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8화
에르네스트는 목요일에 등교하자마자 빈 연습실을 하나 제공받아서는 시험 네 개를 연달아 해치워버렸다.
그리고 점심이 되어서 반에 돌아와서는 이만 가 보겠다며 손을 흔들고는 그대로 떠났다. 아마 그대로 스위스행 비행기에 올랐을 것이다.
정해진 일정이 있을 테니 거기에 따라서 움직여야 했겠지만, 그래도 같이 점심 식사 정도는 했어도 좋았을 텐데. 약간 아쉽긴 했다.
날짜가 하루 지나 금요일.
오전에 시험을 치른 나는 스터디룸에 와서 친구들과 공부를 하고 있었다. 오늘의 멤버는 나와 아나스타샤, 발렌티나. 그리고 아나톨리와 류보비였다.
“…….”
“으…….”
그 모두는 기운 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아직 치러야 할 시험은 몇 개 남아 있었지만 오늘은 금요일이었고, 주말 이틀간 공부할 시간은 얼마든지 낼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이 뇌리에 차오르고 나니 영 금요일엔 공부할 의욕이 생기지 않는 듯했다.
난 의욕과 관계없이 의무적으로 책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거의 책상에 반쯤 엎드려서 펜으로 이상한 짓을 하던 발렌티나가 늘어지는 목소리로 날 불렀다.
“타티아나아.”
“예. 발렌티나.”
“공부하기 싫어.”
“저도요.”
“우리 나가서 놀면 어때? 아나스타샤도. 음, 얘네도 다 같이.”
이 화창한 날 좁은 방에서 공부라니 있을 수 없다는 말투였다. 이 와중에 다른 아이들에게도 미끼를 던지는 것이 상당히 능수능란했다.
그래서 누군가 미끼를 물기 전에 딱 잘랐다.
“그건 안 돼요.”
“왜애.”
“시험의 신께서 노하실지도 몰라요.”
“……?”
발렌티나가 대놓고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공부하기 싫다는 말에는 긍정했으면서 나가 놀자고 하니 대뜸 신이 어쩌구 하는 소리를 하면 선뜻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녀가 투덜거렸다.
“타티아나는 가끔 뚱딴지같은 소리를 해.”
“그런 게 있답니다. 주말에 공부하면 되겠지, 하고 오늘 긴장을 풀어버린다면 시험의 신께서 ‘그래? 그렇단 말이지?’ 하고는 저희를 괘씸하게 여기실 거예요.”
“괘씸하게 여겨서?”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죠? 시험에 상상도 못한 문제가 나온다든지, 주말 내내 탈이 나서 공부를 못 하고 누워 있게 되든지.”
내 말대로 된다면 시험의 신은 정말 귀여운 신일 것이다. 물론, 내 생각에 신들은 그렇게 귀엽지 않다.
그 외에도 생각나는 것은 많았지만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그저 적당히,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지 않고 가볍고 재미있게 들을 수 있는 무게로 이야기했다. 이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이 애들이 내 행동을 이해하는 데에도 조금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발렌티나는 내가 하는 말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게 다 시험의 신의 벌이었다고……?”
멀거니 중얼거리던 발렌티나는 상당히 심각하게 생각에 잠겼다. 짚이는 과거가 상당히 많은 모양이었다. 난 희미하게 웃었다.
아나스타샤는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타티아나, 네가 그런 말을 하니 너무 재밌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라니. 아하하하.”
“이, 이상했나요? 아나스타샤.”
“아니? 귀엽던데. 귀엽단 말이지.”
“아, 따라하지 마세요, 정말.”
일부러 연극조로 이야기한 내 말투를 따라 하면서 아나스타샤가 웃었다. 난 약간 싫은 티를 내긴 했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 아나스타샤가 즐거워한다면 뭐든 좋았다.
발렌티나는 한참 심각하게 고민하더니,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휙휙 젓고는 내게 말했다.
“근데, 근데 있잖아. 솔직히 이상하긴 했어. 난 타티아나 네가 철저히 실력주의라고 생각했는데 말야. 의외로 그런 거 믿나 봐?”
“전 실력이라는 부분을 가장 믿긴 하죠.”
오로지 스스로의 실력만을 가지고 무대에 올라 단시간에 모든 것을 보여야 하는 우리 연주자들은 특히 자신의 실력을 갈고 닦는 것에 집중했고, 실력이야말로 전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짙었다. 난 그중에서도 특히 까다로운 축에 속했고.
