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3화
시선을 느낀다.
마주 보려 해도 어디서 날아드는 시선인지 알 수가 없어 똑바로 마주할 수 없었다. 난 그저 가만히 서서 거기에 저항했다. 움직이지 않고, 소리를 지르지 않고 담담하게 있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시선은 스르르 사라졌다.
조금 더 다가와 내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것만으로도 내 숨통을 졸라버릴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고 그냥 날 내버려 두고 떠났다.
혼자 남은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낀다.
“…….”
눈을 떴다.
미처 잠에서 다 깨어나기도 전에, 등 뒤에서 느껴지는 온기를 느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보니 아나스타샤가 내 쪽으로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고르게 숨소리를 내며 잠든 얼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목이 조금 뻐근했다. 그마저도 기분 좋게 느껴졌다. 적어도, 적어도 오늘은 아니겠구나 하는 직감이 들었다.
조금 안도하며 손을 들어 보다가, 어이가 없어서 조금 웃었다.
앞으로도 평생을 계속 불안에 떨며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매일 일어날 때마다 안도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조금 더 힘을 내야 할 때다. 더더욱, 최선을 다해서.
무섭다고 주저앉아버릴 수는 없었다.
“…….”
난 아나스타샤를 내려다보다가, 웅크리고 잠든 모습이 조금 추워 보여서 내 쪽으로 온 이불을 덮어 주었다. 난 춥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었고, 그녀가 추워하지 않았으면 했다.
이불을 덮어 주고, 잠시 지켜보다가 물러섰다.
잠든 아나스타샤를 해가 뜰 때까지 바라보고 있는 것도 괜찮았지만, 이대로 지켜보고 있다간 나도 모르게 쓰다듬어버릴 것 같았다. 난 괜한 충동과 씨름하지 않기로 했다.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6시였다. 평소 내 수면 시간을 생각하면 정말로 숙면을 취한 것이었다. 모두 아나스타샤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조금 더 자야 할 필요가 있었고, 난 침대에서 내려와서 슬리퍼를 신고는 조심스레 방에서 나왔다.
욕실로 가서 가볍게 세수를 하고는 잠시 생각했다. 아마 손님들은 늦게까지 연회를 즐기고는 각각 방에서 잠들어 있을 것이다.
그 사실이 내 일과에 큰 영향을 주진 않는다. 방음 처리가 되어 있는 별관의 연습실은 피아노를 치더라도 이곳까지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연주회를 마치고 다음 날 새벽이라는 사실 역시 내 일과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어차피 그냥 쉬려고 해도 할 일도 없었다.
그렇게 평소와 같이 아침을 맞이할까 생각하면서 막 복도로 나오는데, 저편에서 한 사람이 멈춰 섰다. 난 그쪽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고용인 분들의 기상시간은 이때 즈음이긴 하지만 일요일에는 기본적으로 다 휴무이기 때문에 대부분 늦잠을 자는 편이다. 누굴까? 잘 모르겠다.
서로를 알아차렸는데도 모른 척해버릴 순 없어서 내가 먼저 물었다.
“누구신가요?”
“타티아나?”
익숙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른다. 그림자는 뚜벅뚜벅 몇 걸음 다가오더니 우뚝 석상처럼 굳었다.
난 상대가 누군지 알아차렸고, 웃으며 반갑게 아침인사를 했다.
“안녕히 주무셨나요? 에르네스트.”
“아니, 일어난 건 아니고…….”
“일어나 계신 게 아닌가요? 몽유병이 있으신 줄은 몰랐는걸요.”
“……잠깐 화장실에 갔다 온 거야.”
가벼운 농담이었는데 에르네스트는 받아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른 아침이라 정신이 없는 걸까.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이번엔 머뭇거리던 에르네스트가 입을 열었다. 내 인사에 답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어쨌든, 너도 잘…… 잤어?”
“예, 덕분예요.”
“덕분은 무슨…….”
에르네스트가 자꾸 머뭇거리는 게, 대화를 제대로 이어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난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그러시나요?”
“아니…….”
에르네스트는 답답한 듯 어색한 듯 주저하더니 작게 물었다.
“안 추워?”
“……?”
갑자기 무슨 소리람?
5월의 모스크바라도 이 새벽엔 꽤 춥긴 했다. 하지만 내가 입고 있는 나이트가운은 얇아 보여도 꽤 따뜻한…….
“아.”
