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9화
연습을 하다 보니 창밖이 밝아 오기 시작했다. 잠에서 깬 새들이 짹짹거리기 시작한다. 봄이 온 후로 새소리가 많이 들리곤 했다.
아침 해가 떠오르고도 조금 더 연습을 하다가, 슬슬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손을 내렸다.
“…….”
의자 옆에 둔 스마트폰을 들고 시간을 확인했다. 5시 30분. 2시간 정도 연습을 한 셈이다.
그리고 난 스마트폰 상단에 위치한 알림 창을 스크롤했다. 5월 14일이라는 오늘 날짜에 중요 표시가 떠 있었다.
오늘은 아나스타샤의 생일이었다.
정말 중요한 날이다. 아나스타샤는 내게 있어서 정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친구였다. 그런 친구의 생일을 되도록 성대하게 축하해 주고 싶은 마음은 당연히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
별관 연습실에서 빠져나와선 내 방으로 돌아왔다. 곧장 책상 서랍 안부터 확인했다. 어젯밤에도 확인했지만 오늘 갑자기 어떤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사라져버리기라도 한다면 정말 곤란해진다.
하지만 다행히 내가 찾던 물건은 서랍 안에 그대로 있었고, 난 그것을 꺼냈다.
물방울처럼 생긴 한 쌍의 귀걸이였다.
어쩌면 친구 사이에 조금 과할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긴 하지만, 이것도 굉장히 오래 고민한 끝에 고른 것이었다.
처음엔 생일선물로 너무 부담스럽지 않고 자주 사용할 수 있는 화장품이나 향수 등을 고려해 보았다.
하지만 미적 감식안이 그녀에 비해 한없이 뒤처지는 내가 그런 것들을 선물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고, 옷이나 구두는 말할 것도 없었다. 난 그녀를 만족시킬 자신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다가 나는 이전에 함께 아나스타샤와 함께 백화점에 갔을 때, 그녀가 귀걸이를 눈독들이던 것을 떠올렸다. 꽤 많은 용돈을 받는 그녀도 덥석 사기 어려워했던 물건이었다.
난 홀로 가서 덥석 샀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청소년 콩쿠르에서 받았던 상금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젠 정말 슬슬 아껴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난 손 안에 든 케이스를 한 번 열어 보고는, 다시 꼭 쥐었다.
이것을 선물로 건네주었을 때 아나스타샤가 얼마나 기뻐해 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후후.”
좋은 날이니 좋은 일만 가득했으면 좋겠다.
***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난 교실로 향했다.
아나스타샤는 등교 시간이 들쑥날쑥하지만 만약 이미 교실에 와 있다면 누구보다 빨리 오늘 생일을 축하한다고 전하고 싶었다. 나보다 늦는다면 그녀를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즐거울 것이다.
그렇게 교실로 가는데,
“타티아나.”
복도 코너를 돌자마자 날 부르는 소리가 있었다. 웨이브 펌을 한 갈색 단발이 찰랑이는 친구가 이쪽을 보고 있다. 발렌티나였다.
“아, 발렌티나.”
“이리 와 볼래.”
“?”
난 그녀가 손짓하는 대로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갔다.
“발렌티나. 좋은 아침이네요.”
“응. 안녕. 그것보다 타티아나, 오늘 혹시 무슨 날인지 알아?”
으슥한 복도에 멈춰 선 발렌티나는 내 인사를 대충 받고는 다짜고짜 물어 왔다. 그녀가 뭘 묻고 있는지 정도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내가 대답했다.
“제가 아는 건 아나스타샤의 생일이라는 것 정도예요.”
“알고 있네. 그럼 물어봐도 될까? 혹시 뭔가 준비라도 했니?”
“생일 선물은 준비해 왔지요.”
“역시나, 역시나.”
발렌티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기고만장한 표정이었다.
그녀가 슥 다가와서는 내 코앞까지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흠칫 놀라 물러서자 그녀가 속삭였다.
“있잖아, 타티아나. 지금 교실에 아나스타샤 있거든?”
“아, 그런가요?”
“너 가서 걔 보자마자 생일 축하한다고 할 거지.”
“……? 예.”
태연하게 대답하자 모든 것에 통달한 발렌티나는 이번에도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녀가 말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안 붙잡았으면 큰일 날 뻔했네.”
“……예?”
“타티아나. 진심 어린 축하도 중요해. 하지만 가끔 사람은 임팩트라는 것을 원하기도 하는 거야.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모르겠는데요.”
“기왕에 안다면 깜짝 놀라게 해 주는 편이 훨씬 좋을 거라는 거야.”
