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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232화 (232/1,277)

##  232화

손을 씻으러 갔던 리처드는 곧 돌아왔다. 탄산음료가 옷에 튀거나 했다면 번거로웠겠지만 그렇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는 깨끗해진 테이블과 바닥을 보고는 우리를 돌아보았다. 아나스타샤가 웃었다.

“닦아 놨어.”

“고마워.”

리처드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미심쩍은 눈초리로 보더니 순순히 감사를 표했다. 거기에 대뜸 아나스타샤는 한마디를 더 얹었다.

“고맙지? 우리 너무 착한 거 같아. 안 그러니?”

“…….”

조금 누그러졌던 리처드의 눈매가 다시 일그러졌다. 아나스타샤는 기분 좋게 웃었다.

가장 착한 건 가장 먼저 청소에 나선 한승우겠지만, 그걸 가만 보지 않고 도와준 아나스타샤도 천성이 남을 골탕 먹이고 구경이나 하는 사람이 되진 못하는 것이다. 리처드는 동의하지 않을지 몰라도 그녀는 분명 착한 사람이었다.

“자, 그럼 공부 시작할까.”

아나스타샤까지 합류한 우리는 다시 테이블에 앉았다.

항상 에너지가 넘치는 그녀가 함께하자 분위기는 이전과 사뭇 달라졌지만, 학기말 시험을 앞두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달라지진 않았다. 모두 집중해서 공부에 몰두했다.

“흐흥…….”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빙글빙글 펜을 돌리던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들더니 좌우로 까딱였다. 그리곤 내 쪽을 돌아봤다.

“타티아나.”

“예. 아나스타샤.”

“너 혹시 공부 막히거나 하는 건 없니?”

“……?”

아나스타샤가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을 처음 들어 보는 터라 조금 당혹스러웠다. 보통 시험 기간에 공부를 가르쳐 주는 것은 내 쪽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놀라고만 있을 일도 아니었다.

난 빠르게 책을 뒤로 휙휙 넘겼다. 잠깐만, 내가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분명 있었을 것 같은데…….

한참을 책을 넘기다 보니 끝까지 넘겨 버렸다. 적어도 8학년 과정 내에 내가 이해하지 못한 부분은 없었다.

내가 멍하니 아나스타샤를 돌아보자 그녀는 쓰게 웃었다.

“없는 걸 찾아낼 필요는 없고…….”

“뜬금없네, 아나스타샤. 타티아나가 너보다 성적이 좋지 않았나?”

맞은편에 있던 리처드가 물었다. 그가 보기에도 지금 아나스타샤가 내 과외 선생을 자처하고 나선 건 조금 의아한 모양이었다. 아니, 왜요? 아나스타샤가 절 못 가르칠 건 없잖아요?

아나스타샤도 조금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내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게 있을지.”

“전 과목을 봐도 없을 것 같은데.”

“뭐야. 아까 거 복수하는 거야? 리처드.”

“현실을 직시하란 거지.”

사실 현실을 보자면 아직까지 성적은 내가 아나스타샤에 비해 상당히 앞서고 있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나보다 잘하는 게 훨씬 많은 사람이었다. 성적은 내가 그녀보다 낫다고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것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세상에 있는 수많은 배울 것들을 놓고 본다면 정말 현실을 직시해야 할 건 내 쪽이다.

스터디룸에 순간 서먹함이 내려앉았고, 리처드는 심한 말을 했다는 자각이 있는지 빠르게 끼어들어서 분위기를 바꾸어 놓으려 했다.

“별 뜻은 아니었으니까 심각하게 듣진 말고. 어차피 너희 둘 다 나보단 훨씬 공부 잘하잖아.”

“그야 그렇지. 리처드 넌 약간 바보잖아.”

“……야.”

중간 성적을 유지하고 있는 리처드는 바보가 아니지만 아나스타샤는 그렇게 말하며 깔깔 웃었다. 일부러 그리 말하는 투가 역력했다.

