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245화 (245/1,277)

##  245화

사실 예브게니아 선생님에겐 반박을 하려 했다.

내면을 들여다보면 누구에게나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꼭 그 둘이어야만 하는가? 그건 슈만의 이중적 자아일 뿐이고 수많은 성격의 자아들이 있을 수 있었다.

혹은, 공격적인 플로레스탄이 둘이거나 우울한 오이제비우스가 둘이라면 교대로 나타난들 어떻게 서로 다른 자아를 구분할 수 있는가.

혹은, 둘 중 하나가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리고 남은 한쪽이 모든 것을 연기한다면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그리고 남은 쪽이 나라는 보장은 어디에 있는가. 난 대체 뭘 알 수 있는가.

그 모든 것을 믿을 수가 없어서 슈만이 그러했듯 음악성이라는 것으로 자아를 세상에 증명하려 한들, 한쪽은 불구가 되었고 어느 한쪽만이 음악가로서 기능한다면, 그쪽이 진짜이지 않은가.

날 둘러싼 것들, 그리고 음악까지 모든 것이 내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

이제 와서 혼란스러워하진 않는다.

지금까지 난 멀쩡하다. 되레 최고의 결과를 내고 있다. 나도 그녀도 만족하고 있다. 난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예브게니아 선생님 앞에서 보인 모습은 엉망도 이런 엉망이 없었다. 대체 이래서 어쩌잔 것인지 모르겠다.

때마침 구세프 선생님이 막아 주셨기에 망정이니, 한없이 꼴불견인 모습만 보일 뻔했다.

“…….”

난 손수건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솔직히 구세프 선생님이 거기서 그렇게 화를 내 주실 줄은 몰랐다.

한참이나 선배임이 분명한 예브게니아 선생님에게 저돌적으로 따지고 드는 구세프 선생님은 조금 무섭기도 했지만, 날 지켜 주시고자 하는 마음은 분명히 와닿아 느껴졌다.

이성적으로는 구세프 선생님이 날 평하시는 다른 선생님에게 그렇게 공격적으로 대하셔서 좋을 것이 절대 없으며, 또 옳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나는 음악가로서 시험에 임했을 땐 음악가로만 평가받고 싶었다. 어떠한 조건이나 사감도 평가에 끼어든다면 그건 날 모욕하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얼마나 간사한지. 스스로가 창피했지만 외면하진 못했다.

무뚝뚝한 표정의 구세프 선생님을 올려다보았다.

“…….”

가만히 보고 있자 구세프 선생님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나와 눈을 마주치셨다. 난 뜨끔해서 고개를 숙였다.

실기시험도 끝났고 볼일 없으면 나가라고 할 줄 알았는데, 구세프 선생님은 날 앉혀 놓고는 주위를 맴돌더니 창가 쪽으로 가셔선 담배를 한 대 꺼내시다가, 내 쪽을 바라보며 툭 물어보셨다.

“한 모금 해도 되나?”

“아, 예.”

상당한 애연가인 구세프 선생님은 금연 구역인 학교에서도 아무 데서나 담배를 피우셨다. 그래도 내 앞에선 종종 이렇게 물어보시곤 한다. 내가 어차피 피우지 마시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물어보시는 걸까? 그건 잘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지금 구세프 선생님이 담배에 불을 붙이는 라이터가 내가 저번에 선물해 드린 지포라이터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선물해 드린 물건이 잘 사용되는 것을 보면 왠지 모를 충족감이 든다.

구세프 선생님은 창가에 기대어 선 채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고는 연기가 내게 닿지 않도록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다고 해서 역한 냄새가 내 쪽까지 오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난 싫은 내색 하지 않고 기다렸다.

“…….”

담배를 다 피우실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자니, 구세프 선생님은 날 힐끗 보시더니 한 번 빨아들였을 뿐인 장초를 그냥 비벼 끄셨다. 난 깜짝 놀랐다. 진짜 한 모금만 하실 줄은 몰랐는데.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는데, 구세프 선생님이 툭 던지듯 말했다.

