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244화 (244/1,277)

##  244화

타티아나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제5곡에선 경쾌하고 또각거리는 스케르초풍의 환상곡이 전개되었다. 쇼팽의 영향이 느껴지는 레가토는 리듬을 밀고 당기면서 크라이슬러의 유머러스한 농담과 풍자를 그린다.

“…….”

그리고 보면 저 녀석, 근래 농담도 조금 늘었지.

처음 만났을 땐 여느 학생들처럼 뻣뻣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타티아나는 묘하게 구세프에게 장난을 치곤 했다. 스스로 선을 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지만 종종 그녀도 모르게 툭툭 나오는 말들은 농담조가 짙었다.

남학생들도 말 한 마디 쉽게 못 거는데, 겉보기에 유약해 보이는 타티아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구세프를 대했다.

그건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유쾌한 스케르초를 들으며 미소를 짓던 구세프는 순간 옆에서 시선을 느꼈다.

“…….”

예브게니아가 바라보고 있었다. 안경 너머로 짓궂은 눈빛이 가늘어진다. 연주 중인 학생을 두고 잡담을 나눌 순 없었지만 농담을 던지고 싶은 표정이었다.

구세프는 급히 인상을 쓰며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타티아나의 피아노에 집중할 때였다.

그 후로 내림나장조의 장조이지만 느릿하고 섬세해서 조성을 파악하기 어렵게 들리는 6번 환상곡과, 크라이슬레리아나의 환상곡들 중 가장 빠르고 격정적인 7번 곡이 이어졌다.

7번 곡의 대위법적인 전개와 전체적으로 하강하는 주제음형은 어느 한 지점을 목표로 달려가며 화려하게 클라이맥스에 닿는 대신, 끝없이 이어지며 다이나믹하게 전개되었다.

그리고 베토벤의 푸가와 같은 구조의 2도 푸가에 이르러선 타티아나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다성음악에 대해서도 천부적인 표현능력을 지니고 있는 타티아나는 이 짧은 구간에서도 그 모든 것을 보일 줄 알았다.

그렇게 열정적이고 폭발적인 크라이슬러의 이야기는 보다 더 미칠 듯한 광기로 이어지지 않고 순간 가라앉아버린다.

곧바로 제8곡으로 이어진다. 빠르고 해학적인 부점 리듬은 마치 장난처럼 뛰놀다가, 이전까지의 모든 이야기를 총합하듯 변화한다. 조성이 바뀌지 않는 것처럼 들리지만 순식간에 사단조에서 내림나장조, 사단조, 라단조를 거치며 변화무쌍하게 쏟아져 내렸다.

술에 취한 채 휘청거리는 듯한 리듬과 정열적인 라단조의 행진곡은 정말 명확하게 구분되어서 잘 어우러지지 못할 것 같았으나, 타티아나가 이어 가는 긴 프레이징과 각 주제 간의 연결은 교묘하고 자연스러웠다.

“…….”

하지만 정열적인 행진곡은 클라이맥스도 없이 마치 꿈을 꾸었던 것처럼 공허하게 끝나버리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걷던 크라이슬러는 스르르 사라져버리는 것으로 8곡의 환상곡은 끝났다.

“…….”

멀어진 크라이슬러의 편린을 마지막 왼손으로 희미하게 장식하고, 타티아나가 손을 떼어 놓았다.

양 어깨가 늘어지며 타티아나가 긴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감사합니다.”

깔끔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다시 자리에 섰다.

30분가량의 대곡을 더할 나위 없이 잘 해냈다는 것은 스스로도 알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자아도취나 성공했다는 기쁨 등은 잘 드러나지 않았다. 타티아나는 말끔한 얼굴로 평을 기다렸다.

“…….”

태도도 흠잡을 곳 없었다.

높은 교양에서 우러나는 고고함이, 어린데도 자연스럽다. 미하일이 베르체노프 저택에 직접 쳐들어가서 타티아나를 스카우트해 왔다는 것은 정말 하늘이 도운 일일지도 모른다.

