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233화 (233/1,277)

##  233화

연습실로 향하면서 근래 연습중인 곡들을 이야기했다.

리처드와 한승우는 기말 과제곡과 합주 과제곡을 연습해야 했다. 그리고 나와 아나스타샤는 자선 연주회로 합주 과제를 면제받았기 때문에 기말에 올릴 과제곡만 연습 중이었다.

학기 중의 연주회 활동으로 시험 등을 면제받는 것은 학교 규정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합주는 안 하는 거야?”

“응. 연주회를 합주 성적에 반영하니까.”

“나도 할 걸 그랬네.”

리처드가 한탄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연주회가 성공적으로 끝났기에 편해 보이는 것이지, 전체적인 과정을 따져 보면 우린 결코 편하지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연주회야말로 수많은 청중들 앞에서 보이는 거대하고 엄격한 시험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걸 단순하게 나도 할 걸 그랬다고 말하는 리처드를 보며 아나스타샤가 어이가 없다는 듯 쏘아붙였다.

“너 바보야? 학교에서 시험 치는 거랑 연주회 하는 거랑 어느 쪽이 더 신경 쓰이고 까다로운데?”

“나도 알아. 그냥 해 본 말이야. 나 얼마 전에 합주 과제곡 연습 하다가 싸울 뻔했거든.”

리처드가 투덜거렸다. 지금 해야 하는 합주 과제곡이 잘 안 풀리는 모양이다.

난 조심스레 물었다.

“리처드가 어쩐 일로요? 누구와 하든 문제없으실 것 같은데.”

“누구든 대충 하면 되겠지만……. 이번 애들은 정말, 그냥 나랑 좀 안 맞아.”

리처드는 무언가 쓴소리를 하려다가, 우리들 앞에서 다른 연주자들의 뒷담화를 하는 건 조금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적당히 말을 접었다.

약간 의아하긴 했다. 내가 아는 리처드는 겉으로 보기엔 몰라도 사실 그리 까다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이 학교에서 그가 유일하게 척지고 있는 사람은 에르네스트뿐이었다.

때문에 에르네스트만 아니라면 누구라도 괜찮으리라 생각했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일단은 힘을 낼 수 있도록 해 줘야 할 것 같다.

“가끔 그런 경우도 있지요. 정말 어떤 일이 있어도 같이 연주 못 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연주자들과 모이는 경우요. 각자 떼 놓고 보면 문제가 없지만 주파수가 잘 안 맞는 사람들은 분명 있나 봐요.”

“주파수……. 그런 게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글쎄.”

작게 중얼거리던 리처드는 이윽고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다른 연주자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진 않은 듯했다.

그가 살짝 화제를 돌렸다.

“그것보다, 연주회 하니까 생각나네. 너희들 자선 연주회 끝나고 기부금 직접 전달해 주러 갔었다며?”

“예. 야로슬라블에 있는 성 니콜라 루그넨스키 수도원의 복지시설에 다녀왔어요.”

“야로슬라블?”

나는 지난 주말에 있었던 일들을 짧게 이야기했다.

리처드는 가만히 들어 주었다. 사실 그리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닌데, 리처드는 어떤 이야기든 진지하게 잘 들어 주곤 했다.

이야기를 마치자 그가 말했다.

“애들이 좋아했겠네.”

“연주자의 길을 걷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 타티아나 넌 그런 거 잘하지.”

“그런 거라니요?”

“애들 가르치거나 돌봐 주는 것 말야.”

리처드가 사뭇 다정하게 말했고, 난 약간 당황했다.

“평범하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나요?”

“평범? 전혀 아닌데. 봉사활동은 물론이고 평소에도 스터디 그룹에 1, 2학년 애들을 끼워서 봐주는 게 어떻게 평범한 일이야? 우리 학교에서 그런 사람은 타티아나 너 하나뿐이야.”

그 말처럼 이 스터디 그룹엔 한참 어린 아이들도 있었지만, 난 그것을 무언가 특별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선배로서 당연한 내리사랑일 뿐이다. 난 그 애들이 앞으로도 잘 자라서 그 재능을 펼치길…….

