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4화
집에 돌아오니 해가 막 지고 있었다. 학교에서 꽤 오랫동안 있었던 것이다.
차에서 내려 경호원들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오늘도 고마웠어요. 소로킨, 빅토르, 자하르.”
“쉬십시오, 아가씨.”
소로킨이 깍듯이 받아 주었고 빅토르는 경례를 척 올려붙였다. 장난스레 나도 손을 들어 경례를 받아 주었더니 빅토르가 히죽 웃었다.
“오늘 학교에서 즐거우셨나 봅니다? 기분 좋아 보이시는군요.”
“그렇게 보이나요?”
“마음이 놓이네요.”
벌써 1년이나 지났는데도, 아직도 빅토르는 내 학교생활에 걱정이 많은 듯하다. 난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빅토르가 날 얼마나 걱정해 주는진 잘 알고 있었다.
껄껄 웃는 빅토르와 잠시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저편에서 어슬렁거리던 벨카가 달려왔다. 난 자연스럽게 무릎을 굽히고 벨카를 안아 주었다.
“다녀왔어요, 벨카.”
“왕!”
자꾸만 머리를 치대는 벨카의 뒷목을 마구 쓸어 주었더니 더더욱 달라붙는다. 난 이러다가 뒤로 넘어지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벨카는 무리해서 날 밀치거나 하는 일이 절대 없었다.
늘 예민하게 내 기분을 감지하고 있는 벨카는 때마침 기분이 좋은 내게 잔뜩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벨카의 꼬리가 좌우로 살랑거렸다.
난 안으로 들어가서 쉬기 전에 잠깐 벨카와 놀아 주었다. 놀아 준다고 해 봐야 활동적으로 함께 뛰거나 뒹굴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잠시 주변을 거닐고 쓰다듬어 주는 게 다였다. 하지만 벨카도 나도 그런 교류에 편안함을 느끼곤 했다.
꽃이 핀 화원에서 벨카를 부둥켜안고 놀다가, 산책로를 따라서 조금 걸었다. 약간 피로해졌지만 그간 아침에 벨카와 산책도 자주 해 온 터라 쉽게 지치진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벨카와 있었을까. 우리는 다시 한 바퀴 돌아 저택 정문 앞에 섰다.
이렇게 영원히 있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는 일이었다.
“이만 들어가야겠어요.”
“낑.”
“아쉬워하지 마세요. 학교가 방학을 하게 되면 벨카와 함께 있을 시간도 많아질 테니까요. 아셨죠?”
방학이 된다고 해서 하루 온종일 벨카와 놀 수 있는 것은 또 아니었지만, 그래도 지금보단 시간이 많아질 것이다.
난 다시 마지막으로 벨카를 쓰다듬어 주고는 저택으로 들어갔다.
응접실과 복도에서 마주치는 사용인 분들과 살갑게 인사를 나누고, 방으로 돌아왔다.
언제나처럼 휑한 내 방이었지만 오늘 행복에 들떠 있는 마음은 방에 와서도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
난 책상 옆으로 가방을 대충 내려놓고는 상의만 벗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폭신한 침대에 그대로 푹 빠질 것만 같다.
딱 10초만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이대로 잠들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다. 난 그냥 저녁 식사 때까지 이대로 조금 잘까 하다가, 문득 스마트폰을 들었다.
“…….”
한 손으로 화면을 눌러 사진들을 펼쳤다.
에르네스트의 생일 기념 겸 스위스 연주회 축하로 우리가 준비했던 파티가 사진으로 남아 있었다.
한 장 한 장 넘겨 보았다.
서프라이즈는 완벽하게 계획한 대로 성공했고, 깜짝 놀란 에르네스트는 심하게 화를 내거나 하지 않고 이해해 주었다. 그러고 나서는 초를 불고, 내가 그의 귀를 잡아 주었다.
“음…….”
어른도 아닌 동갑내기 친구인 내가 해 줄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딱히 말해 주지 않아도 알고 있었지만, 벌칙을 빌미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버렸다.