구세프는 펜을 들었다. 그리고 아직 하얗게 비어 있는 채점지에 항목별로 채점을 하기 시작했다. 암보 5점, 템포 5점, 리듬 5점, 테크닉 5점, 표현력 5점, 구조성 5점, 해석 5점, 태도 5점.

그렇게 쭉 내리면서 만점인 5점만을 쓰던 구세프는 순간 펜을 멈추었다.

딱히 흠잡을 부분을 찾을 수가 없어서 5점을 적었지만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이 채점표는 학생들에게도 나중에 공개된다.

일부러 없는 흠을 만들어 낼 필요는 없지만, 너무 완벽한 점수를 내어 주는 것은 타티아나에게 도저히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구세프는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도 타티아나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이미 모든 항목이 5점으로 체크되어 있었다. 이미 준 점수를 펜으로 긋고 고치는 것은 구세프 평생 한 번도 없었던 일일 뿐만 아니라 내릴 만한 항목도 없었다.

구세프는 조금 고민하다가, 마지막으로 비어 있는 점수 칸을 발견했다.

추가점수란이었다. 이 추가점수는 어떤 점수를 주든 간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선생들의 재량에 맡기는 점수였다. 아예 안 줘도 되지만, 주고자 한다면 마음껏 줘도 된다.

구세프는 피식 웃으며 거기에 4점을 주었다.

타티아나가 이 채점표를 본다면 다른 모든 항목이 5점인 것보다 4점인 추가점수에 신경을 쓸 것이다. 그리고 약간은 분함과 억울함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결국은 자신의 음악을 보다 더 날카롭고 정갈하게 갈고 닦을 것이다.

구세프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정말 잘하긴 했지만, 까다로운 구세프에게서 추가점수도 5점을 받아 가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잘해야 했다.

물론 머지않아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 구세프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채점표를 내려놓고 구세프는 헛기침을 했다.

“잘했다, 타티아나. 좋은 연주였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나저나 8학년 마지막 실기도 슈만……. 슈만에 자신이 있는 거냐?”

자신이 있을 만도 한 연주라서 구세프는 그렇게 물어보았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옅게 웃으며 담담히 대답했다.

“제가 어떻게 자신이 있을 수 있겠어요, 선생님.”

“무슨 소리냐.”

“전 이제 열다섯 살이에요. 앞으로 배울 것이 훨씬 많겠죠. 벌써 자신감을 가지는 것은 교만이라고 생각합니다.”

“…….”

기가 막혀서 할 말이 없었다.

어른스러운 대답도 정도가 있었다. 스스로 어리다고 말하는 것이 더 어른스럽다는 걸 알고서 저런 말을 하는 건가.

구세프는 묻는 것을 아예 잘못 물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머리를 짚으며 다시 말했다.

“그런 똑똑한 대답 말고 조금 바보 같은 대답을 해 보면 안 되겠나?”

“……예?”

“솔직히 말해 보란 말이지. 그냥 네가 가장 좋아하고 잘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작곡가가 바로 슈만이지 않느냔 말이다.”

타티아나는 그제야 구세프가 딱히 어려운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눈을 크게 떴다.

잠시 고민한다, 그러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어 말했다.

“……제게 있어서 그런 작곡가가 있다면 그건 슈만이 아니라 라흐마니노프라고 생각하는데요.”

“아, 그러냐…….”

구세프는 조금 머쓱해졌다. 타티아나는 라흐마니노프도 정말 좋아하긴 했다. 구세프는 괜히 다시 퉁명스레 물었다.

“그렇다면 왜 슈만을 친 게냐?”

“……미하일 선생님이 과제곡으로 내 주셔서요.”

“……그렇겠지.”

미하일은 자신이 계획한 커리큘럼에 따라 타티아나에게 익혀야 할 과제곡을 내 주었고, 타티아나는 지도 선생인 미하일이 내 준 과제곡을 충실히 연습했을 뿐이다.

구세프는 어쩐지 말을 하면 할수록 손해 보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따라 무어라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괜한 말은 그냥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크흠, 어쨌든 괜찮은 슈만이었다. 곡 사이의 대비도 깔끔했고, 잘하더군.”

