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2화
따사로운 봄기운은 점점 더 깊어져 6월이 되었다.
계절로 보자면 한창 활동하기 좋은 날씨가 되었지만 학생들은 마냥 놀러 다니거나 할 수 없었다. 학생들에게 있어선 가장 중요한 달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 전 지역의 학교들이 시험 기간에 돌입했다. 중앙음악학교 역시 시험 기간이었다.
그리고 우리 8학년들은 지금 이 시험이 곧 9학년 진급시험이기도 했다.
중앙음악학교의 교칙은 상당히 엄격해서, 9학년 진급시험에서 일정 점수 이상을 받지 못하면 아예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야 할 정도였다. 때문에 평소 시험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던 학생들도 이번 시험만큼은 열심히 공부하곤 했다.
일반 교과는 물론이고 음악사와 음악이론, 거기에다가 실기시험까지. 해야 할 공부가 많다.
“…….”
나 역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시간은 12시가 막 지나가고 있다.
뚫어져라 책을 내려다보다가, 순간 초점이 흐릿해짐을 느꼈다. 고개를 들고 목을 스트레칭했다. 알렉산더 테크닉으로 목과 어깨의 긴장을 풀면서 책상 앞에서 뻣뻣해진 몸을 풀어냈다.
“후우…….”
몸은 조금 개운해졌지만 눈은 여전히 피로했다. 무리하다가 안경을 쓰고 싶진 않았다.
잠시 눈을 감고 아무것도 보지 않고 있자니, 어두컴컴한 세계에서 방금까지 보고 있었던 책의 내용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이 늦은 시간까지 붙잡고 끙끙거려야 하는 원인이기도 했다.
책의 이름은 우정에 대하여.
제목처럼 우정에 대해 다루는 재미있는 소설이었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기원전 로마 시절의 정치가이자 문인이었던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저서였다.
시험 기간에 이런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중앙음악학교의 고학년, 즉 9학년부터 치러야 하는 시험엔 논술시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 사람들은 음악과 수학, 과학 등에 강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 모든 기반엔 문학과 철학이라는 비옥한 토양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학생들은 인문학적인 질문에 논리적인 답변을 할 수 있도록 공부해야 했고, 그건 평소 하고 있는 생각을 단순히 적어 내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올바르게 알고 있는 것이 있어야 쓸 수 있는 것도 생기는 것이다.
난 작년까지만 해도 이러한 인문학적 소양이 엉망이었지만, 그런 날 걱정한 미하일 선생님이 여러 책을 추천해 주신 덕분에 이젠 조금 어려운 책을 읽어도 어렵잖게 이해할 수 있었다.
“…….”
그래도 이 책은 정말 머리 아프다.
특히 고결함과 자아, 삶과 운명에 관한 이야기들은 이해해 보려 할 때마다 날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내가 조금 더 똑똑한 사람이었다면 이런 논제들에 대해 명확한 답을 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난 그렇게 머리가 좋지 못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그저 머리만 아플 뿐이다.
“…….”
잡생각이 끼어들려 한다. 정말 그만해야지.
눈을 뜨자 다시 세상이 보인다. 난 손을 뻗어 나제즈다가 끓여다 준 찻잔을 잡았다. 처음 가져다주었을 땐 따뜻했던 캐모마일 차는 책을 보는 사이 식어 있었다.
식은 차만큼 별로인 것도 없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마셨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미지근한 찻물이 목을 적셨다.
책을 덮고 스마트폰을 들었다. 벼락치기에 열심일 아나스타샤는 아마 오늘 밤을 새워 공부할 것이다.
난 한창 집중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녀에게 괜히 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러한 생각과 달리 손가락은 거의 자동적으로 메시지를 입력하고는 전송해버렸다.
[공부중이신가요?]
보내고 나서 아차 싶었는데, 곧바로 답장이 돌아왔다.
[아니.]
내일 시험은요?
[그럼 무엇을 하고 계신가요?]
[명상 중이야.]
난 어이가 없어서 웃어버렸다.