“내가 이렇게 말하면 또 딱딱하게 그 애들이 커서 연주자가 되길 바랄 뿐이라고 할 거지?”

“……!?”

뜨끔해서 리처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드물게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난 어쩐지 당했다는 기분이 들어서 약간 반항적으로 반격했다.

“그, 그게 잘못됐나요?”

“아니 존경스러워.”

“……!?”

“대부분은 자기 앞가림도 하기 힘든데 말야.”

내가 무어라 대꾸도 못하고 멍하니 걷는 사이 리처드가 마지막 말을 맺었다.

“넌 대단해, 타티아나.”

“으…….”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친구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특히 리처드 같은 사람이 이렇게 진지하게 칭찬하는 듯한 말을 할 땐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장난을 걸고 놀리기나 하는 쪽이 나로썬 훨씬 마음이 편했다. 아니면, 이게 약간 고도로 변형된 형태의 괴롭힘인 건가?

부끄러운 마음에 리처드의 의도를 곡해하며 현실도피를 하려는데, 아나스타샤가 내 어깨를 휙 감싸며 말했다.

“그렇지, 그렇지. 너도 보는 눈이 아주 없진 않구나? 리처드. 이 애가 정말 대단하다는 걸 알아보다니.”

“응, 너도 반만 닮아 줬음 좋겠다.”

“얘 말하는 것 좀 봐?”

비아냥거리는 리처드의 말에 아나스타샤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안 되겠네. 알겠어. 당장 존대부터 닮으려고 해야…….”

“취소할게. 미안해, 아나스타샤. 넌 있는 그대로가 제일 나아.”

“이랬다저랬다 하긴.”

세상에 아나스타샤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있긴 한 걸까……? 난 투덜거리며 앞장서는 리처드의 뒷모습을 보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리처드는 알고 있을까? 사실 그가 내게 했던 모든 말들이 그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라는 걸.

평범한 사람이라면 말도 제대로 못하는 유학생에게 말을 가르치면서 이렇게까지 도와주진 않았을 것이다. 리처드도 정말 친절하고 존경할 만한 사람인 것이다.

***

연습실 문을 열고, 우리 네 명은 안으로 들어섰다. 두 대의 피아노가 우리를 마주했다. 듀엣 연습도 하고, 합주 연습도 하고, 가끔은 레슨실로도 사용되는 다목적 연습실이다.

우리는 가방을 한곳에 모아 놓고 섰다.

리처드가 말했다.

“자, 그럼 해 볼까. 누가 먼저 할래?”

한 명씩 연습중인 곡을 연주하고 순서대로 돌 테니 누가 먼저 하든 상관없겠지만 우리는 잠시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대결 같은 것이 아니고 순수하게 함께 피아노를 연습하고 연구하려는 목적이지만 그래도 누가 먼저 할지에 대해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눈치싸움이 길어지기 전에 내가 먼저 하겠다고 말하려는 찰나, 리처드가 손짓했다.

“한승우, 네가 먼저 해 봐.”

“나?”

“어. 너 기말곡으로 쇼팽 소나타 하고 있잖아 요즘.”

쇼팽 소나타라는 말을 듣자마자 편안하게 가라앉아 있던 신경이 곤두서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하나도 내색하지 않고 얌전히 서 있었다.

한승우는 리처드의 말에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음……. 아니야, 나 그 곡 안 하고 바꾸려고 해.”

“바꾼다니?”

리처드가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 나도 조금 황당했다.

한승우는 태연하게 답했다.

“그냥.”

“그렇게 그냥 막 과제곡을 바꿔 달라고 할 수 있진 않을 텐데……. 예브게니아 선생님이 허락해 주시겠어?”

“허락해 주실 거야.”

이미 정한 뒤 연습 중인 곡을 도중에 못 하겠다고 그만두고 다른 곡으로 바꿔 달라고 하는 것은 어지간해선 잘 들어주지 않는 일이었다.

