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4화
한 사람이 피아노 앞에 앉아서 연습한 기말 과제곡을 연주하고, 나머지 세 사람이 저마다 한 마디씩 감상을 던지는 순서가 한 바퀴 돌아갔다. 그리 엄격한 시간은 아니었다. 짧은 의견이 오갈 뿐이었다.
하지만 길게 의견을 나누고 싶은 사람도 있는 법이다.
“…….”
한 음악을 두고 마주한 것은 아나스타샤와 한승우였다.
같은 곡인 쇼팽의 발라드 1번을 가지고 두 사람은 다른 연주를 보였고, 서로에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난 아나스타샤와는 저번에 연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들었던 아나스타샤의 해석은 분명 그녀만의 음악성을 품고 있었고, 굉장히 완성도가 올라간 지금은 더더욱 그녀만의 색을 또렷하게 선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한승우는 예브게니아 선생님을 사사하며 또 저만의 천재적인 음악성을 발휘하고 있었다.
사실 두 사람의 해석 그 무엇도 잘못되었다고 할 순 없었다. 둘 다 옳았고, 가치 있는 음악이었다. 승패를 낼 수도 없는 문제를 가지고 대립하는 것은 손해다.
하지만 결국 음악가라는 인종들은 이렇게 각자의 정체성을 부딪치는 일을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나도 그 마음은 절실히 이해하고 있다.
솔직히 말해, 서로의 음악을 놓고 설전을 벌이는 것만큼 세상에 재미있는 설전이 있을까 싶다. 그리고 그건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배울 것도 많았고.
아나스타샤가 다리를 꼬고 삐딱하게 앉아선 말했다.
“승우 한. 코다가 너무 빠르잖아. 제대로 음이 다 들리지도 않네. 그리고 페달은 왜 그렇게 써?”
한승우의 발라드 마지막 장, 코다의 연주는 조금 빠르긴 했다. 조금 힘을 빼고 연주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나스타샤는 그 부분을 정확하게 찔러 들어갔다.
그리고 한승우는 여전히 아나스타샤를 상대할 땐 조금 위축된 태도를 보이는 주제에, 이번만큼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반격했다.
“코다는 빨라야 해. 가볍고 날쌔게.”
“너무 가볍기만 하잖아. 대체 뭘 들으라는 건데? 조금 더 발라드처럼 쳐야 하지 않나 싶은데 말야.”
“아나스타샤는…… 내가 생각하기엔 너무 느끼해.”
“뭐?”
아나스타샤가 어이가 없다는 듯 턱을 비틀었다. 그녀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너 귀가 이상한 거 아냐?”
“귀가…… 무슨 뜻이지?”
“지금 일부러 못 알아듣는 척 하는 거지?”
화가 난 아나스타샤가 험악하게 말하려는 순간, 내가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잠시만요.”
설전을 벌이는 것은 좋지만 서로 감정이 상할 정도로 너무 멀리 나가는 것은 좋지 않다.
커다란 한승우나 성이 난 아나스타샤를 내가 말릴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은 중재를 해야 할 타이밍이었다.
난 두 사람을 번갈아 올려다보며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지금은 서로의 해석을 두고 무언가 승부를 내려는 자리가 아니라 각자 더 발전시키는 자리잖아요? 그렇죠?”
“아니, 지도 선생이 다르고 배워 온 피아노가 다르니까 해석이야 당연히 다르겠지. 그래도 느끼하다는 건 인정하지 못하겠는데? 대체 어디가? 타티아나 너도 그렇게 생각해?”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겠죠. 상대적으로.”
“상대적인 걸 누가 몰라?”
“……그, 미안해요.”
“…….”
잔뜩 당황한 내가 주춤거리며 사과하자 아나스타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잠시간 혼란스러운 눈빛이 흔들린다. 이윽고 그녀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게 사과했다.
“내가 조금 흥분했어. 미안해, 타티아나.”
“아나스타샤…….”
후회가 가득한 목소리로 사과하는 그녀를 보면서 문득, 지고 싶지 않다고 중얼거리던 모습이 생각났다. 무엇이 아나스타샤를 압박하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그녀가 지금 약간 공격적이 된 데에는 이유가 있는 듯했다.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 정말 나 왜 이렇게 꼴불견이지…….”
“그렇지 않아요, 아나스타샤. 저도 음악적 해석에 관해서 이야기하다 보면 설전을 벌이는 일도 많고…….”
“너처럼 순수한 설전이라면 멱살을 잡고 싸워도 상관없겠지.”
“무슨 말씀이세요……?”
“아니야.”
아나스타샤는 힘없이 의자에 도로 앉더니 잠시간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후회와 고민은 짧았고,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승우 한. 소리 질러서 미안해.”
