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8화
이반느는 모스크바에서도 손꼽히는 악기점의 주인이었다.
어려선 타고난 천재라는 칭찬을 받으며 음악학교에 입학해 피아노 연주자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이 천재가 아닌 수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진 1년이, 수재가 아닌 범재라는 것은 인정하기까진 4년이 걸렸다.
4년의 시간은 미련이기도 했지만, 이반느에게 있어선 그 무엇보다 소중한 시간이기도 했다.
재능 없이 열정만 쥐여 준 신을 원망할 수도 있었지만, 이반느는 이미 음악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때문에 스스로 음악학교에서 자퇴하고 일반 학교로 간 뒤로도 클래식에 대한 공부를 멈추지 않았으며, 학교를 졸업해서는 클래식 악기를 유통하는 회사에 취직했다.
그렇게 돈과 경력을 모아서 차리게 된 것이 자신의 악기점이었다.
이반느는 현재의 삶을 마음에 들어 했다.
악기점을 운영하면서 많은 돈을 벌진 못했지만 충분했고, 손님들은 까다로웠지만 몰상식하지 않았다.
그녀는 악기점의 여주인으로서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다.
클래식 음악은 팝 음악이나 축구 경기처럼 대중들에게 인기가 많은 분야는 아니었지만 단단한 기반과 팬들을 지니고 있다.
연주자와 작곡가 외에도 클래식 음악을 지지하고, 그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많았다.
음반사업자, 악보출판사, 매니저, 에이전트, 평론가, 음향기술자, 조율사, 악기전문가 등등. 이반느는 자신이 그에 속해 있다는 것에 대해 만족했다.
그녀는 종종 친구들과 만나선 우스갯소리로 자신이 피아노를 끝까지 전공했다면 아마 이렇게 악기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에게 악기를 파는 대신 피아노를 증오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여느 때처럼 가게를 열고 악기들을 손보던 어느 날.
모 에이전시에서 왔다는 어떤 남자가 찾아와 자선 연주회 포스터를 가게 유리면에 붙일 수 있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요청했다.
악기점을 15년간 운영하면서 이런 부탁은 정말 많이 받았다. 이반느는 그렇게 하라고 했다.
자선 연주회라는데 포스터를 붙이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슨 연주회인지 자세한 내용을 보는 순간, 이반느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 작은 홀도 아니고 돔 무지키? 챔버 홀에서 성인도 안 된 중앙음악학교 학생들이 피아노 트리오를 한다고?
피아노 트리오는 세 연주자가 뛰어난 연주 실력과 조화를 보여야 하는 정말 어려운 음악이었고, 그야말로 전문가의 영역에 속하는 음악이었다.
학생들이 하기엔 결코 쉽지 않다는 생각과 함께 흥미가 생겼다.
감사를 표하며 떠나는 남자를 막 붙잡은 이반느는 티켓을 가지고 있다면 지금 사겠다고 말했다.
남자는 2장을 사면 싸게 주겠다고 말했고, 이반느는 별생각 없이 2장을 샀다.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주말이 되었고, 이반느는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뒷좌석에선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약속 잊지 마요? 이거 보고 나면 다음 주에 차 빌려주시기로 한 거.”
“그래. 알았다니까.”
아들인 파벨은 모처럼 휴일에 뜬금없이 클래식 자선 연주회를 보러 가자는 이반느가 귀찮은 듯했지만, 다음 주 친구들과 놀러가는 데에 차를 빌려주겠다는 말에 그만 넘어가고 말았다.
이반느는 파벨이 어려서 바이올린을 배운 적이 있지만 지금은 대중적인 가요나 팝에 관심 있어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음악 취향은 개성이었고, 이반느는 굳이 아들에게 클래식을 들어야만 한다고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표는 이미 2장을 사 버렸고 남편과 이혼해 아들밖에 없는 이반느에겐 같이 갈 사람이 없었다.
이반느는 백미러를 통해 뒷좌석에 반쯤 널브러져 있는 아들을 보며 말했다.
“파벨. 클래식 연주회에 안 가 본 지도 오래되었지 않니?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이것도 하나의 교양이라고 생각하면…….”
“무슨 교양요.”
파벨은 대번에 반항적인 목소리로 답했다.
