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4화
클래식 음악 잡지 누벨리스트의 기자인 다위드는 자신의 작은 메모장을 내려다보았다. 기사에 쓰기 위한 단락적인 감상들과 스쳐 지나가는 이미지들을 드러내는 단어들이 두서없이 나열되어 있었다.
다위드는 몇 글자 안 되는 메모들을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기자로서 구독자들에게 신선하고 현장감 넘치는 기사를 보여 주기 위해서 하는 메모였다. 하지만 이게 의미가 있을까 싶다.
다위드는 무대를 바라보았다. 중앙음악학교의 세 학생이 막 슈베르트의 피아노 트리오 2번 3악장을 마무리 짓고 있었다. 저 천재들의 연주를 무어라 형언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
원래 기대가 높은 연주회이긴 했다.
지난 2월, 난데없이 베르체노프라는 어마어마한 이름과 함께 클래식계에 불쑥 나타나 상트페테르부르크 청소년 콩쿠르 대상과 특별상들을 모조리 휩쓸어버린 신예,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
우승 후 감감무소식이라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하는 호사가들이 많았는데, 그런 그녀가 학교 자선 연주회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중앙음악학교에 있는, 장차 러시아 클래식 음악계를 이끌어 나갈 것이라 주목받는 유망주들이 두 명이나 더 튀어나왔다.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 베샤스트니흐, 막심 드미트리예비치 체르체소프. 이 두 연주자는 아직 어리지만 이미 팬층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단단한 연주실력을 지닌 연주자들이었다.
클래식 애호가 중에서도 관심을 조금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에르네스트와 막심의 이름은 상당히 유명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리자 자선 연주회의 티켓이 매진되는 데엔 딱 사흘이 걸렸다. 10대 학생들의 연주회의 티켓 매진 속도로는 유례없는 수준이었다.
그만큼 이 연주회는 사람들로부터 기대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대감의 충족도는 예상치를 아득히 넘어서서 폭발해버렸다.
“…….”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모르겠다.
1부에서 보여 준 브람스의 피아노 트리오 3번과 생상의 폴로네이즈만으로도 기대를 안고 찾아온 사람들을 거의 반쯤 기절시킬 정도의 완성도 있는 해석과 음악성을 보여 주었다.
인터미션을 맞은 청중들의 입에선 다섯 연주자의 이름들이 흥분된 어조로 오르내렸다. 좋은 반응이었다.
그렇게 1부만 하더라도 어마어마한 수확을 얻었으니 기사로 써도 문제없으리라 생각하며 기분 좋게 2부에 들어갔더니, 타티아나와 막심, 니콜라이 세 사람은 정말 상식을 훌쩍 뛰어넘는 수준의 슈베르트를 선보였다.
이 합주가 10대들의 합주라고? 뱃속에서부터 음악을 배웠다고 한들 저런 연주를 할 수 있을까?
거장들의 합주와 비교한다면 당연히 차이가 난다. 슈베르트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와 깊이는 쉽게 해석할 수 없는, 정말 고차원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카데믹하고 담백한 해석과 폭발적인 에너지, 빛나는 생명력. 그리고 마치 하나 되는 듯한 단결력은 거장들의 노숙한 연주와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다위드는 그 모든 것을 그리는 것이 타티아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피아노로 견고하게 청사진을 그리고, 리듬을 얹는다. 그 리듬이 마치 보일 듯이 이미지화되어 눈앞에 다가온다.
피아노로 무슨 마법을 부리는 건지 이해가 안 갈 정도다. 그 위에 바이올린과 첼로가 합쳐지니,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전율을 몰고 왔다.
다위드는 기자로서 냉철하게 무대를 관찰할 필요가 있었지만, 귀가 아닌 전신에 파고드는 음악에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는 메모장을 든 채 무대를 바라보았다. 기사를 쓰기 위해 메모를 해야 하는데, 3악장이 끝나고도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무언가 요약하는 메모를 해야 하는데 할 수가 없었다.
무대 위의 세 명의 연주자가 서로를 바라보며 시선을 나누는 것도 잠시, 피아노 연주자인 타티아나가 손을 들었다.
눈치채는 순간, 잠시 숨을 돌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타티아나는 가차 없이 다시 청중들을 무대 위로 빨아들였다.
