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219화 (219/1,277)

##  219화

타티아나가 먼저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나스타샤는 따라 들어갔다.

“…….”

몇 번 와 봤지만 타티아나가 생활하는 방은 정말 볼 때마다 을씨년스럽다는 기분이 물씬 풍기는 방이다.

책상과 침대, 옷장 등이 있긴 했지만 아나스타샤는 단호하게 이 방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할 수 있었다. 분명히 책도 꽂혀 있고 평소 사용하는 흔적은 있지만 어쩐지 사람이 산다는 느낌이 없다.

마음 같아선 벽지부터 산뜻하게 다 바꿔 놓고 싶지만 이 또한 타티아나가 원해서 이렇게 둔 방이다. 아나스타샤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조금 착잡하게 방을 둘러보는 아나스타샤를 향해 타티아나가 말했다.

“주무시고 가신다고 하셨죠?”

“응, 그러려고.”

아나스타샤는 저번에 타티아나가 집에 놀러 왔었던 것을 떠올렸다. 같은 침대에서 잤던 것도. 타티아나는 기억하고 있을까.

하지만 타티아나는 별 반응 없이 상냥하게 웃더니 옷장을 열었다.

“우선 목욕부터 하시겠어요? 아나스타샤. 피로가 풀리도록 목욕을 하고 나시면 잠옷은 제가 빌려 드릴게요. 아나스타샤는 저보다 크시지만 그래도 찾아보면 입으실 수 있는 게 있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타티아나는 옷장을 뒤적였다. 잠옷으로 입기에 적당한 파자마과 슬립 등을 꺼내놓았다.

타티아나는 본인 역시 여전히 드레스를 입고 있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아나스타샤를 먼저 욕실로 보내려 했다. 그 뒷모습을 보며 아나스타샤는 저도 모르게 말하고 싶었다. 같이 목욕하지 않겠느냐고.

“타티아나.”

“예.”

손이 우뚝 멈췄다. 타티아나의 고개가 스르르 뒤쪽으로 돌았다. 그녀의 눈빛이 촛불처럼 일렁였다.

그간 함께 지내면서 종종 느꼈지만 타티아나는 다른 누구에게 몸을 보여 주는 것을 굉장히 꺼려 했다. 그건 동성이라도 관계없었다.

저 눈에 원망이 서리기라도 한다면 정말 끔찍한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빌려줄 거면 나이트가운으로 빌려줘. 네가 입을 정도면 상관없을 거야.”

“아, 그럴게요.”

타티아나가 잠옷들 중에서 나이트가운을 아나스타샤에게 건네주었다.

“……여기 있어요.”

“씻고 올게.”

아나스타샤는 그것을 받아들고 방 밖으로 나왔다.

욕실로 가서 거울을 보니 옥색 드레스 차림의 여자가 서 있었다. 찬조연주자답게 타티아나를 부각시키기 위해 적당히 고른 드레스였다.

“……후우.”

거울 속의 아나스타샤가 한숨을 쉬었다가 곧 미소를 되찾았다.

아나스타샤는 화장부터 지웠다. 타티아나는 목욕을 하라고 했지만 그렇게 길게 있을 생각은 없었다.

아나스타샤가 샤워를 마치고 나이트가운을 입고 방으로 돌아오니 타티아나는 여전히 감색 드레스를 벗지도 않고 침대에 걸터앉아선 늘 가지고 다니는 태블릿 컴퓨터로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뭐 해? 타티아나.”

“아……. 오늘 연주회에 대한 기사를 보고 있었어요.”

타티아나가 화면을 보여 주었다. 음악 저널에 중앙음악학교 자선 연주회에 대한 리뷰가 올라와 있었다.

정말 호평 일색인 리뷰를 읽어 내리던 타티아나는 갑자기 부끄러워졌는지 태블릿을 옆에 내려놓았다.

“기분이 이상해요.”

타티아나는 웃으면서도 그런 말을 했다.

“아나스타샤는 어떠세요?”

“음, 음악 왕국의 천사들이라니.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메일로 이건 좀 아니지 않냐고 말해볼까?”

“아하하하,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정말 낯이 뜨거워질 정도의 미사어구들은 도가 지나쳤다. 타티아나는 까르르 웃으며 맞장구쳤다.

한참을 웃던 그녀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아나스타샤가 없었더라면 전 정말 아무것도 못했을지도 몰라요.”

“얘는 또. 넌 잘했을 거야.”

“그렇지 않아요. 전…… 아나스타샤와 친구가 된 것 또한 제게 찾아온 멋진 인연이라고 생각해요.”

타티아나는 창피한 줄도 모르고 거의 정색하면서 말하고 있었다.