“엄만 제가 하드바스 같은 거나 듣는다고 해서 교양 없어 보여요?”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
“지금 가는 연주회도 어차피 음악학교 애들이 자선차 하는 거라면서요. 프로도 아닌 그 애들이 뭘 할 줄 안다고 교양을 느껴야 해요, 제가?”
이반느는 할 말을 잃었다. 틀렸다고 단호하게 꾸짖을 수 없었다.
프로 연주자들이 하는 음악회도 종종 실망스러운 완성도를 보일 때가 많았는데, 하물며 음악학교의 학생들이 하는 행사라면 큰 기대를 않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어색한 침묵이 자동차 안에 고였다. 파벨은 엄마를 더 화나게 만들었다간 다음 주 버스를 타고 놀러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인상을 찡그리고 스마트폰을 내려다보았다. 이반느는 운전에만 집중했다.
그렇게 자동차는 고요 속에 돔 무지키에 도착했다.
주말의 돔 무지키는 연주회나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로 가득이었다.
간신히 빈자리를 찾아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킨 이반느와 파벨 모자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팸플릿을 구매했다.
연주자 목록과 프로그램 목록이 실려 있는 팸플릿이었다. 슥 훑어보니 특별히 다른 점은 없었다.
연주자는 모두 중앙음악학교의 학생들이었다. 8학년이 세 명, 10학년이 두 명. 이력은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화려했다.
표값이 보통 자선 연주회에 비해도 결코 싸지 않았는데 그만한 연주회를 볼 수 있길 바랄 뿐이었다.
이반느와 파벨은 겉옷을 맡기고 챔버 홀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연주회가 시작되기 전이라 웅성거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객석에 앉은 이반느는 묘한 중압감을 느꼈다.
학생들의 자선 음악회이니 자연스레 그 부모친척들이나 친구들이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었다.
마치 엄숙한 자리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잠시 기다리면서 다시 팸플릿의 프로그램 순서를 보고 있자, 홀 안의 조명이 어두워졌다.
그것만으로도 사람들 사이의 말소리들은 점차 사그라들었고, 분위기가 가라앉으며 공기가 무거워진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반느는 파벨에게 작게 말했다.
“핸드폰 끄렴.”
파벨은 군소리 없이 스마트폰의 전원을 껐다. 파벨뿐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도 혹 소리가 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껐다.
500명의 청중들은 오로지 곧 있을 무대만을 위한 준비를 갖췄다.
적막이 깃든 홀과 어두운 무대, 무대 좌측 한편에만 조명이 들어왔다.
잠시 후, 조명 아래로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와서 섰다.
안경을 쓴 중년의 남자였다. 차분한 목소리가 연주회의 시작을 알렸다.
“안녕하십니까. 모스크바 국립음악원 부속 중앙음악학교 자선 음악회의 사회를 맡게 된 미하일 표도로비치 볼콘스키입니다.”
환영의 박수. 자신을 미하일이라 밝힌 사회자는 박수가 멎길 기다렸다가, 정확한 타이밍에 인사말을 이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시기, 여러분을 모시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돕고자 귀한 걸음 해 주신 분들을 위해 다양한 음악들을 준비했습니다.”
멘트를 적어 둔 카드도 한 장 없이 유려하게 인사말을 전한 미하일이 여유 있게 웃으며 말했다.
“뜻깊은 자리가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미하일은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바로 첫 번째 프로그램을 소개했다.
“첫 번째 곡은 브람스의 피아노 트리오 3번입니다. 19세기 말경 요하네스 브람스가 친구인 비트만의 집에서 앙상블을 하기도 하며 평화롭고 행복한 시기를 보냈을 때에 작곡한 곡이죠. 그 시기에 작곡된 명곡들은 정말 많습니다만, 피아노 트리오 3번은 특히나 피아니스트로서 브람스가 이 피아노와 현악기들의 절묘한 밸런스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 곡이 되겠습니다.”
클래식 음악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가벼운 소개였다.
보다 깊게 브람스의 음악에 대해 설명해 주어도 되겠지만, 말보단 연주로 보여 주겠다는 듯 미하일은 적절하게 흥미만 돋우는 수준에서 설명을 마쳤다.
