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205화 (205/1,277)

##  205화

미하일 선생님이 박수를 짝 치며 우리들을 불러 모았다.

나와 막심 선배, 니콜라이 선배, 에르네스트, 아나스타샤. 이렇게 연주회에서 무대에 오를 다섯 명은 선생님 앞에 모였다.

우리 면면을 살피며 선생님이 말했다.

“좋아, 모두 수고했다.”

모두의 얼굴에 올라와 있던 긴장이 사르르 풀어졌다. 우리는 서로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마지막 리허설이 끝났다.

청중이 비어 있는 홀에 와서 하는 총 리허설이다.

우리는 실제로 홀의 음향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확인하고, 무대 자체에도 익숙해져야만 했다.

긴장감은 실전과 다름없었다.

연주회 사회를 맡으신 미하일 선생님이 객석을 향해 사회도 했고, 우리들은 시간에 맞춰 차례로 무대에 올랐다.

청중만 없을 뿐이지 실제 연주회와 다름없이 타임테이블에 따라 정확하게 진행되는 리허설이기 때문에 진짜라고 생각하며 임했다.

잘했을까?

이 연주회를 하기로 기획하고 한 달 사이 정말 최선을 다 했다.

나뿐만이 아니라 나와 함께 연주회를 하기로 한 친구들 역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다행히 모두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자신감이 넘치는 밝은 얼굴들. 모두가 최선을 다했고, 이젠 실전만이 남았다.

“짧은 시간동안 준비를 열심히 했구나. 이 홀을 찾을 관객들도 만족하리라 생각한다.”

“미하일 선생님.”

“그래, 막심.”

“티켓이 다 팔렸다는 게 정말인가요?”

불쑥 막심 선배가 질문했다.

미하일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 매진된 지 오래다. 이 홀을 꽉 채우게 될 거야.”

“그건 다행이군요.”

막심 선배와 미하일 선생님의 대화를 들으며 난 새삼 주변을 돌아보았다.

좌우로 크게 펼쳐진 커다한 홀이 보였다. 우리가 연주회를 해야 할 무대다.

이곳은 모스크바 국제 음악의 전당, 흔히 돔 무지키dom muzyki라고 불리는 곳이다.

“…….”

모스크바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모스크바 강의 중앙에는 코스모다미안스카야 제방이라는 하중도가 있다.

캐나다의 몬트리올이나 미국의 맨해튼처럼 강 중간에 위치한 섬이다.

그 가장 동쪽 끄트머리에 세워진 돔 무지키는 러시아에서도 손꼽히는 콘서트 홀로 러시아 국립 오케스트라의 주된 공연 장소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우리가 대관한 곳은 가장 큰 스베틀라노프스키 홀이 아닌 두 번째로 큰 챔버 홀이었다.

이 챔버 홀도 528석이나 되는 대형 홀이었다. 실내악과 듀엣 등을 선보이기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음향적으론 이만한 곳도 드물다.

이곳을 대관할 수 있게 된 것은 정말 여러 가지 행운이 겹친 일이었다.

자선 연주회란 음악 자체를 무료로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보통 우리같이 클래식을 가르치는 학교에서 하는 행사는 티켓을 팔아서 그 수익금을 기부하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그런 행사에서 큰 비용이 드는 외부의 홀을 대관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아직 수익성이 보장되지 않는 학생들이 큰 홀을 대관했다가 수익금으로 기부는커녕 사비를 써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학교의 행정직원들은 본래 하던 대로 교내 콘서트홀이나 모스크바 음악원의 홀을 대관하라 말했다.

그 와중에도 모스크바 음악원에선 공연 일정 문제로 이번 학기 중엔 대관이 어려울 것이란 답변만이 돌아왔다.

결국 교내의 콘서트홀에서 하게 되려나 싶었는데, 일전에 연락이 온 에이전시에서 다시 전화가 왔다.

