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6화
일리야와 나는 근처의 노천카페로 갔다.
파라솔이 있는 테이블만 몇 개 나와 있는 한적한 카페였는데 잠시 이야기를 나누기엔 적절한 곳처럼 보였다.
“저쪽에 앉을까.”
“예.”
안쪽의 테이블로 향하자 일리야는 자연스레 내 의자를 빼 주었다.
“고마워요.”
앉으려고 하면 일리야가 의자를 휙 빼버리진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지만 저기 옆에 빅토르가 도끼눈을 하고 보고 있는데 일리야가 그런 짓을 할 만큼 간이 큰 사람이 되진 못할 것 같다.
의자에 앉자 일리야도 맞은편에 앉았다. 앉자마자 종업원이 와서 주문을 받아 갔다. 나는 히비스커스 차를, 일리야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난 한참 만에 본 일리야를 다시 자세히 보았다. 어쩐지 헤어스타일도 산뜻해진 것 같고 입고 있는 후드도 깔끔했다. 전체적으로 이미지가 좀 바뀐 것 같다.
그가 말했다.
“같이 식사라도 하면 좋겠지만 저녁 약속이 있어서. 미안해.”
“괜찮아요, 일리야.”
그렇게 예의상 나누는 말들이 오가고, 순간 일리야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의자에 기대더니 손을 빙빙 돌렸다.
“하, 그냥 다 캔슬할까? 어때?”
“그래요? 같이 놀까요?”
“아니, 농담이야.”
일리야가 딱 잘라 말했다. 난 그가 이렇게 말할 줄 알았기에 웃음을 터뜨렸다.
난 일리야와 주고받는 이런 대화가 꽤나 즐거웠다. 내 쪽에서 적당히 선을 가늠하기 전에 일리야는 이미 나와의 관계를 꽤나 분명하게 정해놓은 듯했다. 난 거기에서 상당히 깊은 연대감과 동지 의식을 느끼곤 했다.
이성에 나이도 분야도 다르지만 나름대로 죽이 잘 맞는 예술가 친구는 흔하게 만날 수 있지 않다. 길거리에서 스쳐 간다면 반드시 붙잡고 인사를 함이 당연했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가만히 바라보자 일리야가 히죽 웃었다.
“왜 그래?”
“아뇨, 약간 스타일이 달라지신 것 같아서요.”
“범생이 같지?”
“전혀요. 멋있어지셨는걸요.”
일부러 장난치는 것이 아니라, 솔직한 감상이었다. 일리야는 이렇게 깔끔한 모습이 훨씬 나았다.
“아나스타샤도 좋아하지 않던가요?”
“안 어울린다고 난리던데.”
“아하하하.”
그 말을 듣자마자 이즈마일로바 집안의 광경이 마치 눈에 보일 듯 그려졌다. 나도 모르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날 보며 일리야는 조금 멋쩍은 듯 커피를 홀짝이더니 말했다.
“뭐……. 확 튀는 것도 좋지만, 난 지금 미술을 더 배우려고 하는 학생의 입장이니까 바뀔 필요도 느껴서…….”
“그랬군요.”
“그랬지.”
학생의 입장이란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일리야는 정말로 변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가 툭 내뱉었다.
“사실 구술시험 치다가 10분 시험보고 20분 동안 욕먹었거든.”
“흡.”
난 마시던 차를 뿜을 뻔했다. 우스워서가 아니라 당황해서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구술시험 시험관들이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들도 아닐 텐데 20분이나 시간을 할애한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 정말요?”
“계속 미적 감식안이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묻고 예술에 대한 관점이나 뭐 그런 것들을 묻는데, 말이 시험이지 욕하는 걸로밖에 안 들리더라고. 그때 뭐 어떻게 변명했었는지 기억도 안 나네.”
“예게 구술시험이었나요?”
“그것도 있었고.”
시험관들은 일리야에게 상당히 공격적인 질문들을 많이 했었나 보다. 일리야가 20분 동안 시달리며 답했을 것을 생각하니 조금 안쓰러웠다.
