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화
서프라이즈 파티를 해 주지 못한 것에 대해 발렌티나는 아쉬워했지만 그래도 곧바로 기운을 차렸다. 늘 긍정적인 행동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발렌티나의 장점 중 하나였다.
그녀는 아나스타샤의 옆에서 재잘거렸다.
“파티는 어디서 할 건데? 빌렸어?”
“아니. 우리 집에서 하려고.”
“집에서? 좁잖아.”
발렌티나는 당연하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아나스타샤의 집은 고급 주상복합아파트의 펜트하우스로, 워낙에 넓어서 출장 뷔페를 주문해도 될 정도였는데, 홈파티를 하기엔 집이 좁다는 소릴 하다니 조금 당혹스러웠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발렌티나의 말이 옳다는 듯 설명했다.
“그냥 크게 안 하려고. 그리고 이젠 날씨도 풀려서 옥상 쓰면 될 것 같아서. 얼마 전에 옥상 청소도 다 해 놨어.”
“그래? 누구누구 초대할 건데?”
“해 봐야 여기 있는 너희들이랑……. 글쎄.”
아나스타샤는 주위를 죽 둘러보더니 말을 흐렸다. 그녀는 친구가 그리 많지 않았다. 때때로 보이는 차가운 모습이 그런 벽을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딱히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지만, 그래도 나는 넌지시 제안했다.
“그래도 생일을 축하해 줄 친구들은 되도록 많이 초대하시는 것이 좋지 않나요?”
“네가 그런 말을 하니……?”
“아…….”
그녀가 날 보더니 살짝 눈을 흘겼다. 올해 초, 나는 내 생일이 언제인지도 기억하지 못해서 친구들을 한 명도 초대하지 않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 바 있었다. 그때 아나스타샤는 어떻게 스스로의 생일을 잊을 수가 있냐며 전화로 화를 내기도 했었다.
“이제 생각해 보면 이해가 가지만 말야.”
하지만 이제 그녀는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얼마 전 내가 기억상실이라고 말한 후 아나스타샤는 상당히 많은 부분에 대해 이해하게 된 것 같았다. 그녀가 그럴 때마다 난 묘한 감정을 느낀다.
아나스타샤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보더니, 목을 조금 더 쭉 펴고는 교실을 훑었다. 그러고는 시야에 스쳐 지나간 한 남학생을 발견했다.
“리처드도 오라고 할까. 작년엔 왔었는데.”
리처드도 어릴 때부터 중앙음악학교에 유학생으로 있었고, 아나스타샤와 오랜 친구였다.
아나스타샤는 그도 초대해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선 다가갔다. 부끄럼을 타거나 주저하는 모습은 전혀 없이 거침없는 발걸음이었다.
“리처드.”
“아나스타샤.”
리처드는 아나스타샤가 다가오는 기척을 미리 느끼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바로 말했다.
“생일 축하해.”
“……기억하고 있었어?”
“아니.”
“뭐야?”
아나스타샤가 무슨 소릴 하냐는 듯 묻자 리처드가 피식 웃었다.
“옆에서 이야기하는 거 다 들리잖아.”
“아무튼. 오늘 올래?”
“초대해 주는 건가?”
“응.”
“그럼 가야지.”
리처드는 가볍게 승낙했다.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옆을 향해 말했다.
“승우 한.”
“……?”
“내 생일인데. 너도 올래?”
스스럼없는 초대였다. 저번에 함께 식사도 하고 놀기도 한 이후로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감은 상당히 가까워져 있었다.
한승우는 그래도 조금 의외라는 듯 고민했지만, 곧 승낙했다.
“갈게.”
이렇게 초대까지 받았는데 별다른 이유 없이 가지 않는 것은 실례이기도 했다.
아나스타샤는 흡족하게 웃으며 방과 후 레슨과 연습이 끝나고 다시 반에 모여 있으라고 전했다.
반 친구들을 더 초대해도 좋겠지만, 아나스타샤는 누군가를 더 초대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 보였다.