하지만 조금씩은 바뀌기 마련이다.
“그래도 조금은 괜찮잖아요?”
“그도 그렇네.”
발렌티나는 별생각 없다는 듯 가볍게 답했다.
나가서 놀자고 한 이야기는 접기로 한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공부를 하고자 하는 마음도 생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히죽거리며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지루한데 우리 재미난 거나 할까.”
“재미난 거요?”
“응. 얘들아. 너희도 이리 와 봐.”
아예 류보비와 아나톨리도 불러온 발렌티나는 스마트폰으로 앱을 하나 실행시켰다. 옆에서 살짝 보니 타로카드에 관한 서비스들을 하는 앱인 것 같았다.
류보비가 어깨를 들썩였다.
“와, 저 타로 좋아해요!”
“자, 그러면 운명의 신께서 당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점쳐 주실 것입니다. 가까이 오세요.”
아이들이 관심을 보이자 발렌티나는 스마트폰 화면 위로 손을 빙빙 돌리며 무슨 마술을 부리는 듯한 과장된 손동작까지 했다. 진짜 마술사라도 된 것 같았다.
난 두어 걸음 물러나선 창가로 향했다.
창밖을 보니 날씨는 정말 맑았다. 길게 들이치는 햇살을 받으며 약간 멍하게 내다보고 있는데, 아나스타샤가 다가와서 말했다.
“타티아나. 너 타로는?”
“음, 제 운명을 미리 알고 싶지는 않아서요.”
그녀는 딱히 더 캐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그녀 사이엔 이 정도 교류로도 충분히 마음이 통하곤 했다.
잠시 우리 둘은 창가에 서서 밖을 내려다보았다.
탁 트인 정원 같은 것은 없어서 조금 아쉬웠지만, 테이블 쪽에서 밝게 웃는 소리를 들으며 잠시 머리를 쉬게 두니 기분이 좋아졌다. 난 미소를 지으며 아나스타샤에게 말했다.
“잠시 쉬는 것도 좋네요.”
“날씨는 정말 좋다. 여름엔 뭘 할까나…….”
아나스타샤는 벌써부터 시험이 끝나고 여름방학에 할 일들을 궁리하는 것 같았다.
살짝 물어볼까 싶었는데, 내 스마트폰이 부르르 울었다. 꺼내서 확인하자 메시지가 와 있었다.
“어?”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며 메시지를 확인했다.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기울이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난 그녀에게 말했다.
“에르네스트에게서 메시지가 왔어요.”
“응? 뭐라는데?”
“……공부 중이냐는데요?”
정말 밑도 끝도 없이 그런 메시지였다.
아나스타샤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 주었다.
“우리야말로 묻고 싶네. 연습 중 아니냐고.”
“그러게 말이에요.”
그 말 그대로 에르네스트야말로 오케스트라와 연습 중 아니냐고 메시지를 보냈고, 잠시 쉬는 중이라는 답장이 왔다.
난 아나스타샤와 함께 스위스에 있을 에르네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하며 다음 메시지를 보낼 준비를 했다.
그때 발렌티나가 우리를 불렀다.
“타티아나, 아나스타샤. 타로 봐 준다니까 안 오고 뭐 해?”
“아, 발렌티나. 에르네스트도 저희처럼 잠시 쉬는 시간이라고 해서요.”
“진짜?”
발렌티나가 눈을 크게 뜨며 관심을 보이더니, 과감하게 말했다.
“전화해 볼까.”
“전화요?”
“응. 응.”
그녀는 거세게 고개를 주억이며 이 기회를 놓칠 순 없다는 듯 말했다.
“응원도 미적지근하게밖에 못 해 줬잖아. 영상통화를 해 보면 어떨까?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궁금하고.”
“스위스잖아요?”
“스위스에서도 어디냐는거지.”
그 말도 일리가 있었다. 에르네스트가 스위스의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난 찬성했다.
“해 보죠. 쉬고 있다고 하니.”
“그러자.”
발렌티나는 지체하지 않고 곧장 에르네스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귓가에 스마트폰을 붙이진 않고 책상에 기대어 세웠다. 영상통화를 걸어 놓았더니 스피커폰으로 전화 연결음이 들렸다.
잠시 후, 친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발렌티나.
하지만 화면엔 무언가 제대로 보이지 않고 어둡기만 했다.
발렌티나가 말했다.
“에르네스트. 스마트폰 떼 봐!”
- 무슨 소리야?
“영상통화니까 떼서 보라구.”
