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7화
눈을 뜨니 캄캄한 새벽이었다. 왼쪽 귀가 먹먹해서 손을 들어 만져 보니 이어폰이 끼워져 있었다.
“…….”
이어폰을 낀 채로 눕더라도 자기 직전엔 꼭 빼놓곤 하는데 오늘은 피곤함에 곯아떨어진 것 같다. 귀가 나빠지기라도 하면 정말 곤란하다. 다음부턴 주의해야겠다.
부스스 일어난 나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그대로 기지개를 켰다. 군데군데 피로감이 남아 있다.
억지로라도 더 자는 게 전체적인 컨디션을 유지하는 데에 좋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게다가 오늘은 방학 첫 날이었다. 학교에 갈 필요도 없이 해가 중천에 뜰 때가지 늑장을 부리더라도 크게 무어라 할 사람은 없었다.
조금 더 누워서 잠을 청해도 좋겠지만, 난 이렇게 새벽에 한 번 깨어버리면 좀처럼 잠들지 못하곤 했다.
특히나 할 일이 생겨버린 오늘 같은 날에는 더더욱.
“…….”
머릿속에 벌써 피아노의 선율이 흔들거리며 울리고 있었다. 중증이라는 건 알지만 이제 와서 어찌할 도리가 없다. 가까운 곳에 바로 이 욕망을 풀어버릴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한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난 살짝 스트레칭을 하고, 침대에서 내려와선 가운 하나만을 걸치고 욕실로 향했다.
거울을 보니 유령처럼 희멀건 얼굴을 한 내가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일부러 조금 웃어 보이고, 찬물로 세안을 했다. 정신이 조금 더 돌아온다.
“…….”
고개를 드니 물기가 스며서 그런지 아까보단 조금 나아 보인다. 괜찮네.
로션까지 챙겨 바른 나는 다시 방으로 돌아가는 대신 잠옷에 가운 차림 그대로 저택 밖으로 나섰다.
“…….”
찬바람이 휙 스며든다. 7월이 다 되어 가는 모스크바의 날씨는 정말 따뜻해져 있었지만 새벽엔 여전히 조금 추웠다. 방으로 돌아가 제대로 된 옷을 갖춰 입고 다시 나올까 싶었지만 아예 버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별관까진 그리 멀지 않으니 그냥 가기로 했다.
종종걸음으로 별관으로 걸으며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별들이 총총했다.
과학 시간에 배웠던 것들을 떠올려 별자리를 찾아보려고 잠시 집중해 보았으나 잘 못 찾겠다.
멍하니 보다가 그냥 가장 밝아 보이는 별들을 대충 이어보았다. 물음표 모양의 뱀처럼 보여서 즉석에서 물음표뱀자리라고 명명했다. 세상 모든 천문학자님들에겐 죄송할 따름이다.
바보처럼 킥킥거리는 사이 별관에 도착했다. 자연스럽게 발걸음은 개인 연습실로 향한다. 그간 수천 시간은 족히 보냈을 연습실이다.
연습실 안에 들어선 나는 피아노로 향하는 대신, 이번엔 악보들이 꽂혀 있는 책장으로 향했다.
난 별과 우주의 움직임같이 거대한 흐름은 잘 알지 못한다. 내가 조금이나마 아는 것은 근 몇 백 년 사이의 짧은 음악의 흐름뿐이다.
그 음악의 흐름이라는 것은 학자들에 의해 문자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지만, 이렇게 내가 가장 잘 알아볼 수 있는 악보라는 형태로 확실하게 남아 있었다.
“…….”
조용히 손가락을 들어 악보들을 천천히 훑었다.
요한 파헬벨,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도메니코 스카를라티, 조지 프레드릭 헨델, 요제프 하이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그렇게 책장의 반 정도를 넘어갔을 때,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18세기를 대표하는 것은 물론 수백 년의 음악사 전체를 통틀어도 가장 위대한 음악가로 손꼽히곤 하는 천재 음악가.
베토벤이 작곡한 곡들은 교향곡과 관현악, 협주곡, 실내악뿐만 아니라 오페라와 가곡도 많았다. 그중 내 책장에 꽂혀 있는 것은 협주곡과 피아노 독주곡뿐이었다.