장난을 치는 아나스타샤의 웃음소리를 듣다가, 난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난 이전에 아나스타샤에게 내가 기억상실이라고 털어놓았다. 때문에 그녀는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모든 지식들이 1년 만에 쌓아 올린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내가 지금까지 15년을 산 아타스타샤에게 공부를 가르치곤 했으니 그녀도 마음이 복잡해졌을 것이다.

그건 누구라도 당연하게 느낄 만한 감정이었다.

“…….”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거기서 다른 누군가가 쉽게 품을 만한 배신감이나 시기 같은 어두운 감정은 일절 없이, 앞으로도 거의 무조건적으로 내 도움이 되어 주려 하고 있었다. 그녀의 그런 밝고 따뜻한 모습은 정말 큰 기쁨이었다.

나 역시 최선을 다해 그녀의 도움이 될 방법이 있을지 떠올려 보았다.

슬쩍 아나스타샤의 펼쳐져 있는 수학책을 보니, 한 10분 전에 펼쳐져 있던 부분과 똑같은 페이지였다. 난 가만히 그녀를 불렀다.

“아나스타샤.”

“응?”

“저도 허수와 복소수 개념을 정리하고 넘어가려는데 제가 이해하고 있는 게 맞는지 한 번 봐 주시겠어요?”

아나스타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보았다.

내가 그녀에게만 기억상실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이것도 그녀로 하여금 시험에 들게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그래도 그녀를 믿고 싶었다.

난 열성적으로 내가 이해한 수학 개념들을 차근차근 늘어놓았다. 그래프를 그리고, 식들을 몇 개나 쓰면서 공책을 채워 나갔다. 아나스타샤는 조용히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명을 마치고, 난 잠시 멈칫했다.

내가 개념을 정리하겠다는 핑계로 아나스타샤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었지만, 이런 얕은 의도는 이미 처음부터 그녀에게 들켰을 것이다. 혹시라도 기분이 상했진 않았을지, 설명을 다 마친 지금에 와서야 갑자기 걱정이 들었다.

난 바보인가 정말.

조심스레 공책을 덮고 아나스타샤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래? 타티아나. 잘 설명해 놓고서.”

“…….”

머리 한편에 뭉게뭉게 피어오르던 걱정이 조금 사라졌다. 아나스타샤는 조금 더 내 곁으로 가까이 오더니, 부드럽게 웃었다.

“말 나온 김에 이것도 설명 좀 해 줘. 이해가 안 가서 그래.”

“……예. 알았어요.”

우리는 다시 관계를 확인하며, 이전처럼 평범하게 함께 공부했다. 내가 가르쳐 주고, 아나스타샤는 빠르게 이해한다. 때때로 아나스타샤가 날카롭게 개념적인 부분을 물어 오는 일도 있었고, 그걸 설명하는 것으로 나 역시 공부가 되기도 했다.

아나스타샤가 궁금해하는 부분을 다시 짚어 주고, 설명을 마쳤다. 그러자 이번엔 리처드가 날 불렀다.

“타티아나. 잠깐 미안한데, 이것 좀 물어봐도 될까.”

“예. 뭔가요?”

“나도 갑자기 헷갈려서. 이 문장에 이거,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 거였지?”

리처드는 한승우에게 러시아 고급 문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난 그에게 공책을 받아 와서 슥 보았다. 그리고 바로 설명해 주었다.

“생격 지배 전치사로 분류하면 되겠어요.”

“아, 맞다.”

리처드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는 본래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면서 러시아어는 체계적으로 문법부터 배운 사람이지만, 그래도 최근 러시아어를 배운 나에 비하면 잊어 먹고 있는 것이 많았다. 난 첨언했다.

“뒤에 격 변화 규칙에 따라 변화한 것도 다시 확인해야겠고요……. 이제 이 정도는 읽나요?”

“어느 정도는.”

“어느 정도여선 곤란한데요.”