일리야가 다 치렀을 시험의 이름은 ‘통합 국가 시험’ 짧게 줄여서 예게라고 불리며 미국의 SAT나 한국의 수능처럼 러시아의 대입 시험 체계였다.
5월에서 6월 사이 거의 한 달에 걸쳐서 12과목 중 선택한 과목들을 치르게 되는데, 필기시험뿐만 아니라 구술시험도 있어서 복잡한 시험이었다.
난 문득 걱정이 되어서 살짝 물어보았다.
“그래도 시험은…… 잘 치르신 거죠?”
“나쁘지 않았던 것 같은데. 글쎄.”
일리야는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실기시험에 올인하려고.”
“아니…….”
“어차피 예게 비중은 별로 안 높아.”
“그런 말 조금 불안해지는데요. 시험의 신께서 보고 계셔요, 일리야.”
“난 그런 신 모르는데.”
괜한 소리를 길게 해 봐야 좋을 일 없겠다 싶어서 난 입을 다물었다.
일리야가 어느 미술대학에 지원하는진 모르겠다. 모스크바의 국립 수리코프 미술대학이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국립 레핀 미술대학이 러시아에서 가장 알아주는 미술대학이긴 하지만, 굳이 물어보진 않았다.
그냥 어디라도 일리야가 원하는 미술을 배울 수 있는 곳에 가서 공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일리야는 잠시 말없이 커피를 마시더니 날 보며 약속했다.
“어쨌든, 대학 붙으면 이런 거 말고 제대로 보답할게.”
“보답이라뇨……. 전 아무것도 한 게 없는걸요.”
“그냥 그런 게 있어.”
그가 스스로를 조금 더 진지하게 바라보고 노력하고 있는 것은 그가 결정한 것이다. 난 그저 이야기를 조금 나누었을 뿐이지, 딱히 보답이라는 것을 받을 정도로 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일리야는 내가 뭐라 한들 듣지 않겠다는 눈빛이다. 결국 난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한 일리야가 물었다.
“난 됐고. 타티아나 너는 어디 가던 길이야?”
“스튜디오에 갔다가 집으로 가는 길이었어요.”
“스튜디오? 뭐 녹음이라도 해?”
“예. 음반요.”
“와우.”
일리야는 정말로 놀라워했다.
“정말 대단하네. 네 나이에 음반 같은 걸 내는 게 쉬운 일 같아 보이진 않는데.”
“아직 녹음은 시작도 못 했지만요.”
그간 스튜디오에 드나들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그냥 음반을 내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다는 점이었다.
자비로 음반을 만드는 것 정도는 어느 곳을 가더라도 쉽게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앨범 커버를 만들고 음반을 CD로 만드는 데까지 빠르면 30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정말 제대로 된 프로듀서와 제대로 된 음반을 만드는 일은 너무 어려웠다. 준비 기간만 4개월이 걸리고도 아직도 프로그램조차 정하지 못했을 정도로.
단지 내가 음반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에만 감탄하고 있는 일리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불쑥 불렀다.
“저기, 일리야.”
“응.”
일리야는 곧장 대답했다.
하지만 난 그 다음 말을 물어보지 못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
지금 내 음반작업에 있어서 가장 큰 고민에 대해 예술가 동료인 그에게 물어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시험 준비로 바쁠 그에게 부담되는 질문은 삼가야 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도 결정을 내지 못하고 내가 결정할 일이라고 건네준 일이었다. 내가 스스로 생각해서 결정함이 옳았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있는데, 테이블에 팔을 세우고 턱을 괴고 있던 일리야가 입을 열었다.
“잠깐 내가 열다섯 살 때 이야기를 해 볼까.”
그리고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난 그때 음반 같은 걸 내진 못했지만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그래피티를 이곳저곳에 뿌리고 다녔었거든. 건물 벽, 자동차, 담벼락, 터널, 스케이트장……. 뭐라도 남기고 싶어서 온갖 곳에 바밍을 했었지.”