난 그제야 내가 무슨 꼴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순간 목옆에서부터 열기가 타고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눈짓으로 묻자 에르네스트는 필사적으로 내게 무언가를 전하려 하는 듯했다. 난 창피한 것도 잊고 순간 그 모습이 조금 귀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대로 있을 수도 없었다. 잠시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어색하게 얼버무려버리는 것은 안 된다. 그렇다고 에르네스트를 놀려먹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정말 나쁜 짓이었다.
결국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넘기기로 했다. 조금 뻔뻔하게 보일진 모르겠지만 아나스타샤가 할 수 있었다면 나도 할 수 있었다. 가까스로 평정심을 되찾고 목소리는 태연을 가장했다.
“괜찮잖아요? 뭐 어떤가요?”
“네가 그러면 내가 민망한데…….”
“아나스타샤는 괜찮지 않았나요?”
“걔랑 너랑 같아?”
“…….”
너무 당연하다는 듯 에르네스트는 그렇게 말했고,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평정심이 흔들거린다.
그냥 등을 돌리고 도망치고 싶어졌다.
에르네스트는 순간 내게서 그러한 충동을 읽어 냈는지 급히 말했다.
“아니 뭐, 네가 네 집에서 어떻게 하든 상관은 없는데……. 만약 내가 아니라 다른 손님이었으면 어쩔 뻔했어?”
“다른 손님요?”
“그래. 니콜라이 선배라든가…….”
갑자기 니콜라이 선배의 이름이 왜 나오는진 모르겠지만, 상상을 해 보았다.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이렇게 가운만 입고 욕실에서 나오다가 니콜라이 선배와 마주친 상황을.
……잘 모르겠다. 평소 굉장히 친절하지만 하고 싶은 말은 상당히 직설적으로 하는 그 선배가 내게 무슨 말을 할지 난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난 선배가 무슨 말을 하든 제대로 듣지도 않고 도망쳐버렸을 것 같았다.
확실히 지금 이렇게 조금 평범하게 대화라도 할 수 있는 건 상대가 에르네스트였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그렇네요.”
“그것도 그렇단 말이 무슨 말이야?”
난 딱히 그 질문에 성실히 대답하지 않았다.
“갈아입고 올게요.”
“그래……. 아니, 뭘 다시 와? 난 가서 잘 건데.”
에르네스트는 대답하다가 말고 고개를 저었다.
난 더 자거나 할 생각이 없었지만 내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면 안 된다. 에르네스트는 충분히 더 잘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를 그냥 보내기 싫었다.
“에르네스트.”
“……응?”
그에게 말했다.
“어제 일리야 특제 오리지널 칵테일은 어땠나요? 이상했나요?”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대번에 에르네스트가 인상을 구겼다. 일리야가 진짜로 이상한 걸 만들어 먹였나 보다.
에르네스트는 가만히 날 보더니 물었다.
“아나스타샤가 말해 줬어?”
“일리야가 괴롭혔다고요.”
그리고 이번에 그는 조금 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무엇이든 간에 인정하고 싶지 않은 듯한 얼굴이다.
“무슨 소리야. 난 그런 거 당한 적 없거든. 내가 마시고 싶어서 마신 거야.”
“그……래요?”
그냥 자존심 때문에 하는 말처럼 들리진 않았다. 상황이 조금 이해가 안 간다. 난 일리야가 못 마실 것을 만들어 에르네스트에게 강제로 마시게 한 줄 알았는데, 그래도 마실 것에 장난을 치진 않았던 걸까?
난 저번에 보았던 일리야를 떠올리며 말했다.
“일리야는 칵테일을 꽤 잘 만들죠. 저번에 저에게도 논알코올 칵테일을 만들어 준 적이 있어요. 골든 메달리스트라는 이름이었어요.”
“아 그래? 내가 마신 건 러시안 피아노라는 이름이던데.”
듣기만 해도 정말 마셔 보고 싶은 이름이다.
“와, 러시안 피아노. 멋진 이름이네요. 저도 마셔 보고 싶어요.”
“그거 넌 못 마실 거야. 콜라가 들어가거든.”
“아……. 아쉽네요.”
내 중얼거림에 에르네스트가 갑자기 폭소를 터뜨렸다. 갑자기 왜 웃어요?
어리둥절해서 바라보니 에르네스트가 끅끅거리다가 배를 부여잡고 콜록콜록 기침까지 했다. 어디 아픈 거 아닌가 걱정될 정도다.
“……어윽.”
“괜찮으세요?”
“괜찮아. 식빵 먹으면 돼.”
“식빵요……?”
오늘따라 에르네스트는 정말 엉뚱한 소리를 많이 했다. 난 걱정 반 흥미 반으로 그에게 말했다.