발렌티나는 깜짝 파티 같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아나스타샤의 생일을 맞아 무언가 기획하고 있는 것이 있는 듯했다.
하지만 난 그러한 의견에 조금 회의적이었다.
“그게…… 의미가 있을까요?”
“타티아나…… 그렇게 안 봤는데 조금 차갑다? 놀랐네. 의미가 왜 없니? 당연히 있지! 생일 축하를 서프라이즈로 하는 건 친구도 몇 없는 그 애의 친구인 우리들의 도리이자 의무야!”
“발렌티나야말로 너무하신 말씀을 하시는 것 같은데요……?”
“아무튼, 아무튼 간에!”
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발렌티나는 억지를 부렸다.
그녀는 한층 더 은밀하게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나와 어떠한 비밀스런 거래라도 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아나스타샤가 기뻐해 줬으면 좋겠잖아, 그렇지?”
“그야…… 그렇죠.”
“좋아, 좋아. 지금 내가 교실 밖에서 널 붙잡은 건 그 때문이야. 네가 이 서프라이즈에 껴 줘야 하니까. 네가 빠지면 아무 소용없어.”
“그건 상관없지만…….”
“아직도 무의미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아뇨, 그게 아니에요.”
“그럼?”
난 왜 깜짝 파티라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지 설명했다.
“아나스타샤도 자신의 생일을 모르시진 않을 텐데, 평소보다 경계하고 있고 계시지 않을까요?”
“…….”
순간적으로 예리한 송곳에 찔린 듯 발렌티나가 헛숨을 들이켰다. 정말 우리끼리 조심스럽게 준비하면 아나스타샤를 놀라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순진한 생각이지 않을까.
나도 아나스타샤에게 서프라이즈 파티를 열어 주고 싶다. 그녀가 놀라는 모습은 보기 힘든 모습이므로 더더욱.
하지만 이렇게 생일을 노려서 하는 건 너무 들키기 쉽다. 정말 잘 계획해서 실행한다면 성공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아침에 만나서 급조한 계획으로 그녀를 속일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그냥 축하해 주면 안 되는 건가?
발렌티나는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잠깐만, 할 말 좀 생각하고.”
“천천히 생각해 주세요.”
“너 그렇게 말하지 좀 마. 아, 머리야.”
그녀도 바보가 아니므로 알고 있을 것이다. 난 더 이상 재촉하지 않고 얌전히 기다렸다.
이윽고 발렌티나가 한숨을 폭 내쉬며 말했다.
“그래, 그래……. 네 말이 맞아, 타티아나. 우리가 무슨 서프라이즈를 하든 무슨 장난을 치든 그 애는 예상하고 있겠지. 감각 하나는 거의 동물적인 수준에 가깝게 발달해 있는 애니까.”
“발렌티나……. 아나스타샤에게 화나신 거라도 있으세요?”
“어쨌든, 그렇다면 더더욱 해 줘야 하지 않겠어? 그 애가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기대요?”
“응. 우리가 생일을 알아주고 뭐라도 할 것이라는 기대.”
발렌티나는 확신 어린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생일이 오늘이라는 것을 안다. 그렇다면 친구인 우리들에게 약간이나마 기대를 하고 있을 것이고, 그것이 경계일지라도 충족시켜 주는 게 마땅하다는 논리였다.
듣기에 나쁘지 않았다.
“……그것도 그렇네요. 기대하고 계실까요.”
“……솔직히 잘 모르겠어.”
“그래도 하자는 거죠?”
“응.”
발렌티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아나스타샤를 놀라게 해 주고 싶어 하는 듯했다.
사실, 애초에 반대할 생각도 별로 없었다. 난 대답했다.
“좋아요.”
발렌티나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하지만 그렇게 원군을 얻은 것처럼 좋아해 줘도 곤란하다. 난 일평생 서프라이즈 파티 같은 건 해 준 적도, 받아 본 적도 없었으므로 뭘 해야 할지 전혀 모른다.
아예 솔직하게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제가 뭘 하면 좋을까요?”
“음……. 오늘 될 수 있는 대로 생일 이야기는 아예 언급도 하지 마. 그게 첫 번째야.”
“아…….”
바로 이야기하려고 했었던 내 생각에 정반대되는 지시였다.
난 벌써부터 조금 걱정되었다. 아나스타샤와 반에 들어가서 만나도 생일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고 시치미를 떼고 인사만 나눌 수 있을까?
잠시 상황을 떠올려 보고 있는데, 발렌티나가 덧붙였다.