“그 곡, 직접 확인하시죠. 브람스의 피아노 트리오 3번을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의 피아노와 막심 드미트리예비치 체르체소프의 바이올린, 니콜라이 콘스탄티네비치 자이체프의 첼로로 준비했습니다. 박수로 맞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무대 위로 조명이 비춰지고, 뒤편에서 세 사람이 걸어 나왔다.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반느는 무대 위를 살피다가 깜짝 놀랐다.
훤칠한 키의 바이올린과 첼로, 두 남학생도 인상적이었지만, 그 무엇보다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감색의 드레스를 입은 여학생이었다.
우아한 몸놀림에 맞춰 물결처럼 흔들리는 드레스와 백금의 머리칼이 어우러져, 거의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운 소녀였다.
이반느는 슬쩍 옆 객석을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파벨은 넋이 나간 듯 무대 위로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이래서야 무대가 어떻든 간에 저 피아노 연주자, 타티아나에 대한 이야기밖에 안 할 것 같아 걱정이다.
우레와도 같은 박수를 받으며 세 연주자는 무대 위에 나란히 서서 객석을 향해 인사했다.
타티아나는 품격 있게 인사를 하곤, 고개를 들고 싱그러운 미소를 그렸다.
피아노의 요정처럼만 보이던 인상이 비로소 사람같이 보였다. 박수 소리가 더욱 커진다.
준비된 피아노와 두 개의 의자에 연주자들이 착석했고, 서로를 바라본다.
문제가 없다는 눈빛을 교환하고,
“……!”
세 악기가 동시에 화음을 쏟아내었다.
1악장. 다단조 알레그로 에네르지코. 힘차고 풍부한 화성이 홀을 울린다. 회색 빛깔의 웅장한 음악이다.
거침없이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선율을 이끌고, 첼로가 뒤따르다가 피아노 혼자서 두 현악기를 밀어 올린다.
무게 없이 크기만 한 음량이 아닌, 아주 밀도 높은 음들이 발밑에서부터 차올라 가슴 근처에서 넘실거리는 기분이 든다.
조금만 허리를 늘어뜨리고 목을 내리면 그 음들을 들이킬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반느는 타티아나가 보이는 압도적인 음의 바다에 경탄했다.
그런 피아노에 맞춰 바이올린과 첼로도 질세라 브람스의 안배에 따라 조화를 이뤘다.
브람스의 합주곡은 유별날 정도로 치밀하다.
때문에 연주자 중 한 명이라도 음이나 박자를 잃고 실수를 하면 음악 전체가 방향성을 잃고 뭉개져버리는 특징이 있다.
공을 주고받듯 서로 유려하게 주도권을 주고받으면서도 어느 한 명이라도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면 안 되는,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음악.
프로 연주자들도 맞추기 힘든 그 균형을 이 학생 트리오는 잘 해 나가고 있었다.
그 기초가 되어 주는 것은 피아노였다.
거대한 존재감으로 가뿐하게 무대를 장악하고, 큼지막하게 이정표를 써 붙여 놓고 있으니 길을 잃으려야 잃을 수가 없다.
타티아나의 왼손이 피아노로 그려내는, 기가 막힐 정도로 뚜렷하게 보이는 선율의 이정표.
뛰어난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던 브람스의 정수가 타티아나에게서 재현되고 있었다.
“…….”
정열적인 화성이 풍부하게 내뿜어지다가, 얽히면서 치솟는다. 바이올린은 환희하며 앞장서는 나팔수가 되어 걸었다.
경쾌함보다는 묵직함이 강하다. 피아노와 첼로는 마치 한 악기처럼 뭉쳤다가, 떨어져 나간다.
그다음 이어지는 두 번째 주제는 바이올린과 첼로가 하나로 묶여 한 음을 내었다.
장대한 화성과 조화가 쉴 새 없이 계속되면서 음악을 쌓아올렸다.
오직 악기의 소리만을 확실하게 전달하기 위해 설계된 챔버 홀은 그 역할을 다한다.
좋은 실내악을 위한 모든 조건들이 모여들어 한 음악을 이루었다.
이반느는 트리오가 선보이는 음악에 숨 쉬는 것도 잊고 빠져들었다. 이 음악은 바다였다.
시원하고 푸른 이미지가 아닌, 광대하고 고독하면서도 정열을 지닌 바다였다.
바다에 빠져서 숨을 못 쉬게 된다면 숨을 쉬기 위해 급히 떠오르고 싶어지겠지만, 이 정열의 바다에선 도무지 빠져나오고 싶지 않았다.
