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6화
식사를 마치자 정식 메뉴에 포함되어 있는 디저트들이 나왔다.
딸기로 된 디저트와 양갱이었다. 이 모스크바에서 양갱을 먹을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아나스타샤는 양갱을 한 입 먹더니 식감이 이상한 성게알 같다는 기묘한 평을 했고, 양갱이 무엇으로 만드는지 모르는 나는 그저 고개를 주억거리기만 했다.
그러자 한승우가 나서서 팥으로 만든다고 가르쳐 주었다. 팥? 팥죽을 굳히면 양갱이 되는 건가?
그렇게 디저트를 먹으면서 우리가 아는 디저트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아나스타샤 가방에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아나스타샤는 가방에서 대충 꺼내서 바로 끊으려는 듯하더니 선생님의 전화라면서 우리에게 양해를 구하곤 잠시 밖으로 나갔다.
그걸 보더니 리처드도 잠시 나갔다 오겠다며 나갔다. 무슨 순서대로 나가는 게임이라도 하는 건가 싶다.
리처드와 아나스타샤가 나가고, 테이블 앞에는 나와 한승우만이 남아 있었다.
“…….”
우린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보면 이렇게 단둘이 한 자리에 있어 본 것도 오랜만인 것 같았다. 그땐 이 애가 말을 아예 할 줄 몰라서 태블릿 컴퓨터로 구글 선생님을 통해 필담을 했었는데.
무슨 이야기들을 했었더라.
잠시 옛날 일들을 떠올리고 있는데, 테이블 건너편에서 한승우가 날 불렀다.
“타티아나.”
“으, 응?”
고개를 드니 한승우가 천천히 물어 왔다.
“식사는 어땠어?”
“아……. 맛있었어. 생각보다 훨씬.”
“다행이라고 생각해. 난 네가 혹시 싫어할 것이라고,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어.”
그렇게 우려할 만도 했다. 난 이곳에 오기 전부터 꺼려 하는 느낌을 잠깐 보였고, 매운 고추를 먹기까지 했으니까. 기분이 상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맛있게 잘 먹었다고 웃으며 답하자 그도 한결 풀어진 미소를 보냈다.
“맛있어해 줘서 고마워.”
“나야말로. 너희 나라 음식을 소개해 줘서 고마워.”
“말을 꺼낸 건 리처드지만.”
“그러게 말야.”
한승우는 대놓고 우리에게 자신의 나라와 문화를 알리려는 적극성이 별로 없는 애였으니, 정말 리처드가 아니었다면 이곳에 올 일은 없었을 것이다.
물론 리처드의 공로만은 아니었다. 셋 중 한 사람이라도 없었다면 난 아마 오지 않겠다고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세 친구가 함께 했기에 난 분명히 언젠가 겪었어야 할 시험에 임할 수 있었고, 나름 잘 끝마쳤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적절하게 날 이끌어 준 친구들에겐 감사할 따름이었다.
가볍게 한승우와 이러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등 뒤편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돌아보니 한 중년 여성이 쟁반을 들고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러시아인이 아닌 한국인이었다. 셰프처럼 보이는 두건과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당당한 태도와 훈훈한 눈빛이 공존하는 인상을 지닌 분이었다.
쟁반이 테이블 위에 내려앉으며 정중한 인사가 함께했다.
“본 레스토랑의 오너 셰프 신지예입니다. 식사는 어떠셨는지요?”
“훌륭했어요.”
“칭찬 감사합니다. 서비스로 드리는 유자 소르베를 준비해 왔습니다.”
“아, 고맙습니다.”
당연히 러시아어로 된 인사였고 나 역시 그렇게 답했다.
신 셰프는 우리 앞에 귀여운 유자 소르베가 든 접시를 내려놓고, 자리에 없는 두 사람의 몫도 내려놓았다.
그대로 돌아가나 했는데, 그녀는 자리에 서서는 한승우를 보며 말했다.
이번엔 한국어였다.
「잠시 괜찮을까요?」
「예? 예.」
한승우는 막 스푼을 들었다가 버벅대며 답했다.
