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220화 (220/1,277)

##  220화

아나스타샤는 농담하지 말라고 웃어넘기고 싶었지만, 타티아나는 말이 없었다. 위태로운 눈동자가 아나스타샤가 이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며 흔들거리고 있었다.

농담이 아니었다. 기억상실이 사실이라는 전제를 놓자 빠르게 머리가 돌아간다. 타티아나와 처음 봤던 것은 9월 중순. 8학년 1학기가 시작되고나서였다. 작년 3월이라면 그보다 반년 정도 더 전이었다.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에게 물었다. 정말 소중한 친구의 비밀을 듣고, 되도록 태연하고 싶었지만 자꾸만 목소리가 떨렸다.

“그…… 기억상실이라는 건 뭐야? 그러니까…… 어제 뭐 먹었는지 기억 안 나는 그런 건 아니잖아?”

도저히 위트 있게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말주변을 저주했다.

타티아나는 웃지도 실망하지도 않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작년 3월 깨어났을 때 저는 제 가족도, 제 이름도, 러시아어도 모르는 상태였어요. 그전까지의 과거는 완전히 사라져 있었죠.”

“……뭐?”

“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반년 사이 러시아어를 배우고 상식들을 익히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정말 열심히 했어요…….”

타티아나는 지나간 작년을 회상하는지 아련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타티아나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확 와닿는 것이 있었다.

실제로도 노력하지 않고선 지금 타티아나가 이렇게 있을 수 없었다.

9월의 타티아나를 떠올렸다. 어쩐지 말주변이 서툰 듯한 느낌을 분명 느끼긴 했었다. 대화를 하다가 말고 곤란하다는 듯 미소만 짓고 있기도 했고.

평소의 딱 부러지는 모습을 생각하면 이해가 안 가는 모습이었지만, 이제 설명을 들으니까 이해가 갔다. 타티아나의 언어능력은 한 살짜리인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간 타티아나가 보였던 평소 무방비하고 상식이 부족한 모습 역시 단번에 이해가 간다. 피아노만을 좋아하며 다른 걸 배우고픈 생각이 별로 없어 보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시간 자체가 부족했던 것이다.

물론 타티아나가 어리숙하고 바보 같다는 것은 아니었다. 주변의 모두를 속이고 1년 만에 이렇게나 어른스러워질 수 있다는 건 기본적으로 머리가 나빠선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거기에 타티아나는 성실함까지 겸비했다.

그리고 타티아나는 더 하고픈 말이 있는 듯했다.

“아나스타샤가 보시기엔 정말 여자로서 아무것도 모르는 애처럼 보였을 거예요. 저도 알아요. 그래서…… 더욱 고마워요.”

“…….”

“아나스타샤가 없었다면 제가 아무것도 못했을 것이란 말, 그건 농담이나 과장이 아니었어요. 전 어머니가 안 계시고…… 마가리타 선생님이나 나제즈다가 도와주었긴 했지만 같은 또래인 아나스타샤로부터 정말 많은 것들을 배웠으니까요.”

그동안 함께 다니면서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로부터 배운 것도 많았지만, 분명 가르쳐 준 것도 정말 많았다.

하나하나 기억들이 떠오르니 납득되었다. 왜 자꾸만 끼어들어서 사사건건 챙겨 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던 건지. 왜 가만 지켜보고만 있어도 불안해서 곁에 두고 싶어졌던 건지. 왜 그렇게 외로운 눈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건지.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애를 도와줘야 한다고.

아나스타샤는 스스로를 조금 칭찬하고 싶어졌다. 아나스타샤는 그사이 단 한 번도 타티아나에게 싫은 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 죽도록 후회했을 것 같았다.

타티아나는 고개를 들고 똑바로 아나스타샤를 바라봤다. 불안하게 일렁이는 눈동자가 다시금 사과와 감사를 담았다.

“그동안 숨겨서 미안해요. 그저…… 저 나름대로 지켜야 할 것들이 있었어요. 지금도 물론 그렇고요. 다만 연주회도 마쳤고, 아나스타샤에겐 이야기해 드리고 싶었어요.”

“연주회를 마친 게 무슨 상관이야……?”

“……저도 모르겠네요. 모르겠어요. 앞으로도 계속 열심히 해 나갈 거예요. 전 아직 하고 싶은 게 정말 많아요……. 하지만 제게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제가 원치 않더라도.”

아나스타샤는 뒷머리를 누군가가 후려친 듯한 기분을 느꼈다.