“그러지 마시고 식당에서 제대로 먹을 만한 것을 찾아보는 건 어떤가요? 필요하다면 간단한 건 만들어도 되고요.”
“타티아나.”
“예?”
“네가…… 해 주려는 거야?”
에르네스트는 아까처럼 답잖게 중얼거리는 어투로 내게 물었다. 난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에르네스트가 먹을 것이라면 못 해 줄 것도 없었다.
***
방으로 돌아가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나는 에르네스트를 데리고 식당으로 향했다.
늘 내가 에르네스트를 끌고 가는 곳이 거의 피아노 연습실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건 조금 특이한 경우이긴 했다.
하지만 해 주고 싶었으니까.
어두컴컴했던 식당은 내가 불을 켜자 환하게 밝아졌다.
그 안쪽의 부엌을 살폈다. 깔끔하게 정돈된 조리대를 보니 마치 연습실에서 피아노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넘치고 의욕이 생긴다.
언제든지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은 받은 지 오래였다. 어제 늦게까지 고생한 드미트리는 쉬고 있을 테고, 이제 그 제자인 내가 힘을 써 볼 차례였다.
머리를 묶고, 앞치마를 했다. 뒤를 돌아보니 에르네스트가 기웃거리고 있었다. 이런 말은 실례지만 강아지 같은 모습이다. 난 그에게 말했다.
“앉아 계세요, 에르네스트.”
나도 모르게 말해 놓고 보니 정말 강아지에게 하는 투였다. 조금 미안했다.
다행히 에르네스트는 내 속내를 눈치채지 못하고 말했다.
“어……. 도와줄 거 없어? 나 감자 잘 깎는데.”
“없을 거예요.”
같이 만드는 것도 즐겁겠지만 이건 나 혼자 하고 싶었다.
뭘 만들지는 이미 정해 두었다.
가장 빠른 시간 내에 가능한 것은 양배추와 절인 오이로 만드는 새콤한 스프인 라솔니크였다. 만드는 법도 일전에 배웠고,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난 자신 있게 도전해 보기로 했다.
“…….”
그렇게 의욕적으로 식재료들이 들어있는 냉장고를 열었다.
10초 후. 난 절망에 빠졌다.
“없어……?”
다른 냉장고도 열어 보았지만 절인 오이를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원래 꽤나 대량으로 구비해 놓는 식재료 중 하나였는데, 어제 연회에 베풀기도 했고 때마침 딱 떨어진 모양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지.
눈앞이 캄캄해졌다. 다시 자겠다는 에르네스트에게 뭐라도 먹이고 싶어서 일부러 데리고 왔더니 가장 무난하게 해 줄 수 있는 요리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요리라도 하면 되겠지만, 눈앞에 있는 양배추와 스테이크용 고기 등을 보면서도 아무 생각도 안 났다. 이 아침부터 스테이크를 먹일 순 없잖은가? 그것도 과식을 했는지 속이 불편한 것 같은 친구에게.
머리가 바보가 된 것 같다. 그나마 알고 있던 레시피들도 생각이 안 났다. 냉장고 문을 붙잡은 채로 난 한동안 굳어 있었다.
“…….”
“타티아나? 왜 그래?”
“아니에요.”
어떻게 하지. 당장 나가서 식료품점에 가서 사 올 수도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일요일 아침 6시에 절인 오이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급기야 냉장고 문을 닫았다가 짠 하고 다시 열면 마법처럼 절인 오이가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마저 할 찰나, 에르네스트가 조심스레 물었다.
“타티아나. 재료가 없어?”
“…….”
눈치가 왜 그렇게 빠른 거예요?
난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한참을 침묵하고 있다가, 결국 눈을 질끈 감고 실토했다.
“예……. 망했어요.”
“……뭐?”
에르네스트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되묻더니,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하, 하하하, 아하하하.”
“죄송하지만 웃지 말아 주세요, 에르네스트. 전 지금 정말 창피하니까요.”
이제껏 봐 온 것 중 가장 기분 좋게 웃는 것 같았지만, 같이 좋아해 줄 정도로 난 여유롭지 못했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샐쭉하게 말하니 에르네스트가 끅끅거리며 웃음을 삼키면서 손사래를 쳤다.
“아니, 아니. 미안, 타티아나. 네 입에서 망했다는 말이 나오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아서. 다른 의미는 없었어.”
“……아뇨. 아직이에요. 나가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오이를 구해 오면 아직까진 희망이 있어요.”
“나가긴 뭘 나가? 이 새벽에. 망한 게 맞지.”
“…….”