그러고는 돔 무지키와 접촉해선 중앙음악학교의 자선 행사에 500석이나 되는 홀을 빌려주겠다는 의사를 약속받았다고 전달해 온 것이다. 난 그들의 유능함에 기가 막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한 달도 안 되는 시간에 500석이 넘는 객석을 채우기 위해선 홍보를 할 홍보물과 여러 준비가 필요했는데, 그것도 에이전시 측에서 도와주었다.

물론, 돈 한 푼 안 되는 일에 그들이 이렇게 적극적일 이유는 없었다.

학생들만으로 이루어진 자선 연주회로 사흘 만에 528석 모든 객석을 매진시키는 기염을 선보인 에이전시는 이것이 장래를 위한 투자라며 깔끔하게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는 비단 나 하나만을 향한 것은 아닌 듯했다.

“…….”

난 무대 위의 다른 네 명을 돌아보았다. 막심 선배, 니콜라이 선배, 에르네스트, 아나스타샤. 모두 중앙음악학교가 자랑하는 실력자들이다.

특히 막심 선배와 에르네스트는 청소년 음악가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인지도가 꽤나 있다. 정말 촉망받는 유망주로 각광받고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해 난 이제 막 첫 걸음을 뗀 수준이지만, 커리어에 조급증을 느끼거나 하진 않는다.

피아노 실력에 있어서 우리의 시간이 공평하지 않듯, 연주자로서의 커리어에 있어서 우리의 시간이 또한 공평하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다.

“…….”

미하일 선생님은 날 기억상실로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분들 중 한 명이었다. 선생님이 날 보며 물었다.

“타티아나는 이런 홀은 처음일 테고……. 너희들은 경험이 있느냐?”

“전 한 번요. 요만한 홀에서.”

아나스타샤가 대답했다. 그녀도 어려서부터 연주회 경험이 있었다.

“전 조금 많죠.”

“오호, 에르네스트.”

“가장 최근엔 라흐마니노프 홀이었죠. 700석이던가?”

수많은 콩쿠르에서 우승을 휩쓸고, 러시아 공로 예술가 훈장까지 받은 그의 연주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은 정말 많았다.

때문에 에르네스트의 연주회 이력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그런데 옆에 있던 막심 선배가 불쑥 말했다.

“내가 이겼군.”

대뜸 시비조다.

조금 뜬금없는 소리여서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연주회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가 인상을 썼다.

“뭘 이겨요.”

“아니, 그냥.”

“어디 대단한 곳에서 연주회 하셨었나봐?”

에르네스트가 비아냥거렸고, 막심 선배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조금 그렇지. 뉴욕의 링컨 센터가 후진 곳은 아니잖아?”

“뭐라고요?”

뉴욕의 링컨 센터는 2500석도 넘는 초대형 콘서트홀이다. 그곳에서 연주 한 번 하는 것이 꿈인 연주자들도 많은데……. 벌써 해 봤다고요?

놀란 눈으로 바라보니 막심 선배가 날 돌아보았다. 어떠냐는 것 같았다. 어떻긴 뭐가 어떻단 말인가? 당연히 대단하지.

뭐라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있는데 에르네스트가 더더욱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혼자 거기서 리사이틀을 한 건 아니잖아요? 오케스트라가 있었겠지.”

“넌 리사이틀이었어?”

“예, 그럼요. 혼자였다고요.”

마치 오케스트라와 함께하는 건 반칙이라는 듯한 투인데,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에르네스트.

어쨌건, 제대로 된 독주회는 열어 본 적도 없고 200석 규모의 홀에서 위클리 연주회를 해 본 게 전부인 내가 보기엔 혼자서 700석이나 되는 큰 홀에서 독주회를 한 에르네스트나 뉴욕의 링컨 센터 연주 경험이 있는 막심 선배나 둘 다 대단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에르네스트와 막심 선배는 어느 나라의 어느 콘서트홀에서 연주회를 했는지 경험들을 늘어놓았다.

종국엔 누가 이겼는지 판단해 달라는 듯 내 쪽을 바라보았는데, 내가 누가 이겼다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두 분 모두 대단하세요. 전 지금 이 홀이 다 찬다는 것만 생각해도 꿈만 같아요.”

“…….”

