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5화
모스크바 외곽에 위치한 오래된 건물.
에우테르페 레코즈의 모스크바 스튜디오가 위치해 있는 곳이었다.
지난 4개월간 일주일에 최소 한 번씩은 오르내렸던 계단은 이제 친숙하게 느껴졌다. 천천히 계단을 올라 2층에 다다르면 간판이 보인다.
빅토르가 문을 열어 주었고, 난 작게 눈인사를 한 다음 안으로 들어섰다.
“실례합니다.”
아무도 안 계신가.
난 조심스레 발을 내딛었다. 좁은 스튜디오 안은 인기척이 없었다. 하지만 귀를 기울여 보면 웅웅대는 음악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난 음악이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가운데에 위치한 메인 컨트롤 룸이다.
“…….”
메인 컨트롤 룸의 문에 달린 작은 창문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안을 살폈다.
올백 머리에 수염을 기른 깡마른 남자가 의자에 앉아선 구부정하게 화면을 보며 키보드와 마우스를 조작하다가, 앞에 있는 무시무시한 다이얼들을 이리저리 돌리기도 했다.
이 스튜디오의 레코딩 엔지니어이자 프로듀서이자 사장인 마카로프 일리예비치다.
“…….”
난 문에서 물러나선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빅토르와 눈이 마주쳤다. 난 손가락을 입에 대었다. 조용히 기다리자는 뜻이었다.
이렇게 작업에 집중하고 있는데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할진 모르겠지만 일단 메시지만 하나 보내 놓았다. 집중해야 할 일이 끝나고 스마트폰을 확인한다면 나와 줄 것이다.
그렇게 메인 컨트롤 룸의 문 앞에서 기다린 지 얼마나 지났을까.
“이런.”
문이 열리며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나와서 나를 발견하고는 난감하다는 듯 말했다.
“기다리지 말고 그냥 들어오라 하지 않았습니까? 타티아나.”
“일하고 계시는데 방해할 순 없어서요.”
“괜찮습니다.”
“저야말로 기다리는 것도 괜찮아요.”
“하핫.”
하루 종일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일에 집중하고 있을 때 기다려 주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했다.
내가 고집스럽게 다시 괜찮다고 전하자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결국 웃어버렸다. 이런 부분에서 내가 고집이 상당히 세다는 건 그도 슬슬 아는 듯했다.
길게 말할 것 없이,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문을 활짝 열고 날 맞이했다.
“들어오시죠.”
빅토르는 이곳에서 대기하고 난 프로듀서를 따라 들어갔다.
메인 컨트롤 룸 안에는 칸막이 뒤쪽으로 손님용의 소파와 테이블이 있는 공간이 있었다. 딱히 응접실이 없는 이 스튜디오에선 대부분의 회의 등을 이곳에서 한다.
소파에 앉자 그가 물었다.
“차는 캐모마일 차면 되겠죠?”
“예.”
“베로니카 과장이 자리에 없으니 오늘은 제가 타 드리도록 하죠.”
이렇게 종종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내게 차를 타 주곤 했다. 누가 차를 타든 다 비슷한 맛이긴 하지만, 날 위해 물을 끓이고 차를 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면 어쩐지 입에 대었을 때 맛도 달라지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잠시 기다리자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차를 타 왔다.
“뜨거우니 천천히 마시도록 하세요.”
“감사합니다.”
잔을 받아 들자 향긋한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살짝 들어 목을 축였다.
잠시 그렇게 나와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말없이 차를 음미했다. 평화로운 침묵이 감돈다.
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을 때,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이쪽을 보고 있었다.
“오늘로 중앙음악학교는 학기말 시험이 끝났다고 했나요?”
“예. 맞아요.”
“타티아나는 굉장한 우등생이라고 알고 있는데, 밤새워 공부하신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밤을 새진 않았지만 얼마 못 자긴 했다. 나도 지금 아나스타샤처럼 눈 밑에 다크서클이 내려와 있는 것이 아닌지 조금 걱정되었다. 아까 봤을 땐 괜찮았었는데.