“감사합니다.”

타티아나는 웃으며 다시 감사를 표했다. 구세프는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오늘은 날이 아닌가 보다.

어쨌든 타티아나가 잘해 나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더 이상 할 말은 없었다.

구세프가 조용해지자 또 한 명의 심사위원, 예브게니아가 말했다.

“그럼 이제 제가 평할 차례인가요?”

노년의 여선생은 안경을 고쳐 쓰며 인자하게 웃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원숙해진 자상함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구세프는 꿈도 못 꿀 정도로 예브게니아는 학생들에게 항상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미소 짓고 있는 그녀의 입에서 나온 평은 가차 없었다.

“기대했던 바에는 못 미쳤어요.”

“……!”

타티아나는 예상치 못한 평에도 내색하지 않고 담담한 표정을 이어 갔으나 어깨가 경직되어 있어서 당황했다는 것이 다 보였다. 그 모습이 딱했으나 구세프는 같은 선생으로서 예브게니아의 평가에 끼어들 수 없었다. 그냥 내버려 둬야만 했다.

예브게니아는 계속해서 말했다.

“타티아나의 크라이슬러에게는 도저히 이입이 안 되더란 말이죠. 이랬다가 저랬다가, 글쎄요. 왜일까요.”

“…….”

“해석이 너무 타이트하고 건조했지 않았을까요? 전 그 이유가 타티아나의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에 있다고 생각해요. 슈만의 것이 아닌 바로 연주자인 타티아나의 것 말이죠. 타티아나?”

“예, 선생님.”

“플로레스탄과 만나 보았나요?”

“…….”

타티아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모르겠어요.”

“모르겠나요?”

“예.”

“그럼 어떻게 슈만을 해석하죠?”

“슈만의 의도에 따라…….”

“하지만 그래선 진정한 해석을 했다고 할 수 없겠죠. 그렇지 않나요?”

대답을 하기도 전에 예브게니아가 다시 날카롭게 말을 잘랐다. 타티아나는 머리가 어지러워졌는지 미세하게 목을 떨었다. 예브게니아는 그러한 타티아나를 배려한다는 투로 상냥하게 말했다.

“슈만은 인간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본 작곡가죠. 때문에 슈만을 알기 위해선 스스로의 내면도 깊이 볼 필요가 있어요. 그리고 누구에게나 잠들어 있을 이중성인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를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것도 필요하죠.”

“…….”

“이러한 이해는 한 것 같은데, 너무 맑네요. 스스로에게 솔직하고 싶지 않나요?”

연주의 깊이는 그저 테크닉으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된다. 열다섯 살의 타티아나는 가만히 듣는다.

하지만 일부러 억누르려던 고뇌와 상념이 눈 위로 서서히 떠올랐다.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선생님.”

어두운 목소리가 낮게 깔린다.

“전 모르겠어요.”

“모르겠나요?”

“아뇨, 사실은 알아요. 제 이중성은 명료하니까요. 저는 두 개의 의견이 놓여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고 무엇이 옳은지도 알아요. 올바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는 데엔 찰나의 시간도 필요하지 않아요.”

두서없이 시작된 그녀의 말은 예브게니아의 뜻과 상당히 엇나가 있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이 자리의 누구도 그녀에게 논점에서 벗어난 말을 하지 말라고 할 수 없었다.

타티아나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래서 저는…….”

사람의 내면에 대한 복잡한 문제는 단순하게 일축해서 정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나 지금 같은 상황에서 타티아나처럼 평소에도 종종 위태로워지는 아이일수록 더욱더.

결국 구세프는 참지 못하고 예브게니아를 막아섰다. 더 두고 볼 순 없었다.

“예브게니아, 이야기 중에 미안하지만 한마디 하죠. 제가 듣기에 타티아나의 슈만은 그렇게까지 문제가 있지 않습니다. 뭐가 문제라는건지 모르겠군요.”

“오……. 구세프, 반론하시는 건가요?”

“전 반론하면 안 됩니까?”