“일반 교과 시험은 어땠나? 타티아나.”

갑자기요?

약간 당황했지만 그래도 선생님이 물어보실 만한 질문이라고 생각하며 답했다.

“나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공부 잘하는 녀석들의 공통점이냐?”

“예?”

“뭐라고 물어보면 나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 말이다.”

난 더 이상 구세프 선생님을 답답하게 실망시켜 드리지 않기로 했다.

“열심히 공부해서, 잘 치렀어요.”

“그래, 그래야지. 잘했다.”

구세프 선생님도 고개를 주억이며 칭찬해 주셨다. 필기시험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지만 앞으로 남은 과목들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구세프 선생님이 말했다.

“넌 열심히 하니 말이다……. 어쨌든 그렇다면 이번엔 에르네스트를 누르고 학년 1등을 할 수 있겠군? 안 그러냐?”

“에르네스트요?”

생각도 못했던 사람이 언급되어서 되묻자 구세프 선생님은 당연한 이야기를 한다는 듯 설명했다.

“그래. 그 녀석 이번 주말에 스위스에서 오케스트라와 연주회가 있다.”

“예, 들었어요.”

“알고 있었나 보군. 에르네스트가 말해 주었나? 아무튼, 아무리 조율을 해 봐도 이렇게 학교 시험 기간에 할 수밖에 없었다고는 하는데…….”

조금 답답하다는 얼굴. 보통 연주자가 연주회를 준비하는 것엔 에이전시가 많이 관여하게 된다. 학교의 지도 선생님에게도 관여할 권한이 있겠지만, 그래도 선생님에겐 선생님의 일이 있고 에이전시에겐 에이전시의 일이 있었다.

구세프 선생님은 시험 기간에 연주회를 잡아버린 에르네스트를 막지 못했던 것이다.

이미 지나가버린 것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구세프 선생님은 팔짱을 낀 채로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연주회를 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긴 하지.”

“그렇죠.”

“하지만 시험 기간에 연주회를 준비하려면 당연히 학교 시험엔 조금 소홀해질 것 아니냐? 하루 48시간을 사는 것이 아닌 이상.”

“소홀해질까요…….”

“뭐, 그 전에도 이렇게 시험 기간에 콩쿠르 등에 나가거나 한 적이 있어도 1등을 놓치지 않곤 했다만.”

구세프 선생님은 손가락을 들어 날 가리키셨다.

“이번엔 네가 있지 않느냐?”

“…….”

“뭐냐?”

내가 말없이 침묵하자 구세프 선생님이 물었다. 그리고 곧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셨다.

“타티아나. 설마 내가 에르네스트의 지도 선생이라서 지금 상황을 못마땅해하리라 생각하느냐?”

“아, 아뇨. 그게 아니라…….”

변명을 하고는 있지만 사실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구세프 선생님은 에르네스트의 지도 선생님이고, 에르네스트를 정말이지 아끼신다.

그 에르네스트가 연주회로 시험공부가 소홀해질 것이 분명한 이때, 내가 치고 올라가 학년 1위가 되어버리는 것을 구세프 선생님이 진심으로 반길 것 같진 않았다.

딱히 날 못마땅해하시진 않으리라 믿고 있지만 아주 좋아하실 이유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잠시 날 들여다보던 구세프 선생님은 코웃음 치며 말씀하셨다.

“일전에 그랬었지. 넌 에르네스트와 친구이자 라이벌이라고. 그렇다면 라이벌의 콧대를 꺾어 줄 수도 있어야지. 안 그렇나?”

“……그렇죠.”

“1학기엔 타티아나 네가 학년 2등이었으니, 이번엔 빼앗아 보거라.”

내가 혼자 생각하지 않도록, 아예 확실하게 의뢰를 해 오신다.

그렇다면 부응할 뿐이다.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그래.”

구세프 선생님은 시원하게 말씀하시며 심술궂게 웃었다. 제자를 마냥 감싸고만 들지 않는 구세프 선생님의 교육 방침은 에르네스트에게도 적용되는 모양이었다.