말이 명상이지 천장 보면서 멍 때리고 있을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역시 그녀도 시험공부는 상당히 괴로운 모양이었다.
[저도 방금 전까지 눈을 감고 명상했어요.]
[눈을 감고? 지금 눈을 감고 어떻게 잠들지 않을 수가 있어? 아니면 너 혹시 지금 자면서 메시지 보내고 있는 거니?]
[그럴지도요.]
[정말 초인이 되어버렸구나, 타티아나.]
아나스타샤는 이모티콘이나 그림 메시지 같은 것을 거의 쓰지 않지만 이번엔 작은 토끼가 기겁을 하는 듯한 그림을 보냈다. 토끼라니, 귀여워라.
내가 느끼기에 그녀의 이미지에 어울리는 동물은 사실 늑대나 표범 같은 종류이지만, 토끼도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난 웃으며 메시지를 썼다.
[아나스타샤는 밤새실 건가요?]
[아마도.]
[전 자야겠어요.]
[치사해!]
시험을 앞두고 문장으로 마주하는 아나스타샤는 확실히 평소보다 귀여웠다.
난 의자에 기대어 앉은 채 그렇게 아나스타샤와 메시지로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시험에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복잡한 이야기는 없는, 실없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아나스타샤도 평소보다 조금 더 발랄한 투로 답장들을 해 왔다.
그렇게 10분 정도 대화를 나누었을까, 난 둘 중 누군가가 먼저 현실로 눈을 돌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먼저 말했다.
[더 방해하지 않을게요.]
[방해는 아니었어. 덕분에 잠이 깼으니까.]
[다행이에요.]
[고마워. 다시 공부 시작해야겠네.]
[열심히 하세요.]
[너도.]
아나스타샤는 마지막으로 어디론가 열심히 달려가는 토끼를 보냈고, 그 후로는 말이 없었다. 다시 책상 위로 집중하기 시작한 것 같다.
메시지는 말없이 손가락으로 스마트폰의 화면을 톡톡 터치해서 보내는 것이었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하지만 아나스타샤와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을 멈추는 순간 주위가 훨씬 더 고요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나는 기지개를 한 번 더 펴고는 덮여 있던 책을 폈다. 원래는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들 생각이었는데, 아나스타샤가 벼락치기를 저렇게 열심히 하니 나도 조금 더 해야 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
문학 필기시험을 마치고 답안을 제출했다.
답안을 내고 나서도 제대로 썼는지 머릿속에서 내가 썼던 문장들이 촤르륵 지나갔다.
실수를 한 부분은 없는 것 같다. 난 계속 쥐고 있었던 펜을 내려놓았다.
문학 선생님이 우리가 제출한 답안지를 거두어선 교실 밖으로 나갔고, 교실은 순식간에 왁자지껄해졌다.
아나스타샤가 옆에서 내 어깨를 찔렀다. 돌아보니 그녀는 간밤에 정말 못 잤는지 눈가가 퀭했다. 하지만 그 입가에 걸린 미소를 보니 밤을 샌 보람이 있는 듯했다.
그녀가 물었다.
“딱히 어렵진 않았네. 그렇지?”
“예. 평범했던 것 같아요.”
문학 시험은 그리 어려울 것 없었다. 미리 외워야 했던 시 몇 편을 외워서 적고, 몇 가지 소설의 발췌문을 읽고 답하는 것이었다.
난 아나스타샤와 문제로 나왔던 시들을 즉석에서 암송했다. 바이런과 주콥스키, 투르게네프의 시들이었다. 우리는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암송할 수 있었고, 서로를 보며 웃었다.
아나스타샤와 나는 확실히 잘한 것 같고, 다른 친구들이 조금 신경 쓰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딱 한 사람이 유독 내 시야에 잡혔다.
내가 뒤쪽을 힐끔거리자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우리는 뭐 잘 봤을 거고, 걔도 잘 봤나 물어볼까?”
“누구 말씀이세요?”
“누구긴 누구야. 승우 한이지.”
