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8화
큐대가 바닥에 툭 닿았다. 난 아나스타샤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고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다시 에잇볼 게임 규칙을 설명했다.
“검은 볼을 넣어야 하는 건 맞는데, 우리가 맡은 솔리드 볼을 모두 넣은 다음에 마지막으로 넣어야 해.”
“지금 넣으면요?”
“진 거지.”
게임 시작 전 그녀가 분명 설명했었던 규칙이었다.
아주 기본적인 룰이었는데 어떻게 이걸 듣고도 아무 생각 없이 잊을 수가 있지. 내가 이렇게 바보였다는 것이 새삼 증명된 기분이었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서 물어보았다.
“파울도 없이 끝인가요?”
“응. 그건 그냥 끝이야.”
“…….”
애매할 것도 없이 확실히 끝난 모양이다.
난 당구대 위를 바라보았다. 볼이 이렇게 많이 남았는데 패배했다는 것이 어쩐지 믿어지지 않았다. 살짝 맥이 풀렸다.
하지만 내 실수임은 분명했다. 구차하게 변명할 것 없이 사과했다.
“해선 안 될 실수를 저질렀네요. 미안해요.”
“아, 아니야, 타티아나.”
아나스타샤가 격하게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오늘 큐대를 처음 잡아 본 사람이 수구가 어디로 튈 지 계산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나도 그게 그렇게 될 줄은 몰랐어. 따지고 보면 그 방향을 가르쳐 준 내 잘못이지.”
그녀가 가르쳐 준 대로 치긴 했지만, 어쨌든 내 손에서 벌어진 일이니 내 잘못 아닌가?
아나스타샤는 실수를 한 나를 위로하려 했다. 그런데 저편에서 리처드는 무표정하게 점수판의 핀을 하나 옮겼다. 그가 선언했다.
“첫 세트는 우리가 가져간다?”
“리처드!”
“왜?”
아나스타샤가 힐난조로 불러도 리처드는 세상 귀찮다는 듯 답할 뿐이었다.
“규칙이야 처음 하면 잘 모르는 게 당연하고, 해 보면서 배우기로 했었잖아. 방금 건 알아도 종종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고.”
“…….”
“어쨌건 게임은 게임이지. 자, 두 번째 세트 하자고.”
승부에 깔끔한 리처드는 위로도 좋지만 그 대신 무엇으로 내 기운을 북돋아 줄 수 있을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확실히 내 잘못으로 끝나긴 했지만 게임은 게임이고, 첫 번째 세트가 끝났을 뿐이라는 그의 말에 약간 가라앉았던 기분이 다시 끓었다.
“계속해 주실 건가요?”
“당연한 걸 묻네.”
그가 피식 웃으며 볼들을 거두었다. 그리고 다시 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난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아나스타샤에게 말했다.
“첫 세트는 제가 망쳤으니 더 잘할게요, 아나스타샤.”
“그럴 필요 없대도…….”
아나스타샤는 신경 쓰지 말라는 투로 중얼거리더니, 내 얼굴을 보고는 큐대를 휙 들어선 어깨에 얹으며 쾌활하게 말했다.
“그래도 이길 의욕 넘치는 건 좋네. 다음 게임 잘해 보자, 타티아나.”
“예.”
아나스타샤는 마음을 새로 잡는 것처럼 초크를 들고 큐대의 탭을 문질렀고 나도 따라서 했다.
에잇볼 게임은 다음 세트로 이어졌다.
기본적으로 경험자인 리처드와 아나스타샤의 대결이나 다름없었다. 두 사람은 연속으로 두세 개씩도 볼들을 넣으며 경기를 이끌어 나갔고, 나와 한승우는 각자 차례에 하나씩이라도 넣으면 잘하는 것이었다.
처음에 할 땐 잘되는 것 같았는데 어쩐지 하면 할수록 마음처럼 안 되는 부분도 많았다. 아무리 집중하더라도 경험과 감각으로 익힐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팀 대결이지만 리처드와 아나스타샤, 그리고 나와 한승우의 대결이라고 놓고 본다면, 상대적으로 리처드보다는 아나스타샤가, 그리고 나보다는 한승우가 우위에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묘한 균형을 만들어서 게임을 흥미진진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결국 경험자끼리의 승부가 게임의 승부로 이어졌다.