***
방과 후, 아나스타샤까지 총 여섯 명은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평범하게 다 같이 지하철로 이동해도 될 일이었는데, 빅토르가 센스 있게 차량을 한 대 더 준비해 줘서 차 두 대로 이동하게 됐다. 난 아직도 지하철을 타 본 적이 없다. 대체 언제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게 될지 모르겠다.
그렇게 우리는 아나스타샤가 사는 프리스넨스키 지구의 아파트에 도착했다. 높다란 주상복합아파트는 저번에 봤던 대로 놀랄 만큼 고급스러웠다.
“…….”
한승우는 한눈에 보기에도 긴장해 있는 것 같았다.
난 괜히 그의 팔을 툭 쳤다. 한승우가 펄쩍 뛰며 날 내려다보았다. 내가 말없이 빤히 바라보자 곧 그는 긴장을 조금 풀어 힘 빠진 웃음을 지었다.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펜트하우스는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낯익은 두 분이 우릴 반겨 주었다.
“어서 오려무나. 연주회 때 보고 이렇게 또 보는구나. 리처드도 오랜만이고.”
“안녕하세요.”
“모두 들어오렴.”
우리는 아나스타샤의 부모님에게 인사를 드렸다. 몇 번 뵈었지만 정말 에너지 넘치고 유쾌한 분들이셨다.
아나스타샤의 어머니는 우리를 환영하며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살펴보듯 바라보셨다. 이미 다 알고 계시는 것이 분명했다. 한 명을 빼고.
한승우가 급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그, 한승우입니다.”
“처음 보는 친구도 반갑구나. 환영한단다.”
아나스타샤의 어머니는 환하게 웃으며 한승우의 어깨를 툭 쳐 주셨다. 한승우는 환영받는다는 것을 이해했는지 옅게 웃었다.
그렇게 부모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안녕하세요, 일리야.”
“오, 타티아나. 안녕.”
여전히 검은 머리에 약간 퇴폐적인 분위기마저 풍기는 아나스타샤의 오빠, 일리야가 손을 흔들었다. 장난스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오늘따라 표정이 밝아 보인다.
일리야가 히죽이며 말했다.
“아나스타샤가 오늘 기대 많이 하더라.”
“정말인가요?”
“그래. 옥상 청소해야 한다고 얼마나 닦달을 하던지…….”
“일리야!”
아나스타샤가 튀어나와 일리야를 가로막았다.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그래!”
“뭐가 쓸데없어.”
일리야는 아나스타샤가 으르렁거리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히죽거리기만 했다. 아나스타샤는 일리야가 더 이상 말을 못하도록 입을 틀어막고 싶어 근질거리는지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난 그녀를 콕콕 찔렀다. 아나스타샤가 날 돌아보았다. 그 얼굴이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미소를 지으며 살짝 물었다.
“기대 많이 하신 거네요?”
“으응…….”
아나스타샤가 작게 대답했고, 난 그 대답이 기뻤다. 아나스타샤가 기대해 주었고 거기에 응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아나스타샤의 어머니가 손짓하며 말씀하셨다.
“자, 올라갈까?”
“예.”
계단을 따라 옥상으로 향했다. 이 아파트의 옥상은 펜트하우스 거주자들의 사유 공간이었다.
그리고 5월의 옥상 정원은 지난겨울에 봤던 것과 차원이 다를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정말 예뻐요.”
“그렇지?”
아나스타샤의 어머니가 취미로 가꾸신다고 했었던 정원엔 막 파릇파릇한 잎사귀들이 피어나 생명력이 느껴지고 있었다. 꽃이 만발하면 정말 멋질 것 같다.
“앉자.”
아나스타샤가 정원 옆의 테라스를 가리켰고, 우리는 그쪽으로 향했다. 테라스는 큰 테이블에 바비큐를 구울 수 있는 그릴까지 설치되어 있는, 멋진 파티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우리는 자리에 앉았다. 잠시 담소를 나누고 있자니 아나스타샤의 어머니와 일리야가 다시 내려가 접시들을 가지고 올라왔다. 순식간에 테이블이 꽉 채워졌고, 우리는 그 가운데에 있는 2단 케이크에 주목했다.
아나스타샤의 아버지가 케이크에 초를 꽂았다.
“15개 맞지?”
“아빤 내 나이도 몰라?”
