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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237화 (237/1,277)

##  237화

바로 집으로 돌아가기 아쉬워진 우리들은 카페에 가서 차를 한 잔씩 주문했다. 함께 먹을 과자도 빼놓지 않았다.

리처드는 저녁 식사도 마쳤는데 과자를 또 먹는다는 게 이해가 안 가는 듯 커피만 홀짝였다.

니들은 그게 또 입에 들어가냐며 말로 묻지 않은 건 칭찬해 줄 만한 일이지만, 기왕이라면 한승우처럼 잘 먹어 주는 편이 좋았다.

“너 정말 잘 먹는구나?”

“응.”

“하긴 그만큼 크려면 잘 먹기도 해야겠다.”

“평소엔 이렇게 먹지 못해.”

“그것도 그렇네. 남자애 혼자서 이런 데 와서 먹긴 힘드니까.”

“둘이어도 힘들어.”

갑자기 툭 튀어나온 말에 아나스타샤는 눈을 깜빡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맞아. 그렇네. 넷이면 괜찮지?”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아나스타샤와 한승우는 서로 약간 거리감을 두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그가 말 못 하는 유학생이라서, 한승우는 아나스타샤의 고압적인 기세에 눌려서 서로 가까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조금 마음에 든다며 아나스타샤가 먼저 살갑게 대하자, 어색했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아나스타샤는 초콜릿 케이크를 복스럽게 먹는 한승우가 마음에 들었는지 계속 말을 걸었다. 나 역시 자꾸만 뭔가 먹이고 싶은 충동이 들어서 이것저것 주문했다.

한승우는 약간 불안한 눈빛을 했지만 난 부담 갖지 말라고 못 박았다. 마음 같아선 이 카페의 모든 메뉴를 세 바퀴쯤 사 먹이고 싶다.

아나스타샤가 내게 물었다.

“타티아나, 너도 승우 한에게 뭐라도 더 먹이고 싶구나?”

“예? 아……. 조금요.”

조금이 아니지만 그렇게 답했다. 아나스타샤는 희미하게 웃었다.

어쩐지, 그녀가 왜 한승우에게 대하던 태도를 조금 바꾸었는지 알 것 같아졌다. 날 이해했고, 더 이해하고 싶다는 그녀의 기분이 느껴진다.

그것들을 직시하지 못하고 난 애먼 시나몬 쿠키만 쪼갰다.

문득 고개를 들고 세상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리처드와 케이크를 먹는 한승우를 보니, 데자뷰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기억 속을 헤집어 보았다. 익숙한 광경이 떠올랐다.

“저희 작년에도 이렇게 카페에 온 적 있었죠?”

“디저트 전문점이었지.”

“맞아요, 그랬죠.”

작년에 이 두 남자애와 신아르바트 거리에서 쇼핑을 하고 거닐다가 내가 끌고 들어간 곳이 디저트 전문점이었다.

그 공간에서 리처드는 정신적으로 피폐해졌었다. 한승우는 지금처럼 케이크를 먹었고.

난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땐 제가 리처드를 혼내 주려고 데리고 갔었는데.”

“네가 그렇게 잔인한 애인 줄 그때 처음 알았지.”

“잔인하다뇨? 즐겁지 않았나요?”

“혼내 준다는 의도였다면서 즐겁냐고 묻는 건 뭐야?”

시큰둥하게 되받아치는 리처드를 보며 난 그저 웃어 보였다. 그를 놀릴 말들은 많았지만 이쯤하기로 했다.

우리가 공유하고 있던 기억을 내놓자 아나스타샤가 궁금했는지 물어 왔다.

“작년이라니? 언제?”

“혹시 기억나세요? 작년에 저 손목에 보호대 찼던 것.”

“아, 그때?”

그때 리처드가 짜 놓은 계획에 따라가 주면서 모두에게 비밀로 했지만 아나스타샤에게만큼은 털어놓았다. 그래서 그녀는 내게 있었던 일들은 조금이나마 알고 있었다.

그녀가 슥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의 끝에는 리처드가 있었다.

“그때였어?”

약간 날이 선 눈빛을 받은 리처드는, 테이블에 팔을 괸 채 손으로 옆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이야기 들었나 보네, 아나스타샤.”

“우린 숨기는 게 없거든.”

