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5화
무대 뒤의 연주자 대기실의 분위기는 객석과 별 차이가 없었다.
슈베르트의 피아노 트리오 2번이 끝나고, 홀이 떠나가라 울리는 박수 소리를 들으며 연주자 대기실에 있는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도 박수를 쳤다.
아나스타샤는 모니터를 통해 타티아나를 보며 웃었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저 선배들과 합주를 하고는 자신이 미숙함이 분하다며 울기까지 했던 친구는, 한 달이 조금 넘는 시간 만에 이렇게 많은 관중들 앞에서 훌륭한 합주를 해냈다.
타티아나는 음악가로서 또 한 발자국 크게, 성큼 걸어 나간 것이다. 이미 멀리 보이는데, 더 멀어졌다.
하지만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외칠 순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가 단지 재능에만 기대지 않고 얼마나 많은 연습량을 소화해 내는지 알고 있었다.
흡사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듯 잠도 안 자고 피아노에 매달리는 타티아나를 보며 아나스타샤는 덩달아 연습량도 늘렸고 아침에도 연습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타티아나의 연습량엔 못 미친다.
그렇다고 타티아나를 잡아끌 수는 없는 일이다.
아나스타샤는 옅게 미소 지었다. 애정과 경의를 느낀다. 아나스타샤는 박수를 멈추지 않았다. 저 애는 이런 찬사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그렇게 박수를 치며 모니터를 보던 아나스타샤는, 모니터 너머의 타티아나로부터 어떠한 기색을 눈치채고 손수건을 챙겼다.
아니나 다를까, 끊이지 않고 울려 퍼지는 박수를 휘광처럼 달고 연주자 대기실로 들어온 타티아나는 울먹이고 있었다.
타티아나가 무대 위에선 절대 흐트러지지 않고 곧게 뻗었던 태도를 일그러뜨렸다.
“아나스타샤…….”
아나스타샤는 말없이 다가가 손수건으로 눈가를 눌러 주었다.
못해도 울고 잘해도 울고. 그렇다고 정신력이 약한 것은 아니라 의지력 하나는 존경할 만했지만, 그토록 강한 자기 통제력을 지니고도 타티아나는 보기보다 눈물이 많았다.
“왜 그래, 잘해 놓고서.”
“모르겠어요……. 저도 모르겠어요.”
모르겠다고 중얼거리던 타티아나는 고개를 들더니 아나스타샤의 얼굴을 보고, 환히 웃었다.
“기뻐요……. 예, 기뻐요. 전 가진 바 최선을 다해 잘했고, 아버지가 보고 계셨고……. 정말 기뻐요.”
말로서 현실을 인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처럼, 타티아나는 그렇게 말했다.
지금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믿기지 않는다는 기분은 성공적으로 프로그램을 마친 연주자가 느낄 수도 있는 당연한 감정이지만, 기쁘다고 연신 말하는 모습을 보며 아나스타샤는 순간 타티아나의 약한 이면을 엿본 느낌을 받았다.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할까 고민하는데, 옆에 있던 에르네스트가 끼어들었다.
“타티아나. 이 박수 소리 들리지.”
그의 말대로 청중들은 텅 빈 무대에도 박수를 퍼붓고 있었다.
이게 현실이다.
에르네스트가 말했다.
“자, 커튼콜이 계속되고 있잖아. 다시 인사 하고 와, 타티아나.”
“……예.”
딱 잘라서 무엇을 해야 할지 정해 주자 타티아나는 정신을 차렸는지 여전히 박수로 가득한 무대로 고개를 돌렸다.
막심과 니콜라이를 필두로 타티아나는 다시 무대 위로 나갔다.
무대 위에서 운다 한들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타티아나는 연주자 대기실에서 보였던 모습을 숨기고 정돈된 태도로 다시 커튼콜에 답했다. 아나스타샤는 약간 석연찮은 기분으로 그것을 지켜보았다.
커튼콜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이어지는 커튼콜을 받으며 연주자 대기실로 왔다 갔다 할 때마다 타티아나는 조금씩 나아지는 듯했지만 여전히 무언가 혼란스러워하는 듯했다.
세 번째로 타티아나를 보내고, 에르네스트가 아나스타샤에게 말했다.