두 번째 세트는 아나스타샤와 나의 승리였다.
“이겼어요!”
“잘했어, 타티아나!”
세트 내내 내가 한 것은 볼 하나만 포켓에 넣었을 뿐이었지만, 그래도 잘했다고 아나스타샤는 칭찬 일색이었다.
그렇게 세트 스코어는 1대1이 되었다. 이제 마지막 세트가 남았다.
저편을 보니 리처드는 한승우에게 무언가 작전을 지시하고 있었다. 난 우리도 무언가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행복하게 웃기만 했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이유는 불과 몇 분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말도 안 돼.”
리처드가 경악하며 말했다.
“그걸 한 번에 다 친다고?”
“나 혼자 재미 봐서 미안?”
아나스타샤는 평소 절대로 하지 않는 애교 섞인 말투로 대답하고는 큐대를 조준했다.
그녀는 연속으로 5개의 볼을 툭툭 쳐서 집어넣고는 마지막 8번 볼을 노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리처드에겐 반격할 틈도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공격해서 끝장내는 형국이었다.
난 얼이 빠져서 멍하니 구경만 했다.
위기감이 들었는지 리처드가 옆에서 말을 걸었다.
“이제 생각난 건데, 아나스타샤. 이거 번갈아 가면서 스카치 게임으로 했어야 했던 게 아닐까?”
“그건 아까 정했어야지?”
“잠깐만, 설마 그쪽을 노리는 건 아니겠지? 나라면 그렇겐 절대 안 칠 것 같은데.”
“어머, 리처드. 트래쉬 토크 하는 거야?”
“큭…….”
말이나 행동으로 상대 선수를 견제하는 트래쉬 토크는 스포츠 경기라면 종목을 불문하고 항상 있긴 하지만, 우리는 그 어떤 스포츠맨십을 요구하는 경기보다 엄숙한 침묵과 존중을 기본으로 교육받아 왔다.
리처드는 자신도 모르게 트래쉬 토크를 했다는 것이 부끄러워졌는지 잇소리를 내며 침묵했다. 하지만 그 신사다운 리처드가 아나스타샤를 말로 견제하려고 드는 모습은 조금 귀엽기까지 했다. 그도 위기의 순간엔 흥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나스타샤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자, 집에 가자.”
곧게 뻗어진 큐대가 수구를 쳤고, 나로선 이해하기 힘든 회전을 담은 볼과 볼의 충돌이 이어졌다.
그리고 8번 볼은 당구대의 쿠션에 붙어 있는 것처럼 타고 움직이더니, 코너 포켓에 들어갔다. 대체 무슨 신묘한 기술을 부린 것인지 보고도 알 수가 없었다.
“당구 재미있다아.”
깔끔하게 큐대를 제자리에 꽂아 두곤 휙 돌아서는 아나스타샤는 반할 만큼 멋졌다. 하지만 리처드는 학교에서 동전 던지기에 이어 또 졌다는 사실에 충격이 큰 듯했다.
“이게 뭐야…….”
“종종 있는 일이잖니?”
아나스타샤의 말에 리처드가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한 번에 다섯 개를 연달아 쳐서 게임을 끝내버리는 일이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내가 보기에도 보통 실력으로는 어려운 일 같았다.
리처드도 큐대를 꽂아 두고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오늘 벌써 두 번째 보는 모습이 조금 안쓰럽기까지 하다. 어쩐지 자포자기하는 듯한 태도로 그가 말했다.
“게임비 내면 돼?”
“흐응……. 아니?”
아나스타샤는 잠시 고민하더니 날 슬쩍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웃었다.
“우리 처음에 그런 내기 내용은 없었잖아?”
“……그렇긴 하지.”
“그래도 네가 패배자로서 꼭 무언가 해야겠다면 말야.”
다시 은근히 리처드의 아픈 마음을 쿡 찌른 아나스타샤는 곧 악의 없이 부드럽게 말했다.
“다음에도 또 놀러 오자. 오늘 재미있었으니까. 그렇지? 타티아나.”