아나스타샤가 대꾸했다. 생각해 보면 이 두 사람, 험악하게 싸우기도 했었는데.

지금 여기에서 옛날이야기를 더 해서 좋을 건 없어 보인다. 난 살짝 끼어들며 말했다.

“전 아직도 그때 일을 감사하고 있어요. 리처드, 한승우. 두 분 모두에게요.”

리처드가 당혹스러워 했다.

“……미치겠네. 뭘 또 감사해? 이제 제발 좀 잊어버려.”

“기억하고 있는 건 제 마음이잖아요?”

이 애들이 정말 위험천만한 일을 한 것은 맞지만, 결론적으로 내게 정말 큰 도움이 된 것 역시 사실이었다. 난 이 애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었다. 잊어버릴 수 있을 리가 없다.

리처드는 약간 어색한지 커피를 쭉 들이켜며 고개를 돌렸다.

우리를 가만히 지켜보던 아나스타샤는 굳어 있던 표정을 풀었다. 작년 일을 말하면서 살짝 드러났던 예리함이 스르르 무뎌졌다.

그녀는 분위기를 망칠 생각은 없다는 듯 웃음을 띠우며 말했다.

“뭐, 됐어. 저 애가 고마워한다면 괜찮은 거겠지. 그리고 평소 리처드의 행실 정도는 알고 있고.”

“영광이네.”

“앞으로도 잘 해.”

“알아 모시죠.”

아나스타샤의 장난스런 말투에 리처드도 위트 있게 받아쳤다. 난 웃으며 다시 찻잔을 기울였다.

우리는 30분 정도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다.

대화와 농담, 장난 등이 오가며 모두의 찻잔이 식었을 무렵, 아나스타샤가 문득 제안했다.

“우리 이거 다 마시고 놀러 갈래?”

“시간이야 많지만……. 어디로?”

리처드의 물음에 뭐든지 잘하는 아나스타샤는 쿨하게 답했다.

“나가 보면 알겠지.”

***

그렇게 우리는 남녀 네 명이서 놀 만한 것을 찾아 돌아다녔다.

리처드와 아나스타샤는 약간의 책임감을 지닌 사람들처럼 앞장섰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의견은 조금씩 엇갈렸다.

아나스타샤가 살짝 짜증을 냈다.

“그냥 아까 그 영화 보는 게 낫지 않았겠어? 리처드?”

“그거 재미없을 거라고 몇 번을 말해.”

“봤어?”

“아니.”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아는데?”

“난 시간 낭비하기 싫거든.”

“난 걷는 게 싫은걸?”

아나스타샤는 투덜거렸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리처드는 완고하게 우리 넷이서 즐길 만한 거리를 찾고 싶어 하는 듯했다.

난 리처드가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어딘가 들어가고 싶었다. 다리도 아픈 데다가 슬슬 어둑해지는 모스크바 시내에서 정처 없이 걷고 싶지 않았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발신자는 빅토르였다. 난 곧장 전화를 받았다.

- 아가씨.

빅토르는 낮게 가라앉은,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빅토르는 평소 장난을 치며 농담을 주고받을 때와 이렇게 경호 업무에 있어서 이야기 할 땐 목소리 톤부터가 달랐다.

- 외람되오나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친구분들과 더 계시는 것은 좋지만 혹시 언제쯤 귀가하실지 계획이 있으십니까?

“아, 그리 늦진 않을 거예요.”

저녁만 먹고 헤어지려다가 아쉬워서 커피를 마시고, 그리고도 아쉬워서 잠깐 놀 만한 곳을 찾는 것이었다. 특히 리처드와 한승우 같은 경우엔 기숙사 통금 시간도 있어서 앞으로 있어 봐야 1시간 정도 후엔 돌아가야 했다.

그렇게 곧 돌아가겠다고 말하다가 문득, 난 빅토르에게 물었다.

“저기, 빅토르.”

- 예. 아가씨.

“빅토르는 학생이실 때 친구들과 어디에서 놀곤 하셨어요?”

- 예?

순간 그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 그걸 왜 제게……?

“그냥 빅토르는 뭘 좋아하시나 궁금해서요.”

- 글……쎄요.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다시 말하자 빅토르는 잠시 생각하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 네 분이시면 포켓 당구를 하시는 것도 괜찮겠군요.