“괜찮아. 나도 미안해. 나는 러시아 말이 서투르다.”
“그래서 그런 식으로 표현했다는 거야? 아니, 아무리 봐도 너 다 알고 그러는 것 같은데…….”
“난 잘 몰라.”
“진짜 수상하거든?”
미심쩍다는 듯 투덜거리는 아나스타샤를 보며 다른 세 명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불만을 표하는 그녀는 꽤나 귀여웠다.
리처드가 피식 웃더니 내게 말했다.
“저 애들은 됐고. 타티아나 네 해석은 어떤데?”
“저요?”
“그래.”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이어 말했다.
“네 해석은 대개 깔끔한 편이잖아. 저 애들한테도 꽤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말을 듣고도 무시할 순 없었다.
쇼팽의 소나타는 어쩔 수 없었지만……. 이번엔 괜찮을 것 같다.
옆을 보니 아나스타샤와 한승우가 조금 기대하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연주해 달라는 것 같다.
난 고개를 끄덕이곤 피아노 앞에 앉았다.
“저는 쇼팽 발라드 1번의 코다를 이렇게 해석해요.”
지금 막 분분하게 해석이 갈리는 부분만을 딱 짚어 펼쳐 냈다.
오른손으로 커다란 화음을 차례로 내리꽂으면서 이전까지의 모든 이야기들을 마무리했다. 연주하지도 않았던 주제가 마치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정리하고.
악장 지시는 정열적으로 가장 빠르게presto con fuoco. 이 코다는 한승우가 속도에 신경 쓰는 것처럼 정말 빠른 속도를 요구한다. 속도를 지키는 것과 동시에, 두 번 연속되는 오른손의 연타도 세심하게 조절하면서 이미지를 그렸다.
“…….”
정확하게 연주해야 하는 아르페지오가 이어진다. 손이 크다면 도약할 필요 없이 그냥 뚜벅뚜벅 걸어 올라가듯 연주할 수도 있지만, 난 그렇게 할 수 없었으므로 빠르게 도약했다.
그저 손이 가는 대로 치면 되는 것이 아닌, 그 와중에도 악센트를 신경 써야 해서 상당히 골치 아픈 대목이기도 했다.
다시 반복하는 주제를 보다 높을 곳으로 끌어올리고, 완전한 클라이맥스로 쏟아부었다. 양손이 교차하며 내리흘렀다가, 반음계 스케일로 바람처럼 올라가고, 조금 어둡게, 마지막 발걸음을 돌리는 듯한 음색으로 첫 주제를 회상하고는 쇼팽 특유의 화려한 마무리로 끝맺었다.
“…….”
1분 30초 정도의 짧지만 화려한 쇼팽 발라드 1번의 마지막 코다를 마무리하고, 난 뒤편을 돌아보았다.
아나스타샤는 내 발라드를 들어 본 적이 있어서 고개를 주억이면서 다시 확인하는 듯한 모습이었고, 한승우와 리처드는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리처드가 짝짝 박수를 두어 번 쳤다.
“잘 치네, 역시.”
상상 이상이라는 듯 감탄이 이어졌다.
“대체 언제 완성한 곡이야? 기회가 없었을 것 같은데.”
“예전에요…….”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어서 얼버무리고는 얼른 음악 이야기를 꺼냈다.
“아무튼, 도약은 되도록 가볍게 하고 복잡한 악센트도 세게 하지 않고 있어요. 테크닉적인 이야기보다 굳이 이미지를 말하자면……. 사슴 같은 이미지예요.”
“사슴?”
이상한 소리라는 듯한 반문이 돌아왔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예. 수사슴. 맑고 경쾌하고 에너지가 넘치지만 과하지 않죠. 그와 동시에 약간의 애상도 떠올릴 수 있고요.”
“사슴은 사슴일 뿐인데 애상이라……. 글쎄.”
“사자나 표범처럼 강한 포식자는 아니잖아요?”
“대충 느낌은 알겠는데.”
리처드는 약간 고민하는 듯 팔짱을 끼고 있다가, 툭 말했다.
“여태 이 곡을 연구해 보아도 그런 해석을 들어 보는 건 처음이야.”
“아, 저는 그냥 해 본 거예요. 주류 해석에 대해선 크리스티안 짐머만의 음반을 들어보시는 것을 추천드릴게요.”
“아니, 네 해석이 비주류라는 뜻이 아니야. 굉장히 주류에 가깝지.”
그는 오해하지 말라는 듯 손사래를 치고는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귓가를 톡톡 쳤다.