“자, 자동차요?”
“버려진 차인 줄 알고 했다가 주인이 나타나는 바람에 걸려서 죽을 뻔하기도 했어.”
예상했던 그대로 열다섯 살 때의 일리야는 상당히 천방지축이었던 모양이다.
듣기에 상당히 살벌하게 들렸지만, 그래도 그는 그런 옛날이 즐거웠었는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욕도 정말 많이 먹고 지워지기도 많이 지워졌지. 그런데 희한하게도 올드스쿨, 그러니까 기본에 충실했던 것들은 좋게 받아져서 지워지지 않는 경우도 많았었던 것 같아.”
“…….”
“그때 내가 느꼈지. 일단 잘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어리다고 해서 무시하지 못하도록 할 수 있는 최선의 실력을 보이면 누구나 인정해 준다는 걸.”
알고 있지만, 정말 충분히 알고 있지만 이렇게 들으니 또 새롭게 들리는 말이었다.
내가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일리야는 커피 잔 끝을 손끝으로 만지며 말했다.
“음반이라는 건 잘 모르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들려주려는 거잖아?”
“예. 그렇죠.”
“그렇다면 아마 별반 다르진 않을 거야.”
난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마카로프 프로듀서와 작업 중인 음반은 지금의 나, 열다섯 살 타티아나의 음악을 세상에 공개해 오로지 음악만으로 평가받는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나라는 연주자가 앞으로 만들 수도 있을 연속되는 음반들 중에 속해 있는 한 장이 아닌, 익명 연주자의 음반 한 장으로 증명되는 것은 연주하는 순간의 단편적인 나였다.
앞으로 미래의 내가 어떤 곡을 연주할진 모르겠지만,
지금 할 수 있는 곡으로, 이 시간 자체에 충실할 필요를 느낀다.
시간 예술을 기술로 영원히 묶어 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직도 어렴풋이밖에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제야 조금 더 알 것 같다.
어떤 정답도 존재하지 않는 문제에 잘 생각해서 결정을 내리려고 하니 머리가 아프고 혼란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젠 조금 뭘 해야 할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두서없이 날아드는 생각들은 복잡했지만, 사실 어렵고 특이할 것도 없었다.
“아…….”
난 새로 쌓아올린 음악이 세상에 얼마나 통용될지 실험해 보고 싶었으니까. 그것이 콩쿠르나 연주회의 형태를 하기도 했었다면, 이번엔 음반일 뿐이다.
이 또한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이고, 늘 해왔던 일이다.
“…….”
그렇게 상념에 빠져 있는데, 일리야가 실없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지? 네겐 재미없는 이야기로밖에 안 들렸을 것 같은데, 타티아나.”
난 고개를 저었다.
“아뇨. 들려주셔서 감사해요.”
“그냥 내 이야기일 뿐이니까 너무 깊게 생각하진 말고.”
“……예.”
내가 얌전히 대답하자 일리야는 약간 석연찮은 표정을 짓더니 첨언했다.
“쓸데없는 이야기 하나 더 하자면, 너는 전혀 안 그런 성격처럼 보이는데도 묘하게 급한 구석이 있어. 마치 올해 안에 모든 것을 다 해버려야 한다는 것처럼.”
반박하지 못하고 침묵하자 그가 가늘게 웃었다.
“느긋하게 하라곤 안 할게. 대신 너무 무리하진 마.”
“그게 참 어렵네요.”
무리하지 않는 것이 어렵다니, 일리야가 어떻게 들었을진 모르겠지만 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일리야는 이상하다고 말하지 않고 그저 웃기만 했다.
떠올려 보면 이전에도 비슷한 대화를 주고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일리야는 날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었지만, 지금은 조금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점은 조금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운 좋게 길에서 만났으면 그저 즐거운 이야기만 해도 모자를 판에 어려운 이야기를 길게 나눈 우리들은 조금 더 가벼운 주제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방학엔 뭐 해?”