“…….”
달콤하고 행복한 선율이 경쾌하게 달렸다. 경쾌하지만 느긋하게 느껴지는 스타카토. 기가 막히는 음색이다. 교외의 목장을 걷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타티아나가 이끄는 대로 모두가 따라갔다.
곧이어 막심과 니콜라이가 함께하며 작은 행진을 이뤘다. 작은 동물들이 함께하는 듯한 귀여운 행진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그려졌다.
유쾌한 행진 후에 숨 가쁘게 헐떡이는 주제가 잠시 이어지고는, 보다 찬란하고 아름답게 행진 주제를 소개한다. 그대로 클라이맥스로 달려가나 싶으면, 다시 잦아들며 애잔한 느낌의 단조로 조성이 변화한다. 정말 변화무쌍하게 사람의 감정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음악이다.
다위드는 감탄하며 한숨을 토했다. 그는 클래식 전문 기자로서 상당한 지식이 있었다.
슈베르트의 피아노 트리오 2번의 마지막 4악장은 소나타와 론도가 섞인 악장으로써 슈베르트 특유의 수없이 반복되는 선율과 그러면서도 결코 같은 것은 두 번 말하지 않는 다채로움, 그리고 한 가지 주제로 결코 똑바로 나아가지 않고 이리저리 방황하는 모습이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악장이었다.
그저 귀여운 행진이었을 음악은 갑자기 2악장에서 드러났던 스웨덴의 민요로 회귀해선 음울하게 노래한다.
피아노가 깊은 사색을 보이며 배경이 되고, 첼로가 상당히 길게 노래한다. 첼로 특유의 저음이 구슬프게 울면서 마음에 내려앉는다. 낮게 되뇌는 음색이 한 번 들으면 결코 잊히지 않는다. 바이올린의 피치카토까지 애잔하고 숨이 끊어질 것만 같다.
행복한 합창에 이어 강력한 경고, 그리고 탈진하는 듯한 묵상까지 모든 것이 쉼 없이 자연스레 연결된다는 것이 마술처럼 들렸다.
다시 숨 차는 주제가 반복된다. 순간, 피아노의 음색이 변화한다. 작은 악동과도 같은 음색이다. 가벼운 소리였지만 불안감이 증폭된다.
그 불안감을 받아 바이올린이 보다 이국적인 음악으로 조화된다. 막심이 다루는 음색도 굉장히 다채로웠다. 코카서스 지방의 느낌이 물씬 풍긴다.
타티아나는 한술 더 떴다. 악기가 바뀐 것도 아닌데 터치를 도대체 어떻게 바꾼 것인지 아예 악기를 바꿔 잡은 것 같은 음색을 보였다.
다위드는 그가 알고 있는 다양한 악기들을 떠올렸다. 피아노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건지 모르겠다. 하프시코드? 그런 쇳소리는 아니다. 그럼 마림바? 아니, 그런 무게가 있진 않다.
순간 머릿속에 헝가리의 악기인 심발론이 떠올랐다. 바로 그 소리와 닮아 있었다.
“…….”
심발론은 직접 채를 들고 드러난 현을 때려서 음을 내는 악기였다. 피아노보다는 되레 마림바나 실로폰과 닮아 있다.
아무리 연주자의 기술로 음색을 바꾼다고 해도 이런 일이 가능한지 이해가 안 갈 정도지만, 타티아나는 해내고 있었다. 바이올린과 함께 하며 이국적인 음색으로 흔들거리며 노래한다.
헛웃음이 나온다. 여기에 앉아 있는 사람들 중 몇 명이 알아챌 수 있을까. 지금 타티아나가 피아노로 하는 마법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 것인지.
다위드는 메모장에 심발론이라는 단어를 메모하면서도 주저했다. 이걸 기사로 내면 욕을 얼마나 먹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들리는 그대로 적었다.
고뇌하는 기자를 신경 쓰지 않고 세 명의 트리오는 그렇게 변주된 노래를 하다가 이번에도 역시 클라이맥스 없이 순간 다시 사그라들고는, 새침하게 첫 주제로 돌아간다. 가히 슈베르트의 정수라 할 수 있을 정도다.
