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2화
욕실에 도착한 나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
거울을 통해 본 나는 약간의 피곤함, 열망, 환희, 죄악감등이 엉겨 붙은 이상한 눈을 하고 있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얼핏 봤을 땐 별로 티가 나지 않지만 그사이 화장이 약간 번져 있었다. 이 꼴로 아나스타샤에게 무슨 소릴 했던 거지?
가지고 온 가운을 옆에 걸어놓고, 화장부터 지우기 시작했다. 화장 솜에 리무버를 적셔 눈에 덮었다. 잠시 세상이 어두워지고 아무것도 안 보였다.
“…….”
연회장에서 나와서 아버지에게, 그리고 아나스타샤와 잇달아 나눈 대화들이 떠올랐다.
잘 이야기를 한 걸까? 아버지나 아나스타샤는 제대로 내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내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과 약속에 대한 증인으로서 있어 줄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내게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하지만, 연주회를 마치고 난 나는 그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간 아무 생각 없이 달려오기만 했지만, 결국 내게 있어서 연주회는 하나의 목적지와 가까웠다.
그동안 날 붙잡아 두고 있었던 것은 한 가지 미련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로 그 미련은 일부분 해소되었다.
독주회는 아니었지만 합주라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간 연주회였고, 오롯이 내 것이라 하기 어려운 그녀와 나의 음악이지만 지금 내가 표현 가능한 음악을 무대 위에서 제대로 구사해 냈다. 또 아버지와 루슬란 오빠, 내 소중한 사람들에게 제대로 들려주었다.
정말 내가 어떻게 되어 버리더라도, 내가 선배들, 친구들과 했던 이 연주회는 사람들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
난 아직 하고 싶은 것이 많았다.
아버지와 루슬란 오빠에게 그간 못해 준 만큼, 그리고 내가 못한 만큼 합쳐서 잘해 드리고 싶었다.
음악가로서는 미하일 선생님, 구세프 선생님에게 배워야 할 것도 많았고, 챔버 오케스트라와 합주도 하고 싶었다. 홀로 무대에 서는 독주회도 하고 싶었고, 에우테르페 레코즈와 음반도 많이 내고 싶었으며 조금 더, 조금 더 나이가 들어서 국제 콩쿠르에 나가고, 전 세계를 돌며 연주회도 하고 싶었다.
아나스타샤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고 에르네스트가 그 천재적인 기량을 더더욱 펼쳐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다.
그뿐만 아니라 발렌티나와 함께 재미있는 곳에 놀러가고 싶었고, 리처드가 제대로 된 실력을 세상에 보이는 것을 보고 싶었고, 한승우가 러시아에서 많은 것들을 배워가도록 돕고 싶었다.
막심 선배가 바이올린으로 세상에 다시 낭만주의를 불러일으키고 니콜라이 선배는 첼리스트로 이름을 날리길 바랐고, 어린 아나톨리나 류보비, 사샤도 모두 성장해서 좋은 연주자가 되는 것을 보고, 듣고 싶었다.
난 정말 욕심도 많고 집착도 강했다.
하지만 모르지 않는가.
대체 어디에 내가 저 모든 것들을 누릴 자격이 있단 말인가.
이전까진 오늘을 위해 허락해 주고 있었다면, 난 지금 이 순간이라도 운명이 내게 개입해 모든 것을 앗아 가지 않을 그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야기했다.
아무 일도 없을지 모르지만, 어떤 일이든 생길 수도 있기 때문에 이야기해야만 했다.
정말 많은 거짓말과 이기심이 섞인 말들이었지만, 피아노를 못 치게 되더라도 그 어떠한 종류의 극단적인 선택도 하지 않겠다고 사람들 앞에서 아버지에게 맹세하고, 만약 기억을 되찾게 되어도 지금의 날 조금이라도 기억해 달라는 의미로 내 짧은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잘한 걸까.
모르겠다.
괜찮을까.
그것도 모르겠다.
“…….”
눈에서 솜을 떼어 내고, 나머지 화장도 지웠다.
그다음, 목욕을 하기 전에 뭘 해야 하는지 잘 기억이 안 나서 멍하니 거울을 바라보다가, 일단 드레스를 벗어야 함을 깨달았다.
등 쪽으로 손을 뻗었는데 손이 잘 안 닿았다. 딱히 도와줄 사람이 있어야 하는 드레스는 아니었는데, 요령이 없다 보니 혼자 벗는 것조차 쉽지가 않다.
“……으.”
끔찍했다. 이렇게 혼자 벗다가 어깨에 담이 오지 않을지 걱정될 지경이었다. 하지만 한참을 끙끙대다 보니 어떻게든 벗을 수 있었다.
드레스를 벗은 채 거울을 바라보았다.
매일 보는 몸이라 잘 모르겠지만 작년과 비교하면 확실히 조금 더 큰 것 같다. 한참 동안 병석에 누워 있어서 너무 약했던 시절에 비하면 훨씬 보기에 좋다. 피아노는 전신을 사용해야 하므로 체력 또한 중요했으니 점점 건강해지는 것은 반갑다.