항상 진지하고 올곧은 타티아나의 말과 눈빛은 사람을 무장해제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있던 아나스타샤는 문득 입을 열어 말했다.

“운명이라는 걸 믿어? 타티아나.”

“……믿어요. 믿을 수밖에 없지요.”

그래야만 한다는 듯 대답하던 타티아나의 눈이 조금 서글픈 미소를 그린다.

“하지만 믿음이라면…… 어떤 믿음일까요? 저 높은 곳에 제 운명이 전부 적혀 있다는 믿음? 아니면 그 적혀 있는 것이 제 등대가 되어 주리라는 믿음?”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타티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둘 다 아닌 것 같아요. 제가 믿는 건 그저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것뿐이에요.”

그녀의 운명론은 무언가 알고 있는 사람의 것처럼 느껴졌다.

원래는 물어보아도 잘 답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혹시 대답해 주지 않을까 싶어서 아나스타샤는 늘 궁금했던 것을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있잖아, 궁금한 게 있는데 타티아나.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면 뭐하러 열심히 해야 해? 어차피 상관없을 것 아니야.”

“그게 제게 허락된 운명일지도 모르잖아요?”

타티아나는 그저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웃을 기분이 들지 않았다.

예상했던 대답이기도 하지만, 약간 우울해졌다. 타티아나는 늘 저 위에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말하곤 했다. 그 위의 누군가가 피아노를 칠 수 있게 허락해 주었으니 응당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그리해야 한다는 듯한 어투다.

그건 정말이지, 조금 슬펐다.

아나스타샤는 일부러 조금 짜증스레 말했다.

“아, 모르겠어. 내가 아는 운명은 이런 거야. 태블릿 이리 줘 볼래.”

침대위에 놓인 태블릿 컴퓨터를 가져와선 아나스타샤는 검색창을 열었다. 그리고 유쾌하게 웃었다.

“별자리 성격이라는 거지.”

“아, 별자리.”

“가볍고, 재미있잖아?”

사람의 성격이라는 것이 태어난 날에 따라 정해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웃기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만큼 가볍게 즐길 수 있는 것도 드물었다.

아나스타샤는 개인적으로 별자리나 타로점 같은 것을 믿진 않았기에 타티아나와 이런 것을 해 볼 생각조차 잘 하지 못했지만 이참에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넌 무슨 자리야? 타티아나.”

“저……. 음, 모르겠어요.”

“이런 거 한 번도 해 본 적 없어?”

“있다는 것만 알아요.”

타티아나의 이런 빈틈엔 익숙하다.

그럴 수도 있겠지. 아나스타샤는 가볍게 납득했다.

“지금부터 보면 되지 뭐. 네 생일이……. 1월 7일 크리스마스지?”

“예. 기억해 주고 계셨네요.”

“당연하잖아. 그때 이탈리아에서 전화받고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데.”

“아하하…….”

그때 정말 비행기 타고 날아오려다가 간신히 참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아나스타샤는 내년엔 무슨 일이 있어도 성대하게 생일 파티를 할 작정이었다.

아나스타샤는 다리를 꼬고 태블릿 컴퓨터 별자리 운세를 검색했다. 탄생일에 따라 별자리들이 나열되었다.

“아무튼 1월 7일이면……. 염소자리네.”

“메에에.”

“…….”

“미안해요.”

아나스타샤는 벙 찐 얼굴로 타티아나를 돌아보다가 시무룩해진 표정을 보고는 그만 크게 웃고 말았다. ‘메에에’라니, 어쩐지 초원에서 풀을 뜯는 타티아나가 연상되었다. 그건 정말 너무나 안 어울린다고 생각이 들다가도, 이상하게 어울린다고 느껴졌다.

아나스타샤는 한참을 그렇게 웃다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내며 말했다.

“아니야, 그냥……. 타티아나 너 정말 흉내 잘 낸다.”

“연습했던 적이 있어서요.”

“연습?”

“아, 아니에요.”

울음소리를 연습했다니 이게 무슨 소리야?

아나스타샤는 황당하게 타티아나를 바라보았지만 타티아나는 대답하기 창피한지 입을 꾹 다문 상태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진 잘 모르겠지만 나중에 다시 캐물어 봐야겠다. 분명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았다.

일단 당장 입을 다문 타티아나의 주의를 끌기 위해 아나스타샤는 태블릿 컴퓨터의 화면을 읽어 내렸다.

“아무튼 보자고, 염소자리. 수호성은 토성. 질서와 위엄을 관장하는 행성이라고 하네. 정신력이 강하고 신중하며 조심성이 많고 인내심과 책임감이 강하다. 굉장하네?”

“좋은 말만 쓰여 있지 않나요?”

