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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235화 (235/1,277)

##  235화

한승우가 추천하는 한식 레스토랑은 걸어서도 금방인 거리라 우리는 조금 걷기로 했다.

봄날의 햇빛을 만끽하며 친구들과 있자니 단지 걷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지금 향하고 있는 곳이 나로선 조금 피하고 싶은 곳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더할 나위 없을 텐데.

“…….”

이미 결정된 일이니 어렵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조금 초연해질 필요도 있었다. 동아시아에 있는 작은 나라의 요리만을 꺼려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난 언젠가 시간이 흐르면 세계를 돌며 연주회 투어도 하고 싶다. 그때 특별히 한 나라만 억지로 멀리하고 싶진 않다. 자연스레 대하고 싶다.

이상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나란히 걷던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지금 가는 곳 가 봤어?”

한승우가 답해 주었다.

“가 봤어. 파인 다이닝fine dining은 아니지만, 이 주위에선 유명해.”

아나스타샤는 흐응 하고 비음을 흘렸다.

“믿어도 돼?”

“조금은 걱정된다.”

한승우는 나나 아나스타샤가 싫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지 드물게 걱정스러운 눈빛을 했다.

그 눈빛을 본 아나스타샤는 더 이상 한승우를 불안하게 할 생각은 없는지 소리 내어 웃었다.

“사실 난 아무래도 상관없어. 타티아나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아까 조금 이상한 모습을 보였던 것을 기억하는지 아나스타샤가 날 바라보았다. 난 씩씩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한승우가 내게 물었다.

“타티아나, 못 먹는 게 있으면 미리 말해 줘.”

“딱히 그런 건 없어.”

이미 마음을 많이 내려놓은지라 별생각 없이 답했다. 대신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너무 매운 건 피해 줘. 이 애, 혀가 약해서 매운 건 잘 못 먹으니까.”

“알았어.”

가끔 보면 나보다 아나스타샤가 날 더 잘 챙기는 것 같다.

***

한식 레스토랑은 겉보기엔 일반적인 레스토랑과 다를 바 없었다. 조금 세월이 느껴지는 낡은 건물에 간판이 걸려 있을 뿐이었다.

정말 비싼 한식당들은 건물 지붕이 기와로 되어 있기도 하고 나무로 마루가 깔려 있기도 하던데, 모스크바 한가운데에 그런 한식당을 차릴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첫 인상은 파인 다이닝이라 하기엔 부족한, 평범한 레스토랑이었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서자 목조 인테리어가 반겼고, 벽에는 예쁜 문양들이 양각되어 있었다. 내부적으로 이국적인 오리엔탈리즘을 나타내고 싶었던 것 같다. 나름 깔끔하고 멋진 분위기였다. 아나스타샤도 이 분위기는 꽤 마음에 들어 하는 듯했다.

종업원도 한국인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그렇진 않았다. 러시아인 종업원이 우리를 자리로 안내했다. 자리에 앉자 무언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보리차부터 나왔다.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이게 뭐야?”

“그러니까…… 발리barley를 넣고 끓인 차야.”

“보리? 그럼 맥주야?”

“아니, 마셔 봐.”

컵에 따라 준 보리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아나스타샤가 신기해했다.

“괜찮네? 여기에 탄산을 넣으면 맥주가 되는 건가?”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나스타샤…….”

아나스타샤는 농담이었다는 듯 싱겁게 웃으며 목을 축였다.

잠시 있자 종업원이 메뉴판을 가지고 왔다. 그녀가 말했다.

“궁금하신 점이 있으시면 물어봐 주세요.”

모두 러시아 사람들에겐 생소한 음식들이니 무엇인지 물어보고 난 뒤에 결정하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에겐 한승우가 있었다.

“내가 설명해 줄게. 이건 정식인데 테이블 도트table d'hote라고 보면 돼. 이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로 준비해놓는 시스템? 그런 거야.”

러시아어로만은 설명할 수 없어서 영어와 프랑스어까지 섞어 가면서 한승우는 열정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까 가이드를 자처했듯 지금이야말로 그 역할에 충실할 때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이건 불고기라고 하는 돼지를 주재료로 하는 고기 볶음 요리. 그리고 이건 씨위드seaweed를 넣은 국이고. 이건 돌솥……. 이건 한국어로밖에 모르겠는데. 뭐라고 해야 하지.”

“적혀 있는 그대로 말하면 되지.”

“그…… 비빔밥이라는 개념도 이 애들은 모를 것 같은데.”