난 의자를 가져다 놓고 피아노 독주곡의 악보들을 하나씩 내려서 쌓았다. 모든 악보를 다 내릴 필요는 없었다. 내 머릿속에 있는 레퍼토리 안의 악보와 일치하는 악보들만 하나씩 내렸다. 피아노 소나타와 변주곡, 바가텔 등이 차곡차곡 쌓였다.
“…….”
그다음으로도 계속되었다. 조아키노 로시니, 프란츠 슈베르트, 엑토르 베를리오즈, 펠릭스 멘델스존, 카미유 생상스. 낭만주의로 클래식이 한창 꽃피었을 시대의 작곡가들은 화려하고 아름답다.
그리고 로베르트 슈만. 그가 남긴 곡들은 19세기 독일 낭만음악의 정수라 할 수 있었다. 난 슈만의 악보들도 하나씩 내렸다.
그렇게 베토벤과 슈만의 악보들을 쌓아놓으니 스무 권도 넘었다.
“…….”
나는 잔뜩 쌓인 악보들을 의자 옆으로 옮겨 왔다.
캐모마일차를 한 잔 끓인 다음, 쌓여 있는 악보들 중 가장 위에 있는 악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서 처음부터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내게 있어서 이렇게 악보를 읽는 행위는 보통의 책을 읽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건반을 연주하면서 따라 읽을 필요는 없었다. 소설을 읽으면 인물과 풍경이 떠오르듯 악보를 읽으면 선율과 화성이 스쳐 지나간다.
이미 수백 번이고 읽었던 이야기들이지만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다.
이미 내용에 대해선 음표 하나, 지시표 하나까지도 완벽하게 외우고 있더라도 이렇게 악보의 형태를 하고 있는 것을 다시 읽어보는 것은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었다.
난 그렇게 다시 차분하게 베토벤과 슈만의 이야기들을 읽어 보았다. 바로 피아노 앞에 가서 내 음악을 연주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1년 간, 정확하게는 성악을 배운 뒤로 1년도 안 되는 사이 다시 쌓아올린 내 음악과 지금 가장 가까이 닿아 있다고 평가받는 음악들이다. 나 스스로도 모를 이 지향성을 파악하고 이해하기 위해선 다시 악보에서부터 이야기들을 읽어 볼 필요성이 있었다.
“…….”
차가 식고, 달이 지고, 해가 밝아 오고, 새가 지저귈 때까지, 난 조용한 연습실에서 위대한 음악가들의 이야기를 읽고 또 읽었다.
***
전날 늦게까지 음악 마스터링 작업을 하던 마카로프는 아침부터 울리는 전화벨에 살짝 스트레스를 느꼈다. 하지만 발신자의 이름을 보고는 급히 일어나선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전화를 받았다.
“타티아나.”
- 아, 마카로프 프로듀서.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군요.”
언제나처럼 고아한 말씨로 타티아나가 인사했다. 마카로프는 짧게 답인사를 건넸다.
- 이른 아침부터 죄송해요. 혹시 주무시고 계셨나요?
“아뇨, 괜찮습니다.”
용건이 있다면 아침이 아니라 새벽에 전화를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마카로프의 괜찮다는 말에 타티아나는 다행이라는 듯 용건을 이야기했다.
- 제 녹음 건 말인데요……. 오늘 할 수 있을까요?
“……? 오늘 말입니까?”
- 예.
예상치 못한 용건이었다.
마카로프는 타티아나가 방학 안에 무언가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은 알 수 있었으나, 이렇게 방학 첫날 아침 댓바람부터 전화를 걸어서 작업을 하자고 할 줄은 미처 몰랐다.
더더군다나 어젠 큰 숙제까지 안겨 줬었는데.
“…….”
그런 숙제를 받고도 타티아나는 이렇게 나서고 있었다. 스스로 무언가 답을 내렸다는 신호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며칠은 고민을 할 줄 알았는데, 결정을 내린 타티아나는 거침이 없었다. 마카로프가 웃으며 물었다.