그렇게 거울을 보고 있자니 옛날 생각이 났다. 처음엔 이 몸으로 대체 뭘 하라는 건지 모르겠다며 화를 내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당히 만족하는 편이었다. 손도 꽤 큰 편이었고 손끝은 섬세했으며, 유연하고 운동 신경도 나쁘지 않았다. 여전히 악기를 다루는 육체 능력으로 남자에 비하면 불리한 점이 많지만 이미 1년 넘게 익숙해진 몸이다.
손을 들어 천천히 움직이면서 기계적으로 상태를 살피다가, 문득 웃음을 흘렸다. 여전히 난 내 몸을 바라보는 기준을 피아노 연주자 쪽으로 집중하고 있었다.
“…….”
음악을 제외한 모든 것을 버리고 이 몸으로, 여성으로 살고자 각오한 지 1년이 넘었고, 그사이 난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잘 적응하고 있었다.
그러한 내 밑바닥에 어떠한 남성성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었다. 농담으로라도 지금 남자처럼 행동해 보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감이 안 온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난 그 정도로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이미 균형은 넘어가 버린 지 오래였다.
단지 연주자라는 정체성이 묘하게 균형을 잡고 있는 것처럼 느낄 뿐이었다. 내가 모든 문제들을 유예시켜 버린 것도 당장 피아노에 집중하고 싶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노력은 연주회로 미약하게나마 결실을 거두었다.
“…….”
만약 할 수 있다면, 뭘 해야 할까.
내 몸은 내게 딱히 뚜렷한 지시 같은 것을 해 오지 않는다. 내가 그만큼 금욕적으로 독하게 몸을 통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잘 모르겠다.
다만 언제까지고 이렇진 못하리라는 것을 안다. 뚜렷하진 않지만 내 마음은 늘 함께할 사람과 온기를 원했다. 난 이제 도저히 혼자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세상은 그렇게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도망치지 않고 바로 마주하게 되었을 때, 난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다.
현명한 아나스타샤가 말했듯, 난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정말 무엇이든. 내가 누구든 그건 상관없었다.
둔탱이 에르네스트는 분명 내 유예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모른다. 아예 상상조차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때문에 난 에르네스트에게도 내 기억에 대한 것을 말해 주고 싶긴 했지만, 아나스타샤는 반대했다. 남자인 그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른다고 했다. 거기에 동의했다. 아나스타샤의 반대는 타당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믿을 수 있을까. 아니야, 잘 모르겠어. 하지만 후회하고 싶지 않았어.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지금 혼자 고민할 필요가 있어? 내게 허락된 것들이 계속해서 이어진다면, 싫어도 알게 될 텐데. 아니면 모조리 무의미해지거나.
“으…….”
머리가 아프다.
난 샤워 부스에 들어가 물을 틀었다. 따뜻한 물이 내 머리 위로 쏟아졌다. 머리 위를 물방울들이 두드리자 복잡했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난 멍하니 발밑을 바라보면서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
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오자 아나스타샤가 없었다. 문간에 잠시 서 있다가, 안으로 들어섰다.
일부러 목욕을 하지 않고 샤워로 끝낸 것도 아나스타샤가 너무 오래 기다릴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는데, 그사이 잠시 어디론가 간 것 같았다.
“…….”
침대에 앉아 잠시 기다렸다. 멍하니 있다가 스마트폰을 들었다. 난 바로 메신저를 불러내 아나스타샤와의 대화창을 열었다.
한 살인 나는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일 뿐이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기억상실이라고 밝히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타협점이었기 때문이 어쩔 수 없었다.
그런 것과 관계없이, 아나스타샤가 앞으로도 날 내버려 두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나는, 정말 가증스럽고 교활하게 느껴졌다.
자중할 필요가 있었다. 아나스타샤에게 어쩌면 무거운 짐을 나누어 준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난 그만큼 그녀에게 잘해야만 했다. 혹여나 아나스타샤를 이용하려는 생각이라도 품었다간, 난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잠자코 기다리고 있자 잠시 후, 방문이 열리며 나이트가운을 걸친 아나스타샤가 돌아왔다.
“타티아나? 빨리 왔네.”
“방금 왔어요.”
“샤워만 한 거야? 목욕하지 그랬어.”
아나스타샤는 히죽 웃더니 들고 있던 컵을 내밀었다.
“어쨌든, 이거 마실래? 식당에서 받아 왔어.”
“아, 고마워요.”
마침 목이 마르던 참이었다. 난 아나스타샤가 건네준 컵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오렌지 주스였다.
난 주스를 홀짝이다가 옆에 앉은 아나스타샤에게 물었다.
“드미트리는 아직 일하고 계시던가요?”
“드미트리?”
“주방에 계신 셰프세요. 갈색 머리에 어깨가 넓으신.”
“아, 그 아저씨? 응. 아직 있더라.”
