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209화 (209/1,277)

##  209화

마지막 음을 마무리 짓고, 팔을 내린다.

현들의 울림이 멎음과 동시에 벼락과도 같은 환호성이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그때까지도 악기 소리에 집중하고 있던 신경이 잠시간 혼란스럽게 엉클어졌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객석에서 일어선 채 열렬하게 박수를 치는 청중들이 보였다.

막심 선배는 이미 일어서서 성원에 응하고 있었다. 나도 따라서 일어섰다. 혹여나 다리를 비틀거리지 않도록 주의했다.

나와 막심 선배, 니콜라이 선배는 나란히 서서 객석을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박수 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우리 세 명에게 전달되는 수많은 감정과 소리들이 마치 거짓말 같다.

“아…….”

수십 곡이나 되는 브람스의 실내악 곡들 중에서도 상당한 난이도를 자랑하는 피아노 트리오 제 3번.

때문에 선곡을 할 때부터 선생님, 그리고 선배들과 말이 많았던 곡이었다. 하지만 난 할 수 있다고 그 모두를 설득하고 이 곡으로 밀어붙였다.

이 곡의 정열적인 주제가 이 음악회의 막을 여는 첫 곡으로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결론적으로 내 선택은 틀리지 않은 듯했다.

“브라보!”

끊임없이 환호가 계속된다. 몇 번이고 반복된다.

천천히, 528석의 객석 전부를 구석구석까지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연주하는 내내 느낄 수 있었던 열기와 시선, 에너지는 바로 저 청중 한 명 한 명이 보내 주었던 것이다.

그 모든 에너지가 연주 내내 우리를 고취시켰고, 긴장과 열정을 음악으로 승화시키는 데에 일조했다.

그리고 연주가 끝난 지금은 우리에게 찬사를 보내온다.

이 환호는 무척이나 기껍다.

심사위원이 있는 콩쿠르가 아닌, 시간예술자인 연주자들이 만들어 낸 시간을 향유하는 연주회의 청중들은, 우리들의 음악 애호가들은 무척이나 열정적이고 당당했다.

난 이 멋진 청중들을 향해 애정을 담아 다시 한 번 미소를 보냈다.

끊이지 않는 박수를 받으며 무대 뒤로 퇴장했다.

미하일 선생님이 우리와 스쳐 지나가다가, 멈칫 멈춰서시더니 막심 선배에게 손을 내밀었다. 막심 선배는 얼떨떨해하며 그 손을 잡았다.

미하일 선생님이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훌륭했다.”

“아……. 감사합니다, 선생님.”

짧은 칭찬, 그다음은 니콜라이 선배다. 니콜라이 선배 역시 미하일 선생님과 악수를 나누고, 칭찬을 받았다.

마지막은 나였다.

“…….”

다가올 손을 기다리며 미하일 선생님을 올려다보는데, 선생님은 내게도 손을 내미는 대신 난데없이 날 껴안았다. 갑자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서, 선생님?”

“잘했다. 고맙다, 타티아나.”

칭찬은 정말 감사하지만, 평소 미하일 선생님이 이렇게 직접적으로 애정을 표시하시는 분이 아니었는데,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나야말로 지금까지 날 믿어 주고 지지해 주신 미하일 선생님께 감사하다.

멍하니 안겨 있는 대신 나도 선생님을 마주 안으려다가, 문득 정신이 들었다.

지금 둘만 있는 게 아니잖아.

간신히 고개를 빼어 옆을 보니 막심 선배가 키득거리며 웃고 있었다. 대번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밀쳐 낼 수도 없이 꼼짝 못 하고 붙잡혀 있자니, 이윽고 미하일 선생님이 날 놓아주셨다.

내려다보는 얼굴에는 안도와 기쁨이 가득했다.

나도 모르게 눈앞이 부옇게 흐려진다.

“대, 대기실에 가 있을게요.”

“그러려무나.”

더듬거리는 나와 달리 미하일 선생님은 얼핏 유쾌해 보이시기까지 한다. 그리고 선생님은 무대 좌측에 있는 단상으로 향하셨다.

