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6화
앙코르 무대까지 마치고 일어서자 본 프로그램 때와는 또 다른, 훨씬 자제 없고 폭발적인 성원이 일었다. 곳곳에서 카메라가 번뜩인다. 앙코르와 커튼콜은 촬영이 가능하다는 말에 청중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이 연주회를 기록으로 남기길 원했다.
“…….”
이전에 종종 느꼈던 음울한 감정들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보다 훨씬, 청중석에 앉아 있는 아버지와 오빠의 모습에서 위안과 기쁨을 느낀다. 아버지는 점잖은 표정으로 박수를 치고 계셨지만 그 얼굴에선 굉장한 기쁨이 느껴졌다.
아버지 앞에서 무릎을 꿇고 피아노를 하겠다고 선언한 지 1년. 그사이 아버지는 한 번도 날 의심하지 않고 믿어 주셨지만 이제야 정말로 자신 있게 증명해 낸 기분이 들었다.
“…….”
갑자기 또 눈물이 나오려 한다. 눈시울이 시큰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실패할 수도 있다고, 여기에서 갑자기 모든 것이 어그러질 수도 있다고 악몽을 꾸고 불안해하기도 했지만, 그 모든 것은 그저 걱정으로 끝났다.
연주회는 성공적이었고 아나스타샤의 말처럼 난 당장 오늘부터, 그리고 내일도, 한 달 후에도, 내년에도 할 일이 많았다. 내게 허락된 피아노를 보다 널리 연주해 보일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을 수 없었다.
자꾸만 눈물이 흐를 것 같다. 목울대에 터질듯이 무언가 밀어닥치지만, 꾹 눌러버렸다.
고개를 들었다. 정말 꿈만 같이 느껴지는 청중들의 환호와 박수 세례. 멍하니 올려다보다가, 손을 들었다.
다시 객석을 똑바로 바라봤다.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난 환하게 웃어 보였다. 무대를 찾아 준 청중들을 위해 적절한 무대 매너를 보이는 것 또한 연주자로서의 의무다. 난 모두에게 감사의 미소를 보냈다.
자선 연주회는 성황리에 끝났다.
“모두 수고 많았다. 훌륭했다.”
연기자 대기실로 돌아오자 미하일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그리고 막심 선배부터 시작해서 니콜라이 선배, 에르네스트, 아나스타샤, 마지막으로 나까지 모두와 악수를 나누었다. 단단한 선생님의 손에서 날 연주자로 인정하겠단 의지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렇게 내 손을 잡고 있던 선생님은, 팔을 뻗어 날 껴안았다. 깜짝 놀라기도 잠시, 선생님은 다른 모두와도 포옹을 나누었다.
마지막으로 막심 선배와 포옹을 한 미하일 선생님이 다시 웃으며 말씀하셨다.
“너희들이 자랑스럽구나.”
연주자이자 동시에 우리는 선생님의 학생들인 것이다. 그 따뜻함이 전해져 와, 우리는 기분 좋게 웃을 수 있었다.
잠시 연주회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지만, 여기에서 연주를 되짚어 보는 것으로 오랜 시간을 허비할 순 없었다.
아직 우리는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다.
“난 너희 모두를 존중받아야 할 연주자라고 생각하지만, 아직 다들 음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음악학교 학생 신분이니 사인회가 없다고 해서 섭섭해하지 말거라.”
“알고 있어요. 사인회는 무슨 사인회.”
“해 줄 사인도 없어요.”
막심 선배가 킥킥거렸다.
연주회가 끝나고 곧바로 사인회를 열어 연주자의 음반이나 프로그램북 위에 사인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우리는 그 대신 로비로 나가서 가볍게 인사만 하기로 했다.
그때 니콜라이 선배가 아이디어를 냈다.
“모금함을 저희 앞에 두면 좋지 않을까요?”
하지만 미하일 선생님은 고개를 저었다.
“이 연주회의 이름은 자선 연주회이긴 하지만 이미 티켓값으로 충분하고, 어디까지나 모금은 자발적이어야 한단다. 우리가 그 앞에 있으면 자발적이라는 의미가 퇴색될까 우려되는구나.”