과제곡이란 지도 선생님이 골라서 내어 줄 때, 학생이 부담감에 체하지 않도록 충분히 고려하고 상담도 해서 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 못 하겠다고 한다면 바꿔 주겠지만 아마 굉장히 혼이 날 것이다.

난 물끄러미 한승우를 봤다.

영어는 꽤 잘하지만 러시아어는 하나도 못하는 채로 혼자서 덜컥 러시아에 올 정도로 강단 있는 녀석이 이렇게 쉽게 과제곡을 바꾼다는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매달려 볼 줄 알았는데. 그리고 실력으로 보자면 쇼팽 소나타를 아예 못 칠 실력도 아닌데. 왜 바꾸겠다고 하는 걸까. 이해가 안 간다.

그렇게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자, 한승우가 슥 고개를 돌려 날 내려다보았다. 선해 보이는 인상에 어렴풋한 열기가 서려 있다.

그가 말했다.

“타티아나, 네가 연주해 볼 수 있어?”

“……?”

“쇼팽 소나타 1번.”

바싹 곤두서 있던 신경에 머리가 뻐근하게 아파 왔다.

쇼팽 소나타 1번. 난 그 곡에서 하나의 편린을 찾아낸 적 있었다.

물론 그건 작년의 일이다. 구세프 선생님과 약속을 하고 성악을 배우면서 난 그것들을 연주하지 않았고, 이젠 하나도 건반 위로 떠올리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그렇게 편린을 붙잡았나 싶었는데,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가버린 곡들을, 지금 나는 전혀 연주하지 않고 있었다.

쇼팽의 소나타 1번이나 스케르초, 그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청소년 콩쿠르에서 만났던 임세연이라는 아이가 쳤었던 마주르카. 한때 내가 정말 사랑했던 곡들.

다시 처음부터 쳐 볼까 싶지만, 겁이 난다.

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한다는 것이.

“…….”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난 분명 최선을 다하고 있다. 구세프 선생님은 요즈음 날 보며 칭찬일색이시고 내가 만들어 나가고 있는 것들은 이제 볼품없이 작거나 초라하지 않다. 내 실력과 경력은 차곡차곡 높이를 더해 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현재의 피아노와 음악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내 기억은 점점 흐릿해져 갔다.

알지만, 지금 당장은 그저 순응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저 훗날 구세프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한 곡 정도는 되찾을 수 있을 것이란 작은 믿음만을 접어 두지 않고 있을 뿐이다.

그 정도면 되지 않나?

“…….”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고 있는 내게, 한승우의 부탁은 치명적이었다.

왜 갑자기 쇼팽의 소나타를 쳐 보라는 거야? 날 자극해서 미치게 만들고 싶다는 거야? 스스로 잘하고 있다는 자기합리화나 타협은 용서하지 못하겠단 거야?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난 나도 모르게 공격적인 태도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는 깜짝 놀랐다. 한승우에게 이럴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가 뭘 알겠는가?

그간 시간이 흐르면서 난 많은 타협을 했고 많은 결정을 내렸다. 적어도 발전이 있는 사람이라면 작년처럼 아무렇게나 신경질적으로 굴 순 없었다. 난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아니.”

“왜?”

“난 그 곡 당분간 안 치려고 해.”

거기에 대해선 더 이상 이야기하기 싫다는 의미를 목소리에 담아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구나.”

역시? 역시 그렇다고?

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해?

침착하게 가라앉혔던 감정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난 그 와중에도 최선을 다해 말을 골랐다.

“작년의…… 일 기억하는 거야? 그런 거면 신경 쓰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 그건…….”

뭐라고 해야 하는 걸까.

모르겠다.

“아무것도 아니야.”

입을 다물어버리자 한승우도 내 기분을 느꼈는지 더 이상 묻거나 하지 않았다. 이젠 앞으로 한승우가 쇼팽 소나타로 내 신경을 건드리진 않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의 입장에선 이상한 히스테리로 느낄지도 모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대충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옆을 보니 리처드가 묘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

하지만 입을 열어 무언가 묻진 않는다. 지금 끼어들 때가 아니라는 걸 눈치챈 것 같다.

