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7화
나와 아나스타샤, 에르네스트 세 사람은 시간에 맞춰 모스크바 국제 음악의 전당, 돔 무지키로 향했다.
평일 공연이 없는 시간에 맞춰 최종 리허설을 위해 들렸던 때와는 달리 주말을 맞이하여 가족끼리, 연인끼리 함께 문화 활동을 즐기기 위해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넘쳐났다.
그 사람들 사이에 섞이지 않고 우리는 공연 관계자 전용 통로를 통해 안으로 들어섰다.
챔버 홀의 연주자 대기실로 가니 선배들은 이미 와 있었다.
깔끔한 턱시도 차림의 막심 선배와 니콜라이 선배가 의자에 앉아서 무언가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를 발견하고는 일어섰다. 내가 먼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들.”
“와우, 이게 누구야. 요정이 두 분 오셨나 했네.”
막심 선배는 유난히 호들갑이었다.
그간 어울리면서 알게 된 막심 선배는 음악에 있어선 굉장히 주관이 강하고 무게감 있는 사람이었지만, 가벼울 필요가 있을 땐 얼마든지 가볍게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타티아나 후배님. 아나스타샤 후배님.”
“감사합니다…….”
니콜라이 선배는 가끔 깜짝 놀랄 정도로 직설적인 말들을 해 오는 편이었다.
생각해 보면 니콜라이 선배는 처음 우릴 봤을 때부터 아름답다느니 그런 말들을 했었다.
보통 그런 말을 들으면 대체 이 사람 뭔가 싶은 생각부터 들 법도 한데, 니콜라이 선배가 하는 말은 순수하게 진심인 것처럼만 들려서 듣는 사람을 조금 무방비로 만들곤 했다.
니콜라이 선배는 사람 좋게 웃고만 있었다.
이 두 선배가 나와 함께 오늘 연주회에서 주된 프로그램을 맡을 트리오였다.
지난 한 달간 합을 맞춰 보면서 우린 서로의 음악을 교류하고, 경쟁하고, 이해하면서 하나로 이어져 갔다.
그 결과를 증명할 차례였다.
“이제 다 모였으니 마지막 점검 다시 하고 웜업 들어가도록 하죠.”
서로 인사를 주고받고 대화가 마무리되었다.
에르네스트는 낯빛을 바꾸더니 철저히 사무적인 얼굴로 돌아다니면서 무대와 우리 대기실 등을 점검했다.
그리고 이곳엔 무대에 오르기 전에 마지막 연습이자 손을 풀고 긴장을 풀 기회도 있었다.
마땅한 장소가 없는 곳도 많은데, 돔 무지키는 연주자들을 위한 준비들이 철저했다.
우리는 직원의 안내를 받아 준비실을 이용할 수 있었다.
“…….”
긴 시간 동안 할 필요는 없었다. 20분 정도 짧게, 선배들과 호흡을 다시 정렬했다.
중요한 구간들만을 짚고 넘어가면서 우리들은 서로의 소리를 맞춰 보았다. 문제없었다. 하던 대로 하면 될 것 같다.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도 차례로 연습곡으로 손을 풀고, 짧게 듀엣을 시작했다.
옆에서 듣는 것만으로도 환상적인 음색을 두 사람은 자아내고 있었다. 같이 지켜보던 대기실 직원은 입을 벌리고 쳐다보고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일전에 주장했던 대로 피아노 듀엣은 트리오에게 가야 할 스포트라이트까지 모조리 빼앗아버릴 수도 있을 정도로 강렬하고, 인상 깊었다.
물론 쉽게 내어 줄 생각은 없다.
짧은 웜업도 끝났다. 각자 다루는 악기들을 만졌더니 몸이 달아 있는 것이 느껴진다. 한층 더 고조된 기분으로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고, 웃었다.
대기실 직원이 슬쩍 내게 물어보았다.
“정말 미성년자 맞습니까?”
“예. 맞아요.”
“믿어지지 않는군요. 아까 트리오를 하셨을 때도 놀랐는데……. 정말 중앙음악학교에선 뭘 가르치는 겁니까?”
“음악을 가르치지요.”
