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227화 (227/1,277)

##  227화

안토니나는 헝클어진 가운 앞섶을 가지런히 잡고는, 싱긋 웃었다.

“고맙습니다. 여러분. 기부금을 마련하시기 위해 자선 연주회를 하셨다고 들었어요.”

비로소 피로한 눈가에 생기가 돈다. 안토니나가 이어 말했다.

“얼마 전에는 소프라노이신 키라 비탈리예브나께서 후원을 해 주셨고……. 예술계에 몸을 담고 계신 분들이 많이 도와주셔서 큰 힘이 되네요.”

“귀 학교에선 음악 교육에도 상당히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예. 물론이죠.”

성 니콜라 루그넨스키 수도원의 고아원인 루네와 일반학교인 루네 학교에서는 간단하게는 바느질, 그림, 요리, 운동부터 시작해서 농사,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를 교육해, 아이들이 시설에서 나가서 생활하는 데에 충분한 도움이 되도록 지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교육 프로그램에서 가장 비중이 높고 또 큰 효과를 보는 것이 노래 연습과 피아노와 바이올린 등의 악기 연주였다.

안토니나가 말했다.

“음악은 좋지요……. 나쁜 길로 언제나 빠지기 쉬운 아이들이 다함께 모여서 노래를 하거나 피아노를 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빠르게 웃음을 되찾는지……. 그걸 보면 정말 기적이란 말밖엔 나오지 않죠.”

그녀는 그러한 기적들을 직접 본 사람처럼 믿음이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곤 우리를 돌아보며 다시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또 이런 기적들도 있고요.”

“…….”

자선 연주회로 1400만 루블을 모금한 우리를 기적이라 말하는 안토니나의 목소리엔 여러 감정들이 맺혀 있었다. 아직 세상을 잘 모르는 나는 미처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하지만 그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가장 큰 감정이 기쁨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녀는 다시 정중하게 말했다.

“아무튼 제대로 인사를 안 드렸군요. 인사드리겠습니다. 루네 의료원의 원장이자 의사이며 루네 학교 직업교육 외래선생 겸 사무부국장인 저 안토니나 바실리예브나 티토바가 다시 감사를 담아 인사드립니다. 도움 주시게 된 것을 후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어마어마하게 긴 직함을 들으면서 난 안토니나가 얼마나 큰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 것인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그런 안토니나의 감사 인사를 받고, 우리를 대표해서 미하일 선생님이 웃으며 화답했다.

“저희 역시 세상을 밝히는 일을 하시는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이렇게나마 도움을 드릴 수 있게 되어 다행이군요.”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인걸요, 뭐…….”

안토니나는 조금 머쓱한지 중얼거리며 웃었다.

잠시 미하일 선생님과 안토니나의 주고받는 인사가 이어지고, 안토니나는 옛일을 회상하는지 팔짱을 끼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야로슬라블 시내에서 소아과 의사로 살면서 아이들을 봐 주다가 이곳에 왕진을 온 계기로 눌러앉기로 결심했죠. 이곳엔 의사가 필요했으니깐요. 그게 벌써 5년 전이네요.”

“오래되셨군요.”

“그사이 별일을 다 겪었지만 요즘이 가장 힘들었네요. 정말 여러분이 도와주시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그녀는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솔직히 다음 달에도 이렇게 상황이 안 좋으면 제가 이곳에서 나가서 도로 야로슬라블의 병원으로 들어갈 생각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이 루네 의료원은 사립병원으로 되어 있으니 국립병원에 들어가서 저라도 돈을 벌어야 이곳이 살 테니까요.”

“봉급으로 도와주실 생각이셨습니까?”

“잘해 봐야 3만 루블 정도의 쥐꼬리만 한 월급이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

이야기를 들으면서 조금 놀랐다. 러시아의 병원은 대부분 국립병원이다. 따라서 3만 루블이라는 액수는 대부분 러시아 의사들의 실정이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았다.

의료 시스템이 잘 갖춰진 나라에 있는 의사들의 생활수준을 상식으로 갖추고 있는 나에게 3만 루블의 월급을 받는 의사는 정말 생소하게 들렸다.