“예. 즐거웠어요.”
“알았지?”
리처드도 마지막에 아나스타샤가 보여 준 어마어마한 실력에 패배하긴 했지만 재미없었던 것 같진 않았다.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알았다고 대답했다.
옆에 있던 한승우도 거들었다.
“다음엔 나도 더 잘 할 수 있어.”
“믿음직스럽네? 승우 한.”
아나스타샤가 기대된다는 듯 말했다.
나 역시 당구를 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을 정도까진 기량을 끌어올려 놓아야 할 것 같다.
앞으로도 이런 자리는 많이 있을 테니까.
***
리처드와 한승우를 기숙사에 돌려보내고, 난 아나스타샤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아나스타샤가 방긋 웃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 타티아나. 고마워요 소로킨, 빅토르.”
“들어가십시오, 아나스타샤 아가씨.”
“내일 뵈어요, 아나스타샤.”
“응. 잘 가.”
아나스타샤는 옆자리의 나를 한 번 꼭 포옹해 주고는 일어나 차 밖으로 나갔다. 그리곤 우리가 완전히 떠날 때까지 자리에 서서 배웅해 주었다. 틴팅이 진하게 되어 있어서 보이진 않겠지만, 난 차가 코너를 돌아 그녀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즐거우셨습니까? 아가씨.”
“예, 빅토르.”
집에 돌아가는 길에 우리끼리 남게 되자 빅토르는 딱딱했던 태도를 풀고 언제나처럼 약간 느긋한 분위기에서 내게 물었다. 난 만족스럽게 대답했다.
“처음 해 본 것이었는데 재미있었어요. 빅토르가 추천해 주신 덕분이에요.”
“다행이군요. 게임은 아나스타샤 아가씨가 가르쳐 주셨습니까?”
“예. 아나스타샤가 얼마나 잘 치는지 몰라요. 마지막엔 혼자서 볼 다섯 개를 연속으로 넣었어요. 그때 모두 얼마나 놀랐는지 빅토르가 보셨어야 했는데.”
내가 당구장에서 있었던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꺼내 놓았다. 빅토르는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흥미로운지 잘 들어 주었다.
이윽고 그가 말했다.
“정말 재미있으셨던 것 같네요.”
“예.”
난 빅토르가 앉아 있는 조수석 어깨 너머로 가까이 얼굴을 가져가며 말했다.
“앞으로도 노는 일에 대해선 빅토르에게 자문을 구해야겠어요. 괜찮죠?”
“제가 하는 일은 경호입니다만…….”
“괜찮잖아요?”
들은 척도 않고 조르자 빅토르가 난감하다는 듯 날 보더니 결국 피식 웃어버렸다.
“아가씨가 원하신다면야, 아무쪼록.”
“고마워요.”
사실 이미 빅토르가 하고 있는 일은 단순한 경호를 넘어선 지 오래다. 공적인 곳에서 내게 걸려 오는 전화는 모두 빅토르를 거치고 있었고 거기에다가 스케줄 보조, 내 사소한 부탁들까지. 따지고 보면 대체 몇 가지 직무를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
늘 신세만 지고 있는 그에게 여름방학에 휴가를 줄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빅토르는 아직도 내가 농담으로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지만,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 그가 걱정하지 않을 수 있도록 집에 알아서 틀어박히겠다고, 학기가 끝나고 나면 이야기할 생각이다.
그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집에 도착했다. 이미 날이 어두워져서 조명이 저택을 밝히고 있었다.
큰 정문을 지나쳐 잠시 달리면 커다란 저택 본관과 별관이 보였다. 소로킨이 그 앞에 차를 세웠다. 난 소로킨과 빅토르에게 감사하다고 인사를 전했고 지금 다른 업무로 자리에 없는 자하르에게도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저택 안으로 들어와서 제일 먼저 한 것은 아버지를 찾는 것이었다.
“아버지, 저 왔어요.”
“왔느냐.”
아버지는 사무실로 쓰시는 방에서 컴퓨터로 무언가 처리하고 계셨다. 퇴근은 저녁때면 하시지만 집에 와서도 항상 바쁘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날 보시더니 마우스에서 손을 놓으시곤 고개를 드셨다. 눈이 마주쳤고, 내가 말했다.