웃겨 죽겠다는 듯 에르네스트가 말했다. 난 할 말이 없었다. 정말 그렇게 안 봤는데 너무하네요, 에르네스트. 제가 망했다는 게 그렇게 기분 좋아요?
하지만 무어라 할 힘도 없었다. 냉장고 문을 닫고 이젠 어떻게 해야 하나,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자 에르네스트가 말했다.
“여기 봐 봐, 라면 있네.”
“라면요?”
식당 한쪽에서 에르네스트가 박스를 들어 올렸다. 코야 라면이라고들 부르는 도시락 컵라면이었다.
이런 컵라면이 왜 주방에 있는 걸까.
“코야 라면이 왜 여기에 있죠……?”
“뭔진 모르겠지만 먹어도 될까?”
“그, 그럼요.”
이래도 되나 생각이 들긴 했지만, 어쨌건 에르네스트가 바란다면 그래도 한 줄기 광명이 찾아든 셈이었다.
난 재빨리 다가가서 손을 내밀었다. 아직도 창피해서 기절할 것 같다.
“……제가 만들어 드릴게요. 이리 주시겠어요.”
“응, 부탁할게.”
에르네스트는 별말 않고 내게 컵라면을 건네주었다. 지금 내게 뭐라도 할 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해 주는 듯했다. 난 식탁에 앉아 있는 그를 뒤로 하고 다시 주방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이 신성한 주방에서 컵라면을 조리해도 되는진 잘 모르겠지만, 드미트리도 내 사정을 안다면 용서해 주실 것이다. 난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라면을 준비했다.
살면서 이렇게 신중하게 컵라면을 준비해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주전자 물이 끓기를 기다리며 노려보고 있다가, 어이가 없어서 결국 나도 웃고 말았다.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시간은 흘러 물이 끓었고, 난 물을 용기 안에 부었다. 그리고 쟁반에 올려 포크와 함께 식탁으로 가지고 갔다. 에르네스트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기절할 것 같다.
“…….”
“…….”
에르네스트의 앞에 쟁반을 내려놓고 맞은편에 앉았다. 잠시 라면이 익기를 기다리며 우리는 말없이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여전히 내 바보 같은 모습이 웃긴지 싱글벙글 웃는 표정이었다.
가만히 보다가 중얼거렸다.
“……생각도 못 했네요. 식재료가 떨어졌을 줄은.”
“너희 집 셰프는 굉장한 사람 같던데, 그래서 그런지 식재료를 쌓아 두고 요리를 하거나 하진 않나 봐? 그렇지?”
“그래도 절인 재료들은 많이 두곤 하는데…….”
오래 먹을 수 있는 절인 재료도 이렇게 떨어지는 날이 있었다. 그게 하필이면 오늘이라 문제지.
“미안해요.”
“미안할 게 뭐 있어? 이걸로도 충분히 고마워.”
“그래도요. 조금 더 제대로 된 것을 만들어 드리고 싶었어요.”
“뭐 어때? 이것도 네가 만든 거잖아.”
컵라면에 물을 붓는 걸 요리라고 하는 건 이제 셰프에게 수련도 받은 요리인으로서의 내 자존심이 인정하지 않는 부분이지만, 에르네스트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듯했다. 이젠 모르겠다. 아무래도 좋다.
포기하고 멍하니 있자니 그가 물었다.
“그보다 너는 안 먹는 거야? 타티아나.”
“전 괜찮아요.”
“왜?”
“…….”
나도 식욕이 없는 것은 아니어서 먹고 싶은 마음이 있기도 했지만, 능청스럽게 두 개를 끓여 같이 앉아 먹을 기분은 안 들었다.
그렇다고 계속 울상을 하고 있으면 에르네스트도 입맛이 떨어질 것 같아서 난 다시 주방으로 가서 주전자에 남아 있던 물로 허브티를 끓였다. 이거라도 마시고 마음의 안정을 취해야 할 것 같다.
에르네스트는 나도 입에 무언가를 넣으려 하자 그제야 다시 웃었다.
잠시 후, 그는 포크로 면발을 들고는 한 입 먹었다. 곧바로 탄성이 터졌다.
“와, 어젯밤에도 진작 이걸 먹을 걸 그랬다. 정말 괜찮네.”
평소 그리 즐기지 않았음에도 이번만큼은 맛있는 모양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정신없이 라면을 흡입했다.
“…….”
끓여 온 허브티를 홀짝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해 주고 싶은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지만, 어쨌건 이 와중에도 맛있게 잘 먹는 그를 보니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난 웃으며 다시 잔을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