꼭 키가 크란 의미는 아니었는데 그가 어떻게 받아들여 주었는진 모르겠다. 혹시나 자존심 상해할까 걱정이었는데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난 지난 1년 사이 그가 얼마나 성숙하게 잘해 왔는지 봐 왔다. 앞으로도 그에겐 기대가 컸다. 부디 아무 일 없이 그가 좋은 연주자로 크길 바랄 뿐이다.
“…….”
그다음은 평범한 생일 파티처럼 진행되었다.
난 정장에 액세서리로 착용할 수 있는 부토니에와 카라바 세트를 선물해 주었다. 평범한 학생에겐 필요 없는 액세서리일 테지만 무대에 설 일이 많은 에르네스트에겐 필요할 일이 많을 것이다. 에르네스트는 어떤 무대에 나가건 반드시 착용하겠다고 약속해서 나를 기쁘게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다른 선물들도 그에게 건네졌는데, 그중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리처드가 준 2천 피스짜리 직소퍼즐이었다.
바닷가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한눈에 봐도 어려워 보이는 직소퍼즐을 보고 당황해하던 에르네스트의 표정이 정말 일품이었다. 말로는 맞춰 보겠다고 하는데, 바닥에 앉아서 퍼즐을 맞추고 있는 에르네스트의 모습은 한 번쯤 보고 싶기도 했다.
“후후후…….”
실없이 웃음을 흘리면서 난 계속해서 사진을 넘겼다.
선물 교환이 끝난 우리들은 각자 케이크를 나눠 먹기도 하고, 가지고 온 보드게임 등을 하고 놀기도 했다.
특히 에르네스트는 그간 이 스터디 그룹에 참석한 적이 없어서 아나톨리나 류보비와는 서로 잘 모르고 친하지도 않은 상태였는데, 오늘을 기점으로 많이 친해질 수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류보비와 유명한 보드게임인 가블리트 가블러스를 하기도 했는데, 빤히 보이게 이길 수 있는 수를 놓고도 고민하다가 결국 져 주기도 했다.
피아노 앞에 앉아선 상대가 누구든 결코 봐주지 않는 성격의 에르네스트도 아이들과 게임을 할 땐 깐깐하게 굴지 않고 꽤 상냥했다. 아무래도 또래 동생인 사샤가 있어서 저런 자상한 면모도 갖추고 있는 것 같았다. 약간 의외의 좋은 모습이었다.
마지막으로는 8학년들 사이에서 체스 최강자를 가리는 승부가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 중에서 실력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결승전에서 맞붙은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였다.
두 사람은 오랜 친구이자 라이벌로서, 이런 부분에서도 지기 싫어했다. 게임 내내 트래쉬 토크와 신경전이 이어졌다. 체스 자체보다는 신경전이 더 재미있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결국 멘탈이 흔들린 에르네스트를 과감하게 공격하는 것으로 아나스타샤가 승리했다. 아나스타샤는 그 어느 때보다 기뻐했고, 체스 여왕으로 즉위해서는 패배자인 에르네스트에게 여왕님이라 부르도록 강요했다.
에르네스트는 치욕스러운 얼굴로 아나스타샤를 여왕님이라고 부르고는 화장실로 도망쳐버렸다. 그래도 오늘 그를 위한 파티 중인데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
그 모든 것들이 사진으로 남아 있었다. 어떤 것은 내가 찍기도 하고, 발렌티나나 다른 사람들이 찍기도 했다. 각자 찍은 것들을 부탁해서 공유받자 굉장히 많은 사진들이 데이터로 남았다.
난 끝까지 사진을 다 넘겨 본 다음, 스마트폰을 든 팔을 침대 옆으로 툭 떨어뜨렸다.
“…….”
시험은 내일로 끝이었다. 그렇게 6월 넷째 주를 마지막으로 중앙음악학교는 학기를 마친다. 11학년들은 졸업을 할 테고, 나도 8학년을 마무리하게 된다.
작년 이맘때만 하더라도 천재들의 소굴이라는 중앙음악학교에 가서 내가 잘 적응할 수 있을지 오로지 걱정뿐이었는데, 이렇게 웃으면서 한 학년을 마칠 수 있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9학년도, 10학년도, 11학년도 이렇게 모두와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으면 했다. 그것만 가능하다면…… 난 바랄 것이 없었다.