“뭔가 확신이 드신 모양이군요?”
- 꼭 확신이라 할 순 없지만요……. 확신이 있어야만 무언가 할 수 있다면 전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마카로프는 잠시 말을 잊었다. 타티아나는 종종 위태로운 모습을 보이면서도, 강인하게 나아가려 한다.
그렇다면 이렇다 저렇다 말할 것은 없었다.
“좋습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입니까?”
- 예? 아뇨,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점심 이후에 출근하시죠? 저도 그때 스튜디오로 갈게요. 시간으로는…… 2시경이 어떠신가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 2시에 뵙겠습니다.
전화가 뚝 끊어졌고, 마카로프는 침대에 앉아 잠시 스마트폰을 내려다보았다.
어린 그녀가 품고 있는 고민이 뭔진 모르겠으나 해야 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에 대한 괴리는 누구나 겪는 것이기도 했다.
때문에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진 않았고, 다만 시간이 조금 걸리리라 여겼다. 안 그래도 타티아나는 고민이 많은 성격이라 오래 걸릴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예상은 깨졌다. 어제 음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단 하루 만에 타티아나는 당장이라도 녹음을 하자는 듯 전화를 해 왔다.
“흠…….”
마카로프는 더 잘 생각이 싹 사라졌다. 그는 일어나서 책상을 마구 뒤적였다. 타티아나와 회의를 했던 자료들과 공책들이 있었다.
마카로프는 그 모든 것을 챙겨들고 스튜디오로 향했다.
만약 바로 녹음을 시작해야 한다면 지체 없이 할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해놓아야 했다. 스튜디오의 피아노 부스는 타티아나에 맞춰 잘 세팅되어 있었지만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마카로프는 바쁘게 준비를 갖추었다.
정확하게 오후 2시가 되자 타티아나와 빅토르가 스튜디오에 찾아왔다. 그간 타티아나는 방과 후에 왔던지라 교복 차림인 경우가 많았는데 오늘은 편안한 롱 원피스에 카디건을 입고 있었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마카로프는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타티아나.”
“안녕하세요.”
마카로프는 메인컨트롤 룸 안의 응접실에 타티아나를 앉히고, 차를 타면서 말했다.
“이렇게 일찍 연락을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갑작스러웠나요?”
“아뇨, 그런 의미는 아니고. 흠, 혹시 괜찮다면 지금 타티아나가 어떻게 마음을 정했는지 들을 수 있겠습니까?”
타티아나는 잠시 머뭇거린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신중하게 고르는 모습은 그녀에게서 종종 볼 수 있는 꽤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마카로프는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고, 타티아나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첫 만남 때 말씀하셨죠. 절 영생하게 만들어 주시겠다고요.”
“예.”
“하지만 전 둥실둥실한 해파리 같은 모습으로 영생하고 싶진 않았거든요. 적어도 바닷가재이고 싶었어요.”
해파리와 바닷가재. 특정 종이 거의 영생을 누린다는 건 사실이지만, 기왕이면 환상 속의 인어 같은 걸 비유로 드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마카로프는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조금 고민이 되었어요. 그런데 지나가던 범고래가 살짝 귀띔해 주더군요. 견고함을 보여 주면 될 것이라고 말이죠.”
꿈 이야기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마카로프는 분명하게 타티아나가 하는 말의 의미를 건졌다.
“베토벤과 슈만을 하기로 하셨군요.”
“예.”
그녀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눈엔 분명한 의지가 감돌고 있었다.
“전 욕심이 많아서, 종종 현재가 아닌 과거나 미래의 음악을 느끼곤 해요.”
“…….”
“물론 이제 과거의 음악은 잠시 접어 두기로 하고, 미래의 음악은 미래의 저에게 맡기기로 했지만……. 아직도 가끔 혼란스럽곤 하죠.”
피아노가 허락하는 한계를 넘어서 다른 시간대의 연주를 끌어오려고 한다는 말이었다. 타티아나와 같은 천재들은 때때로 한계를 뛰어넘는 훨씬 먼 곳의 빛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거리를 잴 줄도 안다.