굳이 농담을 궁리할 필요도 없었다.
내 대답에 직원은 헛웃음을 흘렸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폭소를 터뜨렸다.
시계를 보니 4시경. 적당한 긴장과 편안함을 유지하며 잠시 망중한을 즐기고 있자, 연주자 대기실 문이 열렸다.
“내 준비가 조금 늦었구나, 얘들아.”
“미하일 선생님.”
미하일 선생님은 우리보다 훨씬 더 일찍 와서 이 연주회 전반에 관련된 일들을 처리하셨다.
홀 담당자들을 만나고, 문제없이 공연을 진행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 그리고 공연 시작 1시간 전이 되어서야 그것들이 마무리된 모양이었다.
미하일 선생님이 우리들을 죽 둘러보고는 물었다.
“모두 컨디션은 어떠냐.”
“아주 좋아요.”
나뿐만 아니라 모두들 한마디씩 더했다. 지금 여기에 준비가 덜 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웜업까지 마치고 잠시 휴식중이라고 말하자 미하일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험자들이 많아서 그런지 걱정할 것이 없구나. 좋아. 그러면 잠시 관계자 대기실로 가자꾸나. 부모님들이 와 계시니.”
우리는 미하일 선생님을 따라 챔버 홀 관계자 대기실로 향했다.
오페라나 뮤지컬 등의 공연이면 분장이나 장비 등을 담당하는 사람들로 발 디딜 곳 없이 분주한 곳이지만, 우리처럼 몸만 있으면 되는 연주자들의 연주회가 있을 땐 가족들이 객석에 가기 전 무대에 오르기 직전의 연주자들과 인사와 격려를 나눌 수 있는 곳이었다.
관계자 대기실 안엔 벌써 많은 분들이 와 계셨다.
난 자동적으로 눈을 돌려 아버지와 루슬란 오빠부터 찾았다. 하지만 아직 오시지 않은 듯했다.
대신 일전에 뵈었던 분들에게 인사를 먼저 드리기로 했다.
가장 먼저 내가 향한 곳은 에르네스트의 부모님과 아나스타샤의 부모님이 있는 곳이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와 봐야 하지 않겠니.”
아나스타샤의 어머니가 시크하게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최근 몇 년 사이 아나스타샤가 콩쿠르에도 연주회에도 나가지 않는 것으로 조금 걱정하셨다고 들었는데, 이번에 연주회를 하게 된 것으로 굉장히 기뻐하시는 듯했다.
그리고 에르네스트의 어머니는 먼저 말씀하셨던 대로 드레스를 입고 오셨다.
20대라고 해도 믿을 법한 동안에 드레스까지 입으시니 에르네스트의 어머니가 아니라 누나라고 해도 믿어질 정도였다.
“덕분에 나도 드레스 입어 봤단다, 타티아나. 좋은 핑계이지 않니?”
“언제든 잘 어울리실 거라 생각해요.”
“후후후, 그래?”
웃음이 가득한 인사를 주고받고, 두 아버지들과도 인사했다.
아나스타샤의 아버지는 그녀의 드레스 차림을 보며 철이 들어서 그런지 얌전해진 것 같다고 했다가 괜한 타박을 들었다.
“타티아나.”
“일리야.”
그리고 곁에 있던 아나스타샤의 오빠, 일리야가 날 불렀다.
그는 검게 염색했던 머리는 그대로이지만 피어싱도 안 하고, 말쑥한 슈트 차림을 하고 있었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슈트도 멋있으시네요.”
“무슨 소리야 내가 멋져서 뭐하게.”
일리야는 황당하다는 듯 답했지만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나와 일리야는 단 이틀 봤을 뿐이었지만, 그 후 두 달간 못 봤어도 스스럼없이 친했다. 난 친애를 담아 그에게 말했다.
“아나스타샤에게 들었어요. 대학에 가기로 하셨다면서요.”
“한 번 해 보려고.”
“잘 생각하셨어요. 분명 하실 수 있을 거예요. 저도 응원할게요.”
“고마워. 잘되면 한 턱 쏠게.”
“분명히 약속하셨어요.”