“……읏.”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것을 위해선 내일 남아 있는 마지막 시험을 잘 치러야 했다. 이렇게 누워서 멍하니 바라고만 있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
시험지를 제출하고, 펜을 내려놓았다.
이것으로 마지막 시험까지 모두 끝났다.
기지개를 쭉 펴니 나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절로 새어 나왔다. 순간 옆에서 누가 듣지는 않나 둘러보았으나 다행히 이쪽을 보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
갑자기 탈력감이 찾아들어서 멍하니 풀린 눈으로 앉아 있는데, 아나스타샤가 비틀거리며 다가와선 책상에 턱 걸터앉았다.
올려다보니 밤샘 공부로 지친 그녀의 얼굴엔 검은 그림자가 내려앉아 있었다. 일부러 아이섀도를 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녀는 평소처럼 상쾌한 목소리가 아닌, 물속에 반쯤 잠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올해는 유독…… 힘들었어.”
그 모습이 안쓰러웠다.
“어제도 못 주무셨나요? 아나스타샤.”
“타티아나……. 나 죽을 뻔했어.”
정말 힘들었는지 아나스타샤가 드물게 칭얼거렸다.
그때 발렌티나가 폴짝 뛰어들더니 활기차게 그녀를 달래 주었다.
“아무튼 끝났잖아? 잊으라고, 잊어.”
“이미 답안지 마지막 문제 딱 쓰자마자 다 까먹었어.”
“편리한 머리 달고 있어서 부럽네.”
“싸움 거는 거야, 지금?”
내가 봐도 달래 주려는 건지 정말 싸움을 거는 건지 잘 모르겠다. 목적이야 어쨌든 발렌티나와 투닥이면서 아나스타샤는 기운을 조금 차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각자 서로의 삶의 활력소이기도 한 것이다.
모두 끝난 시험에 대한 속 시원한 성토의 장이 펼쳐졌다. 난 한 번 더 시험의 신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좋아 보인다.
한참을 그렇게 이야기하던 발렌티나가 시험은 이제 지긋지긋하다는 듯 말했다.
“이제 시험도 끝났겠다……. 어디 놀러가지 않을래?”
“오늘?”
“뭐 어때? 뒤풀이 겸으로 말야. 아, 내일 학기말 파티는 어때? 참가할 거야?”
올해 1월에 8학년 1학기가 끝나고 참가한 학기말 파티에서 나는 니콜라이 선배, 막심 선배와 만날 수 있었다. 꽤 재미있는 경험이자, 좋은 인연이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딱 잘라 거절했다.
“아니. 안 해.”
“넌? 타티아나.”
“저도 이번엔 안 가려고요.”
나도 웃으며 거절했다.
재미있는 경험이긴 했지만, 다음은 적어도 왈츠를 제대로 출 수 있게 된 다음이 좋겠다.
발렌티나가 물었다.
“저번엔 정말 그냥 한 번 가 보고 싶었던 것뿐이구나?”
“맞아요.”
“파티에서 남자 애들하고 춤추는 것엔 영 재미를 못 느끼는 것 같네?”
“애초에 전 춤을 출 줄도 모르고요.”
“……? 네가?”
“예.”
“사교파티에서 출 수 있는 왈츠 정도는 배우지 않았어?”
왜 다들 날 보고는 당연히 춤을 출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나스타샤에게 살짝 배운 뒤로도 연습을 안 했더니 모두 까먹은 지 오래였는데, 언젠가 몰래 혼자 연습을 해서 잘하진 못하더라도 교양 삼아 그럭저럭 출 수 있는 수준으로 만들어 놓긴 해야 할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입을 다물자 발렌티나가 나와 아나스타샤를 번갈아 보더니 말했다.
“음, 둘 다 안 가는 거 같네.”
“발렌티나는 가시겠죠? 친구분들과.”
“나? 아니, 안 갈 건데.”
안 갈 거면서 왜 저희에겐 물어보신 건가요?
가만히 바라보자 그녀가 설명했다.
“11학년들 졸업 행사로 시끄러울 것 같기도 하고. 이번엔 빠질래.”
“졸업 행사라면 더더욱 가실 줄 알았는데요…….”
“내가 왜?”
생각해 보면 선배들의 행사에 그녀가 딱히 무언가 할 이유는 없었다.