타티아나는 연주회를 마무리하면서 다른 무언가도 마무리된 듯, 그렇게 조금 미련을 벗어던지고 체념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운명론자다. 입을 통하지 않아도 눈빛으로 전해져 왔다.

더듬거리며 물었다.

“왜, 왜 그런 말을 해……? 타티아나.”

“아나스타샤.”

타티아나가 서글프게 웃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너무 슬퍼 마세요. 저도 슬퍼하지 않기로 했으니까요. 그래서 아까는 아버지에게 약속도 드렸고……. 아나스타샤는 보셨죠.”

“잠깐만, 유리 아저씨는…….”

“당연히 아세요. 제게 기억이 없다는 걸.”

알겠지, 아버지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다시금 타티아나와 유리의 부녀 관계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빠르게 연상되었다. 희미하게 흐르던 그 묘한 기류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추론했다.

그런 아나스타샤의 생각을 돕겠다는 듯 타티아나가 이어 설명했다.

“그래서 방금 전에는 잠시 오해도 하셨던 것 같아요. 제가 루슬란 오빠에게 무언가 듣고 기억을 떠올린 건 아닌지.”

“잠깐만, 이해가 안 가. 아저씨는 분명 당황해하시는 것 같았는데. 네가 기억을 되찾는 건 아저씨 입장에선 좋아할 일이잖아? 왜 당황을 해? 추궁하듯이?”

타티아나는 그저 말없이 웃는다.

정말 이해가 안 가는 일이었지만, 기억을 되찾는다고 해서 당황해할 만한 가정은 한 가지밖에 남지 않는다.

기억을 잃기 이전의 부녀 사이엔 무언가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의 과거 이야기를 모르지만 그 편린은 안다.

쓸쓸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타티아나의 얼굴을 보며 아나스타샤는 도저히 그런 걸 떠올릴 수 없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천천히 말했다.

“한 가지만…… 말씀드릴게요. 전 아버지가 절 사랑한다는 말에 희열과 절망을 동시에 느꼈어요. 그리고 그건 아버지 역시 같겠지요. 작년 3월의 전의 저는…….”

“타티아나.”

말소리는 천천히 줄어들다가 흩어졌다. 타티아나는 변명하지 않지만 아주 긍정하지도 못했다. 기억이 없어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상당히 애매한 태도였지만, 아나스타샤는 한 가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타티아나는 지금 새로이 기억을 쌓아 나가기 이전의 타티아나를 뻔뻔하게 잘라내지 않았다. 그게 훨씬 편할 텐데, 타티아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태껏 숨기고 있기까지 한 것이었다.

“…….”

조용히 입을 다문 타티아나를 보며 아나스타샤는 생각에 잠겼다.

그간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사실은 한 살이었다니.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는 진실이었다.

타티아나는 아나스타샤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모두 받아 주겠다는 자세로 허리를 세우고, 무릎 위에 손을 두고 있다.

하지만 무릎 위의 드레스가 조금 구겨졌다. 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어깨가 떨리는 것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아나스타샤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애를 괴롭힐 순 없었다. 잠시 생각하다가, 그래도 이해가 안 가는 것들을 추리고, 그중에서도 타티아나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 질문들만을 추렸다.

“몇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

대수롭지 않은 어투로 물었다. 타티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다만…… 제가 거짓말을 할지도 몰라요.”

“……어?”

“전 거짓말쟁이니까요.”

너무 당연하다는 듯,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전 지금도 나쁜 애예요. 그러니까 아나스타샤는 절 믿으시면…… 안 돼요.”

이렇게 믿기 힘든 이야기도 믿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진실 된 태도면서 대체 무슨 거짓말을 한다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타티아나는 짐짓 심각하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곧,

“그런데도……. 그렇지만.”

엄격했던 태도는 흐트러진다.

눈동자가 흔들리면서 안절부절못하고, 작게 떨던 어깨는 불안으로 더욱 크게 요동친다. 가까이 더 다가와야 할지 멀어져야 할지 판단하지 못하고 몸은 굳어버렸다.

타티아나가 가까스로 입을 떼었다.

“아나스타샤, 절 버리지 않으실 거죠?”

“대체…….”

“이기적이라도 좋아요. 전……. 아…….”

간절히 말하던 타티아나가 하던 말을 삼켰다.

“미안해요.”

그리고 빠르게 사과했다.

아나스타샤는 멍하니 타티아나를 내려다봤다. 머리가 하얗게 될 것 같았다.

저렇게 말해버리면,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아나스타샤를 옭아매는 말의 족쇄는 사실상 폭력이나 다름없었다.