“…….”

선배들과 연주자 대기실로 들어섰다.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가 일어서서 우리를 맞아 주었다.

에르네스트가 박수를 쳤다.

“멋졌습니다, 선배들. 타티아나.”

“고마워, 에르네스트.”

막심 선배가 답했다. 두 사람은 서로 조금 시비조로 대하는 경향이 있지만 분명 연주자로선 서로를 존경했다.

아나스타샤가 밝게 웃으며 내게 말했다.

“정말 최고였어, 타티아나.”

“아나스타샤 덕분이에요.”

우리는 사이좋게 테이블에 가서 잠시 앉았다.

프로그램에 따르면 다음 순서는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의 듀엣이지만, 잠시 시간이 있었다.

왜냐하면 피아노 트리오를 위해 준비되어 있는 무대 세팅을 피아노 두 대를 위한 무대로 바꿀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피아노 트리오 두 곡에 피아노 듀엣 한 곡이라면 이렇게 무대를 중간에 바꿀 필요 없이 피아노 트리오를 먼저 하고, 잠시 쉬어 가는 인터미션 사이에 무대를 교체하는 것이 나았다.

하지만 미하일 선생님은 이런 식으로 음악들을 대비시키는 방식이 더욱 다채롭게 느껴질 것이라 말씀하시며 이런 프로그램을 기획하셨다.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지금 무대에선 잠시 막을 내리고 그 뒤로 의자를 치우고, 피아노를 한 대 더 들여오느라 분주했다.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사이를 메우기 위해 미하일 선생님은 사회자로서 이야기들을 하고 계셨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역시 약간의 시간이 났다.

둘러앉아서 방금 전 브람스 피아노 트리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막심 선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혼났다니까 아주.”

무슨 말인가 돌아보니 막심 선배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얼마나 피아노가 크게 느껴지던지……. 어휴, 몇 번이나 타티아나가 아니라 다른 피아니스트가 앉아 있는 게 아닌가 돌아보고 싶어지더라고.”

“부끄러운 말 말아 주세요. 그리고…… 막심 선배님도 정말 대단했어요. 방금 무대의 주인공은 선배님 아니었을까요?”

“뭐? 하하하, 나오는 사람들 붙잡고 설문조사라도 해 볼까? 백이면 백 다 널 주인공으로 지목할 거야, 타티아나.”

억지로 띄워 주는 듯한 느낌은 아니었다.

막심 선배는 만약 내 연주가 마음에 안 들었다면 선배이기 이전에 협연자로서 주저 없이 질타를 날릴 사람이었다.

그런 선배가 날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면, 그건 농담이 아니었다.

종종 음악으로 대결을 걸어오는 막심 선배에게 무언가 대결로 우위를 가린 것이 아닌, 협연자로서 인정을 받은 것 같아서 기뻤다.

약간의 안심, 부담, 그리고 동료애를 느낀다.

“아니에요. 선배님들 없이 전 절대 저런 연주를 하지 못했을 거예요.”

“겸양은.”

막심 선배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니콜라이 선배는 내게 주스를 한 잔 따라 주었다.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받자 선배가 말했다.

“타티아나 후배님. 전 여러 연주자들과 합주를 해 보았어요.”

니콜라이 선배도 첼리스트로서 만만찮게 경험이 많은 사람이었다.

선배가 이전 생각들을 하는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조심스레 이어 말했다.

“종종 안타까운 것은 연습할 땐 정말이지 잘하다가, 막상 무대에 서면 긴장과 두려움 때문에 제 실력을 못 내는 연주자들이 있단 것이었는데…….”

다시 날 보고는, 환히 웃는다.

“타티아나 후배님은 연습에서는 물론이고 무대에 서니 더더욱 실력을 보여 주는 듯하네요.”

“고마워요, 니콜라이 선배님.”

“단 한 번의 기회에 가진 것을 쏟아부을 줄 안다는 것은 정말 귀한 재능이에요. 무대 체질이네요. 축복받았군요.”