인간이라면 누구든 이 바다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
1악장이 끝나자 이반느는 고개를 들었다. 정신없이 한 악장이 끝났다.
스스로 빠져나온 것이 아닌, 음악이 끝났기에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된 기분이었다.
곳곳에서 한숨 소리가 들린다.
아직 곡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소리를 내는 것은 실례되는 행동이지만, 그 누구도 서로를 무어라 할 수 없었다.
모두들 비슷한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학생들을 이끌고 연주회를 진행하면서도 사회자가 묘하게 자신에 찬 듯한 모습이더니, 그 이유가 있었다.
2악장. 다단조. 프레스토 논 아사이. 2/2박자의 스케르초가 시작된다.
현악기들이 반주를 하며 피아노가 선율을 조용히 연주했다. 첫 주제는 마치 피아노가 질문을 던지는 듯한 음색이다.
그리고 현악기가 대답하며 대화를 나누어 나간다.
타티아나가 다루는 신묘한 피아노의 음색은 귀에 곧바로 들어오는 것이 아닌, 목 근처를 휘돌다가 몸속으로 들어오는 듯 느껴졌다.
현악기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귀가 아닌 피부로 파고드는 음악에 전율한다.
이제껏 음악이라는 것이 청중들을 향해 연주자들이 각자의 악기로 음악을 발산하는 것이었다면, 이러한 연주는 마치 연극배우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고, 청중은 그 광경을 지켜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대화는 무대에서 맴돌지만, 몇 번이고 이입하게 만들며 곧 홀 전체를 무대로 만들어 놓는다.
갑자기 열변을 토하던 피아노가 눈물을 터뜨렸다. 이반느는 거기에 몰입하여 같이 무언가 목 안에서 치솟는 것을 느꼈다.
곧 바이올린이 다독이고, 첼로가 이끈다. 피아노는 다시 고조된다. 트리오가 조화를 이루며 앞으로 향했다.
타티아나는 별 감흥 없다는 듯 무표정하게 연주하고 있었지만, 말도 안 될 정도로 섬세한 호소력을 보였다.
손쉽게 사람들의 감정을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타티아나는 피아노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주어지는 2악장의 주인공을 연기했다.
그 호소력 짙은 2악장은 3악장으로 곧 이어졌다.
피아노의 선율을 이어받아 마치 눈물을 흘리는 듯한 바이올린 소리가 첼로의 반주와 함께 어우러졌다.
바이올린 연주자인 막심은 미간을 찌푸리며 음악에 집중했다.
강렬하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은 서정적인 악장이지만 막심은 마치 쓰러질 것처럼 의자에서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이번엔 피아노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반짝거리는 별빛과도 같은 음색이 순간 무대를 밝게 비춘다.
라단조로 이조된 음악은 서서히 희미해지다가, 다시 돌아간다.
로맨틱한 음악이, 꿈꾸는 듯한 느낌을 가져다주었다.
이 아름답고 서정적인 대화를 보고, 듣고, 느끼면서 이반느는 약간의 질투마저 느꼈다.
음악가들은 말이 오가지 않는 저런 형태의 대화도 할 수 있었다.
그 대화는 정말 아름다워서 듣는 것만으로도 감정이 북받칠 정도라, 직접 연주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느끼고 있을지 궁금하고 부러웠다.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전해 주는 달콤한 꿈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트리오는 4악장으로 향한다.
4악장 알레그로 몰토. 다단조. 여리게 울던 바이올린이 돌연 자세를 달리 하고 강렬하게 음을 쏟아낸다.
피아노가 따라붙어 그것을 보다 화려하게 만들었다.
론도의 형태를 하고 있는 곡은 처음 주어진 주제를 이어 나가다가 피아노의 아르페지오와 함께 현란한 합주로 전해졌다.
분명한 실내악의 범주에 속해 있지만, 거대한 오케스트라와 배우들을 필요로 하는 오페라의 한 주제로 쓰일 것 같은 주제가 제시되고, 발전하고, 폭발했다.
막심이 열정적으로 연주에 임하고, 타티아나는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피아노로 맞섰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타티아나의 손이 더욱 빨라졌다.
바이올리니스트와 피아니스트의 실력이 여실히 돋보이는 구간이 펼쳐졌다.