다시 한 번 확인을 받자 일리야는 자신만만하게 호언장담을 했지만 내심 불안해 보였다.
대단한 한 턱을 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난 속으로 웃었다.
마지막으로 사샤와도 다시 인사하고, 처음 뵙는 분들에게 향했다.
이젠 모르는 분들과 마주하는 것에 대해 꽤나 익숙해져 있지만, 그래도 혹시 무언가 예의에 어긋나진 않을지 항상 걱정되곤 한다.
“처음 뵙겠습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입니다.”
“처음 뵙겠어요, 아가씨. 니콜라이의 아비 되는 사람입니다. 콘스탄틴 올라비예비치 자이체프예요.”
니콜라이 선배의 아버지는 정말 선배와 많이 닮아 있었다. 심지어 나긋나긋한 말투까지도. 어쩐지 익숙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잘 부탁드려요.”
“저야말로요. 오늘 연주회, 기대해도 되겠죠?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니콜라이.”
“예, 물론이죠.”
니콜라이 선배의 부드러운 성격은 확실히 부모님들로부터 물려받은 듯했다.
그리고 옆에 계시던 막심 선배의 아버지는 큰 소리로 웃으셨다.
“하하, 연주회를 해도 콩쿠르를 해도 혼자 하는 법이 많던 녀석들이 이번만큼은 꼭 보러 오라고 하더니, 그 이유가 있었군.”
“선배님이 그랬나요?”
“그럼! 음…….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그래서 궁금한 게 있는데, 막심하고는 어떤 경로로 만나게 된…….”
“여보, 지금 뭘 묻는 거예요? 아가씨 곤란하게.”
막심 선배의 어머니가 중간에 말을 가로막았고, 내게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셨다. 그렇게 생각하실 것 없는데.
난 간략하게 지난 학기말 파티장에서 선배들과 만났던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물론 그 자리에서 설전을 벌이다가 무대 위로 바로 올라갈 뻔했던 것은 깨끗하게 빼놓은 채로.
선배의 부모님들은 이 이야기가 마음에 드셨는지 웃음을 그치지 않으셨다.
그렇게 연주회를 보러 와 주신 부모님들과 순서대로 인사를 나누고 다니자 곧 네 쌍의 부모님들이 한 자리에 모이셨다.
음악예술이라는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아들딸들을 둔 부모님들이다. 서로 인사하고 알고 지내고 싶어 하는 것도 당연했다.
부모님들과 미하일 선생님들 사이에 웃음과 환담이 오가고, 밝은 분위기의 작은 사교 파티장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술과 음식 등이 제공되진 않았지만, 목을 축일 음료와 간식 정도는 있었다.
“이거, 앞으로도 자주들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연주회도 자주 열고 말이죠.”
“따님의 미모가 사모님을 닮았나 보네요. 우리 애는 제 아비를 닮았는지…….”
“당신 말이 조금 심하지 않아?”
“하하하하. 아드님도 무척이나 미남이신데 뭘 그러십니까?”
약간 정신없는 와중에 어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며 난 웃음을 잃지 않았지만 조금 초조함을 느꼈다.
신경을 집중할 수가 없고 귓가가 먹먹했다.
아버지와 루슬란 오빠는 어디쯤 오셨을까? 전화를 해 볼 수도 있겠지만 스마트폰은 가방에 있었고, 전화를 하면 불안감에 재촉하는 듯한 느낌이 될 것 같다. 꾹 눌러 참는다.
언제 아버지가 거짓말을 하신 적이 있던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도 전용기를 타고 와 주신 분이다.
어제 저녁 식사 자리에서도 다시 한 번 오신다고 분명히 말씀해 주셨으니 분명 오실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바쁘신 분이시니 혹여나 갑자기 일이 생겨서 못 오신다고 해도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이러저런 생각들을 하며 관계자 대기실 출입문을 바라보고 있는데, 마치 내 바람에 응답하듯 문이 천천히 열렸다.
“……!”
문이 열리고 들어온 것은 루슬란 오빠와 아버지였다.
순간 대기실 안의 모든 사람들이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한꺼번에 쏠린 시선을 받고도 아버지와 루슬란 오빠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위를 보더니, 날 발견했다.