“맞겠지 뭐.”
아나스타샤의 핀잔은 들은 척도 않고, 아나스타샤의 아버지는 케이크에 초를 꽂았다. 말은 그렇게 대충 하셔도 정확하게 15개를 심혈을 기울여 균일한 간격으로 꽂으시는 걸 보니, 상당히 신경 쓰시는 모습이 보여서 웃음이 나왔다.
일리야가 그 초에 불을 붙였고, 모든 준비가 끝났다.
케이크도, 나이에 맞춘 초도 준비되었지만, 결정적으로 러시아엔 생일을 축하하는 노래가 없었다. 이것만이 다른 문화권과 약간 다른 것이었다.
다른 노래를 불러 줄 수도 있었지만, 아나스타샤는 그냥 케이크에 꽂힌 초를 훅 불어 껐다.
우리는 그에 맞춰 폭죽을 터트리고, 축하의 말을 건넸다.
“생일 축하해, 아나스타샤!”
“축하해.”
아나스타샤는 정말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고마워, 모두들.”
축하를 받으며 기뻐하는 아나스타샤는 무심코 사진을 찍어 보관하고 싶을 정도로 빛났다. 다행히 아나스타샤의 아버지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DSLR로 사진을 찍고 계시니 이 순간은 영원히 남게 될 것이다.
그렇게 모두에게 축하를 받으며 아나스타샤도 한 명 한 명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에게로 향했을 때, 아나스타샤의 아버지는 카메라를 놓고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양 귀를 잡았다.
세게 잡은 것은 아니었다. 정말 가볍게, 살짝 쥐었다.
귀를 잡힌 아나스타샤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아빠!”
이쪽을 힐긋거리는 것이 창피하다는 투지만 싫은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아나스타샤의 아버지는 웃으며 그녀의 귀를 위로 당겼다.
아나스타샤가 입을 삐죽였다.
“하지 말래두……. 창피하다고.”
아나스타샤가 이렇게 칭얼거리는 말투를 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얌전히 눈을 감았고, 아나스타샤의 아버지는 신경 쓰지 않고 가볍게 툭툭, 아나스타샤의 양 귀를 당겼다.
난 그 광경을 보면서 불현듯 기억 속에서 지나갔던 한때를 떠올렸다. 다름 아닌 내 생일에 있었던 일이었다.
그때 아버지는 내 뒤에서 직접 목걸이를 걸어 주시고는 갑자기 내 귀를 잡고 살짝 당기셨다. 난 그것이 그저 장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아무 생각 없이 넘겼었는데, 이제 보니 단순한 장난이 아니라 생일에 관련된 러시아의 어떠한 전통적인 의식인 것 같았다.
난 유심히 아나스타샤의 아버지가 하시는 것을 바라보았다. 한 번 당기고 놓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15번 당기셨다. 나이에 맞춰서 하는 것이 분명했다.
문득 내 때를 떠올렸다. 아버지는 내 귀를 한 번 당기고는 놓으셨다. 그 의미는 내 나이를 한 살로 기념하는 것이었다.
“…….”
이러저런 기억들이 떠올랐지만, 지금은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무엇보다, 얼굴을 붉힌 채 귀를 잡힌 아나스타샤만큼 보기 드문 광경이 없었다. 난 지금이라도 사진을 찍으면 어떨까 생각했지만 그녀가 화낼지도 몰라서 그만두었다.
“우후후후.”
대신 겁 없는 발렌티나가 스마트폰을 들고는 셔터 버튼을 연타하고 있었다.
다음에 공유해 달라고 해야지.
이윽고 선물을 건네는 시간이 찾아왔다. 가장 먼저 아나스타샤의 가족들이 그녀에게 저마다 선물을 주었다.
“여기, 아나스타샤.”
“고마워. 이거 뭐야?”
“네가 저번에 사고 싶다고 했던 거란다.”
아나스타샤가 그게 무엇이었는지 생각하는지 눈을 깜빡였고, 난 숨을 죽였다. 하지만 일부러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아나스타샤의 어머니가 건네 준 포장된 상자는 크기가 상당히 컸으니까.