“그런데 특이하게 귀에 감기는 느낌이 있단 말야. 신기하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진 모르겠네.”
굉장한 찬사를 들은 것 같은데 나야말로 뭐라고 답해 줘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고맙다고 하면 될까.
그때, 잠자코 있던 한승우가 말했다.
“타티아나에겐 페이소스가 있어.”
한승우는 내 연주에서 느낀 것을 보다 확실하게, 다시 말했다.
“우리에겐 없는.”
“……같은 나이인데 말이지.”
페이소스란 슬픔과 고통을 뜻하는 그리스어 파토스를 영어로 발음한 단어다. 감상자들은 호소력 짙은 연주에서 느껴지는 슬픈 감정을 그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나름 극찬에 가까운 평이다. 좋아해야 할 일이겠지만, 이렇게까지 칭찬을 받는 것은 조금 부끄럽다.
리처드는 잠시 날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면 이 녀석은 우울해하는 걸 한 번도 못 본 것 같단 말야. 승우야, 너 집에 가고 싶지는 않냐?”
“집?”
그러고 보면 워낙 씩씩하게 잘 지내서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한승우 역시 덩치만 컸지 이제 겨우 열다섯 살이었다. 한국에 있는 집을 그리워할 만도 한 것이다.
그간 조금 더 잘해 줬어야 하는 게 아닐까 조금 후회가 들려는 찰나, 한승우는 아주 잠시 멈칫하더니 대꾸했다.
“글쎄.”
“한국인들은 애향심이 강하다고 들었는데 그렇지도 않은가 보네.”
“애향심?”
“그래. 아, 영어로는 노스탤지어라고 하면 알겠지?”
“노스탤지어.”
러시아어로 애향심은 알아듣지 못하지만 영어는 알아들었는지 한승우는 다시 그 단어를 반복하고는, 우리를 차례로 바라보았다. 리처드와 나, 아나스타샤. 이 연습실에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치열하게 서로의 음악을 교류했던 연주자들.
한승우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에 띠었다.
“그래도 난 지금이 좋아.”
그 미소를 보니 마음이 놓인다.
집을 떠나 있는 게 마음이 편친 않겠지만, 그래도 연주자로서 그는 지금 생활에 만족하고 있는 것이다.
리처드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그래 보인다.”
“너는? 리처드?”
“나?”
리처드 역시 어른스러워 보여서 잊기 쉽지만 영국에서 유학을 온 열다섯 살에 불과했다.
그도 영국의 집을 그리워할까?
약간 궁금해하는 눈빛을 하니 그가 피식 웃었다.
“나도 좋으니까 여기 붙어 있겠지.”
“영국은 별로야?”
“너 우리 집 사진 못 봤어?”
리처드는 영국의 평범한 집 출신이 아니라 공작가 출신이었다. 어떤 집에 살고 있는진 나도 못 봤는데 조금 보고 싶기도 하다.
나도 사진을 보여 달라고 할까 하고 힐긋거리고 있는데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말만 하지 말고 한 번 데려 가지 그래?”
영국에 데리고 가라는 말에 리처드가 조금 인상을 썼다.
“와 봤자 별것 없어. 차라리 한국에 가는 게 훨씬 재미있겠다. 거기 그렇게 놀 게 많다던데.”
“난 위험하다는 말만 들었었는데. 아직 전쟁이 끝난 게 아니라 휴전 중이라며? 큰일 나는 거 아니야?”
“전쟁이 나더라도 설마 외국인인데 무슨 일 있겠어?”
“미사일에 눈 달렸겠니?”
“요즘은 눈 달렸다던데.”
동아시아에 있는 작은 나라에 대해선 잘 모르는 아이들이 저마다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이 애들이 아는 한국은 언제든 미사일이 날아들 수 있는 위험한 나라인 것이다.
문득 한승우를 보니 입이 간지러운 듯했다. 그러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
그가 오해하지 말라는 듯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 역시 미소로 받았다.
따로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누군가 나서서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면, 그건 한국인인 한승우에게 주어진 역할이었다.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문 체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가만히.
***
연습을 끝마친 우리는 약간 풀어진 분위기에서 담소를 나누었다. 이대로 조금 더 연습을 해도 좋고, 각자 집에 돌아가도 좋으리라. 그때 리처드가 제안했다.
“우리 다 같이 저녁 식사나 하러 갈래?”
때마침 반가운 제안이었다.
아나스타샤는 힐긋 날 바라보더니 그 제안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지 약간 고민하고는 물었다.
“저녁? 음……. 어디 맛있는 곳 아는 데 있어?
“맛있는 곳?”
리처드가 되물었다. 아나스타샤가 쌍심지를 켰다.