진짜 천재들에게 형편없이 밀려버리진 않았지만, 그래도 종종 재능의 부재를 느끼는 내게 무대 체질도 또 하나의 재능이란 말은 신선하게 들렸다.

그 말대로였다. 많은 사람들 앞에 서야 하는 연주자에게 필요한 것은 다만 연주 실력뿐만은 아닐 것이다.

물론 난 선배나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경험들이 있고, 실내악 연주회 경험은 없어도 콩쿠르 경험은 꽤 많았다. 그 또한 내게 도움이 되어 주고 있으리라.

무대 위에 피아노 두 대가 설치될 때까지 잠시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는 지난 연주 이야기도 하지만, 더불어 다음 있을 연주의 이야기도 했다.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의 긴장을 풀어 주는 것 또한 필요했고.

“긴장? 글쎄 딱히 모르겠네.”

“……예? 에르네스트도 긴장하신다고 하셨잖아요?”

“당연히 하지. 그런데 지금은 모르겠는걸.”

에르네스트는 뻔뻔하게 고개를 들며 그렇게 말했다. 새벽 2시에 전화를 했던 건 어디의 누구였던 거야? 살짝 부아가 났다.

그런 에르네스트를 보며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괜찮아. 곧 긴장을 느끼게 해 줄 테니까.”

“뭔 소린데 또.”

“적당한 긴장은 필요하잖아?”

“…….”

에르네스트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시선을 돌렸다.

난 두 사람에게 듀엣을 시키고도 잘한 것인지 아직도 쉽게 말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간의 연주를 보면 괜찮은 선택이었다고 자찬할 수 있었다.

때문에 곧 있을 듀엣 무대가 기대된다. 하지만 걱정도 된다.

이 듀엣을 주선한 내가 느끼면 안 될 비겁한 기분이지만, 난 어쩔 수 없이 비겁한 사람이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또 선배들이 오늘 청중들과 무대 분위기가 어떤지에 대해 조금 설명해 주는 사이, 대기실 직원이 들어와서 다음 연주자들인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에게 준비해 달라 부탁했다.

피아노가 다 설치된 것 같았다.

우리는 대기실에 설치된 모니터로 미하일 선생님에게 집중했다.

미하일 선생님이 신호를 보내자 막이 다시 걷혔다. 무대엔 피아노 두 대가 있었다. 마이크를 잡은 미하일 선생님이 말했다.

- 두 번째로 준비된 곡은 피아노 트리오가 아닌, 두 대의 피아노로 이루어진 듀엣입니다.

작은 웅성임이 일었다.

프로그램을 봤지만 그래도 이렇게 인터미션이 아닌, 피아노 트리오 연주를 마치고 바로 피아노 듀엣으로 넘어가리라곤 상상치 못한 반응이다.

하지만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꽤 신선하게 받아들이는 듯 기대감이 솟는 것이 느껴졌다.

미하일 선생님은 별로 특이할 것도 없다는 듯, 평이하게 설명해 나갔다.

- 프랑스의 작곡가 카미유 생상을 아십니까? 생상은 19세기 음악가로서 열 살에 피아니스트로 데뷔하여 열세 살에 파리 음악원에 입학해 오르간을 공부하고, 2년 만에 파리 음악원의 수많은 천재들 틈바구니에서 오르가니스트 중 1위로 졸업했을 정도로 건반 악기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인 연주자였습니다. 당대에 어마어마한 명성을 날렸다고 하죠.

카미유 생상이 당대 프랑스 최고의 오르가니스트인 파리 성 마들렌 성당의 오르가니스트가 됐을 때가 겨우 스물두 살이었다.

그가 얼마나 천재적인 연주자였는지는 여러 기록들이 전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연주자로서의 생상에 대한 기록만으론 그에 대해서 잘 알 수 없다.

미하일 선생님이 설명을 이었다.