“평소보다 조금 덜 자긴 했어요.”
“하하하, 그렇군요. 좋은 결과가 있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작게 감사를 표하자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잔을 살짝 흔들며 말했다.
“어쨌든…… 시험이 끝났다면 방학이겠군요.”
“예.”
“방학 좋지요. 저번 겨울 방학 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청소년 콩쿠르에 나가셨었죠. 이번 방학에 특별한 계획은 있습니까?”
난 고개를 저었다.
“아뇨……. 특별히 없어요.”
“콩쿠르도 연주회도 없습니까?”
“예. 콩쿠르는 없고, 연주회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와 연주회를 할 계획이 있긴 한데 아직 만나서 미팅조차 가져보지 못한 상태라서요.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아요.”
슬슬 그쪽의 에이전시와 다시 접촉해서 연주회를 추진할 때이긴 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시작한다 하더라도 3개월이 채 안 되는 방학 안에 연주회를 열 수 있을진 미지수였다. 모스크바에 있는 것도 아니고 멀리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오케스트라와 리허설을 자주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이러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연주회보단 콩쿠르에 신경이 쓰이는 듯했다.
“그렇군요……. 이번 방학에 열리는 독일 에틀링겐 국제청소년 피아노 콩쿠르에 나가시진 않을까 생각했습니다만, 안 나가기로 하셨군요.”
“예. 이제 청소년 콩쿠르는요…….”
아직 열다섯 살밖에 안 되었으니 사실 연주회보다는 콩쿠르에서 수상하여 이름을 알리는 쪽이 보다 나을지도 모른다. 나도 알지만, 이미 청소년 콩쿠르에는 더 이상 나가지 않기로 선생님에게 허락도 받은 상태였다.
별생각 없었는데, 지금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말하다 보니 정말 방학에 뭘 할지 깜깜했다. 난 그저 무작정 집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연습을 하거나 친구들과 놀 생각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미하일 선생님은 그렇게 방학 동안 잡념 없이 차분하게 집에서 연습을 하여 실력을 기르는 것도 필요하다 하시면서 딱히 뭐라 하진 않으셨다. 하지만 이렇게 무계획적이어도 되는 건가 약간 위기감이 든다.
마카로프 프로듀서에게 이렇게 구멍이 숭숭 난 내 방학 계획을 털어놓자 조금 부끄러웠다. 하지만 프로듀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음반 작업은 방학에도 계속하실 생각이시죠?”
“물론이죠.”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음반 작업인 것이다.
무계획 그 자체인 방학에 그래도 집중해서 할 일이 있다는 점에 조금 안도를 얻으며 내가 물었다.
“저기, 그래서 말씀드리는데요, 마카로프 프로듀서.”
“예.”
“이번 방학에 녹음을 시작할 수 있을까요?”
그간 스튜디오에서 내가 한 일은 마카로프 프로듀서와 앉아서 레퍼토리 안에서 한 번 연주해 볼 곡들을 선별해서 리스트를 만들고, 쭉 연주해 보고, 함께 들어 보면서 피드백을 받고, 그 외로는 연주를 녹음하고 재생하는 음향 기기들에 대한 지식 등을 배우는 것 정도였다.
아직 한 곡도 음반을 채우지 못한 것이다.
그리 급한 마음은 아니었지만 살짝 물어보니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슬슬 물어 볼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4개월……. 길지는 않지만 짧지도 않죠. 그간 타티아나와 많은 회의도 거쳤고요. 보통 이렇게 자주 회의를 하면서도 시간을 4개월이나 끌지는 않습니다.”
“아……. 그런가요.”
“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려 아직도 저는 조금 고민 중입니다.”
홍차로 다시 목을 축이고, 그가 말을 이었다.
“타티아나가 보통의 열다섯 살의 연주자였다면……. 이렇게까지 시간이 걸리진 않았을 겁니다. 연주 가능한 레퍼토리야 뻔하고, 그중에서 가장 좋은 곡을 고르면 그만이니 말이죠.”
“그……렇겠죠?”
“물론 그런 보통의 학생이라면 애초에 접근도 하지 않았겠지만요.”