“걔가 조금 섭섭하게 느낄 정도로. 얘들은 내 생일도 까먹었나?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지. 오늘은 조금 거리를 두고 모른 척하는 것도 좋겠다.”
“…….”
“그리고 오늘 걔 레슨이거든? 그러니까 우리들은 스터디룸에다가 서프라이즈를 위한 준비를 해 놓는 거지. 필요한 건 나랑…… 에르네스트가 점심에 나가서 사 올 거야.”
“에르네스트요?”
“응. 같이 하기로 했어.”
내게 너무 어려운 일이 아닌가 갈등하고 있는데 발렌티나는 에르네스트의 이름을 언급했다.
도와줄 사람은 나뿐만이 아닌 듯했다. 그게 에르네스트라는 것을 알고 난 순간 마음이 조금 놓이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약간 놀랐다. 난 나도 모르는 사이 에르네스트를 이렇게나 믿고 있는 걸까.
어쨌든 그는 분명 유능한 사람이니까. 나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난 살짝 물어보았다. 두 사람이 나가서 필요한 물건들을 사 온다는데 날 가만히 놀게 둘 것 같진 않았기 때문이다.
“제가 도와 드릴 건요?”
“점심 식사 후에 이야기해 줄게.”
아마 스터디룸을 꾸미는 것을 하게 될 것 같았다. 풍선을 불거나 이러저런 꾸미는 일을 하게 될까? 생각해 보니 난 풍선도 불어 본 적이 없었다. 폐활량이 버텨 줄지 모르겠다.
그렇게 작전을 세운 나와 발렌티나는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하고는, 결연하게 반으로 들어섰다.
동시에 들어가면 의심을 살 수도 있으므로 내가 먼저 뒷문으로 들어가고 발렌티나가 잠시 텀을 두고 앞문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벌써부터 상당히 용의주도한 계획을 실행하고 있는 것 같아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바로 앞에 서 있던 밤색 머리칼이 흔들렸다. 같은 반의 라리사였다. 그녀가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생긋 웃으며 인사했다.
“타티아나, 좋은 아침.”
“좋은 아침이에요.”
그녀와 인사를 나누고, 창가 쪽으로 향하자 익숙한 친구들이 보였다.
“아나스타샤, 에르네스트.”
“왔어?”
아나스타샤가 의자에 옆으로 앉은 채 손을 흔들었다. 에르네스트 역시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난 친구들에게 인사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응. 날씨 좋네.”
아나스타샤는 오늘도 넥타이를 느슨하게 메고 블라우스의 팔을 걷은 차림이었다. 날씨가 정말 좋아졌다는 건 그녀의 옷을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원래대로였다면 지금 여기서 바로 아나스타샤의 생일을 축하한다고 말해 주고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
하지만 지금은 발렌티나와 계획 중인 서프라이즈를 준비해야 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난 어쩐지 가슴이 답답해져서 그녀의 옆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생일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다른 이야기라도 하면 될 텐데,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까지 말주변이 없었나 새삼 회의감이 들었다.
그렇게 로봇처럼 가방에서 책을 꺼내고 괜히 어수선하게 책과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타티아나.”
“예!?”
아나스타샤가 날 불렀다.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 대답하며 바라보자 그녀가 아늑하게 웃었다.
“나 오늘 생일인데 생일파티에 와 줄래?”
“……!?”
순간 머리가 백짓장처럼 새하얗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서프라이즈 파티 같은 건 아예 시작조차 할 수 없지 않은가? 아닌가? 그냥 하면 되는 건가?
머리가 극도로 혼란스러워졌다. 그 와중에 난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 아니에요. 제, 제가 아나스타샤의 생일을 잊고 있었던 게 아니라…….”
“타티아나! 나 잠깐만 목마른데 음료수 하나만 사 주라!”
“예? 예?”
“가자!”
뒤이어 어느샌가 들어온 발렌티나가 음료수를 사 달라고 하더니 내 손목을 낚아채서 끌고 나갔다. 난 미미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나스타샤를 두고 발렌티나에게 끌려 나갈 수밖에 없었다.
교실 밖으로 향하는 발렌티나가 중얼거렸다.
“작전상 후퇴, 작전상 후퇴.”
“…….”
작전상 후퇴가 아니라 이미 끝난 것 같은데요, 발렌티나.
우리는 그렇게 교실 밖 복도로 나갔다.
발렌티나가 벽을 노려보며 섰다. 난 내가 잘못했나 싶어 작게 말했다.
“제가 잘못한 걸까요.”
“아니, 아니야. 네 잘못은 아니지.”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분하다는 듯 말했다.