포장을 풀자 보랏빛 원피스가 그 안에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그녀의 어머니를 껴안으며 고마움을 표현했다.
다음으로 아나스타샤의 아버지가 지갑을 선물로 주었고, 일리야는 시집을 선물했다.
난 아나스타샤가 시집을 그렇게 좋아하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그녀는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심지어 일리야를 오빠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일리야는 녹음을 해야겠다며 다시 한 번 말해 달라고 했고, 아나스타샤는 혀를 내밀었다.
아나스타샤의 가족들이 선물을 모두 건네주었고, 다음은 친구인 우리의 차례였다. 발렌티나를 필두로 한 명씩 준비해 온 선물들을 주었다.
그녀의 취향을 잘 아는 발렌티나는 화장품을 선물했고, 에르네스트는 클렌징 제품을 선물해 주었다. 아나스타샤가 뭘 좋아할지 남자인 그는 잘 모르니, 아예 뭘 쓰더라도 필요한 클렌징 제품을 선택한 것 같았다. 그런 부분은 섬세하고도 현명했다. 에르네스트는 가끔 이렇게 사람을 놀라게 한다.
그리고 리처드는 작은 탁상시계, 한승우는 귀여운 텀블러를 선물했다.
마지막으로 내 차례였다.
“아나스타샤. 여기…….”
“고마워!”
아나스타샤는 정말 기뻐하며 내 선물상자를 받아 들었다. 다른 상자에 비해 상당히 작았다. 하지만 그녀는 기대감을 감추지 않고 흥미진진한 얼굴로 포장을 풀었다.
그리고 고급스러운 케이스와 그 안에 든 물방울 모양의 귀걸이 한 쌍을 발견하고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타티아나……? 이거…….”
“생일 축하해요, 아나스타샤.”
난 이렇다 저렇다 할 것 없이 그렇게 말했고, 아나스타샤는 다짜고짜 날 끌어안았다. 난 가볍게 그녀를 토닥였다.
“이 귀걸이……. 정말 기뻐, 타티아나.”
“다행이에요. 좋아해 주셔서 저도 기뻐요.”
“응. 응.”
아나스타샤는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한눈에 봐도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며칠 전부터 고민해서 고른 보람이 있었다.
조금 속물적으로 생각하자면 이 귀걸이가 가장 비싼 물건이겠지만, 아나스타샤는 그 가격 때문에 이렇게 기뻐하는 것 같진 않았다. 내가 그녀와 함께 지나쳐 갔던 것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감동을 받은 표정이었다.
“아나스타샤.”
“응.”
“제가 달아 드려도 될까요.”
“……응?”
아나스타샤는 말을 하는 법을 잊어버렸는지 그렇게 소리를 냈고, 난 내밀어진 귀걸이를 하나 집고는 그녀의 옆으로 슥 돌아갔다.
이미 귀를 뚫은 지 오래되었는지 귓불에 구멍이 있었다. 조심스레 뻗은 손이 그녀의 귓가에 닿았다. 아나스타샤가 소스라치는 것이 그대로 진동으로 전해져 왔다.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렇게 긴장하는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은 듯하다.
순간 이상하다는 기분이 엄습했다. 귀걸이라는 게 이렇게 다른 사람이 해 줘도 되는 물건이던가?
내가 생일에 목걸이를 선물 받았을 땐 자연스럽게 아버지가 직접 채워 주셨기 때문에 별달리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는데, 같은 액세서리라도 귀걸이는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아나스타샤도 답잖게 굉장히 긴장하고 있는 것 같고.
목에 목걸이를 채우거나 손에 반지를 끼우는 것과 달리 귀를 타인에게 맡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여기서 그만두기에도 어색했다. 조금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며 그녀의 귀에 귀걸이를 마저 달아 주었다.
다시 아나스타샤와 마주 본 난 어색함을 느끼지 않도록 될 수 있는 한 태연하게, 그리고 진심으로 미소를 지었다.
“예뻐요, 아나스타샤.”
“정말……. 갑자기 놀랐잖아.”
아나스타샤가 약간 볼멘소리를 냈다.
그녀는 놀랐을지 모르겠지만, 난 이렇게 그녀를 축하해주길 잘 했다는 생각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