“저녁은 오빠와 두 분이 드셨나요?”
“흠, 아니다. 루슬란도 오늘은 학교 일이 있다고 해서.”
“아……. 그럴 줄 알았으면 일찍 올 걸 그랬어요.”
“괜찮다.”
전화로 미리 늦게 들어가겠다고 허락은 받아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상관없었지만, 때마침 오빠도 집에 없이 아버지 혼자 식사를 하셨다고 하니 조금 후회되었다.
큰 잘못이라 할 순 없었고 아버지도 특별히 심각하게 생각하시진 않는 일이지만, 다음부턴 아버지에게만 전화할 것이 아니라 루슬란 오빠에게도 전화를 하든지 해야 할 것 같다.
내가 그러한 고민을 하는 것을 알아보셨는지 아버지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네가 매일 늦는 것도 아니고. 그렇잖느냐.”
종종 아나스타샤나 발렌티나와 놀다가 밖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늦게 들어오는 일도 있긴 하지만 그리 잦은 일은 아니긴 했다.
사실 아버지는 내가 친구들과 논다고 하면 무슨 일이든 거의 허락해 주시곤 했다.
“오늘은 친구들과 즐거웠느냐?”
“예. 정말요.”
“그렇다면 됐다.”
이번에도 뭘 했든, 누구든 관계없이 즐거웠다면 되었다는 듯 아버지는 쿨하게 말씀하셨다. 짧은 말에서도 나에 대한 애정과 믿음이 느껴져서, 이럴 때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는 기분이 들곤 했다.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곧 깨달았다. 내가 말했다.
“내일 아침 식사는 제가 해 드릴게요. 아직 변변찮지만…….”
“……그것도 좋지.”
아버지는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향하며 말씀하셨다. 그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분명히 약간의 기쁨이 서려 있었다.
“기대하마.”
“예.”
“가서 쉬거라.”
“예, 아버지.”
조심스레 문을 닫고 나왔다. 그 길로 나는 드미트리에게 가서 내일 아침 식사를 만들어도 되겠느냐고 물었고 허락을 받아 냈다. 어떤 메뉴가 좋을지 잠시 이야기를 나누며 자문을 구하고, 마지막으로 내 방에 돌아왔다.
“…….”
불을 켜지 않은 어두컴컴한 내 방엔 냉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냉기가 마음에 치미기 전에 난 불을 켰다. 그리고 난방도 조금 올렸다. 그대로 더 발을 들여놓지 않고 가방만 내려놓고는 욕실로 향했다.
교복을 벗어 놓고 따뜻한 물로 목욕을 했다. 오늘 하루 쌓였던 피로가 가시면서 노곤해졌다. 거부할 수 없는 수마의 유혹에 빠지기 직전, 욕조에서 나와 샤워를 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목욕을 하는 사이 방은 따뜻해져 있었다.
“…….”
막 목욕을 한 참이라 이대로 침대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아직 잠들기엔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잠시 뒹굴며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하거나 친구들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전화를 하는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난 책상 앞에 앉았다.
이 하루하루를 앞으로도 이어 나가기 위해선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노트를 꺼내고 내가 작년에 썼었던 러시아어 교재를 꺼냈다. 그리고 한승우가 아직 조금 어려워하는 문법에 대한 몇 가지 예시와 문제를 만들어서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친구에게 해 주는 일로는 조금 지나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벌써 몇 번이나 해 왔던 일이었고, 난 지금까지 대부분의 것들을 리처드가 도왔던 것처럼 나도 이렇게 미력하게나마 도움을 주고 싶었다.
내일은 아침 일찍 벨카와 산책도 하고 아침 식사도 만들어야 했으므로, 연습은 새벽에 일어나 하더라도 이 공책은 오늘 저녁에 다 만들어 놓고 잠들 생각이었다.
“…….”
책상에 앉아서 문제에 골몰하는 것으로 머리가 복잡해지긴커녕 되레 차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난 친구들과 함께 있지 않고 혼자라면 이렇게 무언가에 집중할 때 가장 평온해지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