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204화 (204/1,277)

##  204화

자선 연주회를 하기로 한 뒤로 3주. 4월 중순이 지나가고 5월이 다가왔다.

날씨는 더욱 따뜻해지고 창밖으로 보이는 초목들이 한층 더 푸르러졌다.

하루가 다르게 시간이 흐른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세상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 역시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고 있었다.

연습 시간은 더 늘어났다. 자선 연주회에 나가기로 한 것으로 내 위클리 연주회가 대체되고 미하일 선생님도 과제곡들에 있어 편의를 보아주신 덕분이었다.

그사이 피아노 트리오 두 곡에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그리고 곡에 대한 이해도와 완성도를 끌어올리기 위해 총보독법에 대한 노하우를 구세프 선생님에게 배우기도 했다.

총보독법이란 총보, 즉 협주곡이나 교향곡 등에서 모든 악기들의 파트가 기록되어 있는 악보를 한눈에 보고 모든 악기들의 특성을 읽어내어 즉각 피아노로 연주해 나갈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총보독법은 지휘자들에게 필요한 것이었지 피아노 연주자에게 꼭 필요한 교육은 아니었다.

하지만 빠르게 곡들을 익혀야 하는 지금, 초견 능력과 연습의 효율성을 조금이라도 더 끌어올리기 위해선 더욱 과감하게 무엇이든 배울 필요가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이전에도 난 협주곡 악보를 혼자 보고 피아노 솔로로 편곡하거나 노래하면서 연주해 보곤 했기 때문에 총보독법에 금방 익숙해질 수 있었다.

그것을 모르는 구세프 선생님은 노래를 부르며 모든 파트를 총망라하는 내 연습 모습을 보고는 오페라 지휘자들이나 하는 짓을 왜 하고 있느냐고 어이없어하셨지만, 더더욱 열성적으로 날 가르치셨다.

난 피아노 연주자로서 협연에서 내가 맡아야 할 위치와 자세를 다시금 배웠고, 갈수록 숙련되고 있었다.

“…….”

그리고 에우테르페 레코즈와의 음반 미팅 역시 계속 진행해 나갔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음반의 일은 급하게 한다고 될 일이 아니니 연주회가 마무리될 때까지 느슨하게 해도 된다고 말했지만, 내가 스튜디오에 드나드는 이유는 단지 음반을 빨리 만들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가르쳐 주는 음향 기술에 관한 지식들. 소리와 위상 그리고 공간의 예술에 대한 설명들.

방대한 음악에 대한 이야기들은 잠깐 듣는 것만으로도 내 귀를 틔게 했다.

이것 역시 늘 세팅된 무대에 오르는 연주자가 굳이 깊게 알아야 할 지식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러 연주자가 하나의 소리를 만들어 내는 협연을 공부하면서 소리라는 현상에 대한 근본적인 공부도 병행하는 것은 내게 확실하게 큰 도움이 되었다.

오늘도 스튜디오에 가서 여러 공부를 하고 온 참이다.

“……흐암.”

조금 볼품없이 하품이 나왔다.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으니 상관없는 일이다.

시간을 보니 12시다. 난 책상을 내려다보았다. 책과 공책이 보였다. 시야가 조금 흐릿했다.

눈가를 비비고 다시 펜을 들었다. 마무리는 짓고 자야겠다.

피아노 연주자로서 협연을 위한 모든 준비, 연습과 더불어 학교 일반교과 공부도 허투루 할 수 없었다.

8학년 2학기의 마지막 시험은 일반 학기말 고사가 아닌 9학년 진급시험이었다.

이 시험에서 떨어진다면 9학년으로 오르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중앙음악학교의 학칙에 의거하여 유급도 없이 바로 전학이다.

사실 나는 당장 시험을 치더라도 진급 시험에 떨어질 것 같진 않다. 꾸준히 공부를 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12시가 넘도록 책상 앞에 붙어 있는 것은 한승우 때문이었다.

나와 친한 사람들 중 진급 시험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한승우였고, 때문에 그는 스터디에 꾸준히 나오고 있었다.