다른 선생의 평가 역시 존중해야 했고, 이렇게까지 말 할 생각은 없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날카로운 목소리가 나왔다.

구세프는 연장자이며 존경할 만한 음악가인 예브게니아에게 늘 한 수 접어주곤 했지만 오늘만큼은 그럴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트집을 잡겠다면 트집으로 맞설 뿐이다.

“해석이 건조하다는 말, 전 동의하지 못하겠습니다. 예브게니아는 어떻게 들으셨는진 모르겠지만 전 또래 연주자 중에 타티아나만큼 깊이 있는 공부가 느껴지면서 그 와중에 가치 있는 개성이 드러나는 연주는 못 들어 본 것 같습니다만. 대체 어디가 건조하다는 겁니까?”

“구세프의 의견은 그렇군요?”

굉장히 드세게 공격적으로 말하는 구세프를 보면서도 예브게니아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구세프는 부아가 치밀었다. 한층 더 말이 세게 나왔다.

“이참에 같은 선생으로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짓궂은 장난은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장난이요?”

“타티아나에게 걸고 있는 게 장난 아닙니까? 설마 진담으로 플로레스탄의 이야기를 꺼낸 겁니까? 그것이 슈만의 작품에 예술적 가치를 더욱 높여 주었다는 건 사실이지만 결국 정신병리적인 증상입니다. 그걸 정상인인 타티아나가 어디까지 따라가야 합니까?”

선생마다 슈만을 어떻게 이해할지에 대해 가르치는 것은 자유이지만, 슈만의 두 개의 자아에 대해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은 필수 중의 필수였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었다. 구세프는 대놓고 예브게니아가 말하는 식으로 가르치는 것은 학생을 정신적으로 망가뜨리는 일이 될 뿐이라고 주장했다.

“…….”

같은 음악가로선 얼마든지 서로의 해석을 주장하고 토론할 수도 있지만, 여기는 학생을 두고 심사를 하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예브게니아는 자신의 권리가 침해당했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웃는다.

“후후후, 우후후후.”

“…….”

“그렇게 무섭게 보지 마세요, 구세프. 좋아요. 장난은 그만두도록 하죠.”

“……예브게니아. 정말 장난이었다고요?”

돌연 태도를 싹 바꾸며 정말 타티아나에게 했던 평들이 모두 장난이라는 듯 말하는 것이 신경을 더더욱 긁는다. 학생을 대체 뭘로 본단 말인가? 잔뜩 빈정이 상한 구세프는 한층 더 사납게 인상을 쓰며 예브게니아를 노려보았다.

존경심이고 뭐고 없이 쏘아보는 구세프에게 예브게니아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아, 오해하지 마세요. 제가 장난을 걸었던 건 타티아나가 아니라 구세프 쪽이니까요. 타티아나에겐 선생으로서 제가 물어봐야 할 걸 물어봤을 뿐이죠.”

“……무슨 말입니까?”

“글쎄요? 후후. 지금 보면 타티아나도 떠올리는 바가 많은 것 같은데요.”

영문 모를 웃음과 함께 예브게니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세프가 물었다.

“어딜 가십니까?”

“저는 잠시 사무실에 다녀와야겠어요.”

뜬금없이 사무실엔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예브게니아는 정말로 자리를 떴다.

그리고 하늘거리는 걸음걸이로 타티아나에게 다가가서는, 따뜻하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무 힘들어하지 않아도 될 날이 온답니다.”

“……예?”

“오늘은 잘했어요. 타티아나, 앞으로도 기대할게요. 정진하세요.”

“아, 감사……감사합니다.”

갑작스런 칭찬에 타티아나가 깜짝 놀라며 어깨를 옹송그렸지만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곧 머리를 맡기곤 긴장을 풀어 내렸다. 하지만 여태껏 혹평을 듣다가 갑자기 칭찬을 받아서 혼란스러워 하는 표정이었다.

여전히 눈물이 맺힌 채 어리둥절해하는 타티아나와, 마지막으로 타티아나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주고는 밖으로 나가버린 예브게니아를 보며 구세프는 순간적으로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구세프는 급히 옆에 있는 예브게니아의 채점지를 낚아챘다. 상당히 매너 없는 일이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그리고 구세프는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하……. 젠장.”

