가자로 내 이름과 막심 선배, 니콜라이 선배, 에르네스트, 아나스타샤의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여기에서 한두 명 정도 더 구할 수 있다면 좋고.
아예 못 구한다면 어쩔 수 없이 이 인원으로 연주회를 열게 된다.
미하일 선생님은 아마 사람을 더 구하긴 힘들 것 같다는 뉘앙스로 말씀하셨다.
학교 행사이기 때문에 구인 게시물을 붙이긴 붙이겠지만 무의미한 일이나 다름없다는 것 같다.
그렇게까지 자선 연주회에 관심들이 없나? 그건 약간 슬픈데.
“타티아나 선배!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안나.”
복도를 지나가다가 마침 날 발견했는지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를 하는 그녀는 7학년의 안나 니콜라예브나였다.
저번 학기 내 위클리 리사이틀 이후로 슈만이라는 작곡가에 엄청나게 빠졌다면서 가끔 도움을 구하곤 하는 아이였다.
안나가 방실거리며 다가왔다.
“뭐 하세요?”
“게시판에 붙일 것이 있어서요.”
“뭔데요? 음……. 자선 연주회?”
안나는 약간 흥미가 동했는지 내가 붙인 게시물을 보았다. 잠시 읽어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진다.
“타티아나 선배에 에르네스트 선배……? 거기다가 바이올린과의 막심 선배까지요?”
“이상한가요?”
“아뇨, 이거 너무…… 화려하지 않아요?”
“……?”
난 잘 모르겠는데 안나가 보기엔 이 인선이 상당히 무겁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보다 막심 선배 좀 유명한 사람인가?
안나는 헛웃음을 짓더니 반걸음 물러서기까지 했다. 난 희망을 안고 그녀에게 물었다.
“안나, 저기…….”
“죄송해요.”
“예?”
뭐라고 하기도 전에 안나가 대뜸 사과부터 했다. 조금 황당해서 그녀에게 물었다.
“왜 그러세요? 안나.”
“자선 연주회 사람 구하시는 거잖아요? 그렇죠?”
“예.”
“타티아나 선배나 에르네스트 선배의 연주회는 보고 싶지만…… 같은 무대에 서는 건 말이죠…….”
그녀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치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다시 한 걸음 더 물러섰다.
“죄송해요! 저는 두 분 응원할게요!”
“잠깐만요? 안나? 안나?”
그리고 그대로 도망쳐 버렸다.
아무래도 다른 학생들에게 지금 결정된 인선은 상당히 부담스럽게 다가오는 듯하다.
특히 에르네스트는 전 학년을 통틀어도 최고 실력자로 인정받는 사람이고, 막심 선배도 내가 모를 뿐이지 상당히 유명한 것 같다.
그 사이에 끼어서 연주회의 한 몫을 맡는 것은 용기도 필요로 하는 모양이다.
“…….”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최고의 연주자들을 구했으니 이젠 무대를 어떻게 만들지 집중할 뿐이다.
난 더 이상 고민하지 않도록 아예 스마트폰을 들고 막심 선배에게 전화를 했다.
당장 만나고 싶다고 말하자 막심 선배는 조금 당황해하는 듯하더니 그렇게 하자고 했다.
하루도 낭비할 시간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