타티아나는 그것을 뱉고 나서야 깨달은 것이다.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후회하며 한탄하는 타티아나를 보며 아나스타샤는 손을 뻗었다. 그리고 떨리는 어깨를 붙잡아 진정시켜 주었다.

여기서 같이 흔들려 버리면 안 된다.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넘어가 주기로 했다.

빠르게 이야기했다.

“타티아나, 아무래도 상관없어. 어쨌든 내가 본 건 바뀌지 않으니까. 네 기억이 작년 3월부터 없다고 했지? 그럼 지금 피아노 실력은? 그 짧은 시간 만에 이만큼 끌어올린 거야?”

“아. 그건……. 피아노에 대한 기억은 남아 있었기 때문이에요.”

“말까지 다 잊었다면서?”

“러시아어는 새로 배워야 했죠.”

굉장히 이상한 소리였다. 말도, 이름도 까먹을 정도로 중증의 기억상실인데 피아노에 대한 기억만 기억한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하지만 상식선에서 떠오르는 의문들을 아나스타샤는 모조리 치워버렸다. 그런 의문은 아무 도움도 안 된다. 아나스타샤는 있는 그대로 타티아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서…… 3월에서 9월 사이, 반년 만에 우리 학교에 편입할 정도로 실력을 키우고 말까지 배운 거야? 일반 상식도?”

“예. 그래요.”

아나스타샤는 기가 막혀서 웃었다.

“그럼 실제로는 한 살인 거잖아? 너 정말 천재인 거 아니야……?”

“그렇진 않아요.”

“뭐가 아니라는 거야 자꾸.”

지금 타티아나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똑같은 말을 했다면 아나스타샤는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타티아나의 말이라면 믿을 수 있었고, 그렇다면 정말 대단한 이야기였다.

타티아나는 중앙음악학교 8학년에서 에르네스트 다음가는 수재로 손꼽힐 정도로 성적도 좋았고, 피아노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야말로 초인적인 재능과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했다. 아나스타샤는 그 모두를 존중하고, 경애했다.

아나스타샤가 중얼거렸다.

“이해가…… 이해가 가네.”

“…….”

“믿고 말고를 떠나서, 왜 지금까지 못 알아차렸는지 모르겠어. 그렇게 가까이에 있었는데…….”

가끔 이상함을 느끼긴 했지만,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정도였다.

그리고 그건 모두 타티아나가 죽을힘을 다해 노력해서 적응하려 한 덕분이었다.

“최선을 다했던 거구나, 타티아나.”

“…….”

항상 조심스럽고 피아노가 아닌 부분들에 대해선 수동적이었던 태도도, 어떻게든 적응해서 살아가야 할 타티아나가 찾아낸 방법 중 하나이리라.

아나스타샤 같았으면 최소 2년은 아무것도 못 하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반년 만에 학교로 향했다.

러시아 최고의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기 때문에.

“…….”

갑자기 죄책감이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이 애한테 대체 뭘 요구하고 있었던 거지? 눈앞이 깜깜해졌다.

타티아나가 시간을 필요로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1년 가지고 대체 뭘 알 수 있었겠는가? 15년의 기억과 정체성을 지닌 아나스타샤도 헷갈리긴 매한가지였는데 타티아나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는 상태였다.

순간 섬뜩해졌다. 만약 발렌티나의 도움을 찬스로 여기고 멋대로 했었다간…….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아나스타샤는 소름이 돋은 팔을 반대편 손으로 잡고, 잠시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타티아나는 그간 함께했던 추억들을 되새기고, 아나스타샤로부터 그 모든 것들을 다시금 이해받았다는 것을 느꼈는지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이 애를 대체 어떻게…….

아나스타샤는 문득 생각이 나서 물었다.

“타티아나, 에르네스트에게도 이 이야기 할 거야?”

“……예.”

역시나였다.

타티아나는 에르네스트 또한 소중하게 생각했다. 눈에 선하게 보일 정도로 아끼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아나스타샤가 보기에 그건 이성간의 감정이라기보단 연주자끼리의 우호와 비슷했다.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것인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었지만, 이젠 이해가 간다.

때문에 공평하게 에르네스트에게도 타티아나의 이야기를 들을 자격이 있다.

“하지 마.”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반대했다.

“왜……요?”

“걔는…… 나쁜 애는 아니지만, 남자애잖아. 나랑은 달라.”

“…….”

“감당하지 못할지도 몰라. 걔도, 너도.”