어지간해선 그에게 이야기해 주고 싶지만, 한승우 앞에서 쇼팽의 소나타 1번의 한 악절을 쳤을 때, 그것이 다른 사람의 것이라는 걸 그가 알아봐 주어서 울어버렸다는 꼴사나운 이야기를 리처드에게 할 순 없었다. 그때 난 정말 스스로의 감정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생각해 보니 그러고 나서 바로 보충수업 건으로 교무실에 가서 리처드를 만났던가? 그러고 보면 리처드와의 첫 만남은 내가 울고 난 뒤였던 것이다. 갑자기 스스로가 창피해졌다.

“그, 그래서 뭘로 바꿀 건데? 시간은 2주밖에 없는 거 기억해?”

어두운 기분을 모조리 저편으로 밀어 놓고 일부러 활기차게 말하자 한승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생각해 둔 곡이 있는 듯했다.

“쇼팽 발라드 1번.”

“……그게 더 어려울 텐데.”

“연습은 해 봤어. 그 곡을 만들어서, 콩쿠르에도 쓰고 싶어.”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쁘지 않았다.

쇼팽의 소나타 1번을 연주하지 않는 연주자는 있어도 발라드를 연주하지 않는 피아노 연주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완성도만 갖춰 놓는다면 정말 어디에서나 꺼내기 좋은 곡이었다. 익혀 둘 이유가 충분했다.

난 한승우에게 물었다.

“지금 칠 수 있겠어?”

“할 수 있어.”

곧장 대답하며 한승우가 피아노 앞에 가서 앉았다. 이미 악보가 필요 없을 정도까지 익혀 놓은 것 같았다.

한승우는 의자의 높이를 낮춰서 자신에게 맞도록 조절하고 있었고, 남은 세 명은 의자에 앉아서 기다렸다. 문득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아, 나도 쇼팽 발라드 1번 하려고 했는데 이거 대결이 되겠네.”

“그렇게 생각하실 것 없어요, 아나스타샤.”

다른 곡을 연주하는 것보단 같은 곡을 연주하는 것이 직접적으로 비교가 되긴 하지만, 꼭 경쟁적으로 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날카로운 눈으로 한승우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쟤한테까지 지고 싶진 않은걸.”

그 모습이 진지하고도, 일견 엄격한 구석이 있어서 난 무어라 말을 더 붙이지 못하고 아나스타샤를 바라만 봤다.

잠시 후, 어깨를 펴고 피아노를 내려다보던 한승우가 양손을 들어 부드럽게, 그러면서도 묵직하게 건반을 눌렀다.

수어 개의 음으로 화려하게 시작을 알리는 화음은 없었다. 단 2개의 음으로 낮게 울리는 소리는 얼핏 초라하게까지 들린다. 하지만 그것을 초라하지 않고 낭만적으로 애절하게 울리게 하는 음악성을, 한승우는 가지고 있었다.

건반 2개를 눌렀을 뿐인데 모두가 알아버렸다. 그리고 기대하게 됐다.

길게 늘어지는 화음이 멎기 직전, 천천히 상승하는 양손 아르페지오를 타고 이야기가 시작된다.

“…….”

한승우가 선보이는 쇼팽 발라드 1번의 첫 주제는 기가 막힐 정도로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기술적인 승부수 없이 오로지 리듬과 음색 같은 음악성으로만 승부해야 하는 그 특성상, 한승우의 연주는 정말 대단한 음악적 완성도를 지니고 있었다.

정말 천재는 천재구나. 난 순수하게 감탄했다.

볼 때마다 달라지더니, 이젠 정말 대단했다. 건반 하나를 누르는 터치만 봐도 굉장히 좋아졌고 작년과 비교하자면 이젠 정말 성숙한 음악을 보이고 있었다.

새삼 이 학교에서 적응하고 피아노를 배울 수 있도록 돕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이렇게 잘해 준다면, 난 정말 그 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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