“뭐야, 어디로 갈지 생각도 안 하고 대뜸 그런 소릴 한 거야?”
“너야말로 대뜸 그런 말 좀 하지 마. 내가 무슨 데이트 코스 짜야 해?”
“남자가 리드할 줄도 알아야지.”
“햄버거 먹으러 가자.”
“최악이야 정말.”
아나스타샤가 쏘아붙였고 리처드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농담이고. 이참에 한식 레스토랑 가 볼래?”
신경 쓰지 않겠다고 생각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난 깜짝 놀라서 어깨를 바르르 떨기까지 했다.
평정심이 흐트러진다. 난 뻣뻣하게 리처드를 돌아보았다. 그는 악의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왜 한식 레스토랑을 추천하는지 이야기했다.
“아까 이야기하다가 생각난 건데, 저번에 가 봤더니 맛이 괜찮더라고. 여기엔 그쪽 현지에서 온 가이드도 있으니 요리 고르는 데에 실패할 일도 없고.”
“아하하, 가이드라니 심한 거 아냐?”
한승우는 한국에서 왔으니 한식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고르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도 친구를 가이드라고 부르는 건 조금 심했다는 듯 아나스타샤가 말하자 한승우가 불쑥 말했다.
“난 가이드야.”
“네가 그러면 어떻게 해, 승우 한!”
아나스타샤가 깔깔거리며 한승우의 어깨를 때렸다. 다른 남자애였다면 휘청거렸을 텐데 한승우는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늘 먹던 것만 먹다가 한식 레스토랑이라는 제안이 나쁘지 않게 들렸는지 아나스타샤는 벌써 흥미가 생긴 듯했다. 그녀는 세계 여행도 자주 다니면서 이것저것 다양한 것들을 접하는 것을 좋아했다.
아나스타샤는 이미 넘어간 것 같고, 리처드는 이어서 내게 물었다.
“어때?”
“저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가면 될 일이었다. 딱히 내색할 것도 없고 메뉴판을 보고 무언가 고를 필요도 없다. 가만히 앉아서 한승우가 골라 주는 것을 먹고 나오면 된다. 식당에 가서 음식 먹는 데에까지 까탈스럽게 굴 이유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내 입은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 오늘은 프렌치가 어떨까요? 저번에 추천받은 곳이 있는데…….”
“프렌치? 갑자기 궁한 소리 해서 미안하지만 타티아나, 우린 돈이 별로 없는데.”
“괜찮아요! 친구들과 오면 할인해 준다고 했으니 그건 제가…….”
“아니, 그건 아니지.”
리처드는 그렇게까지 신세질 순 없다는 듯 딱 잘라 말했다.
할 말이 없어졌다. 빠르게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마땅한 핑계랄 게 없었다. 아니, 애초에 왜 핑곗거리를 찾고 있는 거야? 그냥 가면 된다니까?
쓸데없는 고민에 빠져 있는 내게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왜 그래? 타티아나, 한식 먹어 본 적 있니? 입에 안 맞아?”
“아뇨, 먹어 본 적 없어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간 아나스타샤, 발렌티나와 모스크바 곳곳을 돌아다녔지만 그중에서도 한식 레스토랑에 가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나스타샤가 조금 의아한 듯 물었다.
“그럼 괜찮잖아? 넌 이국적인 음식들 좋아하는 것 같은데.”
“제가요?”
“그래, 넌 젓가락도 잘 쓰잖아?”
“…….”
도저히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러시아에서 젓가락을 쓰는 건 상당히 특이한 교양으로, 대부분이 쓸 줄 모른다. 때문에 젓가락을 능숙히 다루는 날 보며 당연히 아시아권 음식을 좋아하리라 생각하는 것도 잘못된 추리는 아니었다.
그녀를 바라보자 날 설득하는 미소가 다가왔다.
“타티아나, 넌 좋아하는 건 별로 없지만 이것저것 해 보려고 하잖아. 이번에도 도전해 봐. 나쁘지 않을지도 몰라.”
아나스타샤는 내게 이것저것 보여 주고 먹여 주고 가르쳐 주는 것을 정말 좋아했다. 그건 작년에 그녀를 처음 봤을 때부터 이어져 왔던 일이고, 지금도 그녀는 당연하게 내게 새로운 것을 보여 주고 싶어 했다. 이국적인 음식들은 아주 좋은 흥밋거리다.
“…….”
거절할 수 없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가 볼게요.”
“정 싫으면 말아도 돼. 정말 입에 안 맞는 거 아니야?”
“모르겠어요.”
이젠 정말 모르겠다.
그저 불현듯, 이것도 피할 수 없이 내가 거쳐 가야 할 시험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