“다음에 앙코르 내가 할게. 넌 타티아나와 같이 좀 있어 줘. 나보단 네가 낫겠지.”
“……뭐?”
원래 계획은 앙코르 요청이 있다면 트리오가 준비한 앙코르를 하고, 그다음 에르네스트가 독주를 하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그 순서를 바꾸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빠르게 그 의도를 알아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에르네스트는 대기실 밖으로 나갔다. 그대로 미하일과 이야기를 나누고는, 미하일이 마이크를 잡고 앙코르를 하겠다고 전하자 에르네스트의 의도대로 순서가 준비되었다.
대신 무대를 채워 준 에르네스트 덕에 대기실로 들어와 한숨 돌릴 수 있게 된 타티아나와 막심, 니콜라이는 저마다 의자에 앉았다.
“타티아나.”
아나스타샤가 넌지시 불렀다. 타티아나는 고개를 돌려 아나스타샤를 바라봤다. 약간 멍한 눈빛이다.
첫 연주회에서 세 번이나 되는 커튼콜을 받으면 이렇게 생시인가 싶어 넋이 나가버리는 것도 이해는 가지만, 정말 멍하니 있다.
아나스타샤는 마냥 축하해 주기보단 약간 말을 골랐다. 일단 옆에 있는 선배들을 순서대로 보았다.
“그리고 선배들도. 정말 최고였어요.”
“고마워.”
“고마워요, 아나스타샤 후배님.”
막심이 짧게 답했고 니콜라이는 정중하게 감사를 표했다. 타티아나는 이렇게 오가는 인사를 보며 현실감각을 되찾는 듯했다.
아나스타샤는 계속해서 말했다.
“이 정도 무대를 보여 줬으니 아마 기사도 나가지 않을까? 모금함은 얼마나 채워졌으려나?”
“예……?”
연주회 이후에 있을 것들에 대해선 생각치도 않았다는 듯 타티아나가 되물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가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빠르게 깨달았다.
“그렇잖아? 그리고 타티아나는 이렇게 실내악도 잘할 수 있다는 걸 증명했으니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해도 잘할 수 있을 테고. 안 그래?”
“아…….”
멍했던 타티아나의 눈에 서서히 빛이 돌아왔다.
그녀는 연주자로서 또 한 걸음을 성공적으로 내디뎠고, 앞으로도 해 나갈 것이 많았다. 이 연주회는 결코 끝이 아니었다.
타티아나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정식 프로그램이 끝나자 약간 탈력감을 느낀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는 빙긋 웃으며 타티아나의 손을 잡았다. 어떻게 피아노를 다룰까 싶은 가느다란 손이다.
손을 통해 전해지는 온기를 느끼며 타티아나가 중얼거렸다.
“아나스타샤…….”
“정말 좋은 일밖에 없네. 당장 오늘 저녁을 뭐 먹을래? 타티아나, 가족들 모두 모였으니 다 같이 근사하게 먹자.”
그녀의 말에 막심이 불쑥 말했다.
“뒤풀이 파티인 건가?”
“거의 파티나 다름없게 되지 않겠어요?”
아나스타샤가 다시 타티아나를 바라보며 강하게 말했다.
“파티를 하자, 타티아나.”
타티아나는 친구가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해 주고 있는지 안다. 그녀는 그 미소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예, 아나스타샤.”
그렇게 네 명의 연주자들 사이로 웃음이 번졌다. 완전히 웃음을 되찾은 타티아나가 특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녀는 파티를 한다면 베르체노프 저택에서 할 수 있는지 아버지에게 물어봐야겠다며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연주회가 끝난 후에 할 일이다. 아직 연주회는 끝나지 않았다.
무대로 나간 에르네스트의 앙코르 연주가 시작되었다.
“차이코프스키네.”
에르네스트가 디저트로 꺼내든 곡은 차이코프스키의 18개의 소품 op.72 중 18번째 곡인 트레팍으로의 초대였다.
트레팍이란 2/4박자의 러시아 춤곡이다. 그 유명한 호두까기 인형의 트레팍이 아닌, 소품곡 트레팍은 모르는 사람이 많았지만, 이 귀엽고 경쾌한 곡은 앙코르곡으로 더할 나위 없었다.