난 열심히 하는 그 애를 위해 시험 예상 문제를 몇 번 만들어 주기도 했다. 이 공책도 예상 문제들이다.

그저께에도 예상 문제를 건네주었더니 한승우는 나중에 갚겠단 이야기를 했다. 괜찮으니 마음만 받겠다고 했다.

사실 그 애가 날 귀찮아하지 않고 열심히 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다.

“…….”

연주회 준비와 협연 연습, 스튜디오의 일, 학교 공부, 거기에다가 이렇게 사서 하는 일까지 합친다면 하루 서너 시간을 자고 활동을 해도 종종 시간이 모자라다는 생각이 든다.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는 내 스케줄을 듣고는 적당히 하라며 화를 내기까지 했다.

요 근래 들어 묘하게 합심해서 날 괴롭히는 듯한 두 사람이 화를 내는 게 이해가 안 가진 않았다. 나도 피곤함을 느끼긴 하니까.

하지만 난 지금 하루가 너무 충실하고 의욕이 넘쳤다. 잡생각들도 별로 들지 않았고 컨디션도 좋았다.

스케줄을 비우고 지금보다 편하게 산다고 해서 지금보다 마음이 편하진 못할 것 같았다.

“…….”

30분 정도 공책을 더 정리하고 나서 책을 덮었다. 이 정도면 될 것 같다.

그대로 침대에 가서 누웠다.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더 피곤해서 그런지 절로 눈이 감기지만 버릇처럼 이어폰을 가지고 왔다.

스마트폰에 연결하자 그간 몇 번이나 들었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익숙한 리스트의 곡들이 흘러나왔다.

***

오후 연습 시간. 개인 연습을 조금 하고 합주 연습실로 향했다. 조심스레 문을 열자 이미 한 사람이 안에 있었다.

“안녕하세요, 막심 선배님.”

“타티아나.”

막심 선배는 손을 흔들며 날 맞이했다. 선배는 이미 바이올린을 들고 현을 손보고 있었다.

난 가방을 내려놓고 합주 연습실에 있는 전기포트로 차를 끓였다.

니콜라이 선배도 없는데 막심 선배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어제 내가 추천한 음반은 들어 봤어?”

“예. 디지털 음반으로 나와 있어서 구하기 쉬웠어요.”

“그래? 뭐 상관이야 없지만……. 난 실물이 없는 건 조금 그렇더라고. 소장하는 기분이 안 들어서. 넌 그런 거 없어?”

“물론 저도 만질 수 있는 음반을 좋아해요.”

“그럴 수밖에. 보통 감상하는 사람들은 다 그럴걸? 음반을 꽂을 선반이 꽉 차서 둘 곳이 없어서 탑을 쌓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사고 봐야 하는 이 심정. 덕분에 내 지갑은 늘 텅텅 비어 있지만.”

막심 선배는 보란 듯이 자신의 지갑을 꺼내 보여 주었고, 정말 텅 빈 지갑을 보며 난 웃어도 되는지 갈등했다.

선배와 하게 되는 이야기는 대부분 이랬다.

난 음악가 동료로서 많은 공감을 느끼기도 하고, 다채로운 관점을 발견하기도 하면서 선배와의 대화를 즐겼다.

물론 가장 재미있는 건 대화가 아니었다.

“어쨌든, 그러면 그건 이따가 니콜라이가 오면 같이 해 보도록 하고. 그 전엔 잠깐…….”

막심 선배는 비스듬히 고개를 내리며 내게 권유했다.

“소나타 어때?”

“아하하.”

우리가 나갈 연주회에서 함께 연주할 곡은 피아노 트리오 두 곡으로 바이올린 소나타는 끼어 있지 않지만, 막심 선배는 종종 내게 같이 소나타 연주를 해 보자고 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내게 도움이 되곤 했다.

막심 선배는 철저히 앞으로의 트리오와 연관성이 있는 소나타만을 내게 연습시켰기 때문이었다.

트리오를 연습하면서 이전보다 훨씬 스무스하게 호흡이 맞는 듯한 기분이 드는 구간이 있다면, 그건 거의 막심 선배가 소나타로 연습시킨 부분이었다.