너무 신경 쓰진 말라는 듯 신 셰프가 웃으며 물었다.
「저번에 오셨을 땐 관광객이신 줄 알았는데, 교복을 입고 계시군요? 유학생이신가요?」
「그렇죠. 모스크바 음악원 부속 중앙음악학교에 다니고 있어요.」
「굉장한 엘리트셨네요?」
「제 친구들은 그럴지 몰라도 전 아닐 거예요.」
「그럴 리가요.」
나야말로 그럴 리가 있냐고 그에게 말하고 싶었다.
중앙음악학교의 선생님에게 콘탁으로 스카우트되어 입학하고, 천부적인 음감으로 6성부 청음을 해내는 데다가, 피지컬과 테크닉도 좋아서 앞으로의 가능성이 무궁무진 그 자체인데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어이없다는 듯 한승우에게 무어라 하거나 눈총을 날릴 순 없었다. 난 지금 오가는 대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무표정을 가장하며 잠자코 있자니 신 셰프가 물었다.
「일행분들은 한국말은 아예 못 하시나요?」
「예. 몰라요.」
「고생이 많겠군요?」
여러 뜻이 담긴 질문이었다. 하지만 한승우는 피식 웃으며 간단히 답했다.
「저보단 제 친구들이 고생이죠.」
「메뉴 설명하고 주문하시는 것도 도맡아하셨다고 들었는데요?」
「그게 무슨 고생인가요. 당연히 해야 하는 거죠.」
정말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 그가 주저 않고 덧붙였다.
「제가 그간 받은 게 오천 배는 많아요.」
평소처럼 러시아어로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언어가 바뀌자 성조도 바뀌어서 그런지 목소리가 아주 달라져 있었다.
한승우는 정말 명료하고 따뜻함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깜짝 놀랄 정도로.
분명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끔은 약간 답답해서 성격이 흐리멍덩한 게 아닌가 생각을 한 적도 있었는데, 그러한 오해들은 지금 깔끔하게 날아갔다.
놀란 내색을 하지 않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다. 난 괜히 스푼을 들어 소르베를 쿡 찍어 보았다. 살얼음으로 된 소르베가 푹 들어갔다.
신 셰프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종종 학생 분들이 오시기도 하는데, 그중에서도 유독 사이가 좋으신 것 같아서 부럽네요. 제 옛날 생각이 나기도 하고.」
「여기 오래 계셨어요?」
「햇수로는 10년쯤 되려나요. 그보단 남편이 이곳 사람이라서.」
「아…….」
살짝 손을 보니 반지가 끼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러시아 남편과 결혼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신 셰프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여기 사람들 참 괜찮죠. 첫 인상은 조금 냉랭하지만, 가까워지면 이만큼 의리 있고 좋은 사람들도 드무니까요. 손님도 잘 아시겠네요.」
「글쎄요……. 첫 인상이 냉랭……했나?」
한승우는 잘 모르겠다는 듯 중얼거리더니 말했다.
「아니었던 것 같아요. 늘 잘 대해 줬어요.」
「정이 많은 분인가 보네요.」
「맞아요.」
조금 힘없이 한승우가 답했다.
「가끔은 진짜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갚을 필요가 있을까요?」
신 셰프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이미 친구라면 굳이 그렇게 생각하실 필요 없다고 생각하지만……. 고민이 많으시다면 소소한 부분에서부터 시작해 보세요. 의외로 작은 부분에서 쉽게 감동을 받기도 하니까요.」
내 이야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만히 모른 척하고 돌아보지 않는 건 굉장히 힘들었다. 차라리 얼굴이라도 안 보이는 곳에 숨어 있으면 모를까, 이렇게 다 보이는데 이야기가 오가는 건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고역이었다.
그렇게 조금 불편함을 느낄 무렵, 정확하게 신 셰프가 말했다.
“그나저나…… 너무 한국어로만 이야기했네요. 죄송합니다, 손님. 한국분과 만나면 이렇게 수다가 떨고 싶어져서 말이죠. 혹시 언짢으셨다면 사과드릴게요.”