“…….”
그 시작은 리드미컬하게 한 선율로 시작된다. 앞으로 시작될 주제를 선언하고, 앙증맞은 화음으로 장식한다.
드러난 주제는 잠시 천천히 감춰지듯 사라졌다가, 에르네스트의 손에 의해 커져 나간다.
그리고 이어지는 굉장한 속도의 춤곡.
“…….”
이 곡의 연주 난이도가 높은 건 아니었다. 아나스타샤도 초견으로 연주해 낼 수 있을 정도로 쉽다. 중앙음악학교의 누구라도 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이 템포가 정말 빨랐다. 땅에서 폴짝거리며 뛰거나 팔을 뻗고 빙빙 도는 춤이 아니라, 마치 그 위를 날아다니는 듯한 음악이 들렸다.
에르네스트는 춤곡에서 탈피한, 기악곡으로서의 한계를 보여 주겠다는 듯 무시무시한 속도로 곡을 연주했다. 그 어떤 패시지도 바람처럼 빠르게 처리해 낸다. 모니터로 보니 손이 잔상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음이 뭉개지거나 박자를 이탈하는 일이 없었다.
귀엽고 앙증맞은 주제 역시 흩어지지 않고 보다 화려하게 펼쳐진다. 어려서부터 천재로 교육받으면서 쌓아 온 견고한 테크닉이 보란 듯이 빛을 발했다.
본 프로그램에 올려야 할 곡이었다면 이렇게 빠른 속주가 아닌, 보다 정갈한 음악성을 살린 연주를 했겠지만, 앙코르 무대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앙코르 무대다운 가벼운 쇼맨십이었다.
몇 번이나 번개처럼 빠른 변주를 거치면서 곡은 화려하게 커져 나갔다.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아나스타샤는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듀엣을 하면서 어느 정도 따라잡았다고 생각했었는데, 역시 현실적으론 아직 거리가 느껴진다.
그렇게 에르네스트를 보던 아나스타샤는 문득 옆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굉장한 테크닉을 지닌 또래를 그녀는 한 명 더 알고 있었다.
“…….”
타티아나는 에르네스트에 대한 신뢰가 가득한 얼굴로 웃으며 모니터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4분가량의 곡은 거의 3분 만에 끝났고, 폭발적인 환호와 함께 에르네스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손을 들어 화답하자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잘 모르고 보아도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듯한 초인적인 연주에 열광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타티아나는 마치 당연히 다음은 자신의 차례라는 듯 말했다.
“앙코르 하고 올게요, 아나스타샤.”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끄덕였고, 타티아나는 막심, 니콜라이를 이끌고 무대로 다시 나갔다.
“…….”
대기실에 혼자 남은 아나스타샤는 모니터를 통해 무대를 보았다. 에르네스트와 타티아나가 서로 교대하고 있었다.
턱을 괴고 그 모습을 보던 아나스타샤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자세를 바로 했다.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와 인사하고는 미련 없이 뒤돌아 무대를 빠져나왔다.
“아 씨, 글리산도 긁다가 잘못 긁었나 봐. 아파.”
에르네스트는 오른손을 내려다보며 투덜거리면서 연주자 대기실로 돌아왔다.
아나스타샤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왜 오버를 해?”
“오버는 무슨? 아주 적당히 한 건데?”
“에휴……. 이리 줘 봐.”
아나스타샤가 내민 손에 에르네스트가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맡겼다. 손톱 위의 첫마디가 빨갛게 되어 있었다. 열상이 생길 정도로 심하진 않았지만 아플 만했다.
아나스타샤도 글리산도를 처음 해 봤을 때 상처가 나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잘 안다.
아무 문제없다는 것을.
하지만 누군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나스타샤는 구태여 첨언했다.
“별거 아니니까 혹시라도 다른 누구한테 자랑하고 다니지 마. 쪽팔리기 싫으면.”
“말을 해도 꼭……. 따갑다고.”
“대충 저기 물컵에 담가 놓으면 되잖아. 식게.”
“아나스타샤. 네 손 아니라고 취급이 너무한 거 아니야?”
“그럼 뭐?”