약간 놀랐다. 나도 지금 가서 이야기를 해 볼까 말까 고민 중인데 아나스타샤가 먼저 이렇게 한승우에게 가 보자고 할 줄은 몰랐다.
난 한 걸음 물러섰다.
“잘했겠죠.”
“그래도 타티아나 넌 궁금해할 것 아냐?”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아랑곳하지 않고 날 이끌고는 교실 뒤편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자리에 앉아 있는 한승우에게 쾌활하게 말을 걸었다.
“승우 한. 시험 어땠어?”
한승우는 이제 아나스타샤에게도 서먹하게 굴거나 하지 않았다. 그가 웃으며 답했다.
“잘 본 것 같아. 고마워.”
“고맙긴.”
아나스타샤는 시크하게 대답했고, 이어 한승우는 내게도 말했다.
“타티아나도 고마워. 네가 도와준 덕분이야.”
“…….”
난 여기서 당당하게 생색을 내기도, 다시 한 번 그에게 잘 하라고 응원하기도 어색했다. 그냥 별생각 없이 말하면 될 일인데도 어쩐지 입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다.
대신 짧게 전했다.
“같이 9학년이 되자.”
“알았어.”
한승우는 자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그는 늘 시원스레 대답하고, 열심히 노력하곤 했다. 이 노력에 마땅한 보답이 돌아갔으면 좋겠다.
이어서 점심시간 전에 실기시험이 시작되었다.
모든 학생이 각자 악기를 들고 동시에 실기시험을 칠 순 없었기에 날짜에 맞춰서 시험을 보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내 실기시험 날짜는 바로 오늘이었다.
이틀 뒤에야 실기시험을 치게 되는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차라리 빨리 치고 끝내는 게 좋은 것 같기도 해. 중간에 실기시험 치려면 신경 쓰이잖아.”
“그렇기도 하죠.”
“어쨌든, 오늘 잘 해.”
“고마워요.”
실기시험의 순서는 중요한 일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크게 연연하지 않는 편이었다. 시험도 실전이라고 생각한다면 크게 다를 것 없었다.
미리 전달받은 연습실엔 무작위로 피아노과 선생님 두 분이 계실 것이다. 그리고 학생은 선생님의 앞에서 과제곡으로 준비한 곡을 연주하면 된다. 곡에 따라 짧게는 10분에서 길게는 30분 정도 걸린다.
매번 실기시험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작은 콩쿠르에 임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연습실은 무대고 선생님들은 심사위원이라고 생각하면 더 긴장할 학생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나는 되레 더욱 차분해졌다. 보다 실전에 가깝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는 차갑게 식었고, 감각은 보다 예민해졌다.
예전에 니콜라이 선배가 말했던 무대체질이라는 말이 이런 것을 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
연습실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화장실에 가서는 거울을 보며 매무새를 정돈했다. 빗을 꺼내 머리를 다시 빗고, 넥타이도 조금 더 단정하게 바로잡았다.
드레스가 아닌 교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손댈 부분은 없었지만, 그래도 연주자로서 평가받는 자리에 서야 한다면 이렇게 마지막 체크도 없이 그대로 들어갈 순 없는 일이었다.
“…….”
모든 것을 완벽하게 정돈하고, 연습실로 향했다.
문 밖에 얌전히 서서 노크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입니다.”
“들어오세요.”
연습실 안에서 허락이 떨어졌다. 여성분의 목소리였다. 난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익숙한 연습실은 실기시험장으로 세팅되어 있었다. 기다란 책상과 의자가 두 개 놓여 있었다. 그리고 거기엔 선생님 두 분이 앉아 계셨다.
두 분 다, 아는 분들이었다.
“어서 와요, 타티아나.”
“안녕하세요, 예브게니아 선생님.”
지긋하게 나이가 든 노년의 여선생님의 이름은 예브게니아 니콜라예브나 말로바. 내 편입 시험 때 계셨던 시험관 중 한 분이셨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한승우를 멀리 한국에서 콘탁으로 데리고 와서 제자로 삼은 지도 선생님이기도 했고.