정중하게 이어지는 사과는 러시아어였다. 내가 참고 있었다는 것을 안다는 듯한 어투였다.
날 소외시킨 것이 아니라는 건 안다. 가볍게 사과를 받아 주었다.
“괜찮아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음씨도 고우셔라. 손님이 평소에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하실 만도 하네요. 이렇게 착하셔서.”
“방금 제 친구가 그렇게 말했나요?”
“그럼요. 후후후.”
아무것도 못 알아들은 척 물어보니 신 셰프가 웃었다.
보다 예전, 우리와 비슷한 나이였을 때를 떠올리는지 잔잔한 미소가 입가에 떠올라 있다. 국적이 상이한 친구를 만나면서 어떠한 즐거움들이 있는지 잘 아는, 흐뭇하고 기분 좋아 보이는 웃음이다.
그녀는 호쾌하게 말했다.
“앞으로도 종종 찾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서비스 많이 드릴게요.”
“기억하고 있을게요.”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까지 숙여 예를 표하고 그녀가 떠났다. 어린 학생들에게 관심도 가지만, 동시에 깍듯이 손님으로 대우하는 모습이었다.
그녀가 주방 쪽으로 사라지고, 난 고개를 돌려 한승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딘지 내 눈치를 보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난 짐짓 장난스레 그를 불렀다.
“한승우.”
“응.”
“무슨 이야기 했었어?”
“나, 나쁜 말은 아니었어.”
살짝 물어보자 한승우는 약간 당황하더니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있었던 상냥하고 매력적인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이 또다시 약간 어눌한 발음과 목소리다. 하지만 이젠 이마저도 재미있었다. 난 계속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알아.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해서 가만히 있었어. 널 믿으니까. 그래도 궁금해.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무슨 내용이 있었는진 이미 다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의 입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다. 무슨 말을 할지 궁금했다.
그는 지나간 대화들을 되짚더니 천천히 말했다.
“그냥…… 그, 남편분이 러시아인이라는 이야기를 했어.”
“그리고?”
“…….”
갑자기 조용히 입을 다물더니, 그가 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궁금증이 가득한 얼굴이다. 평소 내게 묻고 싶은 것들이 많았는지, 그는 조금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타티아나.”
“응.”
“넌 어째서 나에게 처음 마주한…… 그…….”
하지만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
지금 내게 그런 것을 물어보는 것 자체가 실례라고 생각하는 듯한, 말실수를 했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정말 솔직했다. 숨기는 것마저도 솔직한 모습은 꽤 마음에 들었다. 궤변에 가까운 말이겠지만, 난 거짓말쟁이이기에 더더욱 솔직함에 높은 가치를 두고 싶었다.
괜히 한 번 더 물어보았다.
“무슨 말이야?”
“……아니야.”
“러시아어 공부 좀 열심히 하라니까.”
“하고 있어.”
한승우가 즉답했고, 난 그 위에 곧바로 말을 얹었다.
“나도 알아.”
기습이라도 당한 듯 그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난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왜 내가 처음 봤을 때부터 반말로 친근하게 대하면서 되도 않는 오지랖을 부렸는지, 그리고 지금도 혹여나 네가 진급 시험에 통과하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하는지, 넌 이해하지 못하겠지.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어.
만약 네가 혼자 시험을 치러 왔던 것이 아니라 의지할 부모가 있었다면, 그리고 합격하고도 이렇게 열심히 하지 않았다면, 아마 난 네게 신경도 쓰지 않았을 거야. 학교엔 수십 명이나 되는 한국인들이 있지만 개중에 친구로 지내는 것이 너뿐인 데엔 이유가 있어.
하지만 앞으로도 모르고 있어도 상관없어.
“이거 맛있다. 먹어 봐.”
“……알았어.”
난 신경 쓰지 말라는 투로 스푼을 들고 유자 소르베를 떠서 먹었다.
주문하지도 않은 서비스가 나온 것은 반가웠다. 그것이 차갑고 달달한 소르베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차가운 얼음이 입안에 퍼지면서 유자 향을 퍼뜨린다. 기분이 개운해진다.