선생님은 니콜라이 선배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너희가 할 일은 연주 그 자체만이었고, 훌륭했다. 더 이상 무언가 시키고 싶진 않구나.”
“음……. 알겠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로비로 나갔다. 객석의 열기를 떠올려 보면 조용할 것 같진 않았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가자마자, 지나치던 모든 인파의 시선이 우리에게로 쏠렸다. 웅성거림이 점점 커지다가, 환성으로 돌변했다. 나름대로 대비하고 있었음에도 깜짝 놀랄 정도다.
“이쪽!”
“멋졌습니다! 아주 멋졌어요!”
“당신을 위한 꽃입니다. 받아 주세요.”
“러시아의 미래들!”
“혹시 음반은 없습니까?”
“사인회는요?”
음반도 없고 사인회도 없으며, 단지 마지막으로 인사를 드리기 위해 나왔다고 미하일 선생님이 알렸음에도 주변이 시끌시끌했다. 사람들 머리 위로 곳곳에서 스마트폰들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우리는 안전 줄 안에 있었음에도 모두가 저마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오기 위해서 애쓰고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축하와 찬사, 그리고 꽃을 건네주었다.
“오늘로 팬이 되어버렸네요. 앞으로 연주회도 많이 하고 음반도 내 주세요.”
“감사합니다, 부인.”
에르네스트는 점잖게 인사하며 내민 손을 맞잡았다. 깔끔하고 멋진 답례. 그것만으로도 주변의 분위기가 더욱 고조되는 것이 느껴졌다.
나 역시 많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진심으로 대했다. 이 사람들이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클래식을 좋아해 주고 지탱해 주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정말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
그런데 내 쪽으로는 사람들이 잘 안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힐긋 옆을 보자 에르네스트와 막심 선배, 니콜라이 선배, 아나스타샤는 그야말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중이었다. 열광하는 사람들과 인사하고, 악수하고, 격려받고, 모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그런데 난 조금 한가했다. 희한했다. 분명 시선은 내게도 꽤나 집중되어 있는 것 같은데, 다가오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꽃을 받아 주시겠어요.”
모처럼 한 남자가 와서 꽃을 건넸다. 붉은 장미였다. 난 활짝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정말 감사해요.”
“저…… 그, 정말 멋진 연주였습니다. 앞으로도 그…… 좋은 활동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앞으로도 지켜봐 주시길 부탁드릴게요.”
이름이라도 물어볼까 하는데, 남자는 내 어깨너머를 보더니 휙 돌아서 도망쳐버렸다. 난 뻘쭘하게 꽃을 들고 있다가, 옆에 있는 책상에 내려놓았다.
뒤를 바라보니 아버지와 루슬란 오빠, 그리고 빅토르가 서 있었다.
“아버지.”
“타티아나.”
아버지는 다만 내 이름을 부를 뿐 다가와서 날 안아 주거나 하시진 않았다. 아직까지는 공적인 자리이니 사람들에게 집중하라는 것 같았다. 루슬란 오빠와 빅토르 역시 근엄한 얼굴로 날 보고만 있었다.
아니……. 그렇게 무섭게 서 계시면 어떻게 해요.
다시 앞을 보니 머뭇거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버지를 보고는 위압감을 느끼는 듯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와 오빠에게 방해되니까 잠시 어디 안 보이는 곳에 가 있으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한 중년 남자가 다가왔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큰 체구에 안경을 쓴 남자였는데 떡 벌어진 어깨와 말투가 마치 군인처럼 느껴지는 남자였다.
남자는 다른 사람들처럼 주저하지 않고 곧장 손을 내밀며 말했다.
“멋진 무대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유리 알렉세예비치는 무척이나 기쁘겠군요. 이렇게 훌륭한 따님을 두어서.”
악수와 인사를 나누는데, 불쑥 아버지의 이름이 나왔다.
난 이 아저씨가 혹시 아버지와 아는 사이인가 싶어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친구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긴 했다.
내 눈에서 의아한 빛을 발견했는지, 자기소개가 이어졌다.
“제가 누군지 궁금해하시는 것 같군요. 소개드리죠. 제 이름은 말리셰브 야로슬라프 비탈리예비치. 국방부 차관입니다.”