“고생이시네요…….”
드미트리는 오늘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도와주진 못하더라도 이렇게 방으로 그냥 들어올 것이 아니라 인사라도 했어야 했던 게 아닐까 약간 후회가 들었다.
아나스타샤는 내 표정을 보더니 말했다.
“이 시간까지 식당에 와서 음식 해 달라는 사람이 있으니까.”
“어떤 분과 만나셨나요?”
“어……. 에르네스트.”
약간 떨떠름한 어투였지만 그보다 난 에르네스트라는 이름에 놀랐다.
“에르네스트가 왔었나요?”
“응. 일리야가 괴롭혀서 도망쳤나 보더라고.”
“괴롭혀요?”
“특제 오리지널 칵테일을 먹였대.”
“술을요!?”
“아니, 논알코올. 그냥 이것저것 섞었나 봐.”
난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만을 가지고 연회장에서 나왔던 것을 떠올렸다. 에르네스트는 거의 버려두듯 하고 와버렸는데, 논알코올이라곤 해도 일리야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니 못할 짓을 한 기분이 들었다.
“그…… 저희가 테이블을 지키고 있어 줬어야 했던 게 아니었을까요.”
“뭐? 뭐하러?”
“그래도요…….”
“남자들은 원래 그러고 놀아. 너무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냥 남자들끼리 놀게 내버려 두면 돼.”
아나스타샤는 별것 아니라는 투로 말했지만 나는 후회하며 식당에 있을 에르네스트를 떠올리다가, 당황했다.
“……잠깐만요, 아나스타샤. 그 차림으로 에르네스트와 보신 건가요?”
“그런데?”
“……예?”
태연하게 말하고 있지만, 아나스타샤는 속에 무언가 입지도 않고 나이트가운만을 걸친 상태였다. 저 복장으로 친구를 보기엔 너무 창피하지 않은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낯이 뜨거워질 지경이었다. 난 말을 더듬었다.
“어, 어, 어떻게요?”
“얘는 진짜 순진한……. 아니지.”
아나스타샤는 한숨을 작게 쉬더니 말을 흐렸다. 그러고는 내게 사과했다.
“미안해. 나도 앞으론 조심할게.”
“조심요?”
“그래. 난 평소 조금 편하게 입고 다니잖아?”
“그런가요? 잘 몰랐어요.”
“아, 너 여름엔 학교에 없었지.”
아나스타샤는 여름엔 더 편한 옷을 입고 다녔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선 그게 당연한 것이었다.
나도 여름이 되면 그래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면서 새삼 각오를 다지고 있는데, 가만히 날 바라보던 아나스타샤가 불쑥 내 이름을 불렀다.
“……타티아나.”
“예.”
“반년 만에 편입 시험에 통과하느라 정말 고생 많았어.”
“…….”
갑자기 이런 말을 해 올 줄은 몰랐다.
아나스타샤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가 만약 시간을 넉넉히 잡고 올해 입학을 목표하고 있었으면 난 아마 학교에 없었을지도 몰라.”
“가,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넌 모르겠지만 작년에 나 진짜 심각했었거든.”
타건 테크닉에 대한 벽에 부딪쳐서 아나스타샤가 슬럼프를 겪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2년 넘게 길어져서 상당히 곤란했다는 것도.
여자로서 그러한 벽을 어떻게 뛰어넘어야 할지 충분히 고민하고 터득했던 내가 도움을 주지 않았더라도 아나스타샤는 그 벽을 언젠가 넘어섰겠지만, 어쩌면 조금 더 길어졌을지도 모른다.
멍하니 바라보자 아나스타샤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힘들었겠지만, 고마워.”
“그…… 저는 그냥 너무 늦게 입학하면 안 되니까 서두른 것뿐이에요…….”
“아하하하, 매정해.”
“물론 아나스타샤에게 도움이 되었다면 정말 기뻐요!”
내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도움이 된다면 난 무엇이든 도와줄 생각이 있었다. 언제든지.
매정하다는 오명을 벗기 위해 몇 번이고 주장하자 아나스타샤는 한참을 기분 좋게 웃더니 따스한 눈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튼, 타티아나. 이제 한 달만 지나면 여름이잖아. 방학이기도 하고.”
아나스타샤가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그녀의 존재감이 보다 뚜렷하게 느껴진다. 부드럽고, 따뜻했다.
“우리 많이 놀러 다니자. 모스크바뿐만 아니라 어디라도 가 볼 곳은 정말 많으니까 말야.”
“…….”
“공부랑 연습도 열심히 하고 말야.”
아나스타샤는 계속해서 지금 내 현실을 일깨워 주고, 앞으로 함께할 날이 많다고 얘기해 주었으며, 운명이 있다면 그건 좋은 쪽으로 해석하면 된다고 말해 주었다. 그런 그녀의 긍정적인 모습은 정말 많은 힘이 되었다.
나야말로 그녀를 바로 만나지 못했더라면 지금 여기에 없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