그리고 그런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에 약간 부끄러워졌다. 1년이나 지났음에도 아직도 난 기초적인 상식이 굉장히 많이 부족한 것이다.

미하일 선생님이 물었다.

“얼마 전 의료계 종사자들의 처우를 개선해 주겠다는 이야기가 있긴 했습니다만.”

“아, 그거 거짓말이에요, 거짓말. 아하핫. 선생님도 아실 것 아녜요?”

“공감 가는 바가 없진 않군요.”

“말씀이 통하시는 분이시네요.”

월급을 정부에서 받는 직종에 계신 분들끼리 통하는 것이 있는 듯했다.

두 분은 지금이 한낮만 아니었다면 당장 술집으로 향했을 것처럼 눈빛을 주고받더니, 우리들을 바라보고는 피식 웃었다.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안토니나가 다시 책상으로 돌아가 스마트폰을 살폈다. 무언가 확인하는 듯했다.

“고마우신 분들이 오셨으니 우리 선생님들을 불러야겠군요. 일단 지금 루네에 계실 분이 표트르 선생님과 스네야나 선생님……. 어제 이야기를 해 뒀으니 아마 준비는 되어 있으실 거예요.”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사무국장님과 원장님은 뵈었으면 하는데요.”

“아, 지금 사무국장님은 병환으로 입원 중이시고 원장님은 미국의 복지회에 업무로 나가 계신지라…….”

난처한 어투로 안토니나가 답했다. 여러 일들이 있는 듯했다.

미하일 선생님은 상관없다는 듯 말했다.

“부국장이신 안토니나께서 국장 대리시겠군요?”

“혹 여러분에게 실례이지 않을까 걱정되네요.”

“괜찮습니다.”

“하……. 정말 원장님이 지금 계셨어야 하는데. 전화로 이야기를 전해 드렸더니 거의 우시더라고요.”

전화상으로 어떠한 이야기들을 주고받았을지 알 것 같았다.

당장 건물 수리를 할 돈도 없는 것은 물론이고, 일할 수 있는 사람도 부족해 한 사람에게 몇 가지나 되는 직책을 주는 이 시설의 어른들은, 본인들은 숫자를 계산하며 숨이 막혀 죽어 가는 와중에도 아이들만큼은 어둡게 키우지 않으려 고생했을 사람들이다.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우리도 기뻤다.

훈훈한 분위기가 피어나고, 안토니나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문 쪽으로 걸어갔다.

“자, 그러면…….”

벌컥 문을 열자 문가에 있던 세 명의 아이가 막 도망가려다가 안토니나의 시선에 붙들렸다. 밖에서 엿듣고 있다가 딱 걸린 모양새다.

얼어붙은 세 명의 아이를 내려다보며 안토니나가 말했다.

“키릴, 발렌틴, 로자. 너희들은 가서 선생님들과 숙소에 계신 분들도 모두 불러와 주겠니? 이분들께 인사를 드려야지.”

“선생님들요?”

“다요?”

“그래. 모두…… 아니지, 어린애들을 보시는 록산나 선생님은 빼고.”

“저희도 어린애들인데요?”

“너희보다 더 어린 애들이 있잖니.”

안토니나는 눈을 찡긋해 보이고는 미하일 선생님을 돌아보았다.

“네댓 살 아이들은 항상 봐줄 사람이 필요해서요.”

“물론입니다.”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 중엔 이렇게 열 살 이상으로 보이는 아이들도 있지만 한참이나 어려서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들도 있었다. 당연히 그 애들을 돌봐 줄 사람도 한 명 남기지 않을 순 없었다.

굳이 양해를 구할 일이 아님에도 양해를 구한 안토니나는 다시 아이들에게 말했다.

“아무튼, 부탁해도 되겠니?”

“물론이죠, 안토니나 선생님.”

“30초만 기다리세요.”

“전 25초요.”