상대적으로 첼로는 주인공으로 나설 기회가 없어 보였지만, 둘 사이에서의 가교 역할을 정확하게 해 주었다.
첼로의 피치카토는 바이올린의 것과 달리 낮고 웅장하게 리듬을 지켜 준다.
잠시 주제가 바뀌면서 주제가 가라앉았다가, 피아노의 재기발랄한 속삭임과 함께 되풀이된다.
다시 피날레에 이르러 세 악기 모두가 마지막 목적지를 향해 내달렸다.
피아노는 빠르지 않게, 하지만 느리지도 않게 첼로와 함께 아주 굳건한 구조를 만들었고, 바이올린이 화려하게 주 선율을 이끌었다.
피날레에 다다르자 막심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바이올린의 소리가 나는 높이가 달라졌을 뿐인데 보다 넓은 곳까지 소리가 구석구석 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보다 강렬한 음량이 공간을 돌파하여 파괴적으로 객석에 와닿는다. 첼로가 함께하며 그 음향에 힘을 보탠다.
그리고 그런 바이올린을 부드럽게 감싸 안듯 피아노의 아르페지오가 이어지다가 쾅, 하고 내리찍으며 바이올린과 함께 선다.
타티아나가 손을 들었다가, 손끝으로 쿡 찌르듯 건반을 찍었다. 그것만으로도 객석이 통째로 진동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피아노 건반이 아닌 객석을 고정하고 있는 기둥을 때린 것 같다.
그렇게 바이올린이 지상 위를 지배한다면, 피아노는 마치 그 밑의 모든 것을 지배하듯 울렸다.
온몸을 지배하는 악기의 소리들이 기적과도 같이 느껴진다.
실황음악의 정수. 악기상인 이반느는 이러한 악기들의 힘을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울림이 착각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였다.
트리오의 환상적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피날레가 끝을 맺고, 여음이 2층 구석구석까지 전달될 때까지 기다린 뒤, 막심이 바이올린을 턱에서 떼고 객석을 향해 웃음을 보냈다.
“브라보!”
어마어마한 박수소리가 홀을 때렸다. 500명이 넘는 인원이 치는 박수 소리였으므로 귀청이 아플 정도로 강렬했다.
이반느는 열렬하게 따라 박수를 치면서도, 저 세 명이 악기로 내는 소리가 이 500명의 소리보다 훨씬 강렬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정돈된 음악과 그것을 연주하는 실력 있는 연주자에겐 그 정도의 힘이 있는 것이다.
타티아나와 니콜라이도 각자 자리에서 일어나서 객석을 향해 인사했다.
그렇게나 격렬하게 서로의 음악을 주고받았음에도 절도 있고 우아한 자세였다. 감탄이 나왔다.
이반느는 아들인 파벨이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궁금해하며 옆을 보았다.
파벨은 그야말로 얼이 빠진 듯 손만 움직이고 있었다.
“파벨.”
끝없이 이어지는 박수 속에서 살짝 파벨을 불렀다.
파벨은 멍하니 이반느를 돌아보았다가,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입을 열어 말했다. 박수 소리에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입모양으로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가끔 오죠, 연주회.”
교양이라고 부를 것 없이, 음악 자체가 전해 주는 감동은 그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파벨은 클래식 음악에 다시 조금 흥미를 되찾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이반느 역시 마찬가지였다.
음악학교에서 나온 이후로 연주자는 자신의 업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취미로 종종 연주하긴 했지만 악기상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했다.
하지만 악기로 대화하고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청중들을 감동시키는 어린 천재들을 보면서, 이반느는 한참 전에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질투를 느끼고 열정을 되새겼다.
이반느도, 못난 목소리나마 악기로 목소리를 내고 음악가들과 대화하고 싶었다.
다시금 느낀다. 그녀는 정말로 음악을 사랑했다.
이반느는 혼자서만 조금씩 쳐 보던 피아노를 조금 더 본격적으로 연습하고, 가게를 찾아와 주는 음악가 친구들과 합주도 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작은 방에서 친구들과 실내악을 하는 것이 고절한 천재들에게만 허락된 기적은 아닐 것이다. 이반느는 늦게나마 힘을 내 보기로 했다.
음악이라는 또 하나의 언어를 구사하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