어디라고요……?
순간적으로 너무 놀랐다. 국방부 차관? 그런 아저씨가 왜?
멍하니 바라보자 말리셰브 야로슬라프가 말했다.
“우리 중앙음악학교 학생들이 자선 연주회를 연다는 데에 표를 살 이유가 딱히 무엇 더 있겠습니까?”
마음을 읽는 능력이라도 있는 것처럼, 내가 뭐라 묻지 않아도 말리셰브 야로슬라프는 내 궁금증에 척척 대답해 주었다.
악수하고 있던 손을 놓고, 말리셰브 야로슬라프의 시선이 문득 내 뒤편으로 향했다가 되돌아왔다.
그가 말했다.
“이런 뜻깊은 무대는 사실 제가 아니라 문화부에서 봐 주었어야 할 무대였는데. 아쉽게 되었습니다. 문화부라면 더 많은 도움을 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죠.”
“연주회를 보러 와 주신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감사해요, 말리셰브 야로슬라프.”
국방부 차관 이전에 한 명의 청중이었다고 생각하니 조금 진정되었다. 난 목소리를 떨지 않고 말할 수 있었다.
내 대답에 말리셰브 야로슬라프의 눈이 이채를 띠더니, 미미하게 휘어졌다.
어쩐지 기분이 좋아진 얼굴로, 그는 미소 지었다.
“아무튼, 즐거웠습니다. 앞으로도 러시아 음악계를 이끌어 나갈 음악가가 되어 달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응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말리셰브 야로슬라프는 미련 없이 뒤돌아서 수행원으로 보이는 사람들과 함께 인파를 빠져나갔다. 사람들이 우르르 비켜서며 길을 만들어 주기까지 했다. 국방부 차관은 정말 굉장한 사람인 것이다.
“…….”
그리고 그 정도 되는 직책의 사람이 청소년들이 하는 자선 연주회를 보러 오게 될 이유로는 하나밖에 떠올리지 못하겠다.
난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아버지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을 하고 계셨다.
아버지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건 익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아는 건 극히 일부분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
연주회를 완벽하게 마무리 짓고 나자 8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오늘 무대 위에 섰던 연주자들과 그 가족들은 모두 우리 집으로 향했다.
작은 연회가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와우.”
“대단하네요!”
저택 안의 연회장에 들어선 사람들이 탄성을 발했다.
사용되는 일이 상당히 드문 이 연회장은 오늘만큼은 샹들리에와 촛불로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거기에 사람들이 들어차자 훈훈한 공기로 연회장이 더더욱 화사해졌다.
떠들썩한 분위기에 벌써부터 마음이 들떴다. 고용인분들이 다가와서 자리를 안내해 주었고, 우리는 저마다 테이블에 앉았다. 네 개의 테이블이 꽉 찼다.
즐거운 이야기들이 오가길 잠시, 예고르가 나와서 말했다.
“본 저택에 방문해 주신 여러분들 모두 환영합니다. 늦은 시간이지만 여러분들을 위해 준비했으니 부디 즐겨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바로 고용인 분들이 음식을 서빙해 왔다. 난 테이블에 채워지는 음식들을 보며 익숙함을 느꼈다. 이건 모두 드미트리의 솜씨였다. 칭찬이 멎질 않는다. 실력 있는 셰프인 드미트리가 솜씨를 다한 음식은 보는 것만으로도 맛있어 보였다.
그리고 음식에 이어 술과 주스 등의 음료도 놓여졌다. 정말 다양한 종류의 음료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에르네스트의 아버지가 잔과 술병을 챙기더니, 어른들을 바라보고, 이어서 어린 우리 쪽을 바라보셨다.
“오늘의 주인공들도 한 잔씩 해도 안 되겠습니까?”
“막심과 니콜라이는 괜찮겠지만……. 다른 아이들은 논알코올 샴페인이 어떻겠습니까?”
“하하하, 그게 좋겠군요.”
그 와중에도 나는 논알코올 샴페인의 탄산도 못 마실 것 같아서 사샤와 함께 주스로 잔을 채웠다. 나와 같은 걸 마신다고 사샤가 좋아했다.