발렌티나는 배시시 웃더니 내 옆에 앉았다.
“난 그냥 너희들이랑 놀래. 그래서 말이지, 오늘 어때? 응? 전에 갔었던 류비그의 스파 말이야. 피로를 푸는 데엔 제격일 것 같지 않아?”
이렇게 같이 놀러 가자고 졸라 대면 난 보통 거절하지 못하곤 했다. 멀리도 아니고 신아르바트 쪽의 류비그라면 나쁘지 않기도 했고.
하지만 오늘은 안 된다. 난 정중히 사과하며 거절했다.
“정말 미안해요, 발렌티나. 저 오늘은 안 돼요.”
“어? 왜? 시험도 끝났잖아?”
그녀는 황당하다는 듯 물었고 난 설명했다.
“오늘은 스튜디오에 가야 하는 날이라서요.”
에우테르페 레코즈와의 음반 프로젝트는 4개월이 넘게 진행되고 있었다.
내가 아직 학생의 신분이라서 매일같이 음반에 매달리지 못해 진행이 조금 더디기도 했지만. 마카로프 프로듀서의 그 깐깐한 성격으로 보면 4개월은 별로 오래 걸린 것도 아니었다.
내 열다섯 살을 영원토록 남길 수 있는 곡들을 선곡하는 일은 이렇게나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늦출 순 없었다.
나야 음반 작업이 오래 걸린다고 해도 마카로프 프로듀서와 함께 작업을 하면서 배우는 것이 정말 많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불만이 없었지만, 마카로프 프로듀서 입장에선 음반을 내지 않으면 이득이 될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 슬슬 윤곽이 잡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긴 한다. 오늘도 가서 마카로프 프로듀서와 회의를 할 생각이다.
발렌티나는 내가 음반 작업을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해하는 듯했지만, 그래도 조금 아쉬운지 말했다.
“그냥 오늘 쉬면 안 돼?”
“저번 주에 한 번도 안 갔기 때문에 오늘은 가야 해요.”
“그래도…….”
여기서 미적지근하게 굴 순 없었다.
그러자 아나스타샤도 만사 피곤하다는 듯 하품을 하며 말했다.
“나도 쉴래 그냥.”
“아나스타샤 너까지?”
“잠 한숨도 못 자서 피곤해. 솔직히 오늘은 놀기는커녕 그냥 아무데나 가서 자고 싶은 생각뿐이야.”
농담이 아니라 정말 당장 쓰러질 것처럼 보이긴 했다.
오늘 놀 상황이 안 되는 나와 아나스타샤를 보다가 발렌티나가 탄식했다.
“한 명은 시험이 끝나도 바쁘고 한 명은 시험이 끝나니까 노는 것조차 힘들다고 하고……. 내 팔자야.”
“네 팔자가 그렇지 뭐.”
“그런 대답을 듣자고 말한 게 아니었거든? 너 바보야?”
아무렇게나 말하는 아나스타샤에게 빽 소리를 친 발렌티나는 곧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내게 말했다.
“알았어. 어쩔 수 없지.”
“미안해요.”
“미안할 건 또 뭐야? 넌 작업하러 가는 거잖아.”
발렌티나가 그런 말 하지 말라는 듯 웃었다.
“그런데 그 음반 작업이라는 거 꽤 오래 걸린다? 그치?”
“평균적으로 이 정도 걸리는진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저와 함께 하시는 프로듀서께서는 꽤 여유를 두고 작업 중이셔서요.”
“너 정도 되면 그냥 휘리릭 쳐서 녹음하고 찍어 내면 되는 것 아닌가?”
“저 정도밖에 안 되면 몇 달을 고민해서 곡을 골라야 하죠.”
발렌티나는 날 어떻게 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난 냉정하게 다시 정정해 주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렵네.”
“조만간 슬슬 녹음에 들어갈 것 같긴 해요.”
“음반 나오면 나도 주는 거지?”
사실 나와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만들 음반의 초판 물량은 각지의 음반판매점에 무료로 뿌릴 것이기 때문에 그냥 가서 다른 음반을 사고 끼워서 가지고 오면 되겠지만,
“물론이죠.”
난 꼭 내 손으로 건네주겠다고 그녀와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