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241화 (241/1,277)

##  241화

본격적으로 파티가 시작되자 아나스타샤의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남자들, 이리 와 봐라.”

일리야와 에르네스트, 리처드, 한승우가 고개를 들었다. 난 발렌티나와 이야기를 하다 말고 무슨 일인가 싶어 그쪽을 바라보았다.

아나스타샤의 아버지가 바비큐 그릴 앞에 섰다.

“바비큐 직접 해 본 사람 있나?”

“먹어 본 적은 있어도…….”

“없어요.”

“꼬챙이 돌려 본 적은 있는데 팔 빠지는 줄 알았죠.”

남자들이 한마디씩 대답했다. 난 이렇게 야외에서 바비큐라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는데 다들 어떻게든 접해 본 적이 있긴 한 모양이다.

자신 없는 대답들을 듣고도 아나스타샤의 아버지는 만족스럽다는 듯 호탕하게 웃으셨다.

“그럼 아저씨가 가르쳐 줄 테니 잘 봐라. 이젠 너희들도 배워서 할 줄 알아야지. 러시아 남자로 다른 요리는 할 줄 모르더라도 바비큐는 할 줄 알아야 하니까.”

“여기 얘네 둘은 외국인인데요?”

“그게 무슨 상관이냐, 일리야. 바비큐를 할 줄 아는 순간 러시아 남자가 되는 거다.”

“…….”

일리야가 리처드와 한승우를 지목하며 의문을 제기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나와 아나스타샤, 발렌티나 세 명은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빠는 바비큐 애호가거든.”

“굉장히 좋아하시는 것 같네요.”

“기본적으로 저런 걸 조금 좋아하셔. 저 그릴도 직접 만드신 거다?”

“정말요?”

“응. 여기 이사 오기 전에 주택에 살 땐 집을 거의 혼자 뜯어 고치시기도 했고.”

아나스타샤는 테이블에 턱을 괸 채로, 조금 부끄러워하면서도 자랑스러운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녀가 정말 뭐든지 잘하는 것도 아버지를 닮은 걸까.

그리고 그녀가 이렇게 파티장이 아닌 야외 테라스에서 생일파티를 하는 쪽을 선호하는 것도 아버지의 영향을 적잖이 받은 것 같았다.

바비큐 그릴 앞에선 아나스타샤의 아버지가 남자애들을 러시아 남자로 만드는 강의가 한창이었다.

“숯을 쌓는 것부터가 중요하니 봐라. 이렇게 쌓으면 된다.”

“그냥 불붙이면 안 돼요?”

“해 봐라. 그냥 붙일 수 있으면 1천 루블 주마.”

저기, 아저씨. 그건 좀…….

하지만 1천 루블이라는 상금의 효과는 확실했다. 남자애들은 모두가 숯에 불을 붙이기 위해 달라붙었다.

가스 토치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난 혹여나 누군가 다치진 않을까 조마조마하면서 지켜보았다.

다행히, 종종 찾아오던 공황은 잠잠했다. 조금 불안하고 가슴이 뛰지만 그래도 버틸 만했다. 지켜보는 사람도 많고 어른도 있어서 안심이 된 것 같았다. 아니면 몇 번 공황을 겪으면서 적응이 되었을지도 모르고.

조용히 바라보길 몇 분이나 지났을까. 결국 상금 1천 루블을 타 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나스타샤의 아버지가 보란 듯이 웃었다.

“왜 숯에 불붙이는 법부터 배워야 하는지 알겠지?”

“잘 안 되네요.”

“이 구조를 잘 봐라. 공기가 잘 통하게 되어있지. 이렇게 말이다.”

한 번 모두가 실패한 뒤라서 그런지 모두들 더더욱 열의를 불태우며 눈을 빛냈다. 아나스타샤의 아버지는 그런 태도들이 마음에 드는지 유쾌하게 설명을 이어 나갔다.

이윽고 불이 붙은 바비큐 그릴 앞에 모인 남자들 사이에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

난 약간 아련하게 그것을 지켜보다가 말했다.