애매한 내 말에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딱 잘라 말했다.
그런 보통의 연주자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
프로듀서가 소파에서 등을 떼고, 테이블 앞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타티아나는 특별합니다. 고전에서 낭만을 거쳐 현대까지 어마어마하게 방대한 피아노 레퍼토리를 지니고 있죠. 지금 4개월간 그 레퍼토리를 거의 다 들어 본 것 같긴 하지만……. 하하.”
단 몇 곡을 골라내기 위해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내 레퍼토리 전체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지금 그 감상을 말하고 있었다.
“제가 그냥 음반을 만들어 팔아 치울 생각이었다면 길게 생각할 것 없이 몇 그룹으로 분류한 다음 바로바로 녹음해서 음반으로 만들었을 겁니다. 타티아나의 장점 중 하나는 크게 기복이 없이 대부분의 곡들이 뛰어난 완성도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니까요.”
그가 피식 웃으며 찻잔 끄트머리를 톡 쳤다.
“길게 생각할 것도 없군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으로 하나,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8번, 14번, 17번으로 하나. 23번, 24번, 29번, 32번으로 또 하나, 쇼팽 연습곡 전곡으로 하나, 쇼팽의 프렐류드 전곡으로 또 하나. 발라드 전곡…….”
그렇게 많은 곡들을, 내가 연주할 수 있는 곡들을 늘어놓던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그래서야 의미가 없죠.”
그가 빙그레 웃었다.
“전 열다섯 살의 타티아나를 영생하게 만들 딱 한 장을 만들 겁니다.”
“알고 있어요. 때문에 지난 4개월이 있었죠.”
“4개월이 더 걸리지 말라는 법도 없겠죠.”
상당한 완벽주의자에 가까운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날 위해, 그리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4개월 정도의 준비 기간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한 신중함과 까다로움은 존경할 만하다. 난 아무런 불만도 없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 가끔,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이미 나에 대해 어느 정도 갈피를 잡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제가 지금 구현해 내는 음악들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고 계시지 않나요? 마카로프 프로듀서.”
“…….”
대놓고 조금 직접적으로 물어보자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조용히 날 바라보았다.
우리는 음악에서 보다 많은 것을 읽어낼 수 있는 예민함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 정도 되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4개월간 수백곡이나 되는 곡들을 들으면서 아직도 아무것도 감을 잡지 못했다면 말이 안 된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내 의도를 가늠하는지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해라기보단…….”
진지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가 들리더군요.”
“목소리요?”
“쇼팽과 라흐마니노프를 하고 싶다고 외치는 목소리 말입니다.”
직접적으로 물어본 내게 직접적인 대답이 떨어졌다. 아주 직설적이었다.
난 바로 인정하기보다 괜히 한 번 시치미를 뗐다.
“……제가 그랬나요?”
“실제로도 좋아하시죠. 아니라고 하진 못하실 겁니다.”
“맞아요. 정확하세요…….”
내가 쇼팽과 라흐마니노프, 그 두 음악가에게 가지고 있는 애정은 상당히 깊었다. 그 심상과 감수성은 수많은 작곡가들 중에서도 가장 내 마음에 잘 와닿았고, 때문에 음악을 언어로 사용하면서 곡이 곧 어휘력이라면 내 어휘력의 많은 부분은 그 두 음악가에게서 비롯되어 있었다.
내 첫 음반에 쇼팽과 라흐마니노프의 곡들을 싣고 싶은 것은 당연한 마음이었다.
그때, 가차 없는 마카로프 프로듀서의 목소리가 날아와 꽂힌다.
“하지만 제가 듣기에 지금 타티아나에게 어울리는 것은 베토벤과 슈만입니다.”
“…….”
냉철한, 같이 음반 작업을 하는 프로듀서이기 이전에 음악가로서 내게 할 수 있는 진실 된 조언이었다.
난 쇼팽과 라흐마니노프의 곡들을 연주하고 싶다. 하지만 쇼팽은 연주하지 못하게 된 곡들이 너무 많았고 구세프 선생님에게 혹독한 질타를 들었던 라흐마니노프는 수많은 타협과 적응을 거쳐 그 형태를 거의 새로이 쌓아올렸다.