두 사람은 맥이 풀린 듯 어깨를 늘어뜨렸다. 쓸데없는 것으로 자존심 싸움을 했다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단지 에르네스트만 조금 미련이 남은 듯 말했다.

“시간만 있었으면 스베틀라노프스키 홀을 빌렸어도 괜찮았을 것 같은데.”

“1700석이나 되는 홀을요?”

“굉장할 것 같지 않아?”

생각만 해도 굉장하긴 하다. 일정도 여력도 안 되어 대관을 하진 못했지만 직접 본 1700석의 홀은 정말 훌륭했으니까.

그 홀에 설치된 러시아 최대 규모의 84라인의 파이프 오르간은 기절할 정도로 웅장했고, 무대 위에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무대에 오르면 어떤 기분일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두근거렸다.

나도 언젠가 그렇게 큰 홀에서 연주회를 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잘 모르겠지만, 그것이 내게 허락되어 있다면 최선을 다해 볼 뿐이다.

막연히 1700석의 콘서트홀을 떠올리고 있는데, 미하일 선생님이 현실로 우리를 되돌려 놓았다.

“대형 콘서트홀도 좋지만 너희도 잘 알지 않느냐? 우리 교내에서 자선 연주회를 열어도 200석을 채우기가 얼마나 힘든지.”

“그렇긴 하죠. 저도 몇 번 손해 본 적이 있으니까요.”

“손해요?”

“티켓 다 못 팔면 대관료 뭘로 낼 건데?”

내가 묻자 에르네스트가 턱을 짚으며 말했다.

연주회는 결코 쉽지 않다. 대관을 하고도 객석을 못 채우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에르네스트 역시 지금처럼 유명해지기 전엔 그런 경험이 있었던 것 같다.

막심 선배 역시 그런 경험이 없을 리 없다. 때문에 티켓을 다 못 판 적도 있다는 에르네스트의 이야기를 듣고도 비웃거나 놀리지 않고 진지하게 말했다.

“그에 비하면 이 연주회는 홍보도 짧았는데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하나.”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 무대가 쉽게 만들 수 있는 무대가 아니라는 것쯤은 분명했다.

막심 선배의 말에 미하일 선생님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연주자로 살면서 정말 여러 가지 운에 영향을 받지만, 적어도 콘서트 티켓팅에 대해선 그렇지 않다. 대중들이 얼마나 엄격한지 알지 않느냐?”

“…….”

“내가 보기엔 이번 연주회는 참 특이한 경우다. 여러 가지 행운들이 겹쳐 있지. 시간도, 장소도, 연주자도. 이런 인선을 한 번에 갖추는 게 얼마나 힘든지……. 선생인 나는 잘 안다.”

미하일 선생님은 우리를 천천히 둘러보며 이어 말했다.

“모두 최소 한 번씩은 청소년 콩쿠르 입상 경력이 있고, 개개인이 리사이틀을 연다고 해도 크게 어렵지 않을 테지. 그런데 모두가 이렇게 자선 연주회에 한데 모이게 된 것은…….”

말씀을 하시다 말고 미하일 선생님이 날 바라보셨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듯 나머지 네 사람도 내 쪽을 바라보았다.

“……?”

갑자기 내게 시선이 쏠리자 부담스러워졌다. 난 딱히 한 게 없는데…….

모두의 시선을 받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날 미하일 선생님이 구해 주셨다.

“어쨌든 마지막 리허설도 끝냈으니 점심 식사나 다 같이 하러 가자꾸나.”

“좋아요.”

“점심 이야기하시니까 갑자기 배고파지네.”

그간 함께 모여서 연습을 할 때마다 미하일 선생님은 우리들의 단합을 위해서라며 자주 식당으로 데리고 가곤 하셨다.

선생님의 지갑 사정까지 걱정하는 건 제자 된 도리가 아니란 걸 알지만, 그래도 조금 걱정된다.

***

베르체노프가의 저녁 식사는 늘 가족이 함께 한다. 그것은 오늘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버지가 드시고 계시던 샤슬릭을 내려놓으시곤 말씀하셨다.