- ……뭐?
일반 전화인 줄 알고 귓가에 붙이고 있었던 에르네스트는 그제야 스마트폰을 떼어 놓았고, 우리들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 뭐야, 이거.
친구들을 보고 이게 뭐냐고 말하는 건 실례가 아닐까 싶긴 한데, 그래도 당혹스러워하는 그의 얼굴이 재미있었다. 우리는 한마디씩 인사를 건넸다.
“에헤헤, 안녕.”
“뭐야, 실내야?”
“안녕하세요.”
에르네스트는 멈칫하더니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는지 영상이 흔들렸다.
- 잠깐만, 나가서 받……. 아, □□□□ □□□□. □□ □□□.
나가서 받겠다는 말을 미처 다 하기도 전에 그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무어라 빠르게 말했고, 갑자기 에르네스트의 옆으로 한 남자가 확 어깨를 당기며 가깝게 붙으며 얼굴을 보였다. 나이는 20대 정도로 보이는 갈색 머리의 쾌활한 이미지의 남자였다.
에르네스트가 약간 짜증스럽게 말했다.
- □□□ □□□□ □……. □□□!
하지만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 □□!
챠오라는 발음으로 들렸는데 무슨 뜻인진 모르겠지만 분명 우리에게 하는 인사라는 것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인사라는 것을 이해하고도 우리는 처음 보는 상대에게 조금 놀라서 굳어 있었다. 내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누, 누구시죠?”
“이탈리아 말이네. 단원 중 한 명인가 본데. 챠오.”
“챠오.”
이탈리아어를 조금 아는 아나스타샤가 짧게 답인사를 했고, 이어서 발렌티나도 말했다.
남자는 반가운지 껄껄 웃으며 말했다.
- □□□ □□ □□□□! □□□□!
그 후로도 알 수 없는 이러저런 말들이 있었지만, 알아들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남자는 그만두지 않았다. 이 정도로 알아듣지 못하는 표정을 보이면 알아서 그만둘 만도 한데 상당히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다.
- □□□□.
결국 에르네스트가 조금 강하게 말하며 화면을 돌렸다.
- 아, 미안. 이 오케스트라의 악장이신데 인사를 하고 싶다나 봐. 놀랐지.
“괜찮아. 다른 단원분들도 있어?”
- 응……. 회의하다가 쉬는 중이었거든.
에르네스트가 옆을 보더니 작게 말했다. 화면을 돌려서 다른 단원들도 우리에게 소개해 주진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렇게 하진 않았다. 조금 부끄러운 모양이다.
난 웃으며 에르네스트에게 물었다.
“에르네스트는 이탈리아어도 하실 줄 아셨나요?”
- 응, 조금. 그래서 의사소통이 조금 편하긴 해. 스위스는 독일어와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를 다 쓰니까. 러시아어를 하는 단원도 있고.
“대단하세요.”
진심으로 칭찬하자 에르네스트가 머뭇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솔직한 칭찬이었는데.
그리고 아까 화면상으로 인사했던 악장이 다시 나와선 에르네스트와 이탈리아어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난 유심히 화면을 지켜보았다.
악장이라면 오케스트라의 제1바이올린의 수석 연주자이자 동시에 수십 명이나 되는 오케스트라의 실질적 리더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보통 오케스트라의 리더를 지휘자라고 보는 것이 잘못된 관점은 아니었지만, 지휘자는 계약직으로, 오케스트라라는 거대한 악기를 효율적으로 다루는 사람에 가깝다.
때문에 오케스트라의 실질적인 중심이자 대표는 악장이라고 보는 것이 옳았다. 악장은 많은 바이올린 주자 중 한 명이 아니라 보다 중요한 직책인 것이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어떤 내용인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에르네스트와 함께할 오케스트라의 악장이 저렇게 친밀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것이 느낌적으로 나쁜 이야기는 아닐 것 같아서, 에르네스트를 믿고 가만히 기다렸다.
아나스타샤는 잠자코 듣고 있다가 툭 물었다.
“뭐라고 하시는 거야?”
- 아무것도 아냐. 그냥 쓸데없는 말들.
에르네스트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말했지만 쓸데없는 말이라도 전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말하기 싫은 것 같다.
그리고 보니 우리가 굳이 화상통화를 건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발렌티나가 활기차게 말했다.
“아무튼 연주회 잘해, 에르네스트! 오케스트라 단원 분들과도 친하게 잘 지내고.”
- 고마워. 잘할게.
“응.”
