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259화 (259/1,277)

##  259화

마카로프는 이런 음반 작업은 처음이었다.

한 연주자의 선곡을 위해 4개월에 걸쳐 레퍼토리들을 들은 것도 처음이고, 레퍼토리 안에서 작곡가 네 명을 추려선 선택지를 주었더니 그 연주자가 하룻밤 만에 답안을 만들어 온 것도 처음이었다. 그리고 재녹음도 필요 없을 정도의 뛰어난 완성도로 두 곡을 연달아 녹음해버린 것까지.

타티아나와 함께하는 작업은 순간순간이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마카로프는 펜을 내려놓고는 문득 건너편에 있는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

“프로코피에프……. 할 수는 있지만 음반 전체의 분위기를 망가뜨릴까 겁이 나네요.”

타티아나는 노트를 들고 마카로프와 함께 작성한 작곡가 일람을 천천히 읽어 내리고 있었다.

한 손에 펜을 들고는 있지만 빙빙 돌리는 것이 버릇없어 보인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펜을 돌릴 줄 모르는 것인지 얌전히 쥐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노트와 펜을 들고 고민에 빠진 타티아나는 어려운 수학 문제를 마주한 학생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모습은 귀엽기도 했지만, 조금은 안쓰럽기도 하다.

“…….”

책상 위를 보니 노트와 펜, 악보, 태블릿PC, 전자 악보, 캐모마일 차와 다과 등이 놓여 있었다.

벌써 이렇게 곡을 찾아 회의에 들어간 지 2시간째다.

6월의 이 좋은 날 오후 5시에, 심지어 오늘은 방학 첫날이기까지 하다.

마카로프는 늘 타티아나를 프로 연주자로 대우했고, 그녀는 오늘 거의 기적처럼 느껴질 정도로 고절한 실력을 보여 주었지만, 그 꿈만 같았던 연주가 지나가고나니 새삼 그녀가 아직 학생이며 겨우 열다섯 살밖에 안 되었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던 마카로프가 입을 열었다.

“타티아나.”

“예. 마카로프 프로듀서.”

타티아나는 노트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든다.

오늘은 이쯤 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보려던 마카로프는 그녀의 눈을 보고는 말문이 막혀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타티아나는 열다섯 살의 학생이 보일 법한 눈빛을 하고 있지 않았다. 누구보다 진지한 열기를 품고 음악가로서 최선을 다해 이 순간에도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이쯤 하자고 말하는 것은 모욕적일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

마카로프가 침묵하자 타티아나는 가만히 눈을 마주치고 있더니 곧 고개를 갸웃거리며 맑은 웃음으로 의아함을 표했다.

그러고는 다시 노트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열심히 찾아서…… 찾아낼게요. 마지막 곡을.”

“…….”

타티아나는 어리지만 앞으로도 충분히 자신의 피아니즘을 개척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연주자였다. 음악성도 뛰어나고 개성도 탁월했다. 노력도 쉬지 않고 성실했다.

하지만 어쩐지 그녀는 항상 갈증을 느끼고, 의무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노력하는 천재이지만 동시에 위태로워 보이는 타티아나를 보며 마카로프는 문득 괴테의 소설인 파우스트에서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노력하는 한 인간은 방황하리니…….”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신이 내기를 하며 신이 했던 말이었다.

마카로프가 중얼거린 말에 타티아나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방금 무어라 말씀하셨나요?”

“아닙니다.”

“……?”

마카로프는 대충 둘러댔다. 타티아나는 이번에도 싱겁게 웃고는 다시 노트를 살핀다.

수많은 작곡가들을 후보로 두면서도 그 와중에도 쇼팽과 라흐마니노프는 의식적으로 피해 가는 모습이 마카로프를 뒤흔들었다.

“…….”

마카로프는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타티아나의 대답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말들은 되도록 삼가려고 했지만, 마카로프는 지금 그녀를 내버려 둬선 안 되겠다는 직감을 느꼈다.

“타티아나.”

세 번째로 타티아나가 고개를 든다. 마카로프는 이번엔 모른 척하는 일 없이 곧장 말했다.

“하고 싶으신 곡을 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예?”

되도록 편안하게 말했고 그렇게 받아들여 주었으면 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타티아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노트를 책상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제 와서 무슨 말씀이세요?”