“타티아나.”

“예. 아버지.”

평소 잘 웃으시는 법이 없는 아버지가 옅게 미소를 띠며 말씀하셨다.

“연주회는 내일 저녁이었지. 무슨 일이 있어도 가겠다고 했으니 약속을 지켜야지. 내일 가마.”

정말 오시는구나. 가슴이 크게 뛰었다.

한 달 전 이 연주회를 계획하고 아버지에게 허락을 받았을 때부터 오시겠다고 말씀은 하셨지만, 워낙 바쁘신 분이라 그때도 노력은 해 보겠지만 확답은 줄 수 없다고 하셨다. 하지만 이번엔 확답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청소년 콩쿠르 때에도 아버지가 오셔서 얼마나 마음에 도움이 되었는지 모른다. 난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기뻐요. 좋은 모습 보여 드릴게요.”

“연습한 그대로, 그래……. 네가 만족할 수 있는 연주를 하면 된다.”

아버지는 그렇게 말씀을 마치시려다가, 문득 생각이 나셨는지 덧붙였다.

“타티아나. 난 네 독주회를 열어 줄 수도 있었지만, 이렇게 학교에서 하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더 보기 좋구나. 친구들과 함께하고 있기도 하고.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라고 했었지?”

“예. 거기에 10학년의 막심, 니콜라이 선배도요.”

“……다행이구나. 잘될 게다.”

아버지가 오시는데 루슬란 오빠가 안 올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오빠를 돌아보았다.

“오빠도 오시는 거죠?”

“무조건 가야지.”

생각보다 강한 긍정이 떨어졌다. 루슬란 오빠는 이전보다 훨씬 더 날 자주 챙겨 주려 하곤 했다.

그런 루슬란 오빠는 이번 연주회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본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말이야, 타티아나.”

“예. 오빠.”

“네 친구인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가 피아노 듀엣을 하는 것 같던데. 연주회 프로그램을 보니까 그렇게 나와 있더라고.”

이미 연주회 프로그램은 포스터로 다 공개되어 있었다. 루슬란 오빠는 그것을 본 것 같았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아요.”

“학교에서 선생님이 짜 준 건가? 그 두 명으로.”

“아니에요.”

“그럼 왜 같이 듀엣을 하지? 널 빼놓고.”

“……제가 무슨 상관인가요?”

뚱하니 묻자 루슬란 오빠가 포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난 그 애들을 봤잖아?”

루슬란 오빠는 내 콩쿠르에 따라온 적이 있었고, 그때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 역시 함께 있었다.

루슬란 오빠는 내 친구들에게 꽤나 관심이 많았다.

무언가 의심하는 듯한 눈초리가 날카롭게 빛났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 두 사람이 난데없이 듀엣을 하는 광경이 상상이 안 가서. 내가 물론 네 친구들에 대해 잘 알진 못하지만, 왜 처음 보면 느껴지는 관계와 구조라는 게 있잖아?”

“……?”

“두 사람이 어려서부터 친구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뭔가 애틋해 보이진 않았거든?”

“꼭 애틋해야만 듀엣을 하는 건 아니에요. 그건 큰 오해예요, 오빠.”

오케스트라와의 관계와 다르게 소규모의 작은 실내악은 서로간의 친애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것이 꼭 연애 감정일 필요는 없었다. 대부분은 음악가로서 서로의 음악에 반해서 가까워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루슬란 오빠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 듯 다시 물었다.

“그래서 왜 두 명이 하는 건데? 난데없이 사귀기라도 하나?”

“정말 이상한 걸 궁금해하시네요……. 아니에요. 제가 부탁했어요.”

“응?”

“제가 부탁했어요.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가 듀엣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요.”

“…….”

루슬란 오빠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곧 이해했다는 듯 툭 던졌다.

“그 애들 정말 착한 애들이네. 다음에 만나면 잘해 줘야겠어.”

착하다마다요. 하지만 잘해 줘야겠다는 게 아나스타샤에게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겠죠?

아무 말이나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난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포크를 들었다.

루슬란 오빠의 입에서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듣기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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