“선생님?”

구세프는 짜증스럽게 채점지를 팔랑거렸다.

“이것 봐라. 네게 만점을 줬다.”

“……예?”

“일부러 그런 게다. 일부러.”

모든 항목에, 심지어 추가점수에도 5점으로 만점을 줘 놓고는 일부러 선문답하듯 물어본 것이다. 솔직하게 칭찬은 하지 못할망정 대체 이런 심각한 장난은 뭣하러 치는지 모르겠다. 타티아나는 실제로 울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구세프는 한숨을 내쉬었다. 참지 못하고 끼어든 구세프도 깔끔하게 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구세프는 이를 갈며 타티아나를 보았다.

일부러 울리려고 해도 피아노 앞에선 절대 안 울 것 같던 타티아나는 무엇이 그리 서러운지 아직도 훌쩍이고 있었다. 살짝 기분이 상했다.

“거기 잠깐 앉아라. 아니, 잘해 놓고 왜 우나? 나 참. 스스로의 연주에 자신이 있어야지! 평소엔 안 그러던 녀석이 왜 그러는 게냐?”

“연주가 아니라……. 아무것도 아니에요. 죄송해요.”

“연주가 아니면 뭐?”

“그…… 예브게니아 선생님의 말씀에도 생각나는 것들이 많아서요.”

“허 참.”

예브게니아가 선생으로서 할 필요를 느껴 타티아나를 일부러 자극했다는 게 단순한 변명은 아니었던 것이다.

연주와 관계없이 예브게니아가 파고든 부분엔 분명한 근거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근거가 상당히 깊게 타티아나를 찌른 모양이었다.

연륜이라는 것은 저 나이쯤 되면 되레 퇴색되지 않던가. 대체 예브게니아는 이 슈만에서 뭘 들은 것인가.

음악에서 읽어 내지 못한 것들을 말로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조금만 깊게 들어가면 타티아나는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어버린다는 것을 구세프는 경험상 알고 있었다.

윽박지르는 것도 한두 번이지, 타티아나는 고집도 강해서 속내를 완전히 드러내는 경우가 없었다. 애초에 학생을 그렇게까지 파고드는 게 선생의 권리인가 싶은 거부감도 있었다.

구세프는 자꾸만 치미는 감정들을 억누르며 일어섰다. 타티아나에게 손수건을 건네자 그녀는 구세프가 손수건을 줄 줄은 상상도 못했다는 듯 놀란 눈을 뜨더니, 눈물이 맺힌 그대로 웃었다. 이럴 때 보이는 애 같은 모습은 조금 안심이 되기도 했다.

타티아나는 삐딱하게 선 구세프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보다 구세프 선생님.”

“뭐냐.”

“선생님은 제게 몇 점을 주셨어요?”

조금 당혹스러웠다. 구세프는 짐짓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

“타티아나. 그게 중요하나 지금?”

“아하하……. 그냥 궁금해서요.”

타티아나는 실없이 변명투로 덧붙였다.

“궁금할 수도 있잖아요? 저도 사람인걸요.”

“정말 오늘따라 이상하군. 그럼 네가 사람이지 피아노 치는 귀신이냐?”

선생과 제자의 농담이라기엔 어폐가 있었으나 타티아나도, 구세프도 신경 쓰지 않았다.

타티아나가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죠, 맞아요.”

“오늘 실기 점수는…… 나중에 공개될 테니 그때 봐라.”

“예브게니아 선생님의 것은 보여 주셨잖아요?”

“당장 태도 점수에서 감점당하고 싶나? 타티아나.”

“아뇨.”

타티아나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구세프는 오늘은 정말 되는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들고 있던 손수건을 내려다보더니 타티아나가 말했다.

“이 손수건은 세탁해서 돌려 드릴게요.”

“됐으니까 이리 내놔라.”

“아뇨, 내일 드릴게요.”

두 걸음 정도 뒤로 도망치기까지 하며 타티아나는 손수건을 고이 접어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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