“이제 와서가 아닙니다. 어제 말씀드렸죠. 해야 할 곡이 있고, 하고 싶으신 곡이 있는 것 같다고.”

마카로프는 타티아나가 짊어지고 있는 것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 주기 위해 이어 말했다.

“타티아나는 제가 내민 것이 일종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진지하고 성실하게 옳다고 생각하는 쪽을 선택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건 문제가 아니라 제안이었습니다. 어느 쪽도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군요.”

“하지만…… 그렇잖아요? 현재를 기록하는 이 음반엔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음악을 하는 것이 옳아요. 그리고 전 그와 동시에 제 음반이 마카로프 프로듀서에게도 중요한 음반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타티아나는 다시 올곧게 반론했다.

음반사의 사장으로서 그리고 프로듀서로서 당연히 최고의 곡들만 선별하는 일은 중요했다. 게다가 이 프로젝트는 프로모션에 치명적인 약점이 있기까지 했다.

타티아나의 말처럼 이 음반은 대충 내고 싶은 곡들을 짜깁기 하여 만들어서 될 음반이 아니다. 타티아나는 마카로프의 사정까지 고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카로프는 스스로가 이율배반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거기까진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타티아나. 전 괜찮다고 생각하니까.”

“…….”

타티아나의 눈빛이 조금 차가워진다.

마카로프는 조용히 그 눈을 마주했다. 이렇게 해야만 했다. 타티아나가 모든 것을 감내하고 납득하고 타협하고 양보했을 때, 마카로프는 무엇 하나 양보하지 않고 있었다.

오늘 그렇게 두 곡이나 얻어 냈다. 하루 만에 두 곡이나.

그렇다면 나머지는 타티아나를 위할 차례다.

물론 프로 정신이 투철한 타티아나는 그런 배려 같은 것은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부러 등을 밀어 줄 필요가 있었다.

“원하는 대로 하시죠.”

타티아나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만약 그녀가 마카로프를 신뢰하고 있지 않는다면 무슨 말을 하더라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신뢰하는 프로듀서의 말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조금 주저하지만, 그래도 한 번 더 조금 뾰족하게 대꾸했다.

“……음반을 망치게 될지도 모르는데요.”

“그럴 리가. 타티아나, 잊었습니까?”

마카로프는 유쾌하게 말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까다로운 심사위원들을 모두 만족시키고 타티아나에게 우승과 찬사, 그 모든 것을 안겨줬던 것이 쇼팽과 라흐마니노프 아니었습니까?”

“…….”

“베로니카를 거쳐 제가 타티아나와 만날 수 있게 된 것도 그 덕분이고요. 어떻게 하면 그 정도 완성도를 갖춘 연주를 싣더라도 음반을 망칠 수 있을지 궁금하군요.”

그의 말은 아무렇게나 내뱉는 공치사가 아니었다. 한 점 거짓 없는 진실이었다.

타티아나는 자신의 쇼팽과 라흐마니노프에 자신이 있으면서도 어딘가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은 이상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건 그녀의 자기평가일 뿐이다.

수많은 음악가들이 그녀가 무대 위로 가지고 올라간 쇼팽과 라흐마니노프를 인정해 주었다. 음반에 한 곡 싣는 것으로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원하는 대로 해도 됩니다.”

“…….”

다시 한 번 제안했다.

이쯤 되면 받아들일 만도 한데, 타티아나는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었다.

마카로프는 헛웃음을 흘렸다. 타티아나가 음반에 대해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무겁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기쁘면서도 답답했다.

마카로프 역시 음반에 있어선 그 누구보다 진지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를 위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카로프가 말했다.

“타티아나가 연주하는 베토벤과 슈만에는 형언이 불가능한 호소력이 담겨 있고, 지금 타티아나가 가장 가까이 닿아 있는 것은 바로 그 두 작곡가일지도 모르죠. 하지만 타티아나가 연주하고 싶어 하고 노래하고 싶어 하는 곡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마카로프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하겠다고 한 마디만 한다면 모든 것을 해 주겠다고.

이윽고, 치열하게 갈등하던 타티아나가 결국 한풀 꺾인 태도로 조심스레 읊조렸다.