실력도 뛰어나고 협연 경험도 풍부한 막심 선배에게 도움을 받아 가며 난 급속도로 협연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좋아요. 어떤 곡으로 할까요?”

“길고 지루한 것 말고. 저번에 우리 브람스의 FAE 소나타 한 적 있었지?”

“있었지요.”

“그걸로 하자.”

난 군말 없이 악보를 찾아들고는 피아노 앞에 가서 앉았다.

5분 남짓의 곡이니 조금만 더 연습하면 암보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직은 악보가 필요했다.

브람스의 단악장 바이올린 FAE 소나타 중 3악장 스케르초 C단조.

차분히 악보를 보면대에 올려놓고, 자리를 바로 했다.

내가 준비를 마친 것을 보고 막심 선배가 말했다.

“시작한다.”

그리고 선배가 현을 그었다.

행진곡과도 같은 리듬으로 바이올린이 곡의 시작을 열고, 곧바로 내 피아노가 따라붙었다.

단조의 스케르초는 음산한 분위기를 내기에 좋지만 이 브람스의 스케르초는 그렇게 늘어지게 두지 않는다.

악장 지시는 알레그로. 빠르게 행진곡처럼 연타하는 화성과 강렬하게 치솟는 바이올린 소리가 한데 얽힌다.

중간에 조성이 변화하고, 조금 약하게, 그리고 다시 강하게 같은 주제를 반복한다. 난 피아노를 깊고 무겁게 가져가지 않고 보다 얇고 넓게 깔았다.

이 곡의 의도대로 피아노의 역할을 하는 것에 충실했다.

굳이 바이올린에게 힘을 더 실어 주려 하지 않아도 막심 선배는 현란하게 자기 실력을 보였다.

FAE 소나타는 로베르트 슈만과 그의 두 제자인 요하네스 브람스, 알베르트 디트리히가 19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요제프 요아힘을 위해 공동 작곡한 소나타다.

FAE라는 표제 자체가 요아힘의 모토였던, 자유롭지만 고독하게frei aber einsam에서 따온 것이었다.

네 음악가의 우정과 존경을 주제로 하고 있는 소나타이며, 세 작곡가가 한 바이올리니스트에게 헌정한 곡이니만큼 철저하게 바이올린을 위한 곡이다.

그중 브람스가 맡았던 3악장. 난 브람스가 이 곡을 어떤 생각을 하면서 썼을지 생각하며 바이올리니스트에 대한 존경을 보였다.

이전처럼 막연히 겁먹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협연이라는 것에 보다 익숙해졌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반드시 누군가 승자가 가려져야만 하는 경쟁이 아니고, 협연자들에게 무언가 인정받기 위한 테스트도 아니고, 같이 음악을 만들어 나가는 것뿐이라는 것을.

막심 선배 역시 음악에 있어선 진지하다.

내가 쓸데없이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닌, 이렇게 협연자로서 편한 태도를 보이면 딱히 싸움을 걸거나 하진 않는다. 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

같이 놀자고 손을 흔들기도 한다.

바이올린하고는 대결할 생각이 없느냐고 묻고 있다.

조금 웃음이 나온다. 무대에 올라선 이런 일이 없겠지만, 연습을 할 때만큼은 정말 무엇이든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난 손끝을 조금 더 날카롭게 세웠다. 보다 깊게 음을 박아 넣었다.

“……!”

안개 뒤에서 나타나 눈앞을 스쳐지나가는 행진은 끝나고, 조성이 바뀌며 서정적인 선율이 나타났다.

본래 바이올린에게 모든 선율이 맡겨져 있지만, 난 앞으로 불쑥 치고 나서며 잔잔한 풍경을 보다 극적으로 만들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피아노의 장점을 드러냈다. 바이올린에겐 불가능한 다성 화음의 풍부함이다.

유려하고 우아한 화성이 물결처럼 퍼져 나가며 바이올린의 소리를 묻어버린다.

막심 선배 역시 당하고만 있진 않았다. 화성의 풍부함으로 피아노에 맞설 순 없기에 보다 신중하게 본선율에 무게를 실었다.