얼마나 자연스럽고 뻔뻔하게 변화하는지 신경을 쓰고 있지 않다면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그저 넋이 빠질 정도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처음으로 돌아간 주제는 결코 똑같지 않다. 보다 길고, 평온을 갈구하는 듯한 음색이 애처롭다.
하지만 이미 한 번의 음울한, 어둠으로 유혹하는 선율을 느낀 바 있는 음악이 다시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행진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불안을 알아버린 주제는 점점 더 발전하며 이 음악 전체를 꿰뚫는 피날레로 향했다.
막심과 타티아나가 치열하게 선율을 연주했다. 조밀한 짜임새가 응축되다가,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타티아나가 연주하는 아르페지오는 무대를 하늘로 만들어 그 위를 거니는 듯한 느낌을 만들어 주고 막심은 보다 자유로워졌다. 니콜라이가 스산한 느낌의 반주로 대조를 이룬다.
하나의 주제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전까지 연주된 모든 주제의 분위기와 메시지들을 함축하는 섬세한 음향이 울린다. 그렇게 하나의 슈베르트로 세 사람은 다가가고, 수렴하고, 만난다.
“…….”
비를 맞으며 무덤가에 서 있는 것처럼, 그렇게 세 사람은 서 있다. 그리고 묻는다. 마지막 당신의 유언이 무엇이었는지.
그 질문에 답하는 분위기는 돌변하고, 밝은 음색이 치솟는다.
타티아나의 손이 건반 위를 경쾌하게 내달리고, 막심과 니콜라이는 심혈을 기울여 활을 힘 있게 연주했다. 가슴 벅차오르는 근사한 감정이 모두에게 깃든다.
청중 전원을 한곳으로 이끄는 음악은 화려한 승리의 위광으로 날아오르다가, 트리오의 하나 된 마무리로 멋지게 끝났다.
그 어느 때보다 완벽하게 일치된 합주.
치켜올려진 막심의 활이 조명을 받아 빛났다.
“브라비!”
숨을 참고 있던 다위드도 외쳤다. 박수를 할 수 없기에 입이 바쁘다. 왜냐하면 그의 손은 바쁘게 메모장을 적어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랑, 슈베르트, 고뇌, 행진, 초월, 베토벤. 여러 단어들이 그저 생각나는 대로 메모장에 적혀져 나갔다.
폭발하는 박수를 박으며 세 사람이 무대 위에 섰다.
45분이나 되는 긴 곡이니만큼 약간 지칠 만도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사람은 흔들림 없는 모습으로 환하게 웃으며 청중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세 사람이 인사를 했다.
가운데에 선 타티아나와 양옆에 선 막심, 니콜라이의 모습은 마치 음악의 왕국에서 온 천사들처럼 보인다. 다위드는 빠르게 메모장 위로 펜을 놀렸다.
타티아나는 다시금 객석을 눈으로 훑었다. 마치 이 모든 것을 기억 속에 담아 두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멀어서 잘 보이진 않지만 타티아나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쏟아지는 박수 세례 속에서 양옆에 선 막심과 니콜라이의 선도로 타티아나가 무대 밖으로 나갔다.
세 사람이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박수는 끝나지 않았다.
연주가 끝나고 연주자들이 무대에서 퇴장한 뒤에도 다시 부르는, 커튼콜curtain call이다.
막 나갔던 세 사람이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다시 무대에 나란히 서서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인다. 최고의 찬사에 대한 최고의 답례를 받은 청중들이 더더욱 소리를 키워 환호하고 박수를 친다.
이 상황이 무척이나 어색한지 타티아나가 살풋 미소를 짓는다. 곤란한 미소는 아니었다. 너무나도 큰 찬사에 어쩔 줄 모르는 것 같다. 그 모습이 정말 이런 연주회는 처음으로 보인다.
다시 트리오는 무대 밖으로 나갔다가, 박수 소리에 이끌려 무대로 돌아온다. 2번째의 커튼콜이다.
과거엔 이 커튼콜의 횟수가 곧 연주자 몸값의 척도였을 정도였다. 커튼콜이 곧 연주회가 얼마나 열정적이었고 성공적이었는지 드러내 주었기 때문이다.