난 지금 배우고 있는 수준을 다시 확인하고는, 한승우를 불렀다.

“한승우. 잠시 이리 와 볼래?”

내 부름에 한승우는 주저하더니 일어나서 내 옆으로 왔다. 커다란 그림자가 날 가린다. 한참이나 큰 그를 올려다보고 있으려니 목이 부러질 것 같다. 한승우는 그제야 내 옆에 웅크리고 앉았다. 난 공책을 가리켰다.

“이 문장 읽어 보겠어?”

한승우는 꽤나 유창한 발음으로 문장을 읽어 냈다. 그간 살면서 배운 것들이 헛되진 않았다. 하지만 읽을 수 있다고 다 끝난 게 아니다.

“문법적으로 구분해 볼래.”

“음…….”

그는 펜을 들고는 문장을 단어별로 구분했다.

난 그 후로도 한승우와 몇 가지 복잡한 문장들을 분석해 나갔다. 그는 꽤 잘 해 나갔다. 진급 시험이 걸려 있다 보니 정말 열심히 하긴 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래도 빈틈이 있었다.

난 한승우에게 도로 공책을 돌려주고는 머릿속으로 그에게 필요한 것들을 정리했다.

“뭐가 부족한지 알 것 같아. 내가 정리해서 문제들을 만들어 줄게. 조금 집중적으로 해 보도록 하자.”

“그…… 괜찮아. 혼자 할 수 있어.”

“네가 혼자 할 수 있다는 건 잘 알아. 믿고 있고. 하지만 이제 2주밖에 안 남았잖아?”

조금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긴 했지만, 내가 내내 이럴 것도 아니고 당장 진급 시험까지만 집중해서 도와주는 것뿐이다.

괜한 소리 할 필요 없이 난 딱 잘라 말했다.

“2주 동안은 아무 생각 말고 네 시험에만 집중해.”

“……받기만 하네.”

“받기만 해도 돼.”

난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굳이 바라는 것이 있다면 좋은 연주자가 되어 주는 것 정도뿐이다. 이젠 나랑 상관없지만 한국에 좋은 연주자가 생기는 건 축하할 일이다. 정말 그뿐이다.

한승우를 돌려보내고, 다시 잠깐 내 공책을 정리하는데, 아나스타샤가 앞의 두 사람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게 속삭였다.

“있잖아, 타티아나.”

“예?”

“…….”

그녀는 이 말을 해도 되는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조금 고민한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고 곧 똑바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말 안 하고 있었지만 난 솔직히 정말 이해가 안 갔거든. 네가 왜 승우 한에게만 반말을 하고 자기 일인 양 잘해 주는지.”

“그건 의사소통이…….”

“이젠 얼추 알아듣는데도 그대로 고수 중이잖아.”

아나스타샤로선 충분히 이상하게 생각할 만도 했다. 하지만 처음엔 몇 번인가 묻더니 나중엔 그냥 평범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서 굳이 더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흉중에 의구심이 남아 있었는 듯하다.

하지만 그녀는 웃으며 속삭인다.

“그런데 이젠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아.”

“아나스타샤…….”

“말도 못하면서 예비학교도 안 거치고 덜컥 입학해서 이제 곧 1년을 보내는 승우 한이 네 눈에 어떻게 비칠지, 알 것 같아서.”

상냥한 목소리가 날 이해한다고 이야기한다. 난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리고 방금 전에 했었던 이야기들도 떠올린다.

난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물었다.

“제가 잘못하고 있는 걸까요?”

“아니? 내가 언제 그런 말 했어?”

아나스타샤는 내가 이렇게 반응할 줄은 몰랐다는 듯 놀라더니 한층 더 따뜻하게 말했다.

“그저 당연한 거야, 타티아나. 난 그렇게 생각해.”

“…….”