“으……. 내가 쟤 성격을 알면서도 생각을 잘못했네. 그렇게 치고 나올 줄이야……. 하아, 걔도 웃겨. 그렇게 먼저 말해버리면 대체 서프라이즈를 어떻게 하라는 거야?”
“……암묵적인 상호 협조가 중요한 것이었네요.”
“망했네.”
“어쩌면 좋을까요.”
내 말에 발렌티나는 더 이상 생각나는 게 없는지 입을 닫았다.
그녀로서도 아나스타샤가 이렇게까지 대놓고 오늘 생일인 건 너, 나,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니 숨기고 무언가 할 생각하지 말라고 나설 줄은 상상도 못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발렌티나는 불굴의 의지를 지닌 소녀였다.
“이렇게 된 이상 놀라게 하는 그 자체에 목적을 두자.”
“무슨 말씀이신가요?”
“몰래카메라를 하자고.”
특히 그게 아나스타샤를 놀리는 목적이라면 그녀의 의지는 더더욱 강인해졌다.
난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이 상황에서요?”
“…….”
발렌티나는 날 물끄러미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을 간파당했다 한들 굴하지 않는다.
“상관없어. 하자.”
“발렌티나……?”
그녀가 조금 과하게 흥분한 게 아닌가 싶다.
말려야 하지 않나 생각하는데, 뒤편에서 에르네스트가 막 교실 문을 열고 나왔다.
“발렌티나. 타티아나.”
“에르네스트.”
그는 우릴 보자마자 한마디 했다.
“너희들 연기자는 못 하겠더라.”
“…….”
옆에서 보기엔 아나스타샤가 내 태도만 보고 알아차린 것처럼 보였던 것 같다. 난 할 말이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피식 웃더니 아무렴 어떠냐는 듯 태연하게 말했다.
“어쨌든 아나스타샤는 이미 다 눈치챘어. 이제 와서 뭘 한들…….”
“아니, 몰래카메라 하자.”
“……뭐?”
발렌티나의 의지는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에르네스트가 교실 안쪽을 손짓하며 다시 말했다.
“이미 다 안다니까?”
“알아도 할 순 있잖아. 아나스타샤를 화나게 하거나 섭섭하게 만들기만 하면 우리의 승리야. 그렇지 않아? 에르네스트?”
이대로 물러설 순 없다는 듯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발렌티나가 말했다. 너무 올곧고 순수한 의지라서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다 옳은 것처럼 들리기까지 했다.
에르네스트도 그녀를 말리려다가 말고 헷갈린다는 듯 중얼거렸다.
“몰래 카메라는 그런 게 아니…… 그런 게 맞나?”
“창문에서 찍고 있어 볼래?”
그 격렬한 의지에 감화된 에르네스트는 대체 발렌티나가 무슨 일을 할지도 궁금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스마트폰을 들어 올렸고, 나도 그 옆에 섰다.
발렌티나는 당당하게 다시 교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곧장 아나스타샤를 불렀다.
“아나스타샤.”
“응? 왜.”
“그냥 알아 둬. 타티아나는 오늘 네 생일파티 못 갈 거야.”
“뭐?”
대뜸 너무 어이가 없는 소릴 해서 내가 다 소리를 칠 뻔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지금?
아나스타샤는 기가 찬다는 듯 대꾸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해?”
“진짠데? 아까 들었어. 네 생일인지 깜빡하는 바람에 오늘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 했대. 그래서 못 간대.”
발렌티나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황당할 정도로 당당한 태도였다.
난 창문 너머로 멍하니 발렌티나를 바라보았다. 아나스타샤가 정말 오해라도 하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제가 오늘을 얼마나 고대했는데.
발렌티나에게 약간 화가 나려는 찰나, 아나스타샤가 다시 조용히 그 모든 것을 부정했다.
“장난치지 마. 준비가 무슨 상관이야. 그 애가 안 올 리가 없잖아.”
“정말이라니까?”
“저번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는 듯 말하던 목소리도 발렌티나가 너무 어처구니없이 당당하게 말하자 점차 사그라들었다.
난 조금 충격이었다.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들은 아나스타샤가 그냥 발렌티나에게 헛소리하지 말라고 한마디 쏘아붙이고는 들은 척도 않을 줄 알았는데, 약간의 의심을 던져 넣은 것만으로도 그녀는 완전히 휩쓸려서 당황하고 있었다.
도저히 더 못 보고 있겠다. 참지 못하고 들어가려는데,
“물론 전부 거짓말이지만!”
“…….”