“아버지께서 굉장히 즐거워하시는 것 같네요.”

“응. 일리야는 뺀질거리는 면이 있어서 아빠가 같이 뭘 좀 하자고 그러면 잘 안 하거든.”

“아하하하, 정말요?”

“딱 봐도 그렇게 보이지 않아?”

“지금은 적극적으로 하시는 것 같은데요.”

“옆에 다른 애들 있어서 그래.”

우리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웃었다. 숯에 불을 붙인 다음에는 소스를 만드는 강의가 계속되고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작게 말했다.

“참 좋네, 이런 거.”

아나스타샤는 흐뭇하게 불이 붙은 바비큐 그릴 쪽을 보고 있었다.

나 역시 이런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저렇게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아들뻘의 어린 애들이 모여서 함께 무언가를 하는 것은, 단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져 갔다. 이렇게 지켜보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쇠꼬챙이에 끼워서 굽는 로티세리rotisserie 방식으로 하면 오늘 밤새야 할 테니 오늘은 바로 할 수 있게 해 보자꾸나.”

“고기를 굽는데 밤을 새나요?”

“소스를 발라 가면서 최소 3-4시간은 구워야 하니까 말이다.”

숯에 붙은 불이 잦아들어야 진짜 숯불이 완성된다고 한다. 그 전에 아나스타샤의 어머니가 고기를 가지러 가겠다며 일어서자, 발렌티나가 도와 드리겠다며 따라 나갔다. 나는 아나스타샤와 함께 샐러드를 접시에 나누었다.

파티는 점점 무르익어 갔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남자들은 케이크를 먹고 즐기는 와중에도 아나스타샤의 아버지에게 이미 다들 동화되어선 바비큐에서 신경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계속 소스를 바르고, 숯불을 관리한다.

그저 앉아서 준비된 식사를 하는 것보단 직접 고기를 굽고 무언가를 만들면서 하는 것을 더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와 이야기를 하며 잠시 기다리자 곧 에르네스트와 리처드가 접시를 들고 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아가씨들.”

“자, 너희들 거.”

장난스레 말하는 리처드와 달리 에르네스트는 조금 쌀쌀맞았다. 하지만 접시 위에 놓인 바비큐는 우리가 한 입에 먹기 좋도록 썰려 있었다.

접시를 받으며 감사 인사를 했다.

“고마워요. 에르네스트, 리처드.”

“응.”

에르네스트가 무뚝뚝하게 건네주고는 내 시선을 슥 피했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아나스타샤는 접시를 보더니 말했다.

“이거 부위가 다르네?”

“부위별로 각각 한 덩이씩 구웠거든.”

남자가 다섯 명이나 되다 보니 종류별로 하나씩 맡아서 굽기로 한 것 같았다.

난 아직도 고기 부위를 잘 구분하지 못하지만 얼핏 다르다는 건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중에 에르네스트와 리처드가 각각 어떤 것을 맡았는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장 오른손 가까이에 있는 것을 집어서 입에 넣었다.

진한 소스의 풍미와 숯불의 향이 입안에 가득해졌다. 즉석에서 구운 바비큐는 상상 이상으로 맛있었다.

“맛있어요.”

“다행이네.”

에르네스트는 물끄러미 날 내려다보더니 그제야 옅게 웃음기를 보였다. 방금 먹은 부위가 에르네스트가 신경 쓴 부위인 모양이다. 그도 음식을 만들어 다른 사람에게 먹일 때 느끼는 행복감을 느끼고 있는 걸까.

그런데 리처드가 불쑥 끼어들었다.

“덜 익진 않았어? 아까 자를 때 보니까 에르네스트 거 조금 덜 익은 것 같던데.”

“헛소리 마. 제대로 익혔으니까.”

“글쎄다.”

두 사람은 다시 티격태격하며 바비큐 그릴 쪽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아나스타샤의 생일이니 많이 자제하는 모습이었다.