그 뒤로도 나와 구세프 선생님은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생각해 보면 구세프 선생님과 미하일 선생님의 레슨실에서 가끔 뵙곤 하지만, 그땐 보통 미하일 선생님도 레슨실에 계실 때가 많아서 이렇게 사사로운 이야기들을 나눌 기회는 흔치 않았다.

단둘이 있다 하더라도 피아노나 봐줄 테니 쳐 보라고 하실 뿐이지, 이렇게 대화를 길게 하고자 하시진 않는 분이었고.

오늘은 조금 달랐다. 여전히 퉁명스러운 태도이긴 하지만 대화는 이어졌고 간간히 웃음이 오간다.

구세프 선생님은 날 잠시간 붙잡아 두고 싶어 하시는 듯 했다.

난 직감했다. 사실 구세프 선생님이 묻고 싶으신 부분은 달리 있을 것이다. 예브게니아 선생님과 나눈 말은 무엇인지, 왜 울었는지 등등. 난 구세프 선생님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 너무나 많았고, 선생님은 그런 것들에 대해 의문을 표하실 만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질문은 전혀 없이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들만 오갔다.

그리고 나 역시 구세프 선생님에게 작년에 했던 약속에 대해 물어볼 이유가 없었다. 일부러 이야기가 나오면 모를까, 아니라면 나도 굳이 묻고 싶지 않다. 그것이 심지어 내 음악을 되찾는 일인데도, 난 그저 선생님을 믿고 수동적으로 행위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구세프 선생님은 이제 내게 있어서 정말 중요한 분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내 저울은 많이 고장 나 있다.

어쩌면 이제야 정상이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난 이 좋은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보내려고 이야기를 찾고 찾아 이어 나갔다. 한 가지 멜로디를 전개하고 변주하여 끝없이 풀어내는 것은 연주자가 가져야 할 필수적인 음악성 중 하나였다.

물론 음악과 달리 말이라는 것은 너무나 비효율적이다.

선생님에게 할 만한 잡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한창 저번에 친구들과 당구장에 갔었던 이야기를 했더니, 구세프 선생님은 옅게 웃었다.

“예브게니아가 곧 오겠군.”

즐거웠겠구나도, 하물며 다음에 가르쳐 주겠다도 아니었다. 구세프 선생님은 이쯤에서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내 기분이 나아졌다고 보신 듯하다.

난 닫힌 문을 보며 말했다.

“……그렇네요.”

“그래.”

구세프 선생님도 따라 중얼거리시더니 피식 웃었다.

난 선생님과 조금 더 있고 싶었지만, 너무 길어지는 것도 실례일 수가 있었다. 조금 아쉬울 때가 좋을지도 모르겠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저……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나가 봐라.”

구세프 선생님은 성의 없게 손을 까딱이며 말씀하셨다.

다시 꾸벅 인사하고, 난 실기시험장인 연습실에서 나왔다.

조심스레 문을 닫고, 난 잠시 복도에 가만히 서 있다가 화장실로 향했다.

거울을 보니 그리 엉망진창은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나왔던 눈물에는 조금 놀랐지만 딱히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고, 지금은 괜찮았다.

“…….”

난 아직까지 손에 쥐고 있는 손수건을 펼쳐 보았다. 청색 실로 자수가 놓인 손수건은 고급스럽고 감촉이 좋았지만 조금 낡았다.

선생님은 물건들을 오랫동안 사용하시는 편이었다.

“…….”

이 손수건을 세탁해 돌려 드리면서 새 손수건을 선물해 드리는 것 정도는 제자로서 할 수 있는 감사 표시로 괜찮지 않을까 싶다.

***

5층에 있는 연습실에 와서 잠시 피아노를 연습했다. 실기시험은 끝났지만 시험이 있든 없든 그건 내 연습과 상관없는 일이었다.

“…….”

오늘은 어떠한 곡의 연습이 아니었다.

피아노 앞에 앉아서 건반을 꾹꾹 눌러 보며 음색을 달리해 보았다.