“난 지금 네가 느끼는 그 당연함을 이제 이해했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내게 연속되는 기억이 1년뿐이라는 것을 들은 아나스타샤는 그 자리에서 있는 그대로 나를 인정하고 자연스레 받아들여 주었다. 그리고 그 후로도 계속 날 평범한 친구로 대해 주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 충분히 감안하고, 배려하면서 감싸 주고 있다.

“고마워요.”

“별게 다 고맙네.”

아나스타샤는 피식 웃더니 이제야 알겠다는 듯 시원스레 말했다.

“타티아나. 네가 왜 나한테 아직 존대를 하는지도 알겠어. 그리고 그게 내가 지금 억지를 쓴다고 해서 바로 고쳐질 일도 아니라는 것도.”

“그렇진 않아요. 아나스타샤가 원하신다면…….”

“아니, 지금 그것부터가 억지잖아. 난 너한테 억지 쓰지 않을래.”

이제 1년이니 기다려 주겠다는 눈빛이 무척이나 기껍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뇌리 한편에서 끊임없이 조소하고 조롱하는 목소리가 내 신경을 갉아먹는 듯한 느낌이 든다.

난 언제까지 아나스타샤에게 그저 고맙다고만 해야 하는 걸까. 이깟 공부 조금 가르쳐 준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안다. 잘 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조금 혼탁해진 머리로 펜 끝을 멍하니 보고 있는 내 귓가로 아나스타샤의 목소리가 흘러든다.

“그리고 친구에게 존대하는 게 생각보다 나쁜 것 같지도 않고. 음……. 나도 너처럼 이제부터 존대할까? 어떻게 생각해요? 타티아나.”

“……!”

멍했던 정신이 확 돌아왔다. 난 말도 못 하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나스타샤가 크게 웃었다.

“아하하하, 왜 그래요? 상호존대 좋잖아요?”

“아나스타샤…….”

“잠깐만, 괴롭히려는 거 아니니까 그렇게 보지 마. 그래, 그래. 그만해야겠다. 난 솔직히 닭살이 돋아서 못 하겠어.”

아나스타샤는 손을 저으며 농담으로 넘어가려고 했다.

그런 아나스타샤를 보면서 약간 마음이 아팠다. 굉장히 이중적인 생각이지만, 난 아나스타샤가 내게 존대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작 나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있으면서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그녀에게 지금부터라도 존대를 하지 않아야 하는 걸까. 그래야 그녀도 마음이 편해질까.

잠깐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리처드가 말했다.

“진짜 아나스타샤 네가 존대를 한다니까 소름이 다 돋는다.”

“어머, 그래요? 리처드. 앞으론 꼭 이렇게 할게요.”

“내가 괜한 소릴 했네. 젠장.”

리처드는 정말로 정색을 했다. 엄청 싫은 모양이었다.

그는 아나스타샤를 보는 것도 싫은지 내 쪽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리고 반대로 타티아나가 우리에게 존대를 하지 않는 것도 상상이 안 가네.”

“……그런가요?”

“넌 그게 자연스러워.”

이미 한승우에겐 그렇게 하지 않고 있었고 난 정말 제멋대로 구는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리처드는 그 부분까지 따지고 들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 자연스럽게 지내길 바라는 그의 마음이 느껴져서, 난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리처드는 책상에 팔을 괴고 날 바라보다가, 모두에게 제안했다.

“우리 이쯤에서 정리하고 연습실에나 갈래?”

“그럴까요.”

스터디룸에서 공부를 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는 피아노 연습을 더 가까이 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우릴 둘러보더니 말했다.

“네 명이 다 같이 가자는 건 아니지?”

“다들 기말 실기곡도 대충 완성했을 텐데 이참에 서로 들려주고 피드백이나 받으면 좋을 것 같은데.”

리처드의 말처럼 학생들끼리 음악을 교류하고 의견을 주고받는 건 이렇게 함께 공부를 하는 것 이상의 효율을 내곤 했다.

아나스타샤도 그건 괜찮다고 생각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가자.”

우리는 가방을 챙겨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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