고기뿐만 아니라 새우와 소시지도 그릴 위에서 구워져 나왔다. 케이크와 바비큐 요리들은 생각보다 잘 어울렸다. 신기할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식사를 하다 보니 에르네스트도 어느새 테이블에 와서 앉아 있었다. 자신의 몫의 접시들을 앞에 두고는 나이프로 자르고 있는 중이었다.

“바비큐 고생 많았어요, 에르네스트.”

“별로……. 아나스타샤의 아버지가 다 하셨지.”

에르네스트는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조금 보람을 느끼는 듯한 얼굴이었다.

샐러드를 오물거리던 발렌티나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저기, 있잖아. 에르네스트가 다음 달이지?”

“어? 뭐가.”

“생일 말야. 6월 16일. 그치?”

정확한 날짜를 말하자 에르네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한데.”

“에헤헤, 그냥.”

발렌티나는 귀엽게 웃으며 다시 포크를 움직였다. 그냥 확인해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다음으로 이어지는 에르네스트의 말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그런데 나 그때 연주회라서 아마 이렇게 파티를 하긴 힘들 거야.”

“……어?”

막 포크를 쥐고 있던 발렌티나의 손이 우뚝 멈춰 섰다.

나 역시 하던 모든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무슨 말을 들은 건지 모르겠다.

“연주회요?”

“응. 스위스에서 그쪽 필하모닉이랑 협연.”

“스위스!? 잠깐만요, 아무 말도 없었잖아요?”

“결정된 지 얼마 안 됐거든. 그리고 굳이 말하기도 조금 그렇잖아.”

에르네스트는 우리를 보며 말했다. 하지만 아무도 묻지 않더라도 해외에서 오케스트라와 연주회가 있다면 말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않은가?

나도 모르게 약간 섭섭한 투로 말이 나왔다.

“그래도…… 생일에 모스크바에서 떠나 계실 줄은…….”

“나도 피하고 싶었지. 더군다나 학기말이기도 하고. 그런데 에이전시에서 스케줄을 잡다 보니 그렇게 되어버렸어.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

에르네스트도 굳이 그때 연주회를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었다. 느긋하게 날짜를 고를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대관할 수 있는 홀은 늘 비어 있지 않았고 오케스트라 역시 늘 시간을 비워 두고 어린 연주자를 위해 대기 중인 것이 아니었다. 연주자가 순서와 기회를 얻기 위해선 자신의 편의에 맞추지 못하는 부분도 많은 것이다. 그것은 아무리 에르네스트라도 어쩔 수 없었다.

아마 그는 저울에 달아 볼 것도 없이 고민 않고 생일을 내려놓았을 것이다.

난 조용히 납득했다.

“그렇군요…….”

“정말 어떻게도 안 되는 거야? 응?”

“이젠 안 돼.”

“말도 안 돼…….”

미련이 남은 발렌티나가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렸다.

난 혹시나 싶어 말했다.

“그렇다면 미리…….”

“타티아나.”

미처 다 말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아나스타샤가 내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미리 생일을 축하하거나 하면 안 돼.”

“……아, 그런가요?”

“응. 금기야. 안 돼.”

그녀가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상당히 엄격한 금기인 것 같았다.

아직 모르는 것이 많은 내가 다른 친구들에게 이상하게 여겨질 수 있는 말을 꺼내기 전에, 아나스타샤는 적절히 막아 주었다.

떠들썩한 바비큐 쪽의 소리를 들으며 우리들은 잠시 침묵했다. 그때 발렌티나가 좋은 방법이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우리가 그날 따라갈까? 에르네스트 연주회도 보고 파티도 해 주고 말야.”

“스위스까지 온다고?”

“그럼 안 돼?”

발렌티나는 에르네스트를 꽤 오랫동안 좋아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연주회를 한다면, 그것도 그게 생일날이라면 스위스가 아니라 어디라도 따라가고 싶어 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사실 나도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했던 콩쿠르에도 내 친구들은 함께 해 주었다. 그게 스위스가 되더라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스위스로 가려면 비행기를 타야 하겠지만 우리 집엔 전용기가 있었고, 그게 안 된다면 평범하게 여객기를 타도 될 일이었다.