발렌티나가 작전 성공이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되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발렌티나의 즉석 거짓말은 너무 허술하기 짝이 없어서 이제 와서 거짓말이었다고 말해도 별 감흥도 없었다.
문제는 그걸 알면서도 아나스타샤가 평정을 잃고 불안에 잠겼었단 것이지만.
“야…….”
아나스타샤는 음울하게 발렌티나를 불렀다. 엄청나게 화가 난 모습이다. 그녀는 화가 나면 정말 무섭다.
어떻게든 그녀를 놀라게 해 보겠다는 의지만으로 움직이던 발렌티나가 분노한 아나스타샤를 마주하고서야 제정신을 차렸는지 움찔했다.
“아, 아나스타샤?”
“발렌티나, 너 이번엔 날 정말로 화나게 했어.”
“아니 잠깐만, 아나스타샤. 장난이잖아? 장난. 생일엔 원래 이렇게 하는 거야. 몰래카메라라구, 몰래카메라. 몰라? 저기 봐 봐. 애들이 찍고 있…….”
“조용히 해.”
“애들이 찍고 있……!”
아나스타샤가 손을 휙 뻗어서 발렌티나의 입을 틀어막았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속도다. 엇 하는 순간 발렌티나는 아나스타샤에게 붙잡혀 있었다.
한 손으로 입을 막는 것만으로도 발렌티나는 아무 신음도 못 내고 버둥거리기만 했다. 그 모습이 살벌하기 짝이 없어서 모골이 다 송연해졌다. 두 사람이 투닥거리는 것은 일상이지만 아나스타샤가 이렇게 무섭게 구는 것은 처음 보는 것 같다.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한 발렌티나를 아나스타샤가 혼내 주는 것은 적극 찬성이었지만 그녀를 죽일까 봐 걱정될 지경이었다. 생일 서프라이즈를 하다가 친구가 죽는 건 원하지 않는다.
“아나스타샤!”
“……타티아나.”
교실로 들어가 그녀를 부르자 한 손으로 발렌티나의 입가를 틀어쥔 아나스타샤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녀에게 말했다.
“아나스타샤, 저도 절 가지고 거짓말을 한 발렌티나에게 화가 나긴 했어요. 하지만 그건 제가…….”
“아니야. 발렌티나는 일부러 널 미끼로 삼은 거야. 몰랐던 건 아니야. 하지만…….”
“……예?”
무슨 말인지 몰라 되묻자 아나스타샤가 물끄러미 날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됐어…….”
맥이 풀린 듯 중얼거림과 동시에 손아귀의 힘도 풀렸다.
아나스타샤의 우악스러운 손에서 벗어난 발렌티나가 황급히 입가를 문지르며 말했다.
“죽는…… 줄 알았네.”
아나스타샤는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
“발렌티나.”
“어……. 어?”
하지만 발렌티나가 순진하게 대답하자 결국 어이가 없다는 듯 웃어버리고 말았다.
“악의가 없다는 건 알지만 장난 칠 거면 다른 애 끌어들이지 말고 네가 할 수 있는 걸로 해.”
“타티아나도 나랑 한편인데?”
“그 말이 아니…….”
아나스타샤는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말고 힘없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어딘가 조금 창피해하는 듯한 모습이다.
“아……. 오늘은 뭘 당해도 짜증 내지 않으려 했는데 짜증내버렸네. 진짜 대단하다, 발렌티나 너도.”
“내가 그건 자신 있거든.”
“칭찬 아니거든?”
발렌티나는 정말 훌륭하게 아나스타샤를 화나게 만들었지만 칭찬할 만한 일이 아닌 건 분명했다.
난 다시 아나스타샤가 발끈할 것 같아서 급히 끼어들었다.
“아나스타샤, 화내지 말아요. 저 오늘 까먹지 않고 있었어요. 이렇게 스케줄에도 등록해 놨고요……. 선물도……. 오늘 파티도 갈 거예요.”
결국 깨끗하게 다 털어놓았다. 스마트폰을 보여 주면서 내 스케줄에 오늘 아나스타샤의 생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까지 보여 주었다.
그걸 보고 나서야 아나스타샤는 완전히 화를 누그러뜨리고 웃어 주었다.
“응. 타티아나.”
진작에 그냥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발렌티나는 괜히 아나스타샤를 자극해서는…….
“…….”
하지만 발렌티나가 아나스타샤를 그렇게까지 기겁하게 만든 건 뜻밖이기도 했고, 아나스타샤는 기분이 상했을지 모르겠지만 난…… 사실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내가 정말 성격이 나쁘다는 걸 새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