타티아나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단편적인 현재를 차곡차곡 쌓아서 계단을 이루는 일부터 잘 해야겠지요. 지금 제가 할 일은 현재 제가 최고의 형태로 구현해 낼 수 있는 음악을 펼쳐 내는 일이에요. 그렇지 않나요?”
당연히 그렇지 않냐는 듯 타티아나가 물었다. 여태껏 한 말들은 길었지만, 결국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이었다.
희미하게 입가에 걸린 미소가 마카로프에게 향했다. 하지만 마카로프는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타티아나는 스스로 고민한 끝에 가장 현실적인 답을 찾아내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선 약간의 타협과 합리화, 거짓말이 뒤섞여 있었다. 우아하고 단정한 그 모습은 어쩐지 상처투성이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겼나. 이겨 내었나.
“…….”
마카로프는 직감했다. 여기에서 조금 더 깊숙하게, 쇼팽과 라흐마니노프에 대한 심도 깊은 이야기로 들어간다면 타티아나는 또다시 혼란스러움에 빠지거나, 도망쳐버릴 것이다.
차라리 여기에서 그렇게 해버리는 게 어쩌면 마카로프가 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하진 않았다. 마카로프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기로 했다.
“마음을 다잡으셨다면 좋습니다. 최선을 다해 보도록 하죠.”
“예. 마카로프 프로듀서.”
타티아나가 대답했다.
마카로프는 마음을 잡은 타티아나와 한참 동안 회의를 할 생각이었다. 이제 조금 더 좁혀지긴 했지만 그래도 타티아나의 레퍼토리는 방대하기 짝이 없었다. 그중에서 한두 곡 정도를 고르는 데엔 많은 회의가 필요했다.
“제가 골라 본 곡을 들어 보시겠어요?”
하지만 타티아나는 길게 회의를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미 결심이 선 듯한 눈빛이 마카로프에게 향했다. 마카로프는 고개를 끄덕였고, 타티아나가 곡명을 말했다.
마카로프는 멀거니 되물었다.
“……피아노 소나타 24번 말입니까?”
“예. 23번과 함께 제가 즐겨 연주하는 소나타 중 하나예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32곡 중 24번. op.78 부제는 테레제.
그리 인지도가 높은 곡은 아니었다. 하지만 베토벤은 생전에 이 24번 소나타를 굉장히 아꼈었다고 알려져 있다.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는 못했지만 작곡가 베토벤 본인은 높은 가치를 매겼던 곡이 바로 이 곡이었다.
“음……. 좋습니다. 해 보죠.”
“예.”
딱히 반대할 이유도 없었다. 당장 들어 보면 알 일이다.
타티아나는 피아노만을 위한 부스에 들어갔고 마카로프는 메인 컨트롤 룸의 시스템 앞에 앉았다. 그는 타티아나를 위해 설치된 4개의 마이크가 제대로 동작하는지 다시 확인했다.
“준비를 마치시는 대로 시작하시면 됩니다.”
타티아나는 피아노 앞에 앉아서 건반 덮개를 올리고는 치맛자락을 정리했다.
낮게 내리깐 눈이 건반을 천천히 살핀다. 무언가 느끼려는 듯한 모습이다. 마카로프는 숨을 죽이고 유리 너머로 타티아나를 지켜보았다.
“…….”
타티아나가 살짝 손을 들어 올리고는, 천천히 건반을 짚었다.
베토벤은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사망했지만 많은 연인들이 있었고, 그중 가장 각별했던 사람이 헝가리의 귀족이었던 요세피네 폰 브룬스비크와 그녀의 친언니인 테레제 폰 브룬스비크였다.
이 두 자매와 상당히 깊게 사귀면서 그중 동생인 요세피네와는 결혼을 하기 직전까지 갔었던 베토벤은 요세피네를 위해 많은 곡들은 작곡하고, 또 헌정했다.
그리고 테레제를 위해선 한 곡, 피아노 소나타를 헌정한다.
올림바장조의 섬세한 선율이 따뜻하게 울린다.
잠들어 있는 연인에게 속삭이듯 상냥하게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천천히 주위를 맴돈다.