“……그래도 될까요.”

“모쪼록.”

“그렇다면 라흐마니노프가 하고 싶어요.”

“그렇게 하시죠.”

조금이라도 다른 말을 하면 곧장 울어버릴 것 같아 보여서, 마카로프는 빠르게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곡은?”

“소나타……. 그중에서도…….”

잠시 생각하던 타티아나가 말했다.

“1번이요.”

“1번, 파우스트 소나타겠죠.”

“……어떻게 아셨나요?”

마카로프가 동시에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소나타 제1번, 파우스트 소나타를 언급하자 타티아나가 깜짝 놀라선 눈을 휘둥그레 떴다.

파우스트 소나타라는 거창한 부제로 불리는 소나타 1번을 타티아나가 말하지 않았다면 적극적으로 추천할 생각이었던 마카로프는 가볍게 웃어넘겼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콩쿠르에서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소나타 2번을 연주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냥, 이번엔 1번을 연주할 것 같더군요.”

“대단하세요. 역시…… 곡까지 짚어 주시고.”

놀라워하는 타티아나는 어쩐지 굉장히 기뻐 보였다. 라흐마니노프에 대한 확신이 애매했지만, 마카로프가 그녀가 생각하고 있던 곡을 말하자 조금 자신이 생긴 모양이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24번, 슈만의 교향적 연습곡에 이어 세 번째 곡이 이렇게 정해진 듯했지만, 연주해 보기 전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마카로프가 타티아나에게 물었다.

“타티아나. 혹시 파우스트 소나타도 지금 바로 연주 가능합니까?”

“죄송해요. 준비가 조금 필요할 것 같아요.”

“역시 그렇습니까.”

“예. 조금 까다로운…… 곡이라서요.”

이 곡은 그냥 까다롭다고 할 정도가 아니다. 라흐마니노프의 수많은 독주곡 중 소나타 두 곡은 연주자들 사이에서도 어렵기로 정평이 나 있는 곡이었다.

그 어마어마한 난곡을 열다섯 살짜리 연주자가 조금 까다롭다고 평하고 있었다.

타티아나는 앞에 있는 전자악보를 집어 들고는 휙 화면을 넘겨 악보를 검색했다.

“잠시 읽어 볼게요.”

능숙하게 라흐마니노프의 소나타 악보를 찾아낸 타티아나는 그 자리에서 악보를 읽기 시작했다.

“…….”

종종 타티아나는 마치 무슨 소설책을 읽듯 악보를 읽곤 했다. 어떠한 초월적인 공감각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저런 행위에 의미가 있을까 싶었지만, 타티아나는 그렇게 악보를 읽는 것으로도 연주에 그대로 반영해 내곤 했다.

즐거운 듯, 하지만 더없이 진지하게 악보를 읽는 타티아나를 보던 마카로프는 다시 일어나 그녀를 위한 차를 준비했다.

고요한 가운데 시간이 흘러갔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문 근처에 서 있던 빅토르가 소리도 없이 다가와서 타티아나에게 말했다.

“아가씨, 죄송합니다만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빅토르.”

“곧 6시입니다. 돌아가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요?”

타티아나는 놀라며 시간을 살폈다. 빅토르의 말대로 6시경이었다.

타티아나가 전자 악보를 내려놓았다.

“돌아가야…….”

“타티아나.”

그렇게 돌아가려는 타티아나를 마카로프가 불렀다.

“조금 더 해 보지 않겠습니까?”

“……?”

타티아나는 의아한 듯 그를 본다.

지금 스튜디오에 남아 있어 봐야 이전 두 곡처럼 제대로 된 녹음을 한 번에 할 수 있지도 않았다. 준비가 필요했다. 타티아나는 돌아가서 며칠 정도 곡을 준비한 다음 만족할 만한 수준에 이르면 다시 녹음할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생각에 잘못은 없었다. 하지만 마카로프는 그녀를 붙잡았다.

“아직 파우스트 소나타를 한 번도 연주해 보진 못하지 않았습니까? 며칠 연습해 오셔도 좋지만, 연습을 도와줄 사람과 장비가 있다면 조금 낫지 않겠습니까?”

“아……. 마카로프 프로듀서?”