“그냥 먹어 보라고 해.”

리처드는 아무래도 괜찮지 않겠냐는 듯 말했고 아나스타샤가 불쑥 말했다.

“난 김치가 먹어 보고 싶어.”

“아나스타샤, 그렇다면 이걸 주문해. 두부와 김치.”

“두부? 두부는 중국 요리 아닌가?”

“동아시아에선 다 먹어.”

“두부는 괜찮겠네. 먹어 본 적 있어. 매운 거.”

아나스타샤는 아는 것이 나와서 자신이 생겼는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그 반응이 조금 의외였는지 한승우가 물었다.

“마파두부를 먹어 봤나 보네. 취두부는?”

“취두부? 그게 뭐야?”

아나스타샤가 취두부를 먹어 보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걸 먹었다면 지금 두부를 먹겠다며 자신 있게 말하진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한승우가 우리에게 메뉴판을 하나하나 짚었고, 우리는 그 옆에 달린 러시아어 설명과 한승우의 설명을 종합해 들으며 메뉴들을 분석했다.

물론 난 대충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한국어가 메뉴 옆에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내색하지 않고 곁눈질로 그걸 읽으면서 나는 조금 당혹스러웠다.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분명 한식을 찾았는데 파스타와 짜장면이 튀어나올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대체 정체가 뭐지 이 식당?

그뿐만이 아니라 감자튀김과 새우튀김, 그리고 중화요리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양고기 향채 볶음 같은 것까지 나오자 난 결국 웃어버리고 말았다.

말이 한식이지, 이 먼 모스크바에서 상당히 많은 것이 섞이고 로컬라이징 되어서 변해 있었다.

이미 이곳은 러시아의 식당인 것이다.

난 약간의 여유를 되찾고 천천히 메뉴를 살폈다.

이윽고 한승우 덕분에 종업원은 우리에게 이것저것 설명할 필요 없이 쉽게 주문을 받아 갔다.

잠시 후 빠르게 음식들이 나왔다. 메뉴에 나오진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제공하는 밑반찬들이었다.

난 보는 것만으로도 종류들을 대강 알 수 있었다. 단호박 조림과 톳나물 무침, 시금치나물, 감자전, 전유화, 메밀묵 등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이런 건 처음 보는지 신기해했다. 그녀가 스푼 위에 메밀묵을 얹었다.

“푸딩 같네.”

그리곤 용감하게 한 입 먹는다. 한승우는 혹여나 그녀가 싫어하진 않을지 불안하게 지켜봤다.

다행히 아나스타샤는 처음인 것들을 꽤나 즐겁게 맛보았다.

“나쁘지 않은데?”

“그렇지?”

그제야 리처드도 안심했다는 듯 말했다. 아직 메인 요리가 나오진 않았지만 밑반찬부터 마음에 들어 한다면 앞으로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나도 아나스타샤가 좋아하는 것을 보며 기분이 많이 좋아졌다. 그리고 그녀를 따라서 몇 가지 먹어 보았다. 내 젓가락질을 보고 한승우와 리처드가 기겁했다.

“타티아나, 너 어떻게 젓가락을 쓰는 거야?”

“이전에 배웠어요.”

“기가 막히네.”

리처드가 혀를 찼고 한승우는 유심히 내 손을 봤다. 흠잡을 곳이 있는지 찾는 듯한 눈빛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손을 그렇게 너무 물끄러미 보고 있는 건 좀 실례이지 않을까?

어쨌든 이미 아나스타샤도 날 보더니 숟가락을 내려놓고 젓가락질을 어설프게 따라하고 있었고, 이 테이블에서 포크를 든 사람은 리처드뿐이었다. 그는 약간 소외감을 느끼는 듯했지만 곧 한승우에게 가르쳐 달라고 말했다. 난 그 광경을 보고 소리 내어 웃었다.

우리는 그렇게 이것저것 먹어 보면서 짧은 평가를 나누었다. 러시아인의 입맛에 적절하게 맞춰진 맛은 이국적이면서도 꽤 깔끔하고 괜찮았다.

막연히 걱정하던 것들이 그저 기우였음을 깨닫고, 난 한결 긴장을 풀고 웃으며 미역국을 한 입 먹었다.

“…….”

그리고 먹는 순간, 난 옆에 있는 고추를 집어 들고 한 입 물었다. 한승우가 깜짝 놀라 말했다.

“그거 매운데!?”

“…….”