아나스타샤는 억지를 부리지 않는다. 합리적이고, 정확한 판단을 내린다. 하지만 그녀는 조금 우울해졌다.

타티아나는 아나스타샤의 조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듯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아나스타샤가 옳아요. 그렇게 할게요.”

“정말이야?”

“예. 말하지 않을게요.”

다시 확인을 받고, 아나스타샤는 작게 안도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가증스럽게 느꼈다. 에르네스트의 감정 또한 뻔히 알면서,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

애써 그런 감정들을 지우며, 아나스타샤는 조금 더 가까이 타티아나와 붙어 앉았다. 말들은 필요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금 같이 있다는 이 현실이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타티아나의 어깨를 팔로 안으며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타티아나, 내가 네 걱정을 모두 해결해 줄 수는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네가 이렇게 말해 준 만큼, 나도 최선을 다할게.”

“아나스타샤…….”

“앞으로도…… 앞으로도 우린 친구야. 알겠지?”

따뜻하게 귓가에 속삭이자, 크게 일렁이던 타티아나의 눈이 금세 눈물을 머금는다.

“으흑. 흑…….”

“또 운다.”

가만히 달래 주면서, 아나스타샤는 생각했다.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보다 확실해졌다. 타티아나가 이해한 것들을 아나스타샤 역시 이해했다.

그건, 나쁘지 않았다.

한참을 훌쩍거리던 타티아나가 고개를 들었다. 창피함과 미안함이 섞인 눈가를 대충 손등으로 비볐다.

“…….”

“괜찮아?”

“예…….”

타티아나가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고마워요, 아나스타샤.”

“뭘, 별것도 아닌데.”

“그렇지 않아요.”

조금 황당할 정도인 이야기를 이렇게 잘 받아들여 주리라곤 생각하지 않은 듯했다. 아나스타샤는 웃으며 말했다.

“정말 별것 아니라니까. 기억이 없단 건 조금 놀랐지만……. 어차피 내가 봐 온 건 그 후의 타티아나잖아? 무슨 상관이겠어?”

“…….”

“난 또, 무슨 고해성사 한다길래 옛날에 사람이라도 죽였던 게 아닌가 했잖아.”

“죽여요……?”

농담조로 던진 말에 타티아나는 멀거니 답했다. 갑자기 눈빛이 멍해졌다. 아나스타샤는 식겁했다.

“타티아나……?”

“아, 아니에요.”

“웃자고 한 이야기니까 좀 웃어 주지 않을래?”

기억이 없는 애한테 할 농담 치고는 지독했다는 건 알겠지만 그것이 하필 폭탄 격발 스위치일지도 모른다는 현실은 받아들이기 싫었다.

그리고 왜 그런 표정을 하고 있어.

설마, 타티아나.

“아나스타샤.”

“응?”

“자살도 살인인 걸까요?”

“타티아나! 무서운 소리 하지 마, 제발!”

아나스타샤는 정말 기절할 듯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자살이라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차라리 사람을 죽였다고 해!

그냥 사람을 죽였다고 고해를 했어도 이렇게까지 놀라진 않았을 것 같다. 아나스타샤가 당황해하며 어쩔 줄 몰라 하자 그제야 타티아나는 옅게 웃음기를 보였다.

“절대로, 절대 안 해요. 무슨 일이 있어도요. 걱정 마세요.”

“간 떨어지겠네…….”

대체 무슨 말을 이렇게 무섭게 하는지 모르겠다.

아나스타샤는 이 또한 타티아나가 하는 약속이라는 것을 느끼며 조금 안심했다. 타티아나는 약속을 쉽게 어기는 애는 아니었다.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를 놓아주고 한숨 돌리다가, 아직도 타티아나가 드레스를 그대로 입고 있다는 것을 보곤 말했다.

“아무튼, 이제 가서 씻고 와. 너도 드레스 너무 오래 입고 있잖아.”

“그럴게요.”

“씻겨 줄까?”

“괘, 괘, 괜찮아요!”

하지 못했던 말을 보다 능청스럽게 던졌더니 타티아나는 허둥지둥 거절했다. 아나스타샤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나스타샤는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웃을 수 있었다.

“다녀올게요.”

“응.”

타티아나가 침대에서 일어서 방 밖으로 나갔고, 아나스타샤는 살랑살랑 손을 흔들어 주었다.

“…….”

그녀가 나가고 잠시 뒤, 아나스타샤는 나이트가운의 앞섶을 다시 여미고는 일어났다.

밖으로 나오니 복도엔 아무도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잠시 주변을 살피다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주방 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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