두 명의 남자아이가 서로 경쟁하듯 말하며 뛰어나갔다. 30초 내에 이 부지 어디에 있을지 모르는 선생님들을 모두 모시고 오는 건 힘들 것 같은데……. 저 아이들에게 그런 건 별로 신경 쓸 문제가 아닌 것이다.

“저런 바보들과 같은 학년이라는 게 수치스러워요.”

“너무 그러지 말렴, 로자.”

“아, 정말…….”

마지막으로 여자아이가 어이없다는 듯 말하며 나갔다. 안토니나는 마지막까지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문을 닫았다.

그녀가 말했다.

“상비약이 생기게 되면, 저러다 혹시나 다쳐도 이젠 제가 치료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마음이 놓이는지 모르겠네요…….”

안도와 피로가 섞인 눈으로 안토니나가 중얼거렸다. 조금 비틀거리는 걸음이 위태롭다.

미하일 선생님은 잠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침묵했다.

여러 이야기가 가능했다. 정기적으로 후원하겠다고 할 수도, 자주 오겠다고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선생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 중앙음악학교의 신뢰와 명예에 직결된다면, 결코 쉽게 할 수 없는 말이다.

그 모든 고뇌를 거쳐, 미하일 선생님은 짧게 말했다.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중앙음악학교의 교사인 선생님이 그러하듯, 나 역시 쉽게 할 수 있는 말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생각할 거리가 많았다.

***

잠시 기다리면서 우리는 안토니나에게 조금 구체적인 기부금 사용처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잘 써 줄 것이라 믿고 있으니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안토니나는 반드시 설명해야겠다며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시설에서 필요한 것은 음식, 의류, 생필품, 의약품, 차량 유지 보수, 건물 유지 보수 등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시급한 루네 학교의 지붕과 벽 보수, 생필품 구매, 그리고 차량 수리비 등에 비용이 들어갈 것 같았다.

“여긴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차량이 정말 필수적인데 고장 난 차가 두 대나 되어서요. 어떤 부품이 고장 났는진 알고 있으니 부품만 구입하면 고칠 수 있죠.”

“정비공을 부르지 않고 직접 고치십니까?”

“아, 여기 계신 선생님들은 대부분 여러 가지를 할 줄 아세요. 자동차를 잘 보시는 분도 계시고……. 저도 어느 정도는 안답니다.”

안토니나는 복잡한 사람도 고치는데 자동차 정도는 당연히 고칠 줄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웃었다. 듣고 보니 그도 그렇지만 대단한 일임은 분명했다.

그렇게 행복하게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안토니나에게 이야기를 들으면서 잠시 기다리자 루네의 선생님들과 직원분들이 찾아왔다. 순식간에 사무실이 협소해져서 우리는 밖으로 나갔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찾아온 선생님들은 감사 인사를 하며 미하일 선생님과 악수를 나누었다. 어떤 선생님들은 눈가에 눈물까지 맺혀 있었다.

기웃거리던 아이들도 수십 명이나 몰려들었다.

“언니오빠들도 학생인데 연주회 했어요? 와, 그리고 그 연주회로 도와주시는 거고요?”

“클래식 학교는 어때요?”

자세한 액수나 사정을 모르는 아이들은 우리가 모스크바의 중앙음악학교 학생들이라는 것에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데에도.

“오빠는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배우 하면 좋겠다. 생각 없어요?”

“……생각 없는데.”

“너무 쿨하시다. 근데 혹시 생각이 바뀌면 하실지도 모르니까 지금 사인해 주시면 안 돼요?”

“생각 없다니까.”

에르네스트는 속된말로 약간 싸가지 없게 말하고 있음에도 엄청난 인기를 구가 중이었다. 막심 선배가 같이 있었는데, 그 옆으로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자꾸 쿨하다고 하는데 대체 뭐가 쿨하다는 건지 잘 모르겠다. 아까 차에서 있었던 일들을 알려 주고 싶다.

난 그쪽을 보다가 작게 웃었다.

어차피 에르네스트는 피아니스트 외에 다른 것을 할 생각은 없는 사람이었다. 생긴 건 정말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생기긴 했지만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소용없을걸?