아버지가 얼음장 같던 표정을 지우고 미소 지었다.
“타티아나.”
난 다가가서 아버지와 루슬란 오빠를 차례로 한 번씩 포옹했다.
루슬란 오빠가 내게 안긴 채로 작게 변명했다.
“많이 늦었지? 미안. 준비하는 데에 시간이 조금 걸려서.”
“아니에요. 와 주셔서 정말 기뻐요.”
짧은 인사가 끝나고, 이젠 어른들이 이야기할 시간이었다.
아버지와 사업 파트너인 에르네스트의 아버지, 스테판 니콜라예비치가 가장 먼저 다가왔다.
“기다렸습니다.”
“오래간만이오.”
두 중년의 남자가 악수를 하며 인사말을 나누는 광경일 뿐인데도 다른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다.
에르네스트의 아버지가 악수한 손을 흔들며 말했다.
“저번 따님의 콩쿠르 이후로 워크숍에서 한 번 뵙고는 못 뵈었지요, 유리.”
“그렇소, 스테판.”
그렇게 인사가 오가는 동안에도 떠들썩했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묘한 적막이 흐른다.
아버지는 이 대기실에 등장한 것만으로도 모두의 시선과 신경을 잡아끄는 존재감을 보이고 계셨다.
짧은 인사를 나누고, 아버지는 다른 부모님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쩐지 모르게, 부풀어 오르는 긴장감이 나에게까지 느껴진다. 막심 선배와 니콜라이 선배도 표정이 굳어 있었다.
나도 덩달아 긴장했다. 아버지가 어떻게 말씀하실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걱정할 만큼 아버지는 딱딱한 분이 아니셨다.
“처음 뵙는 분들, 반갑소. 유리 알렉세예비치 베르체노프요. 앞으로도 긴 인연으로 사적인 자리를 가질 일이 많을 텐데, 편한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소.”
“사적인 자리 말입니까?”
예상외의 말이었는지 막심 선배의 아버지가 되물었고, 아버지는 편안한 어투로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소? 이 자리에 있는 모두 오늘 연주회의 주인공들을 성원하기 위해 모인 학부모들 아니오? 나 역시 타티아나의 아비로 왔을 뿐이오.”
베르체노프 콘체른의 총수가 아닌 오직 내 아버지로서 이 자리에 왔다는 포근한 말에 가슴이 찡했다.
말 한마디에 감동을 받아 눈시울이 붉어졌을 것이 분명한 내 얼굴을 아버지에게 보이기 창피했지만, 나도 모르게 돌아보았다.
아버지는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그저 웃어 주셨다.
“그렇지요, 유리 알렉세예비치.”
모든 것을 이해했다는 듯한 그 말이 기점이었다.
긴장감이 맴돌던 분위기가 녹아내리면서 다시금 웃음이 피었다. 난 한결 편안하게 거기에 섞여들 수 있었다.
즐거운 담소가 끝없이 이어질 것처럼 계속되었지만,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렀고 곧 때가 찾아왔다.
미하일 선생님이 문가에 서며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키고는 말씀하셨다.
“애석하지만 시간이 슬슬 되었군요. 저희는 연주자 대기실로 가 봐야겠습니다. 학부모 분들께선 객석에서 지켜봐 주시죠.”
선생님은 안경을 올리면서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저희가 뭘 준비했는지 보여 드리죠.”
“기대되는군요, 선생님.”
이젠 부모님들이 도와주거나 지켜 줄 수 없는, 우리들만의 무대에 오를 시간이다.
부모님들은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격려와 응원의 말들을 전해 주셨다.
“타티아나.”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난 가까이 다가섰다.
아버지는 가만히 날 내려다보시더니 내 목에 걸린 가넷 목걸이를 한 번 만져 보시고는, 허리를 숙이고 날 끌어안아 주셨다.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다녀오거라.”
“……지켜봐 주세요, 아버지.”
길고 화려한 말이 아닌 그저 맞닿은 온기에서 전해져 오는 응원과 믿음.
난 목이 메지 않게 애쓰며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