농담이 아니라 한 입 물었을 뿐인데 정말 혀가 불타는 것 같다. 매워서 아무 생각도 안 들고 눈물만 흘렸다. 지옥의 유황을 입에 넣은 기분이다.

아나스타샤가 허둥지둥 하더니 물컵을 건네주었다.

“괜찮아? 이거 마셔. 아니, 그걸 왜 먹어 갑자기!”

“그냥요……. 매워…….”

“내가 못 살아 정말.”

손수건을 꺼내 주면서 아나스타샤가 핀잔을 주었다. 콜록거리면서 물을 마셨지만 매운 맛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예 입 밖으로 혀를 내밀고 싶지만 이 와중에 또 그렇겐 못 하겠다.

한참을 기침을 하다가 진정하자 모두들 어이없다는 듯 한 마디씩 이어갔다. 모르는 걸 아무거나 먹지 말라는 부탁 아닌 부탁들이었다.

즉흥적으로 떠올린 생각대로 되긴 했다. 말도 안 될 정도로 매운 고추 덕분에, 난 미역국을 먹다가 아무 이유 없이 눈물을 흘리는 이상한 애 대신, 매운 고추도 서슴잖고 생으로 집어먹는 겁을 상실한 애가 될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 뭐든 이유를 만들어 내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저지른 일이었는데, 조금 심했던 것 같다.

“…….”

아직도 흐릿한 시야와 맵다 못해 따가운 혀를 느끼며 원망스러운 눈으로 고추가 아닌 미역국을 내려다보았다.

다른 건 괜찮았었는데 왜 미역국에서 문제가 생겼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정신적인 긴장을 풀면 안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꼈다. 언제 어디에서 긴장을 푼 사이 둑이 무너질지 모른다.

친구들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싫었다. 이상한 애로 보일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나로 살면서 지켜야 할 규칙 중 하나이기 때문이었다.

바보처럼 웃으면서 말했다.

“맵네요.”

“너 정말……. 숨넘어가는 줄 알았잖아…….”

“이건 치워 놓을게.”

갑자기 벌어진 일에 즐거웠던 분위기가 이상해져버렸다. 모두 내 탓이었다. 난 책임감을 느끼고 입을 열었다.

“이젠 괜찮아요. 요리가 나오…… 딸꾹.”

입에선 말뿐만이 아니라 딸꾹질도 나왔다. 난 급히 입을 가렸다. 얼굴에 열이 차오른다.

모두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날 보더니, 결국 리처드가 웃어 버렸다. 아나스타샤가 으르렁거렸다.

“리처드, 이게 웃을 일이야?”

“저렇게 놀랄 정도로 매운 것도 있다는 걸 알았으니 앞으로 조심하면 되잖아?”

“조심할…… 딸꾹, 게요.”

창피함에 기절할 것 같았지만 가까스로 대답했다.

리처드는 별일 아니라는 듯 미소를 띠며 다시 반찬들을 향해 서툴게 젓가락질을 했다. 그도 내가 지금 이 좋은 분위기를 망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잠시 진정하자 딸꾹질도 멎었고, 내가 눈물을 보였던 것은 잠깐의 해프닝으로 간주되었다. 다행이다.

“이것도 처음 먹어 보는 거지? 내가 먹어 봤더니 나쁘지 않은데 한 번 먹어 봐.”

“예.”

아나스타샤는 다시 웃음을 되찾았고 자신이 먹어 본 것들 중 내 취향에 걸맞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추천해 주었다. 담백한 반찬들은 내게 잘 맞았다.

그렇게 잠시 기다리자 우리가 주문한 요리들이 나왔다.

정식 메뉴들에 두부 김치와 몇 가지 요리들이 합해진 메뉴였다. 난 내 몫의 정식을 내려다보았다.

“…….”

아까 한 번 방심했다가 문제가 생겨서 그런지 약간 경계가 앞선다. 고추도 저 멀리 치워 버렸으니 이젠 정말 조심해야 했다. 하지만 어쩐지 이건 괜찮을 것이란 직감이 들었다. 난 조심스레 젓가락을 들었다.

향긋한 버섯의 내음이 스며있는 돼지고기를 먹자 나쁘지 않았다. 잡내가 나지도 않고 풍미가 깔끔했다.

“맛있네요, 아나스타샤.”

“그러게.”

러시아 사람들의 입맛에도 맞도록 잘 만들어진 한식들은 상당히 맛이 괜찮았다. 너무 맵지도 않고 딱히 가릴 것도 없었다.