발렌티나와 아나스타샤가 짧게 에르네스트에게 연주회의 성공을 바라는 말을 건넸다.
난 이미 엊그제 에르네스트와 이러한 이야기들을 하며 건배까지 했기 때문에 또 똑같은 말을 하긴 약간 어색했다.
“…….”
평범하게 잘하라는 대신 무슨 말을 해 주면 좋을까? 생각해 봐도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나는 문득 아직도 화면에 잡히고 있는 갈색 머리의 오케스트라 악장을 발견했다. 이탈리아어를 쓰면 알아들으신다고?
잠시 카메라 밖으로 빠져나간 다음 재빠르게 내 스마트폰으로 구글 선생님께 도움을 구했다. 이탈리아어로 멋진 연주회가 될 수 있길 기도하겠다고 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선생님?
번역기의 도움을 빌어 난 한 문장을 만들어 냈다. 이탈리아어는 발음이 상당히 어려웠지만 성악으로 가곡을 배우면서 이탈리아어를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 그럼 이제…….
“에르네스트.”
내가 그를 부르자 그가 날 바라보았다. 그 옆에 있던 악장도 화면을 응시한다.
난 이탈리아어로 멋진 연주회가 될 수 있길 기도하겠다고 말했다. 살짝 어색한 발음이긴 했지만, 이 말은 분명 에르네스트에게도, 그리고 그와 함께 해야 할 저 악장분에게도 전해졌을 것이다.
둘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 □□□ □□□! □□□.
그리고 조금 감동한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는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깜짝 놀랄 정도였다.
그 후로도 악장은 몇 번이고 비슷한 어투로 쾌활하게 말했다. 적어도 난 에르네스트와 함께해야 할 오케스트라의 중요한 핵심 인물을 기분 나쁘게 만든 것 같진 않아서 안심이 되었다. 에르네스트에게도 잘해 주실 것 같아 보여서 다행이다.
잠시 후에야 에르네스트가 우리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 모두들 고마워. 잘할 수 있을 것 같네.
“잘하고 와.”
“못 가 봐서 미안해! 에르네스트.”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가 마지막으로 말했고, 나도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다음 주에 뵈어요.”
- 응. 고마워.
처음 우리들의 영상통화를 받고 당혹스러워했던 에르네스트는 이젠 괜찮은지 편안하게 답했다.
그리고 전화는 끊어졌다.
난 아나스타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악장님과 분위기 나쁘지 않았죠?”
“그보다, 너 방금 뭐라고 했던 거야? 타티아나.”
내가 이탈리아어로 말한 것을 묻는 듯했다. 난 가볍게 말했다.
“별것 아니에요. 멋진 연주를 하시길 바란다고 했을 뿐이에요.”
에르네스트는 이탈리아어도 할 줄 안다고 하니 회의에도 리허설에도 연주회도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되지만,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이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문제도 생기고 협의를 해야 할 일도 생긴다.
그리고 열다섯 살의 어린 연주자는 매우 불리하다.
그러한 상황에서 오케스트라의 악장이라면 지휘자와 더불어 내일 에르네스트의 연주에 정말 중요한 사람이었다. 때문에 난 그 사람에게 말이 통할 이탈리아어로 직접적으로 부탁한 것이다.
에르네스트를 잘 부탁드린다고, 그와 함께 멋진 연주회를 해 달라고.
우리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듯한 사람이었으니 내 부탁을 쉽게 무시하고 에르네스트를 골치 아프게 만들진 않을 것이다.
그제야 내가 어떤 부탁을 한 것인지 이해한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가 그 와중에 그런 생각을 했냐는 듯 날 바라보았다.
“난 생각도 못 했는데.”
발렌티나가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난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그때 옆에서 보고 있던 류보비가 말했다.
“에르네스트 오빠는 부러운 사람이네요.”
“……예?”
무슨 말인지 되묻자 류보비는 히죽 웃으며 이어 말했다.
“그야 세 명이나 되는 언니들이 응원해 주니까요. 안 그래요? 봐, 아나톨리. 너도 부럽니?”
“난 또 왜 끌어들여.”
“그럼 안 부러워?”
“시끄럽다고 좀.”
류보비는 괜히 옆에 있는 아나톨리를 툭툭 건드렸고 아나톨리는 짜증스레 말했다.
글쎄, 난 잘 모르겠다. 에르네스트는 교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멀리 연주회를 갔는데 친구들이 응원해 주는 것 정도는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
물론, 난 에르네스트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