“제가 타티아나를 레슨하거나 해석에 관련하여 직접적인 조언을 드릴 순 없지만 적어도 연주가 어떻게 들리는지 즉각 녹음해서 피드백하고 연습하실 수 있도록 도와 드리겠습니다.”

괜히 오늘 녹음을 끝내자고 억지를 쓰진 않았다. 마카로프는 손가락을 치켜들며 부탁했다.

“그러니 데모 한 곡만 녹음해 보죠.”

“…….”

욕심, 약간의 욕심이었다.

연주의 완성도가 어떻든 간에, 음반에 실을 수 없을 정도의 수준이더라도 지금 당장 타티아나의 파우스트 소나타가 듣고 싶었다.

그래서 마카로프는 지금 타티아나를 집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요청했다.

타티아나는 늘 자신을 일찍 돌려보내려 하고 느긋하게 시간을 두려고 하는 마카로프가 이렇게 급하게 데모일지라도 녹음을 하자고 하는 모습에 약간 의아함을 느낀 듯 했다.

하지만 지금 찾아낸 곡에 조금 더 빠져들고 싶은 것은 비단 마카로프뿐이 아니었다.

타티아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스마트폰을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흐르고, 상대방이 받자 타티아나가 말했다.

“아버지. 타티아나예요.”

마카로프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거의 느끼지 못하고 있지만, 타티아나는 베르체노프 가문의 막내딸이다. 지금 저 전화 상대는 턱짓만으로도 이런 음반사는 없애버릴 수도 있는 권력자, 유리 알렉세예비치 베르체노프인 것이다.

하지만 타티아나에겐 아버지일 뿐이다. 타티아나가 살갑게, 하지만 미안하다는 투로 통화했다.

“오늘 외출에서 조금 늦을 것 같아서 전화드렸어요. 저녁 식사에 빠지게 되어서 죄송해요. 혹시 루슬란 오빠는 집에 없나요? 그렇다면 바로 돌아가도록 할게요. 예. 예? 아뇨. 놀고 있지는 않고요. 스튜디오에 와 있어요.”

분명 자신이 집으로 가겠다는 타티아나를 붙잡긴 했고, 또 그녀의 소나타를 듣고 싶단 생각 외엔 아무 의도도 없지만 유리 알렉세예비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조금 섬뜩한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 이렇게 통화를 엿듣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싶었다. 마카로프는 일부러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리고 홍차를 홀짝였다.

타티아나는 잠시간 그렇게 유리와 통화를 했다. 전반적인 내용은 예의 바르게 저녁에 조금 늦어도 되겠냐는 허락을 구하는 전화였다.

하지만 잠시 후, 타티아나가 약간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예? 아…….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마카로프 쪽을 곁눈질하더니, 살짝 그를 부른다.

“저기, 마카로프 프로듀서.”

“예. 타티아나.”

마카로프는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그사이 조금 위기감이 옅어져 있던 그는 자신에게 어떤 용건이 향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타티아나가 작게 말했다.

“정말…… 죄송한데. 아버지가 통화를 원하세요.”

“…….”

올 것이 왔구나.

마카로프는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간 타티아나와 4개월이나 보면서도 한 번도 그녀의 아버지인 유리와 인사를 한 적은 없었다. 어쩌면 지금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뒤늦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긴장할 것도 없고, 위축될 것도 없다.

그렇게 마음을 잡은 마카로프는 목소리를 고르고는 손을 내밀었다. 타티아나가 조심스레 스마트폰을 건네주었다.

마카로프가 진중하게 인사했다.

“전화 받았습니다. 마카로프입니다.”

- 유리 알렉세예비치 베르체노프라 하오.

전화 너머로 묵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유리는 자기소개를 하고는 이어 말했다.

- 마카로프 일리예비치. 이야기는 많이 들었소. 에우테르페 레코즈라는 음반사도 함께 말이오.

“과찬입니다.”

일리예비치라는 부칭은 말하지도 않았는데 이미 알고 있었다. 유리는 이미 뒷조사가 다 끝났다는 것을 에둘러 표현하고 있었다. 소중한 딸을 보내는데 조사를 안 하는 것이 이상하긴 했다.

유리가 계속해서 물었다.