“꼭 그렇지도 않을걸? 어디 봐, 홀로 차근차근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성격이지만 그 성실함은 집착으로 화하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사람을 사귀는 데에 있어선 서투른 면이 있다.”

“……가슴이 아파요.”

“상관없잖아? 대신 신뢰가 강해서 교우 관계는 좁지만 깊다고 나와 있어. 평소엔 엄격하지만 친구에겐 상냥하다는데……. 너 나한테 상냥하니?”

“아나스타샤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너무 착해서 탈이지.”

“그러시지 말고요.”

“거짓말 아니야.”

인터넷에서 찾아낸 염소자리의 성격이라는 사이트를 아무 생각 없이 읽어 내리던 아나스타샤는 약간 감탄하기까지 했다. 별자리 같은 건 그냥 오래된 미신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름 그럴싸했다. 평소 성실하고 착한 타티아나의 성격을 상당히 잘 맞추고 있는 것 같았다.

타티아나는 약간 창피해하는 것 같았다. 자신의 성격이라는 것이 이렇게 객관적인 문장으로 드러나는 것이 싫은 모양이다.

정말로 싫어하면서 거부한다면 여기서 그만두겠지만,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아서 아나스타샤는 계속 진행했다.

“삶의 난기류를 만났을 때도 한 걸음씩 나아가 결국 승리를 쟁취하며 포기하는 일이 없다. 온화하고 얌전하게 보이지만 내면엔 강렬한 열정을 지니고 있다고 하네.”

“…….”

“하지만 현실적이면서도 그만큼 까다롭고 기준이 높기 때문에 종종 우울하고 비관적이게 되기도 한다는데…….”

힐긋 타티아나를 보니 찔리는 곳이 많은지 눈을 피한다. 아닌 척하지만 내심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짚이는 곳이 많아 보였다. 아나스타샤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타티아나가 우울해하는 모습을 너무 많이 봐 왔다.

타티아나는 변명조로 말했다.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것도 그래.”

“사실 어떤 별자리를 보더라도 다 자기 이야기처럼 들리는 건……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냥 재미로 보는 거지 뭐.”

어떤 점이나 테스트도 그저 재미로 봐야지 이걸로 사람을 파악하려 들거나 다 안다고 생각하면 절대 안 된다.

아나스타샤는 그간 만나면서 알게 된 타티아나가 있었고, 그 모습만을 믿었다. 이런 요약된 문장으로는 그중 아주 포괄적인 몇 가지만을 보다 그럴싸하게 느낄 수 있을 뿐이다.

다시금 그렇게 생각하면서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의 팔을 끌었다. 따뜻했다. 그대로 아나스타샤는 즐겁게 태블릿 화면을 넘겼다.

“재미있는 거……. 모든 별자리 중 가장 충실한 연인 중 하나라네. 그러니까…….”

계속 읽지 못하고 아나스타샤는 말을 멈췄다. 모두 별것 아닌 심심풀이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만, 입이 말을 듣지 않는다. 다만 눈만이 바쁘게 움직이며 활자를 읽어 냈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을 믿지 않으며, 아슬아슬한 게임을 즐기거나 파트너를 기망하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사랑을 진지하게 생각하며 그만큼 열렬해진다. 특별한 사람을 찾게 되면 관계를 더욱 강하게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염소자리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격의 별자리와 만나는 것이 좋다. 항상 부드러운 처녀자리나 활기차고 다정다감한 황소자리, 혹은 같은 염소자리가 어울린다.

반대로 자존심이 강하고 변덕이 심한 쌍둥이자리와 만나면 서로의 길을 찾아 떠나게 되고 고집이 강한 양자리를 만나면 싸움이 잦다.

잠깐만, 무슨 별자리라고?

다시 상성에 대한 이야기들을 읽는 아나스타샤의 옆으로, 작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아나스타샤.”

“……!”

아나스타샤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옆을 보니 타티아나가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왜?”

“저기…….”

묘하게 손가락을 어찌해야 할 줄 모르는 듯 꾸물거리던 타티아나가 이윽고 마음의 결심을 했는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왔다.

“아나스타샤는 생일이 언제예요?”

“어?”

“저도 정말…… 어떻게 아나스타샤의 생일을 아직도 모르고 있을 수가 있죠. 혹시, 혹시 말씀해 주신 적이 있나요? 아니, 그보다 지났나요? 지났으면 어떡하지…….”

타티아나가 근심 가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나스타샤가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듯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장난을 조금 쳐 볼까 하다가, 너무 심각한 표정에 그만 피식 웃었다.

“내가 말해 준 적이 없잖아. 그리고 안 지났어. 5월 14일이야.”

“어, 얼마 안 남았네요?”

“응.”

그제야 타티아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다.”

생일이야 때가 되면 이야기해서 다시 초대할 생각이었으니 언제 말한들 상관없었지만, 이렇게 알려 줄 수 있는 건 좋은 기회였다.