모두들 잔을 들었고, 아버지의 건배사가 이어졌다.
“오늘 정말 멋진 연주회를 보여 준 아들딸들과, 또 지켜보고 응원해 준 가족들의 친목과 건강을 위하여.”
“건배.”
짧고 굵은 건배사와 건배 소리가 어우러졌다. 나도 웃으며 건배를 말하고, 옆에 앉은 아나스타샤와 잔을 부딪쳤다. 아나스타샤가 웃으며 장난스럽게 잔을 흔들었다.
“식사하도록 하죠. 배고프시죠, 모두들.”
“쓰러지는 줄 알았어.”
“아하하하.”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연회가 시작되었다. 모두 저녁 식사를 못 했기 때문에 주로 식사를 중점적으로 하고, 그러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식이었다.
고용인 분들이 바쁘게 오가며 서빙해 주셨고, 여기저기서 드미트리의 실력에 감탄을 금치 못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오늘 정말 새로운 미식을 맛보는군요. 맙소사, 나중에 셰프에게 찬사를 건네야겠습니다.”
“음악도 음식도 모두 넘치도록 훌륭하네요.”
“하하, 그러게나 말입니다.”
“이 음식은 뭐라고 하지요?”
요리 스승인 드미트리가 칭찬을 받는 것을 들으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드미트리는 충분히 저런 이야기들을 들을 만한 사람이었으니까.
난 쇠고기와 버섯, 양파를 볶고 사워크림 소스를 끼얹은 비프 스트로가노프와 캐비어를 먹었다.
배고프다는 것을 별로 못 느끼고 있었는데, 막상 먹을 것이 입에 들어가니까 허기가 느껴졌다. 입안 가득 느껴지는 산뜻한 맛에 행복해진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에르네스트가 나와 같은 비프 스트로가노프를 먹고는 날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말했다.
“맨날 이런 걸 먹으면서 대체 학교 급식은 어떻게 먹나 몰라.”
에르네스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저희는 학생이니까 급식을 먹어야죠?”
“원 참……. 그래, 네가 이겼어.”
“……?”
영문도 모르고 에르네스트에게서 이겼다. 에르네스트는 더 무언가 말 할 생각이 없는지 식사에 집중했다.
대신 그 옆에서 나이프를 쥐고 있던 니콜라이 선배가 날 보더니 식기를 내려놓고 말했다.
“고마워요, 타티아나 후배님.”
느닷없는 감사 인사였다. 니콜라이 선배는 언제나처럼 진심 가득한 어투로 이야기한다.
“여태껏 연주회를 해도 이렇게 만족스러운 연주회도, 만족스러운 연회도 없었던 것 같아요. 초대해 주셔서 고마워요. 연주회도, 연회도.”
“아……. 저야말로요. 니콜라이 선배님과 막심 선배님이 도와주셨기에 잘할 수 있었어요.”
“겸손하시네요. 정말 착해요, 타티아나 후배님은.”
“무, 무슨 말씀이세요…….”
난 그런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닌데……. 어쨌든 니콜라이 선배가 좋아해 준다면 나쁘진 않았다.
막심 선배가 대화를 이어받았다.
“뭐, 타티아나도 대단하지만. 여기 두 사람도 끝내줬지. 듀엣 끝나고 반응 봤어?”
“열광적이었죠.”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프로그램 잘 짠 것 같단 말야.”
찬조 연주자를 부탁한 두 사람에게 듀엣을 제안한 건 즉흥적인 생각이었지만, 결과적으론 이렇게 잘 되었다.
모두의 아이디어와 협조, 노력 등이 합쳐져서 지금 이 화기애애한 연회를 만들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갑자기 니콜라이 선배가 감사를 표한 이유가 이해가 갔다. 이 연회는 그냥 있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정말 많은 인연과 기적이 함께해야 간신히 만들어질 수 있는 자리였다.
“저도 고마워요, 에르네스트, 아나스타샤.”
“뭔데 갑자기…….”
에르네스트가 입에 음식을 집어넣다 말고 웅얼거렸다. 음, 그냥 먹게 둬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