“아, 그것도 좋겠네요.”

- 물론 하실 줄 아시는 분이 계셔야겠지만…….

“빅토르가 가르쳐 주시면 안 되나요?”

빅토르는 분명 당구를 잘 칠 것 같았다. 그가 친구들과 날 가르쳐 준다면 즐겁지 않을까 싶어서 물어본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짐짓 엄숙하게 말했다.

- 죄송합니다만 제 일은 경호 업무입니다.

“……예.”

꼭 경호원이라고 해서 고용주와 함께 놀지 말거나 즐기지 말란 법을 없을 것 같은데……. 빅토르는 평소엔 나와 아슬아슬하게 선을 오가는 농담도 주고받으면서 은근히 이런 면에선 칼 같았다.

약간 차갑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러한 빅토르의 프로페셔널함을 차갑다고 생각하면 실례다.

그에게 존중과 존경을 담아 감사를 표했다.

“늘 고마워요, 빅토르.”

- 별말씀을.

전화를 끊고, 친구들에게 당구장에 대해 이야기하자 대번에 분위기가 활발해졌다.

리처드는 왜 그 생각을 못 했는지 모르겠다며 손가락을 튕겼고 아나스타샤는 에잇볼과 나인볼을 칠 줄 안다면서 그렇게 하자고 했다. 결국 당구에 대해 모르는 건 나와 한승우뿐이었다.

그대로 가까운 당구장으로 직행한 우리는 포켓 당구대를 찾았다. 흔히 4구나 3구라고 부르는 캐롬 당구는 초보자가 둘이나 있는 우리가 하기엔 조금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포켓 당구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에잇볼을 하기로 했다. 약간 귀여운 어감의 게임이라서 익히기 쉬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팀은?”

“너랑 내가 경험자니까 일단 찢어져야지.”

리처드와 아나스타샤는 포켓 당구의 경험자였다. 때문에 저 둘을 한 팀으로 붙이고 나와 한승우를 붙인다면 게임을 굳이 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아나스타샤가 도발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타티아나는 내가 데려갈 거야.”

“마음대로 해. 어차피 힘으로 하는 게임도 아니고.”

우리는 피아노를 다루면서 공정한 경쟁에 익숙했다. 굳이 남녀 페어로 하지 않아도 불공평하다거나 하는 불만이 나올 여지는 전혀 없었다.

멍하니 큐대를 안고 서 있는데, 아나스타샤가 날 끌어당겼다.

“이리 와, 타티아나.”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숙이고 나와 얼굴을 나란히 했다. 모처럼 승부욕에 불이 붙었는지 활활 타는 눈빛이 거기에 있었다.

“게임과 스포츠의 경계는 미묘하지만 우린 둘 다 하도록 하자.”

“……예?”

“즐기기도 하고, 이기기도 하잔 말이야.”

아나스타샤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나만 믿어. 리처드의 코를 납작하게 해 줄 테니.”

“…….”

그냥 해 봤다고 하기에 몇 번 쳐 본 적이 있나 싶었는데, 사실 아나스타샤는 꽤 잘 치는 게 아닐까?

어쨌든 나 역시 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게임을 바로 시작하는 대신 나와 한승우는 큐대를 잡는 법부터 배웠다. 교관으로 나선 리처드와 아나스타샤가 직접 우리의 자세를 봐주었다.

난 아나스타샤가 시키는 대로 허리를 숙이고 자세를 잡았다. 생전 처음 잡아 보는 당구 큐대는 묵직하기도 하고, 뭔가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허공에 큐대를 찌르고 있는데 아나스타샤가 다가왔다.

“큐걸이는……. 잠깐만, 타티아나.”

내 뒤편으로 아나스타샤의 그림자가 훅 다가왔다. 그녀는 손을 뻗어선 직접 내 왼손을 교정해 주었다.

큐대에 쓸리지 않도록 장갑을 낀 왼손의 손가락을 아나스타샤가 펴 주었다.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이 이렇게 손가락을 마음대로 만졌다면 당장에 큐대를 휘둘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나스타샤가 자세를 잡아 주는 것은 이상하게 마음이 편하기까지 했다.

내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던 아나스타샤가 속삭였다.

“혹시 손 불편해?”