해외에서 열리는 연주회를 따라가 관람하는 것은 우리에겐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문제는 에르네스트가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였다.

그의 눈이 발렌티나를 바라보다가, 내 쪽으로 돌았다.

순간 느낄 수 있었다. 그냥 그가 모든 것을 모른 척하고 와 달라고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흔들리는 눈동자에서 분명하게 읽을 수 있었다.

연주자로서 자신의 생일보다 무대를 우선시할 정도로 프로페셔널하게 행동하고 있어도, 그도 열다섯 살인 것이다.

하지만 그가 입 밖으로 낸 말은 정 반대였다.

“그러진 마. 시험 기간이기도 하고.”

“그래도…….”

“너무 신경 쓸 필요 없어.”

내가 생일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말했을 때 아나스타샤가 왜 화를 냈었는지 이해가 될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도 이렇게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약간 기분이 축 처졌다.

에르네스트는 급히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아, 아무튼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오늘은 아나스타샤의 생일이잖아? 저 애나 축하해 주자고. 음……. 난 잠깐 그릴 보러 갈게.”

그도 이 상황에서 더 길게 이야기하고 싶진 않았던 모양이다.

난 속으로 별의별 생각을 다 했다. 색다른 방법으로 생일을 축하해 줄 방법들부터 그가 생각도 못한 타이밍에 몰래 찾아가는 것까지. 사실상 난 모든 것을 다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를 존중한다면, 그렇게까지 할 순 없었다. 그가 부담을 가지는 것은 정말 원치 않는다.

물끄러미 테이블 위를 보던 아나스타샤가 툭 던지듯 중얼거렸다.

“쟤는 멀쩡하다가도 가끔 이상하다니까. 자기 생일에 연주회를 잡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

“어쩔 수 없었다고 하시잖아요……?”

“그래도 말이지.”

아나스타샤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말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난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생일은 1년에 한 번 있는 기념일이고 정말 중요했다. 그러나 연주자에게 있어서 무대는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내 가치관은 에르네스트와 닮은 구석이 많았고, 때문에 난 어렵잖게 납득했다.

그렇지만 연주자로서의 존중은 존중이고, 친구로서의 도리는 도리였다. 내가 말했다.

“연주회 끝나고 돌아오신 후에는 상관없겠죠?”

“응?”

“파티 말예요.”

미리 축하하는 것이 어떠한 금기로 되어 있다면 지나간 다음엔 괜찮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내 말에 아나스타샤가 잠시 날 바라보더니, 대답해 주었다.

“뭐 상관은 없지만, 쟤가 돌아오면 뭐 해 주려고?”

“서프라이즈 파티 괜찮지 않을까요?”

그리고 약간 침울해 있던 발렌티나가 반응했다.

“그거 정말 괜찮다, 타티아나!”

생일이 지난 후에 서프라이즈 파티를 해 준다는 것은 조금 이상할진 모르겠지만 연주회를 마치고 돌아온 에르네스트에게 연주회의 축하연과 동시에 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피식 웃어버렸다.

“쟤는 정말 운 좋은 줄 알아야 해.”

“무슨 말이야?”

그녀는 포크로 고기를 쿡쿡 찍으며 말했다.

“저렇게 자기 생일도 안 챙겨도 우리가 챙겨 주려고 하잖아.”

“……?”

“서프라이즈라. 리처드를 꼬셔 볼까…….”

어쩐지 굉장히 무섭게 들리는 목소리로 아나스타샤가 중얼거렸고, 난 그녀가 에르네스트와 사이가 안 좋은 리처드를 데리고 무엇을 할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급히 그녀를 불렀다.

“아나스타샤! 일단 오늘은 아나스타샤의 날이잖아요?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파티를 즐기도록 하죠?”

“응? 물론이지.”

그녀는 곧 생글거리며 내게 잔을 내밀었다. 난 주스가 든 잔을 들어 그녀와 건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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