조용히 맴돌다가,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고, 몇 걸음 물어나더니 창문을 열어젖히고 노래를 부른다. 따사로운 6월의 햇살처럼 내리쬐는 아르페지오는 마치 사람이 아니라 새가 지저귀는 듯한 소리로 들리기까지 했다.
24번 소나타 테레제는, 거대하고 장엄한 주제가 많은 베토벤의 모든 소나타 중에서도 가장 밝고 다채로운 색을 보이는 아름다운 곡이었다.
요세피네와 이별 후 잠시간 사귀었던 테레제에게 베토벤이 그리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보는 견해가 대부분이었지만, 그녀에게 헌정된 이 한 곡을 들어 보면 베토벤이 결코 테레제를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음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청력에 문제가 생긴 이후로 자살을 기도했을 정도로 정신적 위태가 심각했던 베토벤이 무겁고 엄숙한 곡들을 많이 작곡했다는 걸 고려했을 때, 이렇게 감미롭고 달콤한 소나타를 작곡한 데엔 분명 헌정을 받은 테레제의 도움이 있었을 것이다.
“…….”
마카로프는 타티아나가 왜 이 곡을 골랐는지 모른다.
연주 시간이 30분가량 되는 다른 유명 소나타들과 달리, 테레제 소나타는 10분도 안 되는 길이의 론도와도 같은 형식을 갖춘 변칙 소나타이다.
음반이라는 것은 결국 불특정 다수가 들어야 하는 물건이었고 그렇다면 유명하고 해석하기 쉬운 소나타를 연주하는 것이 좋았다. 베토벤 특유의 묵직함과 힘 있는 소나타는 누구에게나 인기가 많다.
타티아나는 그 모든 이점을 포기했다.
“……!”
그리고 타티아나가 이 곡을 택한 이유를 깨닫는 데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진행된 주제를 다시 한 번 되돌아가는 순간, 이전의 거의 완벽하게 느껴졌던 연주가 한층 더 높게 날아올랐다.
분명 같은 연주임에도, 마이크가 잡아내어 모니터에 그리는 스펙트럼엔 큰 변화가 없음에도, 마카로프는 분명하게 그 차이를 느꼈다.
대체 이 변화를 얼마나 정확하게 담아낼 수 있을까. 마카로프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타티아나가 보이는 극히 세밀한 음의 변화는 천재가 아니라 거의 초인적인 부분에 닿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강렬한 주제로 단번에 밀물처럼 모든 것을 밀어 넣는 다른 무거운 소나타들에서는 이런 소름 끼치는 감동을 느끼기 힘들다. 사랑스러운 선율 전체에 걸쳐 묻어나는 섬세한 감정과 이해. 전율적이었다.
베토벤은 제자인 체르니에게 이 24번 소나타가 14번 소나타 월광보다 더 뛰어난 소나타라고 말하기도 했다.
타티아나는 어렴풋하게나마 그것을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섬세한 애정이 가득 묻어나는 선율이 다시 지나가고, 상당한 기교를 요구하는 빠른 템포가 등장했다. 타티아나는 손가락으로 건반을 치지도 않는 것처럼 그 위를 날듯이 지나쳐 갔다. 그것만으로도 정확하게 음들이 펼쳐지며 음악을 자아낸다.
연인이자 제자였던 테레제에게 헌정된 24번 소나타는 그저 따뜻하고 상냥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베토벤이 테레제에게 어려운 숙제를 내고 어디 한번 연주해 보라는 듯 장난을 치는 것 같기도 했다.
따뜻한 낙천성과 장난스러움이 묻어나는 곡조를 듣고 있자면 청력을 잃고 절망한 사람이 쓸 수 있는 곡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베토벤은 썼고, 타티아나는 연주했다.
2악장으로 넘어간 소나타는 이전까지의 은근한 장난에서 보다 짓궂은 장난으로 변해갔다. 말이 장난이지 결코 평범하지 않은 대작곡가의 장난은 평범한 사람이 견뎌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연주는 까다롭고 표현하는 것은 더더욱 까다롭다.