겉보기엔 말끔해 보이지만 사실 내부적으로는 문제가 상당히 많다는 것을, 나는 안다. 때문에 마카로프 프로듀서의 분석에 반박하지 못했다.
“슈만…….”
가만히 읊조리자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물었다.
“무언가 생각나시는 거라도?”
“아, 아뇨. 제가 이번 실기곡으로도 슈만의 크라이슬레리아나를 연주해서…….”
“하핫, 크라이슬레리아나. 담당 선생님께서 고르신 겁니까?”
“예.”
“그렇군요.”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딱히 중앙음악학교의 선생님과 같은 의견이라 기뻐하는 투는 아니었다. 되레 조금 가라앉은 말투였다.
두 분 모두 내 슈만에서 무엇을 읽어 냈는진 모르겠지만, 이로써 이야기는 확실해졌다.
“아무튼, 단적으로 제 의견을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타티아나는 쇼팽과 라흐마니노프를 하고 싶어 하시는 듯하지만, 지금 열다섯 살의 첫 음반으로 내기엔 베토벤이나 슈만이 어울린다는 것이죠.”
“제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일까요?”
“실력의 문제라기보단…… 글쎄요. 실력이 없다면 앞서 말씀드렸던 그러한 목소리를 곡에 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곰곰이 생각하는 듯 의자의 팔걸이를 툭툭 치면서 날 바라보았다. 사람을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이 매섭지만, 거기에 냉기가 서려 있진 않다. 단지 날 더 알고 싶다는 듯한 시선이다.
“표현력과 호소력의 깊이가 어디에서 오는진 저도 잘 모르겠군요……. 보통은 베토벤과 슈만이 표현하기엔 더 어려운데 말입니다. 타티아나는 그것을 더 잘하는 것 같단 말이죠. 타고난 센스가 있어요.”
“…….”
대부분의 대곡들을 청각을 잃고 나서야 써 낸 베토벤과, 손가락이 부러지는 부상 때문에 연주자가 되지 못하고 작곡과 평론에 전념한 슈만의 곡들은 그 내용이 상당히 깊고 인간의 내면에 달라붙는 듯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곤 했다.
때문에 연주자들은 겉보기에 화려한 기교가 넘치는 작곡가들보다, 담백하지만 깊이 있는 베토벤을 제대로 연주해 내는 것을 더 어려워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것은 실력 차이기도 하지만, 성향과 상성의 차이이기도 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그런 의미로 내게 베토벤과 슈만이 어울린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
난 내 성향이 베토벤이나 슈만 쪽과는 멀다고 생각했었는데. 모두들 아니라고 하니 잘 모르겠다.
내 특수한 경험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바꾸어 놓은 것일까. 단순히 표현력과 묘사력뿐이 아닌 성향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 나로선 어찌할 도리가 없다.
정말 잘 모르겠다.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말했다.
“천천히 살피면서 곡을 골라 보면 좋겠다 싶습니다만……. 방학에 녹음을 시작하고 싶다면 한번 생각해 보시죠.”
그는 이전에 내게 망치를 들고 있다고 말했을 때처럼, 진중하게 상황을 설명하고 내게 선택권을 넘겼다.
“해야 할 곡을 하실 것인지, 하고 싶은 곡을 하실 것인지.”
베토벤과 슈만, 쇼팽과 라흐마니노프에서 고를 수 있다면 그리하라는 뜻이었다. 저 네 작곡가의 곡들만 합쳐도 수백, 수천 곡이 넘어가지만, 그래도 모든 클래식 작곡가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때보다는 조금 낫긴 했다.
그래도, 고르기 어려웠다.
미하일 선생님도 내 8학년을 마무리 짓는 학기말 실기곡으로 슈만이 적합하다고 생각하셔서 추천하신 것이 분명했다. 열다섯 살의 나를 남기는 데엔 슈만이나 베토벤이 정말 적합할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내가 해야 할 곡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곡들은 많은 문제들을 덮고 외면하며 가까스로 다시 쌓아 올려놓은 쇼팽과 라흐마니노프였다.