아나스타샤의 생일은 5월 14일. 황소자리였다.

탄생일이나 별자리에 대해 평소 아무 생각도 없는 아나스타샤였지만, 지금만큼은 이렇게나 기쁠 수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지만……. 적어도 쌍둥이자리나 양자리보단 나았다.

타티아나는 5월 14일과 황소자리를 연관시키지 못하는지 염소자리에 대한 다른 것들을 읽어 내렸다.

“음……. 행운의 숫자는 8이고 행운의 요일은 토요일이라고 하네요. 오늘 그래서 연주회를 잘 할 수 있었나 봐요.”

“별자리가 잘하게 해 준 게 아니라 우리가 잘한 거지.”

“그래도요.”

순진한 소리를 하면서 타티아나는 계속 이러저러한 것들을 살폈다. 생각보다 재미있어하는 모습이다.

“행운의 보석은 가넷……. 아.”

갑자기 탄성을 흘리더니 타티아나가 목에 걸린 목걸이를 들었다. 검붉은 보석이 목걸이에 박혀 있었다. 가넷이다.

아나스타샤도 타티아나가 늘 걸고 다니던 목걸이가 가넷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런 의미가 있을 줄은 몰랐다.

“몰랐던 거야?”

“예. 아버지가 주셨던 거예요. 어머니의 유품이라고…….”

타티아나는 소중하게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에게 아버지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도 요즘 그런 가정이야 흔하니 별생각 없었지만 이렇게 보니 약간 마음이 아렸다.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유리 아저씨 말이지, 널 정말 아끼시나 보다.”

“……예.”

웃으며 답하는 타티아나를 보며 순간, 조금 석연찮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매달리는 타티아나에게 혹시 루슬란한테 무슨 이야기를 듣진 않았냐며 묻던 유리의 모습은 아나스타샤의 기억 속에 꽤나 충격적으로 새겨진 것이었다. 설마 그 유리가 그런 반응을 보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저기, 타티아나.”

“예.”

하지만 그 이야기를 굳이 이 자리에 끌어내어 다시 물어볼 용기가 있진 않다. 그 또한 타티아나의 가정사일 터. 아나스타샤가 알아야 할 범위를 한참 넘어선 것일 수도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

타티아나는 물끄러미 아나스타샤를 바라본다. 무슨 말을 하려다 말았다는 것은 다 들켰다. 아나스타샤는 어떻게 다른 화제로 이야기를 돌릴까 궁리했다.

그때, 타티아나가 불쑥 말했다.

“아나스타샤, 아까 아버지에게 제가 약속드리는 모습, 다 보셨죠.”

“어? 응. 그런데.”

물론 부녀간에 오간 이야기를 전부 이해할 순 없었지만 타티아나가 아버지와 오빠에게 상처를 주지 않겠다고 약속하던 건 상당히 인상 깊으면서도 약간은, 어쩐지 약간은 섬뜩한 장면이었다. 그렇게 떠올리고 있는데 타티아나가 작게 말했다.

“사실 저 오늘은 아나스타샤에게도 드릴 말씀이 있어요.”

“뭔데……?”

갑자기 아나스타샤는 무서워졌다.

지금까진 타티아나가 숨기고 있는 것들에 대해 알고 싶다는 생각이 많았지만, 막상 이렇게 진지한 눈빛을 마주하고 있자니 덜컥 겁이 났다.

타티아나는 물러설 생각이 없다.

“너무 놀라거나 화내지 말아요. 저도…… 이유가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이제 말씀드리려고 해요. 충동적으로 하는 건 아니에요.”

“아니 잠깐만, 너무 가정사에 대한 이야기까지는 해 주지 않아도…… 되는데?”

“가정사요?”

타티아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했다.

“그것도 있겠지만, 일단은 제 개인적인 문제에 관한 이야기에요. 거짓말은 최소로 하고 싶으니까……. 그…… 들어 주시겠어요?”

그냥 쉽게 듣고 말 이야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따라 타티아나가 왜 이렇게 이것저것 열어 보이려는진 모르겠지만, 문을 열어 준다 하여 바로 발을 내딛는 건 잘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였다. 더군다나 거짓말을 안 한다고 하지도 않았다. 최소한이라고 할 뿐.

가만히 타티아나를 내려다보던 아나스타샤는 이 이야기를 들어 줄 수 있는 건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줘.”

타티아나가 다시 한 번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더니, 간결하게 이야기했다.

“저는…… 사실 기억이 없어요. 작년 3월 이전으로 전부요.”

“……?”

타티아나가 꺼낸 것은 아나스타샤가 예상할 수 있었던 그 모든 것을 넘어선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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