직접적으로 레슨을 받거나 수업을 들어 본 적은 없었다. 중앙음악학교엔 선생님들이 많았지만 그중 정말 사사하게 되는 분들은 몇 안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한 번쯤은 레슨을 부탁해 보고 싶은 분이기도 했다. 이전에 찾아본 예브게니아 선생님의 음반은 정말 깊이 있고 원숙한, 멋진 음악을 담고 있었다. 그런 음악을 하시는 분에게 배워 보고 싶다는 것은 연주자라면 누구나 가질 법한 욕망이었다.
그리고 또 한 분.
“…….”
“안녕하세요, 구세프 선생님.”
구세프 선생님은 내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구세프 선생님을 화나게 만든 적은 없었는데 오늘도 구세프 선생님의 태도는 아리송했다. 지금 일부러 모른 척하시는 건가?
구세프 선생님은 에르네스트의 지도 선생님으로, 내 지도 선생님은 아니었지만 사실상 내가 사사하는 두 번째 지도 선생님이나 다름없는 분이었다. 정말 많은 것들을 이 분에게 배웠고, 많은 것들이 얽혀 있었다.
내 착각일 뿐인진 모르겠지만 구세프 선생님도 날 음악을 가르친 제자로 여기고 계시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구세프 선생님이 나와 친한 선생님이라고 해서 이 실기시험에 혜택을 주리라 기대할 순 없었다. 구세프 선생님은 그럴수록 더더욱 엄격하고 가혹해지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선생님은 내 피아노에 대해 잘 알고 계셨다. 내 피아노에 나아진 부분이 없거나 되레 퇴보한 부분이 있다면 곧장 호통을 치실 것이다. 정신을 바짝 차릴 필요가 있었다.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구세프 선생님이 심술궂게 이죽거렸다.
“뭘 그렇게 보나? 타티아나. 내 얼굴이 그렇게 넋 놓고 바라볼 잘생긴 얼굴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아……. 죄송해요.”
“정말 아니라는 거냐?”
시험이 시작하기도 전에 날 괴롭히기로 작정하신 모양이다.
철판을 깔고 선생님 예전 사진을 보니 정말 미남이시던데 세월이 야속하네요, 하고 해 볼까 생각하다가 그건 선생님에게 하기엔 도를 지나쳐도 한참을 지나친 농담이라는 것을 깨닫곤 그만두었다.
도를 지나친 농담 대신 말했다.
“그저, 작년 생각이 나서요. 그때도 두 분이 제 피아노를 들어 주셨죠.”
“아……. 그때.”
작년 편입 시험 때를 떠올리는지 구세프 선생님이 슬며시 미소를 짓다가, 울컥했는지 인상을 썼다.
난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그때 영화 OST를 연주했던 것은 구세프 선생님이 날 굉장히 신경 써 주시게 된 지금에 와서도 결코 언급하지 않는 일종의 잊고 싶은 과거였다.
그때 예브게니아 선생님이 말했다.
“저도 그때 생각이 나는군요, 타티아나.”
예브게니아 선생님의 기억에도 나는 괴상한 학생이었을 텐데, 지금 보이는 눈빛은 정말 따뜻했다. 선생님이 말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합격시키기 참 잘했죠. 그렇지 않나요? 구세프.”
“……그렇긴 하죠.”
구세프 선생님이 이렇게 인정해 주실 줄은 미처 몰랐는데, 조금 감격스럽다.
예브게니아 선생님은 나지막하게 웃음을 터뜨리시고는, 손가락을 슥 들어 피아노를 가리켰다.
“후후후……. 오늘도 그러면 어디 실력을 보여 줘 보세요.”
“알겠습니다.”
난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돌아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등 뒤에서 시선이 느껴진다. 내 인생의 몇 배는 훨씬 넘게 살면서 평생을 이 피아노에 목숨을 걸어오신 분들의 시선이다. 무겁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무거움은 내 어깨를 짓누르는 대신, 내가 흔들거리지 않도록 보다 튼튼하게 날 받쳐 주는 무거움이었다. 묵직하고, 온화하다.
그 기대에 부응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