“아, 아뇨. 괜찮아요.”

“이 자세에서 흐트러지지 않도록 해 봐. 큐걸이가 흔들리면 모든 게 흔들리니까, 큐대를 찌르고 나서도 팔로우로 그대로 움직이지 않도록 해야 해.”

난 그녀의 말에 따라 손을 움직여 보려 했다. 하지만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처음엔 다 그렇다며 날 위로했다. 난 오늘 여기 처음인 또 다른 한 사람을 찾아 고개를 들었다. 저편엔 리처드 교관님이 한창 강의를 하다가 놀라는 중이었다.

“팔을……. 뭐야, 너 왜 이렇게 잘하냐?”

“이거 맞아?”

“너 처음 해 본다는 거 거짓말이지?”

“정말 처음인데.”

한승우는 태연하게 말하며 다시 휙휙 큐대를 움직였다. 키도 크고 힘도 좋아서 그런지 호쾌하고 뭔가 자세가 흔들리지 않는 것 같다.

나도 질 수 없었다. 난 정신을 집중해서 아나스타샤가 가르쳐 주는 것들을 귀담아 들었다.

잠시 후, 경기가 시작되었다.

나와 아나스타샤, 그리고 리처드와 한승우의 2대2 포켓 당구 에잇볼 경기였다.

“자, 브레이크 해.”

15개의 당구공을 삼각형 모양의 틀로 모으는 것을 랙rack이라고 하고 그것을 흰 수구로 쳐서 퍼트리는 것을 브레이크break라고 한다고 했다.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끄덕이고 허리를 숙였다. 큰 키의 그녀는 큐대를 쥐고 있는 것도 정말이지 잘 어울렸다. 대체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 세상에 존재하기나 할지 의문이었다.

블라우스 소매 밖으로 나온 얇은 팔이 두어 번 흔들리고는, 크게 움직이자 꽝 하는 소리와 함께 볼이 쏘아져 나가서 모여 있는 당구공을 거의 박살내는 것처럼 퍼트렸다.

리처드의 표정이 굳었다.

“이렇게 호쾌한 브레이크는 나도 힘든데……. 브레이크 구도도 그렇고…….”

“당구는 힘으로 하는 게 아니잖니?”

아나스타샤는 매력적으로 웃으며 말했고 리처드는 약간 경계심 어린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금 이것만 보아도 아나스타샤의 실력을 알 것 같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곧 승부사는 승부에 집중한다.

“우리가 스트라이프로 할게.”

“전황을 읽는 눈은 있네. 알았어. 우리가 솔리드. 쳐.”

“11번 볼 저쪽 사이드 포켓에 넣는다.”

“응.”

복잡한 말들이 오갔지만 그 와중에도 아나스타샤가 설명해 주었던 설명들이 떠올랐다.

1번부터 7번까지의 볼은 평범한 색깔의 솔리드 볼, 그리고 9번부터 15번까지의 볼은 한 줄의 줄이 그려져 있는 스트라이프 볼이다.

각 팀들은 솔리드나 스트라이프 어느 한쪽의 볼들을 맡아서 번갈아 맡은 볼들을 포켓에 집어넣고, 마지막으로 까만색의 8번 볼을 포켓에 집어넣으면 한 세트에서 이기게 된다.

그리고 볼을 포켓에 넣을 때 어느 포켓에 넣을지 꼭 말을 하고 콜샷callshot을 해야 하는 규칙이 있었다. 때문에 의도치 않은 포켓에 들어가면 파울이었다.

그 외에도 파울 규칙은 굉장히 많지만 한 번에 다 익히기엔 어려웠다. 하면서 배우면 될 것이다.

그렇게 리처드가 쳐서 11번 볼을 미리 말했던 사이드 포켓에 넣었고, 아나스타샤도 2번 솔리드 볼을 코너 포켓에 넣었다.

다음은 한승우의 차례였다.

“저쪽에 서서 15번 볼을 저쪽에 넣으면 돼?”

“……확실히 재능이 있네.”

리처드에게 도움을 구하지도 않고 한승우가 말했고, 리처드는 한마디로 표현했다.

한승우는 그렇게 말했던 대로 손쉽게 볼을 포켓에 넣었다. 도저히 오늘 처음 하는 사람처럼 보이지가 않는다.