왜 이런 고집을 자꾸만 느끼는진 나도 잘 모르겠다. 미하일 선생님과 구세프 선생님으로부터 피아노를 새로 배우면서 이전까지의 음악들은 모두 미뤄 두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무의식중에 미련이 아직도 남아 있는 걸까.
하지만 제대로 감당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다시 그것들을 똑바로 직시하려 든다면, 난 다시 엉망이 되어버릴 것이 분명했다.
이제는 그 모든 것이 두려웠다.
“생각해 볼게요…….”
“길게 생각해도 좋으니 깊게 생각해 보시길. 지금의 모든 고민은 타티아나를 보다 높은 곳에 올려놓을 원동력이 될 테니.”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
스튜디오에서는 2시간 정도 있었다.
오늘도 데모로 녹음해 봐야 할 곡들은 많았고, 난 마카로프 프로듀서의 요청대로 주법을 바꿔 보기도 하면서 연주하고 또 연주했다.
그렇게 오늘도 스튜디오에서의 일과를 마치고, 숙제를 받아서 나오자 빅토르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아가씨.”
“기다려 주셔서 고마워요, 빅토르.”
난 빅토르와 함께 계단을 내려왔다. 소로킨이 운전하는 검은 벤츠는 바로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차에 오르자 소로킨이 물었다.
“바로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아가씨.”
“예. 부탁드려요.”
차는 부드럽게 출발했다.
난 푹신한 시트에 머리를 묻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건물과 사람들이 지나쳐 갔다. 날이 따뜻해져서 저마다 간편한 차림을 한 사람들은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걷고 있었다.
난 잘 모르겠다. 그저 집으로 돌아갈 뿐이다.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그렇게 밖을 구경하고 있는데,
“……!?”
난 놀라서 고개를 들고는 거의 순간적으로 외쳤다.
“잠시만요! 차 세워 주세요!”
소로킨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내 요청에 따라 곧바로 차를 도로변에 세워 주었다.
곧바로 내가 문을 열려고 하자 빅토르가 막았다.
“갑자기 무슨 일이십니까, 아가씨. 그렇게 나가시면 안 됩니다.”
“아……. 미, 미안해요.”
내 안전에 늘 신경을 쓰고 있는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데 이렇게 멋대로 굴어선 안 된다. 난 차분히 설명했다.
“아는 사람을 방금 본 것 같아서요.”
“아는 사람 말입니까?”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스타샤의 오빠, 일리야였어요.”
빅토르는 어쩐지 조금 표정이 좋지 않다. 난 그가 이미 일리야에 대해 알아보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최대한 조심스레 부탁했다.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안 될까요?”
빅토르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더니 문을 열어 주었다.
“아가씨가 원하신다면.”
그는 가볍게 말하며 날 따라 나왔다.
빅토르를 대동하고 차로 왔던 길을 도보로 되돌아갔다. 조금 걷자 후드를 입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난 그 사람이 일리야라고 확신했지만 혹시나 싶어 가까이 다가가서 살짝 불러 보았다.
“일리야.”
“……?”
남자가 뒤돌아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에 또렷한 이목구비. 아나스타샤의 오빠인 일리야였다.
그는 이런 곳에서 날 마주칠 줄은 상상도 못했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타티아나?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스튜디오에 갔다가 오는 길에 일리야를 발견해서요. 와, 정말 놀랐어요.”
“나야말로 놀라 기절하는 줄 알았어.”
모스크바는 정말 넓은 도시였다. 번화가도 아닌 이런 외곽진 곳에서 아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 따르지 않고서야 어려운 일이었다.
일리야도 그런 생각을 했는지 반가운 표정을 했다.
쾌활하게 일리야가 말했다.
“잠깐 이야기 좀 할래? 내가 살게.”
“아,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괜찮죠? 경호원 아저씨.”
일리야는 내 옆을 지키고 서 있는 빅토르에게 물었다. 빅토르는 별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