타티아나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가볍게, 베토벤의 장난을 받아 주듯이 연주해 나간다. 베토벤 소나타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 빠르면서도 구조가 탄탄한 연주가 부스를 메웠다.
“…….”
마카로프는 숨을 죽였다.
이대로, 이대로 음반에 실어도 완벽했다. 이전에 베토벤 소나타도 몇 번이나 들어 보았지만 오늘 타티아나의 소나타는 그 어떤 때보다 맑고 선명했다. 평소 그녀의 연주가 흠잡을 곳 없이 철저했던 것을 생각하면 오늘은 정말 그 이상을 따지기 힘들 정도로 좋았다.
다만 아직 연주가 끝나지 않았다. 마카로프는 이 완벽해 보이는 연주가 부디 마지막 한 음까지 완벽하길 바라며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부스 밖의 남자가 긴장감에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타티아나는 편안한 얼굴로 연주를 종막으로 이끌었다.
양손으로 번갈아 상승하는 단선율 아르페지오와 화려하고 깔끔한 피날레가 펼쳐지고, 타티아나가 마지막 건반을 짚고, 손을 내렸다.
“…….”
타티아나가 메인 컨트롤 룸 쪽을 바라보았다. 유리를 가운데에 두고 마카로프와 눈이 마주친다.
마카로프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가 베토벤의 곡을 연주하겠다고 한다면 곧바로 추천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었지만, 모든 것이 쓸모없어졌다.
이걸로 충분했다. 타티아나는 그녀가 지금 연주할 수 있는 베토벤의 정수를 완벽하게 보여 주었다.
“……이 곡으로 가도록 하죠.”
“마카로프 프로듀서의 마음에 드셨나요?”
“들다마다요. 이 곡으로 가면 됩니다.”
“데모로 몇 번 더 다시 연주해야 하지 않을까요?”
“필요 없을 것 같군요.”
깐깐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마카로프는 완벽한 녹음을 위해선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데모곡을 녹음해서 완벽한 한 곡을 고르곤 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
“하하하하하.”
마카로프는 시원하게 웃었다.
4개월을 준비하고 앞으로도 그만큼은 준비해야 할 것이라 생각했건만, 타티아나는 하룻밤, 그리고 한 번의 연주로 모든 것을 끝냈다. 대체 무엇이 더 필요한지 그는 알 수가 없었다.
메인 컨트롤 룸으로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돌아왔을 때, 마카로프는 그녀를 껴안아버릴 뻔했다가 가까스로 손을 내밀었다.
타티아나는 물끄러미 내밀어진 손을 보다가 덥석 잡았다. 마카로프가 두어 번 손을 흔들었다. 어린애가 아니다. 연주자를 향한 경의는 담백하게 표할 필요가 있었다.
“한번 들어 보시죠. 그리고…… 다시 연주하고 싶으시다면 재녹음을 하셔도 괜찮습니다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저도 연주하면서 꽤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하하 그렇습니까.”
기분이 좋아진 마카로프가 껄껄 웃었다.
“그렇다면 이 귀중한 베토벤의 소나타는 이렇게 기록하도록 하고……. 오늘은 이다음 곡을 선곡해 볼까요.”
단 하루 만에 음반의 프로그램이 한 곡 정해졌다. 정해졌을 뿐만 아니라 녹음도 한 번에 완성해버렸다. 타티아나의 연주는 딱히 손 댈 곳도 없었으니 이대로 음반에 기록하면 끝이었다.
마카로프는 다음 곡을 고르고 싶어서 조금 들떠 있기까지 했다. 타티아나를 위해 추천곡들을 추려 왔다. 천천히 그녀와 함께 곡을 골라 나가면 될…….
“어디 가십니까?”
“부스요. 다음 곡 연주하려고요.”
마카로프가 멍하니 바라보자 타티아나가 생긋 웃었다.
“오늘 녹음하기로 했었잖아요?”
그녀는 천천히 며칠에 걸쳐서 녹음할 생각이 없었다.
마치 무대에 오른 연주자처럼, 준비해 온 모든 곡을 녹음해버릴 생각이었다.
지금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