건반 너머 현에 이르기까지 구조가 느껴지고, 그것을 감지하는 내 손끝의 미세한 각도까지 파악한다. 내 목소리를 토대로 비롯된 음색이 내 기술과 합쳐져 피아노로 구현된다.

“…….”

무념무상으로 그렇게 건반을 눌러 보고 있는데, 별안간 연습실 문이 벌컥 열렸다.

깜짝 놀라서 돌아보니 아나스타샤가 서 있었다.

“타티아나!”

“아나스타샤.”

“와, 설마 싶었는데 정말 여기에 있었네.”

그녀는 황당하다는 듯 말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난 그제야 생각 없이 여기서 피아노와 장난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안함을 담아 살짝 물어보았다.

“혹시 찾아다니셨나요?”

“그래. 실기시험도 끝났으면 뭔가 연락이 있어야 하는데 전화를 안 받잖아. 시험이 길어지나 싶어서 스터디룸에서 공부하다가 혹시나 싶어서 와 봤더니……. 연습을 하고 있었어?”

“예.”

“왜?”

“……왜냐니요?”

연습에 딱히 이유가 없는 나는 그렇게 답할 수밖에 없었고, 곧 잘못 말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아나스타샤는 그대로 이해해버렸다.

그녀가 말했다.

“네가 시험이 끝났다고 연습을 안 할 애가 아니라는 건 알아……. 알지만, 메시지는 하나쯤 남겨 주지 그랬어?”

“아, 미안해요.”

“뭐라고 하는 건 아냐. 그냥…….”

난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조용히 아나스타샤의 말을 기다렸으나, 그녀는 곧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네가 이렇게 연습에 몰두하는 이유가 있겠지. 뭔데?”

“그냥…… 아무것도 아니에요.”

“뭔가 시험에서 마음에 안 들었던 게 있었던 것 아니야?”

“아뇨, 딱히 그렇진 않아요.”

“불현듯 피아노의 진리를 깨우쳤다든가?”

“아하하, 그런 게 있으면 좋겠어요. 정말로요.”

아나스타샤는 내가 웃음을 보이자 킥킥거리며 따라 웃었다.

이렇게 혼자 연습실에 처박혀 있을게 아니었다. 실기시험이 끝났다면 당장 아나스타샤부터 만나러 갔어야 했었는데.

“그냥 여기로 올 게 아니라 아나스타샤를 보러 갈 걸 그랬네요.”

“……어?”

난 일어나서 되묻는 아나스타샤의 팔을 잡으며 밖으로 이끌었다.

“나가죠, 아나스타샤.”

“어, 어디 가는데?”

아나스타샤는 힘도 없는 내게 끌려나오면서 물었다.

난 그녀를 돌아보며 활짝 웃었다.

“스터디룸이요.”

“응?”

“스터디룸에 계속 계셨다면서요? 저도 공부해야죠. 내일도 시험 있잖아요.”

“…….”

어찌 되었건 피아노 실기시험은 끝났고, 일반 교과 공부에 집중해야 할 때라는 것은 확실했다. 구세프 선생님도 내가 이번에 시험 성적을 잘 받아서 에르네스트를 꺾고 학년 1등을 하길 바라셨고.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할 일은 명백했다. 아나스타샤가 함께해 준다면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공부하러 가자.”

“오늘은 많이 오셨겠지요?”

“응.”

스터디룸에 아나스타샤 홀로 있진 않을 것이다. 1학기에도 시험기간이면 북적이던 곳이 스터디룸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스터디룸의 광경을 떠올리는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애들도 다 와서는 너만 찾더라.”

“저를요?”

“그래. 내가 가르쳐 주는 건 들어도 잘 모르겠다나 뭐라나. 웃겨, 정말.”

아나스타샤는 아직도 어린아이들과 그리 친하지 못했다. 그녀는 살짝 삐친 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난 그녀가 아이들을 싫어하는 것이 아닌 이상 얼마든지 친해질 수 있을 것이라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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