그렇게 유자 소르베를 먹고 있자니 전화 통화를 마친 아나스타샤가 돌아왔다.
“아, 미안. 잠깐 선생님이랑 통화 좀 하느라.”
“괜찮아요.”
“그 사이 뭐 했……. 이건 뭐야?”
테이블에 못 보던 접시가 올라와 있자 그녀가 의아해했다. 내가 설명했다.
“서비스로 나온 유자 소르베라고 하네요.”
“앙증맞네.”
그 감상대로였다. 유자 소르베는 접시도, 내용물도 앙증맞기 짝이 없었다. 입에 넣기 아까울 정도였다.
하지만 소르베라는 디저트는 먹지 않으면 녹아버린다. 아나스타샤는 스푼을 들고는 소르베를 먹었다. 그녀의 눈이 커다래졌다.
“산뜻한데? 달달해.”
식사 후의 디저트로 과일 같은 것도 좋지만 입에 넣자마자 차갑게 녹아내리는 소르베는 정말 상쾌했다. 아나스타샤는 마음에 든다는 듯 웃었다.
작은 소르베는 스푼이 두 번 다녀가자 사라졌다.
아나스타샤가 테이블 위를 힐끗 보더니 듣는 사람이 없는지 주위를 휙 살폈다. 그녀가 작게 말했다.
“저거 리처드 거지?”
“예.”
“얘들아.”
의미심장하게 우리를 끌어모은 아나스타샤가 장난기 가득한 어조로 소곤거렸다.
“저거 우리끼리 나눠 먹고 리처드한텐 시치미 떼…….”
“또 무슨 작당 모의 중이야?”
“……!”
깜짝이야.
아나스타샤보다 내가 더 기절하는 줄 알았다. 분명 듣는 사람이 없는 걸 확인까지 했는데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예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나나 한승우와는 달리 아나스타샤는 턱을 치켜들며 불만스레 말했다.
“작당 모의? 계속 이래도저래도 들어 주기만 했더니 이젠 못 하는 말이 없네, 리처드?”
“너야말로 못 하는 일이 없잖아, 아나스타샤.”
“디저트를 뺏기는 건 경계하고 있지 않으면 언제나 당할 수 있는 일이야.”
“대체 뭐가 그리 당당한 건데…….”
리처드가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리며 자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앞에 놓인 소르베를 발견했다. 늘 약간 뚱하게 가라앉아 있는 그의 눈이 잠시 소르베에 머물렀다가, 아나스타샤를 봤다.
“아나스타샤.”
“왜.”
“이거 가져가.”
속이 깊은 그가 상황을 이해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리처드가 손가락으로 소르베를 가리켰다.
하지만 사람이란 복잡 미묘한 생물이라서, 장난으로 남의 것을 빼앗아 먹는 건 있을 수 있어도 준다는 걸 덥석 받아먹기는 힘들었다. 리처드가 자신의 몫을 양보하자 아나스타샤는 난처한 듯 저자세를 보였다.
“그…… 아니, 괜찮은데?”
“한눈에 봐도 달아 보이는데, 난 못 먹어. 네가 먹어.”
“으……응. 고마워…….”
리처드가 얼른 가지고 가라는 듯 한 손으로 소르베 접시를 쭉 내밀자 아나스타샤는 그제야 어쩔 수 없이 주저하며 접시를 받아 들었다. 그녀가 리처드를 상대로 이렇게 어쩔 줄 몰라 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다.
접시를 받고도 아나스타샤는 조금 고민하더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타티아나.”
“예.”
“이거 같이 먹자.”
결국 그녀가 취한 선택은 날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난 그런 아나스타샤의 태도가 귀여워서 웃어버리고 말았다. 아나스타샤는 그제야 급하게 다시 태연함을 되찾았지만, 어쨌건 난처한 그녀를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괜찮았다. 난 리처드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리처드.”
“응.”
“대신 카페에서는 제가 사 드릴게요.”
“카페……?”
난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럼요. 차도 한 잔 안 마시고 헤어질 생각이셨어요?”
리처드는 생각도 않고 있었는지 망연한 표정이다가, 곧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