어쨌든, 에르네스트는 저렇게 바쁜데 나는 어떠한가. 앞을 보았다.

눈이 마주친 아이들이 흠칫 놀란다. 상처 입을 것 같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아이들의 눈길은 내 어깨너머 뒤쪽을 향해 있었다. 고개를 돌려 뒤를 보니 거기엔 아나스타샤가 있었다.

“아나스타샤.”

“응?”

그녀가 날 내려다보았다. 아나스타샤는 딱히 인상을 쓰고 있거나 하진 않았다. 그냥 무표정하게 있을 뿐이다. 하지만 키가 170cm가 넘고 화려한 외모의 아나스타샤는 가만히 있어도 굉장히 카리스마가 넘쳐서 사람들이 쉽게 다가오지 못하곤 했다.

아나스타샤가 얼마나 따뜻한 사람인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나는 느닷없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 타티아나?”

“우후후.”

난 그녀를 놓아주지 않고 안고 있는 상태로 눈짓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아이가 놀란 눈으로 날 보다가, 천천히 다가오더니 팔을 뻗어 우리 포옹에 합류했다.

그것이 신호였다. 곧 옆에 있던 아이들도 너 나 할 것 없이 다가와선 포옹에 동참했다. 수십 명이나 되는 체온들이 하나로 뭉쳤다.

“뭐야…….”

“왜요?”

“……아니야.”

그 한가운데에 있는 아나스타샤는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렇게 따뜻한 봄볕 아래에서 웃음과 온기를 나누고 있는데 선생님 한 분이 박수를 쳤다.

“자, 우리 이대로 기념사진 한 장 찍을까요? 중앙음악학교 분들과 모두 함께요.”

“그거 좋군요.”

그 말에 모두가 찬성했다. 아이들은 저마다 우리와 가까이 서겠다며 다가왔고 우리는 되도록 모두의 얼굴이 나오게 가까이 모일 수 있는 위치를 찾았다.

다행히 어느 공식 행사에서 하듯 기부금의 액수가 적힌 판을 들고 사진을 찍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자연스럽게, 그렇게 웃으면서 우리 중앙음악학교와 루네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었다는 증거가 사진으로 남겨졌다.

우리 학교 행정직원분과 안토니나가 함께 실무절차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듯 옆으로 빠져나갔다.

루네의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통솔하며 우리에게서 떼어 내려 했다. 난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마세요. 괜찮아요.”

“하지만…… 불편하시잖아요?”

“괜찮아요.”

난 재차 말하며 아이들에게 말했다.

“저기, 여러분.”

“예!”

“제가 듣기로 여러분은 학교에서 악기도 배운다고 들었는데, 정말인가요?”

묻자마자 앞다투어 대답들이 빗발쳤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대부분이었고 노래를 잘한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 큰 소리로 대답하는 아이도 있었다.

주변을 바라보았다.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 막심 선배가 날 보고 있었다. 이미 내가 아이들에게 말하는 것으로 무슨 일을 할지 알아차린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에르네스트는 피곤하다는 표정이다. 막심 선배는 의욕이 넘쳤다. 바로 전에 에르네스트보다 인기몰이에 실패한 것에 대해 설욕하고 싶은 표정이 다 드러난다. 재미있는 사람이야 정말.

마지막으로 미하일 선생님을 바라보자 선생님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난 허락을 얻었음을 확신했다.

“그렇다면 악기를 배우는 곳으로 안내해 주시겠어요? 여러분이 연주하는 것을 듣고 싶어요. 저희도 함께할 수 있었으면 좋겠고요.”

내 요청엔 긍정적인 대답이 많았지만, 거기엔 조심스러운 말도 섞여 있었다.

선생님 한 분이 내게 작게 속삭였다.

“중앙음악학교의 분들에게 보여 드릴 수준은 아닌데요.”

“그런 건 상관없어요. 모두 함께 즐길 수 있을 거예요.”

난 환하게 웃어 보였다.

“사실 저희가 가장 자신 있게 드릴 수 있는 것은 지금부터니까요.”

우리 음악가들이 도울 수 있는 건 비단 물질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