미역국만이 한술 뜬 그대로 남겨졌다. 다시 먹어 볼까 했지만 한 번 데였는데 두 번을 자초하는 건 바보나 할 짓이었다.

그뿐이지, 다른 문제는 전혀 없었다.

우리는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했다. 가끔 잘못된 방법으로 식사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한승우가 조심스레 고쳐 주기도 했다. 보쌈으로 나온 돼지고기를 포크로 먹는 리처드를 보며 한승우가 첨언했다.

“리처드, 보쌈은 이렇게 먹는 거야. 돼지고기만 먹는 게 아니라.”

“그게 뭐야. 뭐 어떻게 하는 거야……? 야, 난 젓가락질 그렇게 못한다고.”

“내가 해 줄까.”

“미친놈아 돌았어?”

버럭 성질을 내는 리처드를 보며 아나스타샤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젓가락질 잘하는 사람이 해 주면 되겠네!”

“아, 싫다고. 넌 타티아나한테 해 달라고 할래?”

“응?”

아나스타샤가 그건 생각도 못했다는 듯 놀라더니 날 돌아보았다.

묘하게 들뜬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해 달라고 하면, 해 줄 거야?”

“…….”

솔직히 남자애 둘이서 보쌈을 만들어 먹여 주는 건 이 애들에겐 죽을 정도로 창피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나스타샤에게 그런 거부감이 들진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보기엔 조금 기대하는 듯한 눈치다. 그렇다면 못 할 것도 없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난 정성스레 젓가락질을 했다. 아나스타샤는 신기한 듯 그 광경을 보고 있다가, 내가 다 만든 보쌈을 젓가락으로 들고 내밀자 깜짝 놀라선 목을 뒤로 뺐다.

뒤로 빼면 어떻게 하나요.

난 한 손으로 젓가락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받친 채 그녀에게 말했다.

“아, 하세요.”

“……아.”

보기 드물게 쭈뼛거리던 아나스타샤가 입을 벌렸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우리끼린 괜찮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래도 부끄러운지 아나스타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덩달아 나도 조금 부끄러워졌다. 별생각 없었는데, 돌이켜보니 지금 보고 있는 눈이 또 있지 않은가?

곁눈질하자 리처드와 한승우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약간 새된 목소리가 나왔다.

“뭐, 뭘 보시나요?”

“아무것도 아냐.”

리처드가 고개를 돌렸다. 난 그때를 틈타 얼른 아나스타샤에게 젓가락을 물려 주었다. 살면서 아나스타샤에게 이렇게 직접적으로 무언가 먹여 주리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별일이다.

아나스타샤는 귀 끝까지 발갛게 된 채 열심히 우물거렸다. 난 애먼 시금치나 깨작거렸다.

그나저나 아나스타샤에게도 제대로 젓가락질을 가르쳐 줘야…….

“승우 한.”

그때 아나스타샤가 갑자기 한승우의 이름을 불렀다.

전혀 생각도 못한 부름이라 한승우는 물론이고 나도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저 애는 왜요?

아나스타샤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잠시 있더니 중얼거리며 말했다.

“이제 네 차례야. 어서 만들어서 리처드에게 먹여.”

“내 차례?”

리처드가 숫제 비명을 질렀다.

“야! 싫어!”

“싫은 게 어디 있어, 무조건 해!”

“싫다니까!”

“난 했잖아!”

“너네랑 우리가 같냐? 말이 되는 소리를 좀 해라.”

“…….”

아나스타샤가 웅얼거리더니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해서든 혼자 창피한 상황을 피하고 싶어 하는 듯했지만 리처드는 자꾸 강요하면 혀를 깨물고 자결해버리겠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건 너무 잔인한 처사인 것 같다.

“저기, 그럼 리처드도 제가…….”

“그걸 왜 네가 해 줘, 타티아나!”

아나스타샤가 빽 소리를 질렀다. 깜짝 놀라서 옆을 보니 아나스타샤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이윽고 리처드는 귀찮아 죽겠다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잠깐만, 다 싫어. 난 그냥 내가 먹을게.”

그리고 리처드는 포크로 김치와 돼지고기를 요령껏 찍어서 입에 넣었다. 가만 생각해 보면 젓가락을 못 쓰는 러시아 사람들도 많이 오는 식당에서 젓가락 없인 못 먹을 음식을 내놓을 이유가 없다.

그 광경을 보며 난 물론이고 아나스타샤도 황망한 표정을 했다. 우린 뭐 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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