다음은 내 차례였다.

“…….”

뭐지, 잘 모르겠는데.

10개가 넘는 볼이 퍼져 있으니 어떤 볼이 우리가 쳐야 할 솔리드 볼이고 어떤 것이 리처드 팀의 스트라이프 볼인지도 헷갈렸다.

머뭇거리고 있자 아나스타샤가 웃으며 말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

난 주의 깊게 다시 당구대 위를 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노려보니 흰 수구와 적구, 그리고 포켓을 일직선으로 잇는 선이 보였다. 이건 쉬울 것 같은데?

“3번 볼을 저쪽의 코너 포켓에 넣을게요.”

조심스럽게 콜을 한 뒤, 배운 대로 서서 허리를 숙였다. 아직 어색했지만 그래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손을 쓰는 일을 해 왔으면서 방금 배웠던 자세를 까먹을 순 없었다. 난 온몸의 신경을 집중했다.

그리고 천천히 큐대를 움직여서 수구를 가격했다.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팔로우를 유지했다. 내가 친 흰 볼은 아주 쉬워 보이는 궤적을 따라가더니, 3번 볼을 쳐서 코너 포켓에 그대로 넣었다.

생각보다 훨씬 정확하게 내 큐대가 가리키는 방향대로 나가서 조금 놀랄 정도였다.

“잘했어, 타티아나.”

아나스타샤가 나이스샷을 외쳤다. 난 허리를 펴고 웃음으로 답했다.

처음 해 본 포켓 당구는 생각보다 꽤 재미있었다. 체력보단 머리와 기술을 필요로 하는 게임 같아서 마음에 들기도 했다.

“재미있네요.”

“그렇지?”

아나스타샤는 큐대에 기묘하게 기댄 자세로 싱긋 웃었다.

게임은 계속 이어졌다. 리처드와 아나스타샤는 신기한 기술까지 써서 각자 하나씩 볼을 포켓에 넣었다. 볼의 위와 아래를 노리는 것으로 저런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걸 머리로는 이해하겠는데 직접 보니 신기했다.

그리고 다시 한승우의 차례.

한승우는 약간 고민하더니 리처드와 상의하고는 하나의 볼을 골라서 노렸다. 하지만 실패했다.

“아하하하. 좋은 시도였어, 승우 한!”

“아쉽네.”

아나스타샤는 감추지 않고 웃었고 리처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담담히 볼들을 살폈다. 한승우가 노렸던 것은 초보자가 치기엔 어려운 볼이었던 것 같다.

다음은 내 차례였다.

“저쪽에 6번 노리면 괜찮을 것 같긴 한데. 부담 없이 해, 타티아나.”

“예.”

한승우의 실패로 여유가 생겨서 내가 실패해도 상쇄되니 상관없다는 것 같지만, 세상에 어떻게 해도 상관없는 게임은 존재하지 않는다. 난 집중해서 허리를 낮췄다. 그리고 아나스타샤가 지목한 6번 볼을 노려보았다.

어떻게든 넣고 싶다. 어쩐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겨난다. 아나스타샤가 옆에서 정확히 어디를 노려서 회전을 만들어야 할지 코칭해 주었다.

난 극도의 집중상태로 오른쪽 팔 근육만을 움직여 큐대를 찔렀다.

원했던 바로 그대로, 큐대가 정확한 힘을 싣고 수구를 쳤고, 수구는 아나스타샤가 말해 주었던 그대로의 회전을 담고 나아갔다. 그리고 강하게 부딪친다. 깡 하는 소리가 기분 좋게 울린다.

그리고 마치 기적처럼 6번 볼이 사이드 포켓에 들어갔다.

“……!”

난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노렸던 6번 볼을 정확하게 포켓에 넣은 수구는 그러고도 힘이 남아서 옆에 있는 검은 볼도 쳐서 포켓에 집어넣었다.

저것도 넣어야 하는 볼이었죠? 한 번에 두 개나 넣다니, 잘한 거죠?

환희에 찬 얼굴로 고개를 들고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았다.

“…….”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뜻밖의 낭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난 멍하니 물었다.

“아나스타샤……?”

“……타티아나.”

아나스타샤는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웃으며 짧게 말했다.

“우리가 졌어.”

“예?”

무슨 말이에요 갑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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