화제는 자연스럽게 오늘부터 시작된 방학 이야기로 넘어갔다. 일리야는 분명 아나스타샤가 귀찮게 굴 것이라며 미리 양해와 사과를 구하기도 했다.
난 아나스타샤가 날 귀찮게 만들어 주는 것은 언제라도 환영이었으므로 양해도 사과도 받지 않았다. 일리야는 내가 그렇게 반응할 줄 알았다는 듯 폭소를 터뜨렸다.
그러고는 아예 우리 집에 아나스타샤를 한 달 정도 머물게 하면서 내 규칙적인 생활 패턴을 몸에 익히도록 하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건 또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12시에 잠들어서 3시경에는 일어나는 내 생활 패턴에 그녀가 도망쳐버릴지도 모르겠지만.
차를 다 마시고, 디저트와 주스를 또 주문해서 그것들도 모두 먹을 때까지. 우리의 대화는 그 즐거움만큼 조금 길어졌다.
일리야가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는 애석하다는 듯 말했다.
“슬슬 가 봐야겠네.”
“앗, 약속 시간에 늦으시나요? 그렇다면 저희 차로…….”
“괜찮아. 괜찮아. 바로 앞이니까.”
일리야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손사래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따라 일어섰다.
일어서서 보니 키 차이가 꽤 났다. 자연스레 올려다보게 된다.
대화를 할 땐 자연스럽고 친구 같았지만, 이렇게 헤어질 땐 어떻게 인사해야 할지 약간 어색하다. 그렇게 주저하고 있자 일리야는 가만 날 내려다보더니 씩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지나가다가 붙잡아 줘서 고마웠어. 오늘 짧지만 즐거웠네.”
“저야말로요, 일리야.”
“다음에 또 보자. 이런 노천카페 말고 조금 더 좋은 곳에서.”
“아하하, 전 노천카페도 괜찮은데요.”
“내가 싫어.”
좋은 곳 어디에 데려다줄진 모르겠지만 이렇게까지 말해 준다면 기대해도 될 것 같다.
일리야는 손을 흔들며 담백하게 인사했다.
“갈게.”
“잘 가요. 일리야.”
나 역시 한 손을 흔들며 떠나가는 그를 배웅했다.
그는 양손을 주머니에 넣고는 특유의 걸음걸이로 걸어가다가 말고 문득 뒤돌았다. 난 계속 그를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눈이 마주쳤다. 생긋 웃어 주자 그도 피식 웃으며 다시 손을 슥 흔들고는 뒤돌아 가야 할 곳으로 향했다.
“…….”
점점 멀어지는 일리야의 뒷모습을 보며 난 짧게 기도했다. 일리야가 대학 입학을 위한 다른 시험도, 실기도 잘 치를 수 있기를. 그가 원하는 곳에 가서 원하는 공부를 하여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기를.
특정한 신에게 부탁하는 것도 아닌 내 기도 따위가 잘 듣는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나으리라 믿는다.
이윽고 일리야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그제야 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빅토르가 곁에 다가와 있었다.
난 웃으며 말했다.
“후후……. 그럼 이제 가요. 빅토르도 쉬어야죠.”
“제가 쉬는 건 상관없…….”
“가요.”
“아가씨, 잡지 마시고…….”
빅토르가 무어라 했지만 난 무시하고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내가 당긴다고 해서 끌려올 사람이 아니었지만 빅토르는 정확하게 내 발걸음에 맞춰서 따라오다가, 내 옆에 섰다.
그가 투덜거렸다.
“팔 아픕니다.”
“에이, 설마요.”
“제 팔이 아니라 아가씨 팔 말입니다.”
“괜찮아요. 맨날 하는 일이 있는걸요. 전 생각보다 강하답니다.”
농담으로 답하자 빅토르는 어이가 없다는 듯 결국 웃고 말았다. 난 고마움을 담아 조금 더 강하게 팔을 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