- 오늘 타티아나가 외출해서 내내 스튜디오에 있었다고 하는데, 사실이오?

“사실입니다.”

그 대답을 듣고 유리는 흠, 하고 어쩐지 조금 불만인 듯한 소리를 냈다.

마카로프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유리가 말했다.

- 무언가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을 해 본 적은 없지만, 쉽지 않다는 것은 이해하오.

전화 너머의 목소리가 세 배쯤 무거워졌다.

- 하지만 말이지, 방학인 아이의 저녁 시간까지 빼앗을 정도로 바쁘오?

“…….”

마카로프는 순간 할 말이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학생인 타티아나가 방학 첫날 이렇게 스튜디오에 나와서 반나절 내내 음반에 대한 작업을 하고 늘 부모와 하는 저녁 식사마저 못 하게 된다는 것은 조금 심하게 보였다.

그렇다고 여기서 그렇게 바쁘진 않다고 말할 순 없었다. 돌아가야 한다는 타티아나를 붙잡은 것은 어디까지나 마카로프였다.

마카로프가 말했다.

“유리 알렉세예비치. 아버지의 입장에선 이해가 안 가신다는 것도 이해합니다만, 오후에 따님이 이 스튜디오에서 무엇을 하셨는지 듣더라도 믿지 못하실 겁니다.”

- 아니, 난 믿소.

“……그렇습니까.”

딱 자르는 말에 마카로프는 조금 황당함마저 느꼈다.

대재벌의 총수라 그저 딱딱하기만 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조금 더 편하게 마카로프가 말했다.

“그렇다면 감히 그건 기적이었다고 말씀드리죠.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곡을 찾아냈고, 준비하고 있죠. 전 그 모든 과정을 확실하게 서포트해 드릴 수 있습니다. 믿고 맡겨 주신다면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깔끔하게 말을 맺자, 잠시 침묵하던 유리가 대답했다.

- 오늘은 알겠소.

깔끔하게 이해했단 말처럼 들리진 않아서 마카로프가 더 첨언을 하려는 순간, 목소리가 성큼 한 발자국 내딛어 코앞에 와닿았다.

- 한 가지만 말씀드리지. 그 아이와 음악에 관련한 무언가를 하는 것은 좋소. 하지만 하려면 제대로, 구두로 된 약속을 할 것이 아니라 내 앞에 계약서를 가지고 와서 설명을 하고 계약을 한 다음에 진행하시오. 그게 바른 순서 아니오?

4개월간 타티아나는 이 스튜디오에 드나들면서도 어떠한 계약서도 작성하지 않았다.

본 목적은 음반 제작이지만, 타티아나는 음반뿐만 아닌 음향에 관한 지식들을 배우는 데에도 관심이 많았다.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들을 가르쳐주던 마카로프는 굳이 음반 건이 아니더라도 그녀가 스튜디오에 드나드는 것에 익숙해졌다.

음악가들끼리 긴 시간을 갖고 음반 제작을 위해 협력하는 구도는 크게 이상하지 않았다. 타티아나 역시 그것을 편하게 여기는 듯했다.

때문에 프로그램을 결정하고 녹음하기 직전에 계약서를 작성하면 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녹음은 시작되어버렸다.

“그……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했군요.”

-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하겠소.

수많은 기업들을 이끄는 유리가 그간 아무 말 않았던 것은 중요한 음반 계약을 몇 개월쯤 고려하는 건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본격적으로 제작을 시작했다면 응당 마카로프가 먼저 유리를 찾아야 계약서를 건넸어야 함이 옳다.

갑자기 하루 만에 녹음을 절반 이상 할 수 있을 줄은 미처 생각도 못해서 저지른 실수였지만, 마카로프는 변명하지 않고 다시 사죄했다.

“다시 사과드립니다. 되도록 빠르게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 기다리겠소.

전화를 끊고, 마카로프는 스마트폰을 타티아나에게 돌려주었다.

타티아나는 조금 안절부절못하며 마카로프를 올려다보았다. 아버지에게 무슨 말을 들었을지 몰라 난처해하는 듯 했다.

“좋은 아버지군요.”

마카로프는 웃으며 말했다.

그는 지금까지 어떤 마음으로 타티아나를 대했는지 생각하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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