본래 바이올린을 위해 작곡된 곡이라 금세 무게가 넘어갔다. 난 얌전히 때를 기다렸다.

막심 선배는 바이올린 소나타에서 바이올린으로 피아노에게서 주도권을 빼앗았다고 해서 좋아할 사람이 아니었다.

바이올린 소리는 약간 잦아들었고, 다시 원점에서 시작되었다.

한 곡에서도 몇 번이고 우리는 엎치락뒤치락했다.

어떠한 승패를 정하기보다, 막심 선배는 단순히 이런 구도 자체를 좋아하곤 했다.

그렇게 열 번도 넘게 전투가 벌어졌다. 나도 막심 선배도 곡 내내 쉴 틈이 없이 밀었다 당겼다 바쁘다.

이 곡에서 피아노의 위치는 거의 반주였고 때문에 극도로 불리했지만, 난 억지로 이기려 들 것 없이 피아노에게 맡겨진 것만으로 최대한의 존재감을 끌어내는 것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막심 선배는 가끔 훌륭하다는 듯 찬탄의 음색을 쏟아냈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주제들이 점점 고조되고, 마지막은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긴 화음으로 끝났다.

“…….”

연주를 마친 뒤 나와 막심 선배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짧은 곡이었지만 그사이 주고받은 것들은 넘쳐날 만큼 많았다.

바이올린과 활을 늘어뜨린 채, 막심 선배가 중얼거렸다.

“흠……. 어쩌지.”

“예?”

“너랑 무대에서 바이올린 소나타 했으면 좋겠는데.”

그간 바이올린 소나타도 많이 연주했지만 이런 말은 처음이었다.

막심 선배에게 조금 더 인정받았다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 그렇다면 순수하게 기쁘다.

“영광이에요.”

“아니, 농담이 아니라 진짜야. 우리 트리오 두 곡 말고 바이올린 소나타도 하면 안 될까?”

“하지만 이건…….”

“아니 물론 이렇게 놀면 안 되지. 무대 위에선 진짜 음악성에만 집중할 거야.”

이렇게 피아노가 반주에 집중하지 못하고 바이올린과 뒤엉키는 연주를 무대에서 보일 순 없었다. 보다 단정하고 깔끔한 음악을 보여야 할 것이다.

막심 선배가 다시 말했다.

“너랑 이렇게 같이 연주하는 것도 벌써 3주가 넘었지만……. 정말 끝이 없이 좋아지는 것 같아.”

“제 실력이요?”

“어? 어……. 그래. 타티아나. 네 실력이.”

묘하게 말을 더듬더니, 선배가 내 쪽으로 성큼 다가서선 보다 절실히 말했다.

“어쨌든, 트리오하고 피아노 듀엣하고 솔로곡 두 곡까지가 우리 프로그램이지만 시간은……. 아니, 아예 3시간 공연을 하면 되잖아?”

“막심 선배님, 죄송하지만 이미 다 정한 프로그램이지 않은가요?”

“뭘 다 정해? 프로그램 같은 건 당일에도 수정할 수 있는 건데. 아직 팸플릿이 나온 것도 아니고.”

“그야 그렇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프로그램의 수정 같은 건 연주회가 시작하기 직전에도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연주자들은 기계가 아니었고 변동사항은 얼마든지 생긴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순간, 내 부탁에 따라 피아노 듀엣을 준비하고 있을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의 얼굴이 떠올랐다.

“죄송해요, 선배님. 정한 대로 했으면 좋겠어요.”

“그래……? 그럼 어쩔 수 없고.”

막심 선배는 약간 아쉬운 듯 했지만 담백하게 물러났다.

난 내가 못할 짓을 정말 많이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모든 것을 유예하는 대가로 어떠한 균형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선 어렴풋하게 깨닫고 있었다.

난 문득 고개를 돌려 다시 보면대 위의 악보를 보았다.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평생을 홀로 산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요아힘의 모토가 오늘따라 묵직하게 내 마음에 울린다.

솔직한 말로, 이젠 자신이 없다.

하지만 용기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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