트리오가 다시 고개를 숙여도 박수는 잦아들 기미가 없다. 이대로 다시 나가도 커튼콜로 다시 불러낼 기세였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앙코르를 외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본래 길고 난이도가 있는 대규모의 악곡을 연주한 연주자들에겐 이렇게 많은 박수와 커튼콜만을 보내고 앙코르를 요구하진 않는 것이 관례였다. 본 프로그램으로 들었던 곡의 여운을 즐기고 만족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528명의 청중 모두가 똑같이 판단했다. 슈베르트를 만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기막힌 일이었다. 어떠한 각본이나 리허설 없이 즉석에서 연주자와 청중이 주고받는 교감으로만 이루어지는 상황이었다. 다위드는 이러한 홀 전체의 분위기도 빠짐없이 메모했다.
연주자들이 알아서 준비한 앙코르 곡을 들려줄 수도 있겠지만, 어떤 분위기인지는 충분히 읽었다. 세 사람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다시 악기를 잡는 대신 무대 뒤로 들어갔다.
그러고도 박수 소리가 멎지 않아서 세 번째로 커튼콜로 불려나왔을 때, 사회자인 미하일이 단상에 올라 마이크를 잡았다.
사실 커튼콜은 연주자에게 향하는 극한의 찬사이므로 전부 누릴 수 있게 두는 것이 예의지만, 학생들이 세 번이나 되는 커튼콜을 받고 앙코르곡을 해야 할지 말아야할지 혼란스러워 한다면, 선생이 가이드를 해 주는 것 역시 적절했다.
“존경하는 신사숙녀 여러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박수가 일순 커졌다가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모두들 잔뜩 흥분한 상태로 사회자의 말을 기다렸다.
미하일이 말했다.
“이렇게나 큰 환호와 찬사 감사합니다. 연주자들에게 있어서 오늘 무대는 정말 잊지 못할 무대가 될 것입니다.”
연주자들뿐만 아닌 청중들도 잊지 못할 무대가 될 것 같았다. 학생들의 연주회의 수준에 크게 기대를 하지 않고 왔다가, 1부에선 커튼콜도 제대로 못 했던 것이 이렇게까지 후회될 줄은 몰랐다. 대부분이 비슷한 생각일 것이다.
그러한 시선들을 느끼는지, 미하일은 씩 웃더니 말했다.
“때문에 앙코르로 보답드리고자 합니다.”
다시 박수가 있었다. 앙코르를 듣지 않아도 충분히, 정말 배가 터지도록 만족한 참이지만 굳이 들려준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클래식 애호가들은 항상 굶주려 있었고, 미식가였다. 간만에 생각치도 않은 맛있는 음악을 발견했으니 얼마든지 더 먹을 수 있었다.
다시금 기대감이 부풀어 오른다. 그 기대감이 무대 위에 선 세 사람에게 다시 투사되려는 찰나, 미하일이 시선을 끌었다.
“슈베르트를 멋지게 보여 준 우리 트리오에게 바로 앙코르를 부탁하고 싶지만, 디저트에도 순서가 있지 않겠습니까? 식사 후에 바로 파이를 먹을 순 없는 일이지요.”
좌중에 웃음이 번졌다. 커튼콜을 여러 번 받은 것은 트리오였으니 앙코르 역시 그들의 몫이겠지만, 미하일은 철저하게 앙코르를 디저트로 준비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 가볍게 즐겨 달란 뜻이었다.
“때문에 트리오에겐 잠시 시간을 주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박수 부탁드립니다.”
요청에 따라 다시 박수와, 인사가 교차되고 트리오는 무대 밖으로 퇴장했다. 이번엔 커튼콜이 없었다.
빈 무대에 미하일만이 남았다.
완전히 사회자의 목소리로 미하일이 말했다.
“우선 지금은 1부에서 연주를 보여 주었던 에르네스트가 여러분을 위한 달콤한 디저트를 준비했습니다. 즐겨 주시지요.”
에르네스트라는 이름이 불리자마자 다시 환호성이 있었다.
에르네스트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그의 피아노 독주 테크닉은 이미 하나의 완성에 가깝다는 것을 알 사람은 알았다.
청중들은 이 천재가 귓가에 무엇을 넣어 줄지 기대하며 눈을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