- 현대에 와서 생상은 오르가니스트가 아닌 작곡가로서 흔히 알려져 있습니다. 동물의 사육제, 죽음의 무도,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 등 많은 곡들이 여러 매체 덕분에 우리들에게 익숙하죠. 프랑스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곡가를 꼽는 데에 생상을 빼놓을 순 없을 겁니다.

선생님이 예시로 든 동물의 사육제나 죽음의 무도 모두 굉장히 유명하고 자주 연주되는 곡이다.

그 외에도 400곡이 넘는 곡들에서 연주자들은 생상의 개성과 천재성을 발견할 수 있다.

- 그렇게 건반악기 연주자로서도, 작곡가로서도 뛰어난 음악가였던 생상의 정수를 느껴 보실 수 있는 곡을 준비했습니다.

그중에서 피아노 두 대로만 연주할 수 있는 듀엣곡은 단 한 곡이다.

조용한 침묵이 감도는 연주자 대기실. 난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를 본다. 친구들이 무대 위로 올라갈 시간이 거의 다가왔음을 느낀다.

난 말없이 다가가 아나스타샤를 한 번 껴안았다.

아나스타샤가 깜짝 놀라며 허리를 빼는가 싶더니, 곧 웃으며 내 등을 안았다. 얇은 옷 너머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난 그녀가 내 격려로 긴장을 풀기를, 그리고 혹여나 미처 대비할 수 없는 일이 있더라도 피해갈 수 있는 행운이 깃들길 기원했다.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에르네스트 쪽을 바라보았다.

에르네스트는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그저 걱정 말라는 듯 씩 웃어 보일 뿐이다. 이대로 무대 위로 보내자니 섭섭하다.

“…….”

난 그에게 다가가서 조금 주저했다. 정처 없이 뻗은 손은 에르네스트의 목께의 넥타이에 닿았다. 에르네스트가 뻣뻣하게 굳었다.

보는 사람이 없다면 그냥 한 번 안아 주었을 텐데, 보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난 어쩔 수 없이 조금 미련 어린 손으로 애먼 넥타이만 다시 만지작거리며 정돈해 주었다.

가만히 있던 에르네스트가 말했다.

“또 비뚤어졌어?”

“아뇨.”

“그럼 내 넥타이에 뭘 한 거야?”

아무 생각 없었는데, 갑자기 물어오니 할 말이 궁색하다.

하지만 굳이 말을 만들어 낼 필요 없이, 난 그에게 손을 내민 의도를 자각한다.

“마법을 걸어 뒀지요.”

아나스타샤에게 했던 것처럼, 피아노의 신이 있다면 모쪼록 가지고 있는 실력과 연습한 바 최고의 연주를 할 수 있기를.

“……고마워.”

에르네스트는 작게 감사를 표했고, 난 따뜻하게 웃어 주었다.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여기까지였다. 미하일 선생님의 사회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 생상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폴로네이즈.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 베샤스트니흐와 아나스타샤 세르게예브나 이즈마일로바의 피아노로 준비했습니다. 박수로 맞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박수가 쏟아지고,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는 거침없이 발걸음을 돌려 연주자 대기실 밖으로, 무대로, 나갔다.

남겨진 나와 막심 선배님, 니콜라이 선배님은 모니터를 보며 침묵을 지켰다.

무대 위에 선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 두 사람이 청중들을 향해 멋들어지게 인사했고, 열렬한 박수를 받으며 각각 피아노 앞에 앉았다.

의자 높이까지 완벽하게 세팅된 두 대의 피아노다. 마음의 준비 외에 다른 준비는 필요 없었다.

난 내 연주인 마냥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옆에서 니콜라이 선배가 조용히 날 불렀다.

“타티아나 후배님.”

“예.”

“후배님은 친구분들을 정말 좋아하시나 보네요.”

우리 세 명의 모습이 그리 비춰졌다면 다행이다. 난 잠시의 지체도 없이 대답했다.

“물론이에요.”

“귀엽고, 사랑스럽네요.”

“……예?”

무언가 잘못 들었나 싶어 멍하니 되물으며 니콜라이 선배를 보았다. 선배는 여느 때처럼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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