에르네스트를 노려보며 그녀가 까칠하게 말했다. 에르네스트는 입을 다물었다. 속으로 투덜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아나스타샤가 말한 대로 물컵에 물을 받아선 손을 담갔다. 차가운 물에 따가움이 조금 가라앉는 듯 표정이 편해졌다.
잠시간 두 사람은 말없이 모니터를 올려다보았다.
무대에 오른 트리오는 다시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나란히 서서 인사했다.
각자의 악기 앞에 앉은 세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고, 동시에 악기를 연주했다.
아르헨티나의 반도네오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리베르탱고.
현시대에 춤곡이 아닌 기악곡으로 연주되는 탱고 중에선 가장 유명한 곡 중 하나였다.
간단한 주 리듬이 피아노에서 흘러나온다. 타티아나는 즐겁게 피아노로 리듬을 만들어 나가다가, 주 선율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곡 전체에 걸쳐 반복되는 감미로운 선율이다. 아주 쉽고, 중독성 있으면서도 아름답다.
다음으로 피아노 위에 첼로가 선율을 더한다. 보다 애절한 음색이 나타나면서 반복된다. 단조의 음악이고 얼핏 슬프게 들릴 수도 있는 음악임에도 불구하고 신나는 탱고의 리듬은 그것을 흥겨움으로 승화시킨다.
바이올린은 보다 자신감 있고 높게 선율을 노래했다. 섬세한 소리를 길게 뽑아낼 수 있는 바이올린은 그야말로 이 곡에서 주인공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막심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만의 특별한 스타일을 더했다. 얼핏 집시, 그리고 재즈의 선율이 느껴진다. 클래식 바이올리니스트에게서 쉽게 찾아보기 힘든 소울이었다. 그것은 전체 음악에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완벽하게 잘 어우러졌다.
“…….”
에르네스트는 손을 물컵에 담근 채로 모니터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눈엔 열기가, 부러움이 어른거렸다.
아나스타샤는 복잡한 심경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문득 말했다.
“있잖아, 에르네스트.”
“뭔데.”
“우리 나가서 탱고라도 출래.”
“뭐?”
“다섯 명 전부 나가서 무대를 마무리하는 게 보기에도 좋지 않겠어?”
난데없이 무대에 나가 탱고를 추자는 말에 에르네스트는 질겁했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냐는 시선이다. 아나스타샤는 예상 그대로의 반응에 헛웃음을 흘렸다.
에르네스트는 즉답했다.
“싫어.”
생각할 것도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탱고를 배운 적이 있긴 하지만, 그걸 아나스타샤와 추고 싶진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질색하는 에르네스트를 보면서도 싱겁게 웃으며 말했다.
“마냥 싫다고 하네?”
“싫지 그럼. 내가 왜 너랑 탱고를 춰? 듀엣으로도 모자라?”
“그건 아니야.”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젓다가, 지금 드는 심경을 표현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스로도 무슨 생각인지 잘 모르겠다.
어렵다, 너무 어려웠다.
그저, 에르네스트와 알게 된 것이 이제 8년이 넘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사이, 그리고 지금까지도, 아나스타샤는 그와 친구로 지낼 수 있었다.
가끔 투닥거리기도 하지만 그것 또한 친하기에 가능한 것. 아나스타샤가 느끼기에 에르네스트가 영 별 볼 일 없는 남자였다면 진즉에 안 보고 살았을 것이다.
에르네스트는 꽤 찾기 힘든, 괜찮은 친구였다.
타티아나 역시 세상천지를 뒤져도 찾기 힘든 친구였고.
지금 이 특별한 관계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비단 어느 한 사람뿐만이 아닌 것이다.
여기서 폭탄 스위치를 쥐고 있는 것은 누구일지.
아나스타샤는 굳이 떠올리기 싫었다. 가슴 한편이 저미듯이 아파 왔다.
바닥 모를 슬픔에 머리를 담그기 직전,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들었다.
“음, 됐어. 듀엣이면 충분하지.”
“쓸데없는 소릴 해, 진짜…….”
에르네스트는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리지만, 딱히 비난하는 투는 아니었다.
두 사람은 무대에서 울려 퍼지는 트리오의 리베르탱고를 들으면서 저마다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